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완주화산꽃동산,삼례문화예술촌(2024년4월23일)

백재은 2024. 5. 13. 18:00

완주화산꽃동산
농가 레스토랑
삼례 그림책미술관

 

삼례문화에술관 제1전시실
삼레문화예술촌~제4전시실 세계동전 수집 전시회

 
4월23일~우리함께 걸어요 밴드모임에서 완주로 여행을 갔다.완주에 이르니 산봉우리 아래  소나무가 아담하게 펴쳐지며 소나무 농원 같았다. 완주 화산 꽃동산입구부터 하늘위로 치솟은 매우 우거진 숲길이 10분정도 펼쳐졌다.치유의 숲처럼 매우 청정한 숲으로 난생 처음 아름다움을 느낀 숲길이였다. 화사한  철쭉사이로 소나무가 유려한 자태를 뽐내고 금낭화가 향기를 발하고 있었다. 우뚝솟은  초목들의 가로수와 철쭉단지 꽃동산이 장엄하게 비추었다.언덕위로 철쭉언덕에 감싸며 잔디 중앙으로 섬과 같은 돌탑장식으로 고즈녁했다. 테크길로 철쭉, 겹벚꽃등 화려한 색채로  물든 산언덕이 온몸을 감싸안듯이 반겨 주었다.저! 멀리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드리우는 숲길로 매우 아름다웠다.가지위로 아담하게 수를 놓은  소나무가 돌탑과 함께 동남아풍 정감을 자아냈다.숲길마다 매우 정갈한 꽃동산으로 정원사의 매우 정성어린 손길의 감동으로 벅찼다. 철쭉길 사이로 저! 멀리 산봉우리가 비추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룬 자손 대대로 축복받은 동산이였다. 철쭉동산으로 가기전 언덕아래로 꽃동산에 둘러싸인 대나무숲과 돌탑,석탑,겹왕벚꽃,단풍나무,철쭉,소나무 등으로 꽃동산 테크길 보다 더욱 더 웅장하게  다가왔다.곳곳에 매우 아름다운 자연의 색체로 멋진 풍경화 그림이 되는 장인 정원사의 예술동산이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개방하여 행복을 주는 주인의 봉사정신이 자손  대대로 복이 이어지길 기원하며 내려왔다.완주 화산꽃동산에서 점심을 먹으러 농가레스토랑에 갔다.맞배지붕의 적벽돌 벽체로 아담한 정원과 함께 거대하고 장대한 초목이 드리우며 운치가 있었다. 밤색으로 장식을 이룬 식당의 잔디마당 그네로 사색적이였다.버섯전골을 먹었는데 양배추,당면,파, 양파,당근,갖가지 버섯이 들어간 버섯전골로 소고기 육수와 채소육수,깔깔한 고추가루 조화로 얼큰하고 맛깔스러웠다.비법육수가 담겨진 개운한 버섯전골이였다.들깨의 고소함이 매우 가득한 들깨죽으로 매우 인상적인 맛이였다.비린내 나지 않는 고등어무우조림으로 사르르 녹는듯 무우가 매우 맛깔스러웠다.부추와 김무침으로 고소함이 느껴진 풍미로 입맛을 돋구었다.달자지근한 김치,고소한 녹두무침과 시금치무침,젓길향기가 가득한 젓갈무침,새콤한 미삼무침,매우 부드러운 식감의 손수 만든 묵,담백한 돼지수육으로 신선한 재료와 화학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양념으로 정성이 담겨져 있었다.농가레스토랑에서 삼례문화예술촌에 갔다.그림책 미술관,카페 북,삼례문화예술촌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으면서 예술촌 마을을 감상했다. 시멘트벽체로 불조심과 양곡안전관리 글귀가 붙은 그림책 미술관으로 양곡창고의 옛 추억을 소환하고 있었다. 중앙의 인형장식과 함께 목재장식 계단의 2층을 이룬 내부로 매우 산뜻했다.자연의 생명원리를 생명력있게 분출한 추상화그림과 함께 서양 풍경화,귀족의 삶을 그린 그림이 장식되며 고풍스러웠다.1층은 "숲속 연못 헬렌 헤이우드 원화전"이 전시되었다.그림책이 출판되기 까지 원본과 교정쇄,작가 표지,삽화,작업과정을 보여주는 전시회였다.생물들의 이야기가 담긴것으로  마술처럼 연못이 구름으로 변하고 다시 구름이 연못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와 자연속 생물의 일화모험이 펼쳐지는데 그중 생물들의 일화가 판화와 함께 펼져지며 전시되었다.공중에 날개달린 동화속 요술공주와 함께 벽화들로 동화속 정감으로 가득찼다.2층은 빅토리아시대 그림책 3대 거장 전이였다.150여년 전인 19세기 후반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시대 컬러 인쇄술의 급속한 발달로 기존의 흑백  위주였던 책은 점점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당대 가장 뛰어난 컬러원판 제작기술자이자 인쇄업자 겸 편집자 에드먼드 에반스(1826년~1905년)는 어린이 그림책의 발전 가능성을 예측하고 랜돌프 칼데콧,케이트 그린어웨이,월터 크레인 등의 그림책 작가들과 손잡고 다채로운 색상의 그림책을 펴 내면서 세계 그림책 역사에 영원히 남기는 걸작들을 쏟아 내며 그림책의 황금시대를 열었다.이들을 소위 빅토리아시대 3대 거장이라한다. 녹색과 밤색벽체의 카페북으로 책 모양의 대리석 조각이 있는 잔디마당과 함께 맞배지붕의 적벽돌양식과 "ㄱ억자형" 이루며 생기를 발산하고 있었다.카페 내부는 2층을 이루며 책 진열로 매우 아늑한 작은 도서관  같았다.삼례문화예술촌 마을로 완주삼례성당이 비추고 새참수레 카페,회색벽체의 초록우산카페,일본 목재건물양식의 청춘공작소,회색벽체의 완주관광안내센터가 거리 가로수와 조화를 이루며 문화마을 같았다.중앙 타일바닥의 정자를 중심으로 흰벽체의 슬래트집과 적벽돌 슬래집이 군데 군데 배치된 홍식당이 목재 담장으로 비추며 정겨운 향수를 그려내고 있었다.목재담장과 적벽돌담장으로 세계막사발미술관 레지던스 프로젝트 2015년도 2차 조형조각이 장식되어 있었다.태국과 한국의 문화교류가 활성화되는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양국의 상징물을 함께 도판을 구성한 작품이였다. 태국 작가작품으로 조형토와 백토를  혼합한 두 마리의 코끼리가 항아리를 호위하는 태국의 전통문양 위쪽으로 한국을 상징하는 화사한 꽃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었다.작가가 도착했던 초봄에 삼례에서 가장 많이 화사하게 핀 매화꽃이 한국의 상장으로 이미지화된 것이다.한국 전통 문양에서 자주 사용되는 연꽃을 중심에 배치하고 태극을 형상화한 곡선으로 나뉜 공간에 태국을 상징하는 물고기 두마리를 베풀었다.이국적이고 동양적 문양이 섞여진 조형물이였다.