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생태교통마을 왕의 골목길5.~화성 나혜석기념관(2021년3월16일)

백재은 2021. 3. 17. 17:19

동백나무

나혜석기념관을 가기 위해 생태교통마을로 향했다.  동백나무가 연분홍빛으로 순결을 상징하듯 탐스럽게 피었고 철쭉이 매우 화사한 새각시 몸단장을 하며 반기고 있었다.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되면서 1793년 제2청사 이아가 6.25사변으로 소실되고  바로 그터에 1956년부터 1972년까지 수원법원과 검찰청의 청사터였던 곳에 맞배지붕의 모던한 양식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가 오랜 역사의 터를 간직한 채 근대건축의 위용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길따라 "문화상회 다담"의 갤러리 공간과 노랑과 청색의 대비효과로 아담한 카페인 "생태교통마을 행궁동 왕의 골목의 신풍로27번길"로 현재는 작아진 언덕이 수원화성을 축조할 당시는 꽤 높은 언덕으로 정조대왕이 이곳에서 진두지휘하며 화성행궁과 화성축조의 공사과정을 지켜 보았다. 군사를 호령하던 220년전 정조대왕의 의기양양한 새로운 세상의 꿈을 열망했던 그림자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 신풍동 벽화마을을 지나 빨간벽돌과 조화를 이루며 거리를 장식한 군자란이 꽃봉우리들을 맺히며 노란수술을 달고 해맑은 모습의 의젖한 원숙미로 탄생하고 있었다. 한국문인협회 수원지부 "수원 문학인의 집"에 이르니 2층 "화성 나혜석기념관" 복도 계단에 그림과 함께 시들이 장식 되었다. 윤수천의 "봄날처럼"은 아름다울수록 오래 머물지 않는 것으로 사랑도 아쉬울 정도로 짧아야 한다는 교훈이였고 임병호의 "나무들도 사랑을 하는구나"는 단풍나무를 보며 하늘에 계신 그리운 어머니를 가슴타며 외로움과 고통으로 마주하는 시였고 이순옥의 "낡은 책장을 넘기다"는 생존에 방황과 위안의 그림자 시간 같은 구수한 옛 추억을 써 내려간 인생이야기를 다시 보며 느끼는 회환으로 매우 감동적인 시들 이였다. "화성 나혜석기념관"에 들어 가니 동남아풍 고풍스러운 나무의자와 함께 2009년부터 나혜석 탄생을 기념하며 매년마다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 행사로 활동했던  화홍문과 행궁 그림 장식과 나혜석의 자화상,작약의 그림을 모사한 작품들이 진열 되었다. 그녀의 화려한 연보가 장식되었는데 특히 조선인 최초로 세계일주 여행 기록으로 나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그 당시 조선인들의 여행은 서구의 관료를 만나는 외교적 차원의 것으로 나혜석은 자신의 경험과 견문을 확장하는 계기였다. 화가로써 프랑스에서 공부하여  인상주의,야수파,입체파,표현주의 사조들을 모두 섬렵할수 있었고 고전회화부터 당대 유행하는 미국과 유럽의 화풍까지 흡수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할수 있었다. 자신의 예술적 뿌리를 체험하고 자기 정체성을 되돌아 보는 계기로 시야를 확장해 삶을 온전히 바꾸는 일생일대의 소중한 경험을 꼼꼼히 기록하여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를 남겼다. 그리고"경희", "나혜석 베스트 단편소설",나는 패미니스트인가","슬픔에게 언어를 주자","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등.. 그녀의 저서와 함께 예술가,독립운동가,여성운동가,인간으로써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현재 수많은 학자들에게 재 탐구되어 도서로 출판된 책들인 "저것이 무엇인고","불꽃혼 나혜석","그녀들의 이야기 신여성","신여성,개념과 역사",불굴의 여자 나혜석","불꽃의 여자 나혜석","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그리고 까미유 끄로델",나혜석 한국문화사를 거닐다",한국여성작가연구",나혜석 한국 근대사를 거닐다""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근대 조선의 여행자들",한국 근대여성 63인의 초상","나혜석 문학연구"등 책들이 진열 되었다. 