우리집에서 행궁동 공방거리 까지 걷기 위해 향했다. 40분정도 걷다 보니 팔달산 아래 팔달사와 남치로 가는 성곽계단이 펼쳐지고 사방으로 위용한 자태를 지닌 팔달문이 도로 중심지를 감싸고 있었다. 팔달문은 정조때 전통시장을 통하도록 경제와 상업 활동 중심지로 조성한 문으로 조선을 제2경제 중심지로 부흥을 일으켰던 정조 얼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역사의 향기따라 팔달산 기슭에서 대승원 금불상이 비추는 행궁광장에 이르니 가족 동산처럼 활기가 넘쳤다. 행궁에서 왼쪽으로 가니 행궁동 공방거리로 초등학교와 주택가 거리에 아늑한 카페,식당과 함께 전시관과 공방들이 즐비한 거리로 가족이나 연인들이 전통문화와 교류하며 휴식할수 있는 열정의 거리였다. 전통거리 처럼 거리는 기와지붕의 목재문과 기와 담장, 약수터가 장식되었고 1960년대 최고 부유층 건축을 과시했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촬영지였던 기와 지붕과 벽돌 담장이 있는 창살이 있는 문과 함께 중앙에 목재 대문인 건축양식을 비롯해 아기자기한 문양의 벽돌 담장과 함께 알루미늄 샷시로 굳게 닫힌 가게와 집이 연결된 좁은 마당의 기억자형 기와집, 6칸의 직사각형 유리창문과 페인트 칠한 벽에 담쟁이 덩쿨이 우거진 1970년대 2층 양옥 어린이집,빨간 벽돌로 장식된 아치형 현관의 빨간벽돌 2층양옥으로 1층 철문 옆은 아늑한 카페인 1980년대 양옥집,돌들이 계단식으로 깔린 싱그러운 가로수로 높은 언덕의 학교정문에 오르는 남창초등학교로 1950년대 이후 건축양식의 발자취를 볼수 있는 추억의 거리로 매우 정겨웠다. 그리고 예술의 거리로 인두화와 만수무강과 하늘이 내린 천명을 금장식으로 장식한 금공예,목공예,타일아트,각종 공예등을 직접 체험하거나 예술품을 구입 할수 있도록 전시 되었는데 잘 익은 감나무의 단풍이 물들어 가는 나무가지에 새가 지저귀는 인두화로 생명력이 넘친 감나무 인두화가 가장 인상적이였다. 그리고 소나무숲 작품이 거리에 전시되었는데 싱그러운 초원에 소나무숲 경치로 잔디와 소나무의 나무와 잎들을 명암과 양감,질감을 살려 아주 섬세하게 표현하여 생명력이 넘치는 청렴어린 소나무숲으로 승화시켜 지금까지 본 소나무 작품 중 최고의 작품으로 매우 인상적이였다. 즉 조선시대 전통공예를 이어 가는 장인들과 거리 화가의 서양미술이 공존하여 살아 숨쉬는 예술공간이였다. 그리고 전시관으로 "열린문화공간"이 있었다. 원래는 99칸 양성관 가옥터로 1977년부터 2018년까지 백내과 병원 원장님이 거주했던 곳으로 현재는 옛그림 읽는 방법과 우리 전통 문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시사한 수원이 낳은 고 오주석 선생님(1956년~2005년까지)의 발자취 따라 옛 그림 관련 전시와 교육을 통해 시민과 소통하도록 개방되어 있었다. 사방이 유리로 확틔인 2층 양옥집으로 소나무가 귀풍있는 자태로 기와담장을 둘러싸고 중앙은 넓은 잔디를 이룬 1970년대 고 품격 귀족 주택을 자랑하고 있었다. 1층은 풍속화가 복제품으로 무료로 전시되었다. 풍속화는 그 시대 세정과 풍습을 그린것으로 사진이 없었던 시대 당대의 시대상과 일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궁중의 풍속화와 선비 풍류및 일상을 그린 풍속화와 서민들의 노동과 놀이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로 2종류로 나누어 졌다. 풍속화의 역사는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청동시대 암각화, 고구려 고분 벽화의 놀이나 전투장면, 고려 불화의 농사짓는 장면이 남아있다. 조선 전기는 문인들이 계회 장면을 그린 계회도와 농업과 누에 치고 비단 짜는 것을 그린 경직도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조선후기 풍속화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정조는 규장각 자비대령화원 제도를 만들어 속화를 회화 종류중 하나로 공식적으로 지정하여 녹취재의 정기시험 3차 시험의 친시에서 속화를 가장 많이 출제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실학 영향을 받은 윤두서 등 선비화가가 서민 일상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윤덕희와 손자 윤용 까지 대를 이어 풍속화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그리고 조영석은 대상을 직접 보고 그려야만 살아있는 그림이 된다는 사실주의 회화 인식 바탕으로 서민들의 다양한 일상을 그린 풍속화로 풍속화의 본견적인 발전에 기여했고 중인 화가 강희언은 풍속화 확산에 기여 했다.