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안동시 병산서원,하회마을,월영교 (2024년3월28일)

백재은 2024. 4. 2. 11:58

 

병산서원
안동하회마을
월영교

3월28일~우리함께 걸어요 밴드모임에서 안동으로 여행을 갔다.병산서원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서원을 둘러 보았다.

병산서원은 사적 제260호로 서애 류성룡 (1542~1607)이 선조8년 (1575)에 지금의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병산서원의 처음 모습이다. 류성룡은 선조때 도체철사와 영의정을 지냈던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1607년 타계한 뒤 1614년 그를 따르던 제자와 유생들이 이곳에 위판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이로써 모두 갖춘 정식 서원이 되었으며 철종14년 1863년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병산서원 앞에 윤석열 대통령 방문 기념식수인 소나무가 매우 단아한 자태로 빛났다. 유려한 곡선미와 함께 옅은 미소를 지은 여인의 모습 같았다.미국 제41대 부쉬 대통령 기념 식수인 작은 소나무가 넓은 도량을 표출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의 빛을 드높이고 있었다. 서원 둘레길에 물아이체의 푯말이 붙어 있었다.몰아이체는 서애선생은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지만 그러한 속에서 우리들은 사물과 대상과의 교감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도리를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사물과 자연 우리는 하나로 맺어져 있다는 뜻이였다.  해발 328m 화산 아래 낙동강을 마주하며 남향인 병산서원은 모래사장 안쪽에 낙동강이 흐르고 낙동강과 임해있는 절벽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병산이 마주하여 매우 수려한 천혜자연 환경을 이루어 매우 운치가 있었다. 돌계단과 기와담장을 이룬 복례문입구부터 주위 자연과 조화를 이룬 매우 운치있는 수묵화를 담고 있었다. 극기복례를 통해 인을 실현하고자 하는 서애 선생의 학문의 뜻인 복례문을 지나 만대루가 돌계단위 2층 목재누각으로 위풍당당한 카리스마 자태로 다가왔다. 서원에서 볼수 없는  건축양식으로 매우 이색적이였다. 서원의 사색공간인 만대루는 유식공간으로 휴식과 강학을 하였다.서원에서 향사를 지내거나 행사할때 개회와 폐회를 알리는 곳으로 주로 강학공간으로 활용하였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 중 푸른 절벽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저녁무렵 마주하기 좋으니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자연을 바라 보며 휴식할수 있는 공간으로 병풍을 두른 듯한 산과 낙동강의 경치를 즐길수 있는곳이였다.만대루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병산의 산수를 만나기 위한  격물치지의 공간으로 저물무렵  병풍처럼 둘러친 산수를 마주하며 흘러가는 물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문하고 예를 배우고 실천하는 가운데 인의 세계로 세상의 바른 이치로 다가갈수 있음을 상징화 하여 드러낸것이였다. 목재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장식과 기교도 없이 꼭 필요한 요소만 갖추고 건축했다. 휘어진 모습 그대로 서 있는 기둥들과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커다란 통나무를 깍아 만든 계단 등은 건축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한국 전통건축의 빼어난 멋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만대루앞은 광영지 연못이 있었다.황토기와담장에 둘러싸인 소나무섬이 있는 광영지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로서 연못을 맑게 하기 위해 늘 신선한 물을 공급하듯이 사유의 근원인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서애선생의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맑은 날 거울같은 연못으로 하늘빛과 구름이 내려오고 선비들이 마음을 닦고 학문에 정진할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속의 정원이였다. 광영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이란 시 중에서 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노닌다라는구절에서 인용하였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데 이러한 한국 전통 연못의 모습을 천원지방이라 한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뜻으로 동아시아 사회의 전통적인 우주관이자 세계관을 나타낸다.즉 복례문,광영지,만대루가 있는 이곳은 격물치지의 사색의 공간이였다.만대루와 마주 보며  강학영역인 입교당,동재,서재로  학문을 배우는 공간이였다.