그 시대의 자유로운 영혼 나혜석을 마주하며 화성안의 문화공간과 수원작가들의 미술제를 열어 인간으로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행궁 화령전 담장에 나혜석 생가터를 마주 보며 나혜석 기념비석 따라 그녀의 생가터가 있는 골목골목마다에서 그녀의 예술혼을 기리며 새로운 문화예술의 지형을 그리기 위해 화성과 행궁을 지키는  생태교통마을인들의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2009년부터 해마다 나혜석 생가터 문화예술제 행사를 갖은 각종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즉 수원이 낳은 나혜석의 예술을 빛내기 위해 경주하는 생태교통마을 주민들의 모습에 감동의 전율이 흘렀다. 앞으로 그녀의 생가터에 기념관을 세워 그녀 업적을 지키고 역사 길이길이 빛내길을 간절히 소망하면서 거리의 화려한 매무새로 손짓하는 산철쭉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온통 여성해운동가 나혜석의 그림자를 앉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영혼을 사로 잡는 그녀와 마주하며 그녀의 삶의 행로와 남겨진 그림들의 자료들을 찾았다. 그동안 그녀의 그림 몇점만 볼수 있었는데 네이버를 통해 여러 작품들을 감상할수 있었다. 그 당시 미술 전시회의 흑백사진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윤곽선과 안정된 구도,섬세한 필치로 입체감있는 생명력의  탄탄한 기본을 형성하고 있음을 볼수 있었다. 이와같은 고전회화의 탄탄한 기본위에 프랑스의 인상주의,표현주의,야수파를 충실히 학습하여 우리 고유의 황토색과 고유 정서안에 서양의 경치들을 채색하고 감정의 극과극을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자신만의 개성을 체계화 하였다. 즉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개성적인 자아표출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야수파와 표현주의를 형성함으로써 한국 근현대 미술 기초를 탄탄하게 구축했다. 바로 이것은 영원한 자유를 갈망하는 나혜석의 개성과 일맥 상통하는 사조라고 볼수 있는 것으로 동시대 이중섭의 야수파와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근대 화가작품들 중 가장 사랑하는 위대한 그림들로 1932년 화재로 그의 그림이 불타고 6.25전쟁으로 그녀의 작품들이 많이 현존하지 않지만 앞으로 그녀의 예술에 대해 관심이 더욱 더 기울어 지길을 기대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그녀의 삶의 일대기에서 서양물결의 영향을 받은 "여성해방론의 자유연애론" 사상을 발견할수 있었다. 양반의 가문에 2명의 첩을 거닐던 아버지를 보며 여성의 해방을 꿈꾸기 시작하여 가치관이 올바로 성립되지 못한 나이에 일본 유학으로 서양의 자유물결에 눈을 뜨고 모두 흡수하여 유부남인 시인 최승구와 약혼을 하는 불상사를 일으켰고 최승구의 사망으로 결별되었다. 그후 기독교인 사별한 남자인 김우영과 결혼하였는데 남편은 그 당시 여자가 집밖에서 돌아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길을 이상히 여기는 주위 소문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배려와 이해로 그녀를 내조 하였다. 유화계 선구자로 서울에서 최초 유화전으로 남편의 덕망위에 전시회장이 장사를 이루고 고가에 그림이 모두 팔렸다. 남편의 내조로 세계여행과 프랑스 "파리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1888년~1964년)의 아카데미 랑송"에서 공부하여 고전회화부터 당대 유행하는 미국과 유럽의 화풍인 인상주의,야수파,입체파,표현주의 사조들을 모두 섬렵하며 자신만의 화풍의 셰계를 발전시킬수 있었다.