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생태교통마을 왕의 골목길 걷기4.(2021년3월10일)

백재은 2021. 3. 12. 20:19

화령전 담장앞에 "나혜석(1896년~1948년)" 표석

"장안문"에서 "화서문"까지 이르는 도성과 같은 수원화성의 고즈녁함으로 둘러싸인 생태교통마을로 향했다.행궁옆 옛 신풍초등학교 담장으로 일제시대 양식이 잔존하는 모임지붕의 시멘트벽의 건축양식으로 세월을 녹아 내리며 버티고 있었다. 바로 옆은 "화령전"으로 담장앞에 "나혜석(1896년~1948년) 표석"이 있었다. 수원에 태어난 우리나라 최초 여류화가의 그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조선시대 여성으로써 그의 화려한 연보가 눈길을 사로 잡았다. 구한말 용인군수의 양반집에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 일본 유학과 화가로써 변호사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남편과 함께 자유 독립을 열망하고 세계일주 여행을 했던 그가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된다. 그 당시 여성들에게는 꿈도 꿀수 없는 남편과 화려한 동반자로 살았던 그가 이혼 고백의 절규를 외쳤던 것이다. 그의 이혼 고백서의 "조선님들 보시오" 글이 벽화골목에 전시 되어 있었다. 그당시 남성들이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며 적실과 후실의 두집 살림을 하는 유교적 잔재의 현실속에 내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줌 재가 될지언정 나의 피의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들의 여성들은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절규로 그 당시 사회의 몰이해와 냉대속에 성해방을 외쳤다. 시대를 앞서간 여성 최초 일본 유학과 여성 최초 화가,수필가,소설가,독립운동가,근대 신여성으로 진보적인 여성해방 운동의 불꽃을 태웠다. 그리고 그녀의 "냇물"시가 벽화골목에 장식 되었는데 4계절과 24시간 내내 좋든지 싫든지 끓임없이 부서지도록 자기를 희생하며 흘러 내려 모든 것들을 감싸고 녹여주는 사랑인 냇물을 표현 하였다. 단순하고 간결한 언어안에 명료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유려한 문체로 순박하고 따쓰한 정서가 흘러 넘치는 시였다. 냇물의 자연의 질서를 그대로 반영하며 끓임없이 모든것들을 희생적인 사랑으로 포용하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더 나아가 하나님 창조질서대로 순종하고 희생적인 사랑의 정절을 행하는 자연의 교훈이였다. 일제시대 억압과 시련속에 유린당하고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사회풍습으로 고통당했던 옛 선조들의 삶과 현 시대에서도 조롱 받을수 있는 자유를 넘은 부도덕적인 가치관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신경쇠약과 행려병자가 되었던 나혜석 삶의 일대기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 시간이였다. 수원시는 자랑스러운 여류 화가를 기념하기 위해 행궁 화령전 담장의 나혜석 표석과 함께 생태교통마을의 나혜석 생가터와 나혜석 벽화골목,인계동에 나혜석거리를 조성하였다. 문화의 도시인 수원의 열정에 감동이 흘렀다. 그리고 "화령전" 부근 행궁으로 가는 거리의 생태교통마을 수원제일감리교회 맞은편에 "이건희 인두화 창작소" 간판이 걸려 있었다. 차창가로 인두화 전시회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나무 타는 내음을 맡으며 점과 선들이 모아져 작품들을 이룬 우리 문화재인 수원화성의 경치인 전통예술부터 풍경화,인물화로 이색적이였다. 수원화성의 웅장함과 화려함으로 압도되는 고즈녁함과 서양풍의 인물화와 경치의 퇴색해가는 옛 귀중한 보물을 고귀한 보석처럼 빛을 발하였다. 우리 전통문화를 표현하는데 만 국한 된것이 아닌 서양화풍의 작품속에도 예술작품으로 탄생할수 있는 인두화 예술로 경이로웠다.  이와같이 생태교통마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에 둘러싸여 우리나라 최초 여류화가 나혜석의 향기따라 우리 전통예술인 인두화의 불꽃이 타오르는 예술인의 마을이였다.

나혜석 연보
나혜석 글
이건희 인두화 창작소
북서포루
북포루
서북공심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