강당인 입교당과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서재로 구성되었다. 입교당은 유생들이 배우고 원장과 교수가 거쳐하는 서원의 중심공간이였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입교의 뜻을 지닌 강학당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는데 오른쪽 명성재는 원장이 사용하였고 왼쪽 경의재는 교수와 선비들이 사용하였다. 명성은 밝음으로 성실을 가르친다는 뜻이고 경의는 항상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앞마당 좌우에 마주보고 선 두 건물이 동재와 서재이다. 동재는 동직재라는 현판이 서재에는 정허재와 정서실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동재의 큰방에는 상급생들이 기거하였고 작은방은 학생회장인 유사가 사용하는 독방이였다. 서재의 큰방에는 하급생이 기거하였으며 작은 방은 책을 보관하기 위해 온돌을 놓지 않고 마루를 깔았다. 동재,서재,입교당 학사위주 공간으로 서애선생은 배움은 생각을 위주로 해야 한다라고 하였고 중용에서 학문의 단계를 박학,심문,신사,명변,독행이라 하면서 신사를 가운데  둔 것과 성현이 생각을 위주로 학문을 하였듯이 단순히 입으로 외는 공부가 아니라 정성을 다해서 마음의 밭을 갈고 다스린다면 하늘의 이치가 절로 밝아질 것이다라고 한 것은 모두 학문에는 생각을 신중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매화가 드리운  동재,서재,입교당의 마당으로  만대루와 마주하며 고혹적인 향기로 가득했다. 만대루가 고개를 내민 고직사로 가는 언덕으로 카리스마스 자태로 빛났다. 사방 어느곳이나 매우 조화로운 건축을 이룬 만대루로 병산서원의 건축의 백미를 이루고 있었다.입교당에서 내삼문으로 가는 길로  병산의 산수화가 펼쳐지는 서원의 배치도로 매우 특이했다. 입교당위는 제향영역인 내삼문이 버티고 있었다.기와담장과 함께 태국문양의 삼문인 내삼문과  돌계단위 목재문을 이룬 장판각으로 나무가지가 드리우며 고즈녁 했다.내삼문과 마주하는 입교당의 목재문으로 만대루가 비추며 유교의 이념으로   내삼문,존덕사,전사청제향영역으로 행사를 지내고 이를 준비하는 공간이였다. 강학영역과 제향영역을 구분하는 입구인 내삼문으로 사당인 존덕사,향사음식과 제기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존덕사에는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국란을 슬기롭게 극복한 류성룡과 류진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냈다. 위패를 모신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므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였다. 입구의 내삼문에는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주변에 담장을 둘러 제향 영역을 보호하였다.전사청은 보통 사당과 한울타리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나 병산성원은 전사청을 별도의 담장을 둘러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하였다. 이는 철저히 지휘하고 감독하려는 목적이였다.내삼문옆에는 추공교월 푯말이 붙어 있었다.서애선생은 유학의 참된 공부를 터득한 분이다.서애선생의 견문과 지식은 정밀하고 지조는 곧으며 마음가짐은 공평하고 몸가짐은 청결하였다. 문장은 땅과 바다같이 깊었다. 추공교월의 뜻은 서애선생의 깊은 유학의 지식을 의미하고 있었다.두터워 천고를 꿰뚫었으며 해갈이 빛나고 옥같이 깨끗하였으니 서애선생을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칭찬하였고 선조는 정의상으로 나의 친구라며 자랑스러워했다.병산서원 주위는 유교문화길을 이루고 있었다.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가는 길은 굽이마다 구곡이 설정되며 전해지는 곳으로 산수화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길이다. 태백에서 시작한 낙동강의 물길이 화산에 이르러 마을을 품고 남으로 달려오다 문필봉 아래에서  숨을 고르는 동안 붉디 붉은 서녁 달이 산봉우리에서 떠오를때 산 그림자가 거꾸로 반쯤 호수를 드리우는 풍광이 일품인 길이였다.하회구곡 제1곡인 병산은 병산서원 맞은편에 위치한 병풍처럼 펼쳐진 산이다. 하회마을 주산인 화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낙동강을 품고 있는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낙동강 근원이 있는 물이 동쪽에서 흘러  내리고  병풍바위의 우뚝한 절벽이 그 안을 에워 싸고  병산에 서원이 서니 강이 섬처럼 둘러 일곡이라 이름난 터에 버드나무가 나부끼는 곳이다. 병산십경이 마주하는 병산서원으로  병산은 화산과 함께 하회의 중심이 되는 곳이였다. 서애선생은 병산을 보면서 퇴계 선생 가르침을 돌아보고 학문하였으니 병산은 서원의 근간이 된다. 이곳을 두고 류건춘은 하회구곡의 1곡에서 구름자욱한 병산은 서원을 있게 하고 이 터전에서 서애선생의 문풍이 일어났다고 노래하였으니 병산은 류성룡 선생의 학문의 시작점이였다.즉 병산서원은 지은 건축솜씨가 빼어나고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은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로 매우 운치있는  수묵풍 산수화 걸작 같았다.