그리고 18세기 후반 김홍도는 백성의 진실하고 비근한 삶을 그린 생활의 모든것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즉 18세기 김홍도를 비롯 화원화가들에 의해 전계층의 일상 모습과 여인풍속,애정사,도시생활상등을 그려 풍속화 발전의 절정을 이루었다. 19세기 들어와서는 수요가 민간으로 저 변화되어 회화성은 다소 퇴보 되었으나 양적으로 증가 되었다. 19세기말 개항 이후 기록적인 성격을 간조한 풍속화 등장하였는데 대표적으로 김준근은 개항장에서 조선을 드나들던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풍속을 그려 판매하였다. 일제강점기때는 풍속화가 이전 보다 활발하게 제작되지 못하였으나 우리나라 최초 서양화가인 고희동이 풍속화를 그렸고 한국을 방문한 서양화가인 엘리자베스 키스와 폴 자쿨레 등 풍속화를 제작하였다. 즉 풍속화의 가치와 종류,역사등을 알수 있었던 매우 흥미롭고 값진 시간이였다. 2층은 고 오주석의 서재와 미술사자료실,쉼터로 구성되어 우리 옛 그림에 대한 그의 업적들을 기리고 있었다. "이인문필 강산무진도의 연구" 석사학위 논문을 비롯하여 "단원 김홍도 논고집(1995년)","단원 김홍도 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화가(1998년)","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1999년)","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2003년)","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2권(2005년~2006년)","단원 김홍도(2006년)","이인문의 강산무진도(2006년)","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3권,그림속에 노닐다(2008년)",오주석이 사랑한 우리그림(2009년)"등...12권에 이르는 저서와 활동들을 통해 우리 전통 문화유산인 옛 그림에 대해 알리고자 피땀흘린 그의 노고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열린문화공간"에서 나와 공방거리를 따라 왼쪽으로 계속 가니 문화재 발굴조사로 남문과 북문 지역 연못을 조성하기 위해 금지구역으로 벽을 장식 하였다.정조때 화성을 쌓으면서 성벽 바깥쪽은 성돌로 쌓고 성안은 흙으로 쌓았는데 흙을 성안에서 연못을 파서 물길을 정비함으로써 확보하였다. 그때 성안에 조성된 연못은 남쪽에 상남지와 하남지,동쪽에 상동지와 하동지, 북쪽에 북지인 5개 연못으로 현재는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수원화성 축성직후 수원화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6폭병풍 일부인 "화성도"와 수원화성 시설물 명칭과 함께 묘사된 "화성전도",1801년 간행된 "화성성역의궤"와 "은구도"에 실린 남지와 남은구를 표현한 그림,1797년 "뎡니의궤"와 "화성전도"에 상남지와 하남지,남은구 그림을 벽에 장식하여 역사적 자료 근거를 바탕으로 세계유산 화성의 옛 도시 경관을 복원한다는 것이였다.즉 문화재를 정비하고 관리하는 문화의 도시인 수원의 피땀 흘리는 노력을 엿 볼수 있었다. 이와같이 행궁동 공방거리는 수원화성의 옛 도시 정취와 근대건축 발전 양식과 함께 우리 전통예술 장인들이 대대로 이어져 살아 숨숴 전통공예를 알리고 수원이 낳은 한국미 연구가 오주석선생님을 따라 전통그림을 이해하도록 시민들과 소통하고 세계유산의 전통을 복원하는 문화재 가치를 알리는 거리로 매우 귀중한 역사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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