거리를 예술인 마을처럼 단장한 것으로 매우 정겨웠다.일본식 목재벽체의 슬래트집 삼례문화예술촌으로 일제시대 곡물창고 역사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삼례문화예술촌은 1920년 지어진 양곡 목조구조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삼례문화예술촌의 삼례읍은 만경강에 위치하여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한 만경평야의 일원을 이루는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군산,익산,김제와 더불어 양곡수탈 중심지였다.양곡수탈 중심지에 있던 삼례양곡창고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대지주 시라 세이가 1926년 설립한 이엽사농장 창고로 추정되며 완주지방의 식민농업회사인 전북농장,조선농장,공축농원과 함께 수탈의 전위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1914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삼례역 철도를 이용해 군산으로 양옥을 이출하는 기지 역할을 담당 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군산 일대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만조시에 삼례 비비정마을까지 바닷물이 유입되어 들어 오면 배로도 양곡을 수탈하였다고 전해진다.당시 삼례역 주변 주민들은 나라 잃은 아픔과 배고픈 설움을 눈물로 삼켰다.삼례 양곡창고는 1920년대 신축되어 2010년까지 양곡창고로 사용되다가 저장기술발달등 환경변화로 기능을 잃게 되었으나 지역 재생을 위해 완주군에서 매입하여 문화공간으로 조성 2013년 6월5일 새로운 생명을 담은 문화예술촌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모모미술관,카페뜨레,책공방북아트 센터,디지털 아트관,김상림목공소,삼례책마을 등 다양하고 독특한 문화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 역사와 문화를 이루는 문화예술촌을 중심으로 막사발미술관(구 삼례역사)과 책마을 등 다양한 문화와 예술이 함께 하는 문화마을로 조성되어 세계적인 명소로 발돋움하는 꿈을 꾸고 있는 곳이였다.고전적인 서양풍양식인 삼례성당이 고즈녁하게 비추고 적벽돌 슬래트지붕의 뒷마당 정자와 초목으로 정겨웠다.넓은 잔디 마당 중심으로 슬래트지붕의 적벽돌 정원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자이크 타일 장식으로 예술가의 손길이 느껴졌다.정열의 흰벽체 슬래트지붕의 카페의 야와 테라스로 꽃나무가 연못에 드리우며 일본풍 정감으로 운치가 있었다.잔디마당 중앙의 소라,개구리가 장식된 분수와 곳곳에 조형물 장식으로 추억의 사진 마당 같았다.국토교통부 주관  2013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대통령상을 받은 아트촌이였다.전시실 3곳에서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제1전시실 삼례문화예술촌 특별기획 서양명화전 시리즈로  "거장들의 시선을 만나다" 주제로 빈센트 반 고흐(1853년~1890년) 그림을 고해상도 잉크젯 프린팅기술인 포스아트로 전시되었다.자화상,해바라기,작가의 방 3섹션으로 분류하여 전시되었다. 작품들을 쉽게 다가갈수 있도록 주제별로 나누어 구성한 전시로 매우 인상적이였다.작품들을 주제별로 분류하며 감상할수 있는 감상법을 제시해 주어 매우 뜻 깊었다. 전시실 곳곳에 아를의 침실,별이 빛나는 밤,아를 포룸 광장 카페 테라스,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등 대형벽화와 함께 고흐의 엽서가 장식되여 고풍스럽게 다가왔다.인생 샷을 남길수 있도록 감상자를 배려한 장식들이였다.
첫번째 섹션은 자화상으로 생폴에서 첫번째 위기를 극복했다고 생각한 직후인 1889년9월 반 고흐는 거울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팔레트를 든 자화상을 그릴 준비를 했다.한 주 만에 반 고흐는 소용돌이치는 배경의 훌륭한 작품을 포함해 2점의 자화상을 더 그렸다.작품속 반 고흐는 정면을 똑바로 응시한다. 퀭한 두눈은 단화한 심지어 저항적이기까지 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관람자에게 고정되어 있다.작품으로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1889년)","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1889년)","자화상 (1889년)","소용돌이치는 배경의 자화상(1889년)","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1889년)"이 전시되었다. 
두번째 섹션은 해바라기로 고흐는 1888년 프랑스 파리에서 남부 아를로 거처를 옮겼다.그곳에서 그는 동료 화가인 폴 고갱과 함께 작업하기를 기대하면서 고갱을 위해 작은 집을 빌려 노란색으로 페인트를 칠한 후 해바라기 꽃을 그린 그림으로 장식하였다. 이 작품은 그때 그려진 해바라기 연작 가운데 하나로 고흐에게 태양의 화가라는 호칭을 안겨준 중요한 작품이다. 1888년작 "해바라기"의 6개 작품들이 각각 바탕색이 다른 해바라기로 표현하였다.고흐가 사랑한 노랑색과 태양을 닮은 해바라기 등이 강렬하고 생동감있는 터치로 구현되었다.
세번째 섹션은 예술가의 방으로 고흐는 마침내 자신이 진정한 집을 갖게 되었다는 기쁨을 표현한다.그는 이 작품을 자신이 이제껏 그린 작품들 중 가장 빼어난 수작이라고 생각했다.그림속 일상용품 가운데 새 침대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반 고흐는 닫힌 덧문을 통해 이곳이 일상생활이 주는 스트레스와 외부의 부산스러움으로 부터  그 안에서 잠을 자는 사람을 보호하는 환경이라는 점을 환기한다."고흐의 방"과 "반 고흐의 의자" 작품이 대형벽화로 장식되었다. 
 