즉 남편의 내조로 그녀의 그림들이 예술적인 최고의 경지에 이룰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남편을 배반하고 남편의 친구인 최린과 프랑스에서 연애와 바람으로 자유부인이 되었다. 그 소문을 듣던 김우영도 서울에서 딴집 살림을 차렸다. 최린과의 관계는 한국계 파리에서 소문이 날 정도였는데 그녀는 조선에 돌아와 세계일주로 인해 경제악화로 최린에게 도와 달라고 편지를 쓴다. 그 내용이 소문으로 와전되었는데 남편에게는 모욕과도 같은 것이였다. 남편도 이미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면서 딴집 살림을 차린채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하여 1930년 결국 평생 자식도 만나지 못하는 가정이 파멸되는 이혼을 하게 되었다. 얼굴도 못 내밀고 다녀야 할 가문을 중시하던 시대에 똑같은 죄인들이였던 남자에게는 화살이 가지 않았다. 이에 대항하여 그녀는 불이익을 당하는 여성의 평등성을 갖고 "정조는 도덕성이 아닌 취미다.","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글과 1934년 이혼고백서를 당당히 발표한다. 그리고 최린에게 그녀가 이혼 후 경제보상을 약속 받았지만 이를 이행하지 않고 이별통보를 하자 정조유린죄로 그를 고발을 한다. 그러나 최린은 자신의 권력을 삼아 일본의 덕택으로 자기 잘못을 신문에 보도 되지 않도록 하여 동아일보 기사는 삭제되고 신문기사들은 온통 나혜석에게만 몰아가기에 바빴다. 이 파문으로 그녀 뿐만 아니라 예전 남편과 자녀들까지 손가락질 받는 지탄의 수소문속에 쌓이게 된다. 이런 와중에 최린은 친일파로 온갖 명예를 누리게 되었고 김우영도 이혼으로 인한 손가락질로 자신의 변호사일이 되지 않자 1931년 농촌진흥청 과장등 일제관료로 친일파에 서게 되었고 재혼한지 7년후 기독교인인 독립운동가 양한나와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이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요구하며 병원비,집,화실을 제공해 준다고 요구하였지만 끝까지 저항하는 독립 운동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혼으로 자녀들도 보지 못하고 1935년 첫째아들인 선이 페렴으로 죽음으로써 충격과 세상이 등돌리는 악몽으로 인한 신경쇠약으로 1937년 수덕사로 찾아가 불교에 귀의하였고 정신이상,뇌졸중,동공이 풀리고 손떨림의 파킨스병까지 걸려 1944년부터 양로원을 전진하다 거지신세의 페병으로 행려 병자의 죽음을 맞았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듯 자식을 보기 위해 요양원을 탈출하는 기구한 운명을 살아야 했던 시대로 여성으로 불합리한 사회제도 시대의 힘없는 예술가 였다. 즉 일제억압의 식민지시대 서양물결과 유교적인 가부장적 사회에서 혼돈하는 가운데 자유 연애론의 신여성들의 비도덕적인 연애는 문학가 이광수의 본처와 이혼하고 우리나라 최초 여의사인 허영숙과 연애로 도피하여 결혼하였던 풍조로 나혜석의 자유연애론의 파국은 일본 유학에서 만난 유부남인 시인 최승구와의 만남부터 비롯된 올바로 형성되지 못한 자유 연애론에 기인 한다고 볼수있다. 이와같이 그녀의 "자유연애론"은 자신을 파멸로 이끈 사상에 불과한 것으로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준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유혹에 넘어갈수 있는 덫에 놓여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에  불과하므로 그녀의 실수를 비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진리위에 기초하지 않는 그녀의 자유연애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그림들은 내가 사랑하는 나의 영원한 보석이다. 

 

 (나의 느낀점이다.)

철쭉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군자란
한국문인협회 수원지부 수원 문학인의 집 계단
나혜석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