병산서원의 입교당을 둘러 보는 중 김순희집사님을 만나 기뻤다.딸과 함께 여행을 왔는데 이곳에서 만날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하나님께 변치않는 우정으로 그 관계를 주관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이였다.김순희집사님이 사진을 찍어 주어 추억을 남길수 있었다.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갔다. 하회세계탈박물관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탈로 강령탈춤봉산탈춤과 함께 황해도 유명한 탈놀이고 하회탈은 우리나라 탈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 제121호  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로 병산탈과 함께 지정된 귀중한 우리 민속 문화유물이며 가면미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병산탈은 국보 제121호로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서 탈놀이에 사용하던 탈이다.오리나무로 만든 2개의 탈은 기법이 뛰어나다. 제작시기는 대체로 고려 중엽11~12세기로 추정된다.옛 산대탈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성행했던 중국나례에서 기원하여 조선시대에 궁중연회로 행하여지다가 민간에 전해지면서 민중극으로 정착하였다. 탈춤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모두 양반에 대한 비판과 서민생활의 어려움 등을 주제로 한다.처용탈의  처용설화는 신라 제49대 헌강왕(875~886)대의 것이다.이 설화는 처용을 문신으로 신격화하면서 처용의 모습이 역귀를 퇴치할 수 있는 주술력을 갖게 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그 밖에 한국의 탈 종류는 봉산탈,북청사자놀음 탈, 은율탈,예천 청단놀음 탈, 강릉관노가면극, 강릉 관노 탈 ,우도(영광)농악 잡색탈,영해별신굿 중의 탈굿,수영야류 탈,동래야류 탈,통영오광대탈,고성오광대 탈,가산오광대 탈,진주오광대 탈 동래야류 탈,십이지신상 탈이 있었다.전시관 복도와 2층 전시실3은 세계 탈 전시회로 화려하게 이목을 집중시켰다.  스리랑카의 신할레스족은 질병가면이 18개 갖고 있다. 매우 무서운 모습으로  춤을 춰서 병을 치료한다.인도네시아 발리섬 사자춤인 바롱댄스는 카로나랑이라는 전설에 기반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탈문화는 다른 나라에 비해 크게 발전하였다.그 이유는 인도네시아 문화의 다양성에 기인하고 역사적으로 말레이시아,남아시아 무슬림(이슬람교),유림문화를 포괄하는 인접국들로부터의 전통의 영향에 기인한다. 토펭은 인도네시아 자바와 발리 등지에서 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탈놀이이다. 토펭은 나무와 뿌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발리리섬에서는 가면을 뜻한다.콘드라마인도의 서사시 라마키엔(라마야나)을 기초하고 있는 콘은 태국의 왕궁에서 전해져 온 전통 가면극이다.호법존티베트를 중심으로 몽골,부탄,네팔 등의 라마교사원에서 연행되는 종교의식이다. 불력으로 악령을 쫒아내기 위한 이였다.중국에서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의 상나라때 이미 탈이 존재하였고 탈놀이도 행해진 것으로 이야기된다. 중국의 탈은 봉신방 양임,봉신방 문태사,봉신방 강자아,삼국연의 유비,삼국연의 관우,삼국연의 장비,삼국연의 제갈량,서유기 당승,서유기 손오공,서유기 저팔계,서유기 사승,옛  나희가면이 있다. 중국에서는 한국의 가면극과 같은 전통적 양식의 가면극을 나희라고 부른다. 종규는 중국 민간 전설 중의 나쁜 귀신을 쫓는 신이다.탄구는 잡귀를 막고 장수를 빌기 위해서 걸어 두었던 탈이다.베트남대나무탈은 둥글게 짠 대나무 바구니에 칠을 해서 만든 탈이다. 핫 째오 라는 베트남 전통 민속연극의 캐릭터를 상장화한 것이다.코메디아 델라르테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3세기에 걸쳐 유럽전역에서 사랑 받았던 이탈리아 전문 직업 배우들의 가면극이다.아프리카 대부분 부족사회는 각종 행사나 의식에서 가면을 사용한다. 가면은 아프리카 대표적인 문화로 손꼽힌다. 처음에는 신에게 제례를 올리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그밖에 중국 한나라 스토리텔러 수오창과 고촉국의 청동인면상,북아프리카 인디언 가면(이로쿼이 연합),이탈리아 베네치아 카니발 가면,할로윈 가면,태국의 탈,미얀마의 탈,말레이시아의 탈,일본의 탈,인도의 탈,스리랑카의 탈,네팔의 탈,몽골의 탈,필리핀 탈,몰디브탈들이 전시되어 이국적인 문화의 감성에 젖을수 있었다.전시실 자투리 공간으로 부족사회의 생활상을 볼수 있는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각기 다른  나라들의 삶의 문화로 정겨움으로 다가왔다. 탈 판화 전시회장으로 전시장을 화려한 색채감으로 밝게 해 주었다. 유머스러운 만화형태의 작품들로 세계적으로 뻗어나고자 하는 탈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었다.이와같이 우리나라  탈춤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모두 양반에 대한 비판과 서민생활의 어려움 등을 주제로 하였고 서양의 탈춤과 공통점은 악귀를 물리치는 것에 목표를 두었던 것을 알수 있었다.