제3전시실 지역작가 공모전시 두번째 김계형 작가의 "행복한 나의 삶(화양연화)"주제로 전시되었다.오방색과 봄에 무리지어 피는 꽃은 건강과 생명력에 대한 상징이다.작가는 우리 모두 행복한 시간을 말하고자 한다.오방색을 칠한 나무는 우리 삶의 근본이 강건해야 함을 의미한다.내면이 강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오방색은 음양오행사상에 기반하여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우주의 기운을 품고 있는 조화로움의 상징이며 에너지와 생명력을 의미하기 때문에 작품에 특히 나무에 오방색을 표현했다. 또한 단아하게 그려진 하얀꽃은 봄꽃을 모티브로 하였는데 매화,이화,벚꽃.아몬드꽃 등 겨울을 견디고 무리 지어 피어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희망을 안겨주는 꽃들이다.우리 인생은 희망을 꿈꾸며 살아갈 가치가 있다. 작가는 돌가루 재료와 섞은 다양한 혼합재료를 켜켜히 쌓아올려 꽃의 질감을 거칠게 표현하였느데 꽃이 아름다운 것은 삶의 질곡을 견디고 견뎠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작품을 하는 작가나 감상자가 함께 화양연화의 순간을 선물로 받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작가는 더 행복한 시간을 위해... 끓임없이 실험하고 고민을 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즉 그의 작품들은 아름다운 삶의 질곡을 우주의 생명력으로 비유하며 매우 아름다게 표현 하였다.화려한 색채로 아름다운 삶을 채색하고 음양오행사상을 고전미 넘친 문양으로 표현하여 저절로 힐링이 넘쳤다.특히 "2022-18"작품이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우주로 향하여 아름다운 삶을 노래하고 있었다. 
 
제4전시실은 지역작가 공예품 공모 전시전이였다.옹가의 미학 전설희,생동감 넘치는 도예 유희영,추억을 만드는 인형 이소영,전통 그대로의 도예 임경문,금속의 조형미 노병득,우리 전통 가구 이명택,전통판각 최경호의 작품들이 전시 되었다.
노병득은 소나무 조형성에 매료된 작가로 소나무와 조화로운 금속공예로 단아하고 고전미가 넘쳤다. 한지로 인형을 만드는 이소영 작품으로 아이들의 생기있고 발랄한 정서를 율동감있게 표현하였다. 나무공예 작가인 이명택은 민속가구에서 고유의 나무결이 지니고 있는 자연의 결을 중요시 하고 있었다. 전통판각 작가 최경호는 속세의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자신을 찾은 작가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전통판각이란 팔만대장경처럼 출판을 목적으로 목판에 글이나 그림을 새기는 것을 말하는데 그림과 글씨를 파내는 정교한 조각들이 국보급 예술 같았다. 인간문화재로 손색이 없는 작가 같았다.도예작가 유희영은 거치른 표면의 질감과 함께 매우 섬세한 표현으로 매우 뛰어난 기술을 가진 도예의 장인 같았다. 임경문은 율동감있는 용무늬와 귀족적있고 고풍스러운 꽃무늬로 우리 전통무늬를 새기는데 매우 탁월한 작가 같았다.선과 원,추상적인 그림을 장식한 도자기도 진열되며 국보급 도예작가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전설희 단순하고 단아한 미로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었다.즉 우리나라 인간문화재의 국보급 예술작품 같았다.