 

하회세계탈박물관에서 버스를 타고 마을로 갔다.

안동하회마을은 유네스코 세게유산으로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위치한 민속마을이다. 풍산 류씨의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중기 문신 류성룡의 출신지이다. 화산이 드리우는 낙동강이 S자로 마을을 감싸고 흐르고 그 안에 자리한 마을에  3개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곳이다.드넓은 논밭이 펼쳐지고 산봉우리가 둘러싸여 비추는 마을로 황토기와 담장 골목길이 이리 저리 굽이치며  정겨웠다.산수유가 담장과 팔작지붕에 드리우며 운치가 있었다. 중요한 문화재길을 찾기도 힘들 정도로 대단위 민속마을이였다.굽이치는 골목길의 미로의 길 같은 담장길을 땀을 흠뻑 흘리며 따라 가니 영국여왕 엘리자베스2세 방문기념 식수가 있는 충효당이였다.충효당은 보물 제414호로 류성룡 가문의 종택이다. 충효당 이름은 류성룡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 강조한데서 유래한다. 현판의 글씨는 이름난 서예가 허목이 썼다.충효당은 조선중기 재상이자 학자였던 류성룡 가문의 종택으로 손자 류원지가 류성룡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유림과 제자들의 뜻을 모아 지었다고 한다.류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후에 풍산현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진다.서쪽을 앞면으로 하여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가 연이어 있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인  류상조가 병조판서에 임명된 뒤 부하 군사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목재기와 삼문과 목재벽체,안채와 기와 담장에 매화가 드리우며 고혹한 향기로 가득찼다.초석위에 목재기둥과 목재난간과 함께 팔작지붕을 한 기와처마로 산수유가 드리우며 매우 고즈녁했다.충효당에서  영모각으로 가는 정원으로  나무가지들이 매우 수려한 자태로 뻗으며 매우 운치가 있었다. 대대로 유교이념으로 류성룡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었다.영모각은 1965년 충효당안에 지어 1966년개관하였다.영모각에는 류성룡,류성룡의 성장과정,벼슬길에 올라,이순신과 권율,임진왜란에서 활약,말년의 생활,영모각의 보물들, 그의 저서들,병산서원 주제로 전시되었다.류성룡은 조선 선조때 재상으로 자는 이현 호는 서애로  대사헌,영의정을 지냈다. 임진왜란때 이순신과 권율 명장을 천거하고 도학,문장,덕행,서예로 이름 떨쳤다.저서로 서애집,징비록, 신종록이 있다. 이황선생에게 문하에서 글을 배운 서애 류성룡 (1542~1607)은 임진왜란때 영의정으로 국난극복을 위해 힘쓴 뛰어난 명재상이다. 류성룡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책을 가까이 하여 4세에 이미 글을 읽기 시작하였고 21세 때 1562년 명종(17년)에는 형 류운룡과 함께 당시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성라학은 물론 천문,지리,군사,의학 등 모든 분야에 통달하였다. 퇴계 선생은 류성룡을 하늘이 내린 사람이디라고 하며 장차 대성할 임눌임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순탄하고 빠른 승진으로 대부분  중앙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관인으로써 얼마난 뛰어난 역량과 학덕을 가졌는가 알 수 있다. 왕이 의리로는 군신지간이나 정의상으로는 사우와 같다고 하였다.그의 능력은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 앞에서 더욱 빛났다.류성룡의 임진왜란때  공적 중 하나는 이순신과 권율장군의 등용이다.그는 임란이 발생하기 전에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전라 좌수사로 권율을 형조정랑에서 의주 목사로 천거하여 왜적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선생의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없다면 우리는 임진왜란때 위대한  두 영웅을 만날수도 없었을지도 모른다.허술한 군사제도 정비를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주장하였고 왜란이 발발하자 병조판서와 좌의정을 겸임하고 모든 군무에 총책임을 맡았다. 그는 디사 도체찰사라는 직책을 맡아서 왜군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특히 피난길에 임금을 모시면서 임금께서 한 발자국이라도 조선 땅에서 떠나신다면 조선은 곧 우리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의주에 머물러 후일을 도모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다시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옥연정사 등에서 못 다한 학문정진에 힘을 쏟았다.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정비록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겻다. 검소한 생활을 하여 먹을것 조차 넉넉하지 못하였으며 아들에게 나누어 줄 집도 없을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결국 1607년 선조(40년) 66세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나라와 모든 백성들이 슬퍼하였다고 한다. 1614년 병산서원에 위패가 모셔지고 1627년 인조5년 2월에 문충이란 시호를 받았다.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류성룡은 서애라는 호 이외에 운암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는데 운암잡록은 1598년 영의정 물러난 후 다사다난했던 생애 돌아보며 이를 수필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주로 동서로 난눈 붕당에 대한 내용이 주류로 붕당이 커지는것은 말세에 일어나는것이라 하여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걱정한 우국충정을 엿볼수 있다.근폭집은 보물제160호로 임진왜란 중 군무와 정사에 대하여 국왕에게 올린 여러 글을 모아서 만든 책이다.징비록은 임진왜란때 류성룡이 직접 기록한 국보 제132호로 영의정 물러난 후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저술한 책이다.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쟁의 상황 등을 기록한 친필 회고록이다.징비뜻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 뜻이다.영모록초본은 풍산 류씨계보를 모아 기록하고 선친의 연보와 저술,제문,만장 등을 모아 편집하고 발문을 붙여 조상에 대해 존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표하였다. 류성룡선생은 정치가로서 면모 뿐만 아니라 이순신 장군에서 군사전술에 대하여 적어 보낼 만큼 군사전략가로서의 면모 뛰어났다. 당장서첩은 인진왜란떄 명나라 장수 30여명이 서애 류성룡에게 보낸 서한 43통을 수록한 것으로 긴요한 정치적 안건이나 작전 군수사항 등에 관한 논의가 글 속에 보인다. 영모각의 보물들은 국보132호 징비록,보물160호 류성룡종손가문적,보물460호 류성룡종손가유물이 있었다.병풍을 둘러친 듯 하는 빼어난 풍경을 지닌 풍천면 병사리에 위치한 병산서원은 류성룡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본래 이 서원은 고려말 풍산헌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1572년 선조(5년)에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14년 광해군(6년)정경세등 지방 유림의 뜻으로 류성룡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짓고 위패를 모셨다. 1629년 류성룡 셋째아들 류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1863년 철종(14년)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대원군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현재 사적 제260호 지정된 병산서원은 조선시대 국왕으로 부터 편액,서적,토지, 노비등을 하사받아 그 권리를 인정받은 사액서원이다.영모각에서 나와 부용대로 향했다. 충효당과 마주보는 낙동강길로 남포와 수림인 하회2,3곡을 이루고 있었다. 하회구곡(제2곡)인 남포는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고갯길을 넘으면 마을로 들어가는 강변길이 나오는데 이곳을 가르킨다.하회구곡(제3곡)인 수림은 남포에서 하류쪽 1.7KM지점 강변에서 상봉정 작은 정자가 있는데 상봉정을 품고 있는 나지막한 언덕 숲이다.낙동강 제방위로 남포와 수림이 이어지는 벚꽃길로 사색의 물결로 휘몰아 쳤다.낙동강변 백사장으로 소나무숲이 청정한 향기로 가득했다. 소나무숲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이 춤을 추는것 처럼 매우 신비롭게 다가왔다.신천지에 온것 처럼 지금까지 봤던 소나무숲 중 가장 아름다웠다. 낙동강이 흐르는 기암절벽의 부용대로 신비로운 용이 솟구치는것 같았다.즉 낙동강이 흐르는 기암절벽의 부용대와  백사장의 울창한 소나무숲이  사계절 각기 감성으로 다가오는 매우 환상적인 곳이였다.