공예품 공모전시실 옆에는 세계동전수집가 전시를 하고 있었다.마도로스 임종현이 직접 나라를 방문하고 현지 사람들을 만나 동전을 모은 것으로 오랜 세월 담고 있었다. 임종현은 1977년 무역사업으로 세계를 오가는 외항선을 타면서 동전 모으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구 소련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80여개국의 각기 다른 동전 1천여개를 수집하여 2022년 완주군에 기증하였다.각 나라 동전전시와 함께  "돈 이야기 우리 아이 첫 경제" 책 저자 마틴젠킨스 말의  인용한 동전의 탄생과 상평통보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상평통보는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사용되었던 화폐의 하나이다.처음에는 1633년 인조(11년) 상평청을 설치하고 화폐를 주조 유통했는데 결과가 나빠 유통을 중지했다가 1678년 숙종(4년)에 다시 주조하여 조선 말기에 현대식 화폐가 나올때까지 통용되었다.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었다.크기에 따라서 세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모양은 외형이 납작한 둥근 엽전이 일반적이다. 팔각형태로 가운데 정사각형의 구멍이 있다.앞면에는 구멍을 둘러싸고 상하우좌를 한 자씩 찍었는데 여기서 상평은 상시평준의 준말로 유통가치에 항상 등가를 유지하려는 의도와 노력을 반영한 것이다. 뒷면의 구멍 위에는 주조한  관청의 이름을 박았다.조선후기 호조에서 만든 당백전은 흥성대원군 정권이 1866년 고종(3년)부터 이듬해 까지 발행한 화폐로 당시 국가재정난을 해결하고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한 비용과 열강의 침략으로 인한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작된 것이다.또 구멍 아래에 천자 또는 오행의 한 글자나 숫자나 기호를 찍어 주조번호를 표시하는데 여기에는 대자가 부조되어 있다. 
기원전 600년 무렵 동전을 발명하였다. 동전이 탄생하기 전에는 금과 은과 같은 금속 덩어리와 곡물 무게로 물건 값을 측정하고 진흙 서판 차용증에 누가 누구에게 빌렸는지 기록하였다.동전은 금속조각을 특정한 크기와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그 위에 금속의 무게와 그것을 만든 장소의 상징을 새겼다.가장 흔하게 통치자의 얼굴을 새겼다.고대의 많은 발명품이 그렇듯이 동전은 상당히 비슷한 시기에 세계 곳곳에서 생겨났다.수백개의 작은 도시국가로 나뉘어서 각기 다른 통치자들이 다스렸던 지중해  동쪽지역 뿐만 아니라 중국과 흑해 주변에서도 동전이 만들어졌다.동전을 사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동전 한닢의 무게가 얼마인지 그래서 그 가치가 얼마인지 알면 거래를 할때마다 금속의 무게를 달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거래를 훨씬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대 그리스 작가 헤로도토스가 남긴 기록을 보면 역사상 최초 동전을 사용한 지역 중 한 곳이 리디아(지금 터키)였다. 리디아에서 인류 최초의 상점들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리디아 같은 지중해지역에서는 금이나 은,호박금 같은 귀금속으로 동전을 만들었다.그런 동전은 부자들이 값비싼 물건을 거래하거나 재산을 저장하는 데는 유용했지만 먹을 것 같은 일상 용품을 사는 데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그래서 일상용품을 거래 하기 위해 구리나  청동으로 가치가 훨씬 작은 동전도 만들었다.그리스,아테네 등의 고대 시장터에서는 이런  소액 동전이 수천개씩 발견되었는데 그 만큼 많이 사용되었다는 증거이다. 그 시절 모든 도시국가가 동전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동전을 만든 나라에서는 대체로 그 나라의 돈만 사용해야 했다.동전은 그것을 만드는데 사용된 금속의 실제 가치보다 금액을 약간 더 높게 매겼기 때문에 조폐는 나라의 통치자들에게는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라마다 서로 다른 돈 즉 통화가 생겨났다.
 

금낭화

 

완주 화산꽃동산
농가레스토랑
그림책미술관
그림책미술관
북카페
삼레문화예술촌으로 가는 길~삼례성당
삼례문화예술촌

제1전시실)

 

담배물고잇는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
빔센트 반 고흐

제3전시실)

김계형 "화양연화"

제4전시실)

노병득
이소영
이명택
임경문
최경호
유희영
전설희
세게동전 수집가 임종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