 

안동하회마을에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월영교에서 단체사진 찍고 점심을 안동댐 간고등어 직영식당에서 간고등어구이 정식을 먹었다.김순희집사님,딸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 겉은 바싹하고 속은 촉촉한 간고등어구이로 담백했다.짜지않은 고소한 맛으로 소금양과 화력이 비법인것 같았다.좁쌀밥과 함께 호박,두부가 들어간 얼큰한 된장국,새콤한 무우고추절임,견과가 들어간 콩자반,새콤한 해파리무우무침,어묵의 맛을 살린 어묵조림,짜지않는 싱싱한 배추맛의 김치,상추,고추로 집밥과 같은 맛이였다.힐링의 목표로 어머니의 정성으로 차려진 집밥 같았다. 고추가루의 깔깔한 맛의 깻잎절임이 인상적인 맛이였다.절임비법이 담겨진  맛깔스러운 맛이였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월영교를 산책했다.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호수로 사색적인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호수 중앙으로 8각정자인 월영정으로  일본풍 정감 가득찼다. 벚나무가 호수로 드리우는 가로수길로  시들이 전시되었다. 고향과 강변풍경의 시로 작가의 사실적인 경치와 고향에 대한 진심어린 마음을 토로하고 있었다.안동민속촌으로  화사한 육각정자아래 연못으로  홍매화가 드리우며 청정한 향기로 가득찼다.연못앞에 육사시비가 붙어 있었다.육사 이원록(1904년~1944년)은 안동 출신의 민족시인이자 애국지사이다.절정,청포도,광야등에서 명징한 시어로 독립을 노래한 그는 윤동주시인과 함께 일제 암흑기를 밝힌 찬란한 별이였다.일제에 항거하는  강렬한 민족의식을 서정적으로 노래하였고 상징적 세련된 언어로 청초하고 고고한  세계를 구축했다. 1944년 북경 감옥에서 40세를 일기로 순국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원록에 대한 생애를 되새기며 민속마을길로 우리고유의 정서가 묻어나는 한폭의 유화작품을 담고 있었다.안동민속촌을 지나 카페에서 다시 자연친화적인 산책로인 호반나들이길로 갔다. 호반나들이길은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안동댐 보조호수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이룬 길이였다. 버드나무 가지가 고풍스럽게  호수로 드리우며  사색적 정감을 자아냈다. 나무가지가 호수에 잠기며 몽환적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월영교를 산책하며 다시 한번 이곳을 여행하고픈 마음을 갖게 해 주었다.

 

월영교에서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하여 잠실전철에서 버스를 내렸다.지하철에서 동양화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장미,눈풍경,산과 강의 경치들로 섬세한 필치와 함께 여백의 미를 살려 자연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을 신비롭게 표현한 걸작품들이였다. 

병산서원
병산서원앞 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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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세계탈박물관
안동하회마을
충효당
영모각
안동하회마을~부용대
안동댐 간고등어 직영식당
월영교
잠실지하철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