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옥천 부소담악,천상의 정원,정지용생가,정지용문학관,육영수여사 생가(2025년5월13일)

백재은 2025. 5. 15. 18:23

 

부소담악
천상의 정원
정지용생가
육영수여사 생가

 

5월13일 ~ 둘도모밴드모임에서 뮬란대장님 리딩으로 옥천으로 여행을 갔다.아침 휴게소 식당에 유진규의 목련화,쌍곡추경과 이름 모를 작가의 사도해변그림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유진규의 목련화는  냉혹한 시련을 이겨낸 목련화를 고혹적인 향기로 담았다. 쌍곡추경은 신비한 기암괴석과 돌이 반영되는 물가를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매우 놀라웠다. 어부의 고달픈 삶의 그림자로 녹아내린 사도해변이 사색적으로 그려내어 매우 운치가 있었다. 버스안에서 은비님이 호두과자를 주어 감사했다. 비좁은 산고개길을 지나 부소담악에 도착했다.부소담악은 부소무니 마을 앞 물위에 떠있는 산이라 하여 부소담악이라 불리고 있었다. 물 위로 솟은 기암절벽(병풍바위)의 길이가 700m펼쳐지는  절경으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소금강이라 이름 지어 노래했다.부소담악은 처음부터 물가 절벽이 아니었다. 본래 산이었지만 대청댐 사업으로 말미암아 산 일부가 물에 잠겨 물 위에 바위병풍을 둘러놓은 듯한 풍경이 되고 부소니마을은 수몰되었다. 입구부터 테크로드로 철쭉,불두화,모란,찔레꽃이 향기를 발하며 정겨웠다.산이 물에 반사되며 비추었다. 언덕의 추소정 정자로 물 위로 솟은 기암절벽(병풍바위)이 펼쳐졌다.강 중앙에 펼쳐지는 병풍바위의 산들이 호수에 떠있듯이  비추었다. 날카롭게 솟은 바위와 추소정아래로 이어지는 길은  협소한 아찔한 낭떠러지로 폐쇄되었다.사진과 다른 모습과 부소담악길을 끝까지 갈수가 없어 몹씨 실망하였다. 부소담악  테크로드를 지나 산봉우리가 드리운 별장같은 마을로 산이 물위에 반사되는 호수가 펼쳐지며 사색적인 정취를 자아냈다.식당가는 길로 호수가 비추었다. 방아실 촌 돼지명가에서 점심을 삼겹살구이를 먹었는데 나혼자만 대장님에게 부탁하여 된장찌게를 먹을 수 있었다.팽이버섯,느타리버섯,고기,두부,고추,파가들어간 된장국으로 버섯과 고기육수가 조화를 이루어 감칠맛 있었다.일반적으로 구수한 맛이 아닌 진한 된장맛이 감도는 맛으로 이 집만의 특색있는 된장을 담고 있었다.매우 찰진 밥으로 너무 맛있었다. 달큰하고 시원한 김치로 상추와 함께 입맛을 돋구었다.밥과 상추,김치를 먹으면 먹을수록 감칠맛으로 힐링되었다. 동치미,양파간장무침,마늘쫑무침으로 조미료와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천연벌꿀 사용으로 담백했다.즉 천연 조미료를 사용하는 힐링 건강식당이였다.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 천상의 정원에 갔다.천상의 정원이라  불려지는 수생식물학습원은 충청북도 민간정원 10호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위의 정원으로 알려져 있었다.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위의 정원으로 불리는  풍경 좋은  정원에 선정된 곳이였다. 입구의 좁은문을 지나니 서구 정감의 정원들이 펼쳐지며 설레이게 했다.흑색 황강리층 변성퇴적암을 이룬  바위정원이 신비롭게 비추었다.이 지역 일대는 아주 오래전 바다였다.원생대 말에  퇴적되어 변성된 문주리층,금강석회암층,황강리층 등이 기반을 이르고 있으며 중생대 쥬라기 말에 관입한 화성암류인 유성화강암과 백악기 말에 관입한 각종 맥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이 지역에 잘 발달된 흑색황강리층은 석회암, 점판암,편마암 등의 각종 자갈이나 각력을 함유한 해저 사면의 암설류가 붕괴,퇴적,변형,변성되면서 흑색변성이질암  또는 석회질함력천매암이 되었다.옥천 변성대 안에 자리잡은 이 지층은 옥천대의 지질역사,지층 형성 순서 및 지질 구조변형사 연구에서 소중한 지질 자산으로 매우 중요한 지질학적 가치를 지닌 것이였다. 바위정원을 바라보며  큰 잔디밭으로 매우 싱그러웠다. 꽃길의 테크길 따라 천상의 바람길로 금강 대청호가 매우 아름답게 비추었다.유려한 산봉우리들이 호수위로 펼쳐지는 저! 아름다운 경치가 바위 언덕에서 교회당까지 계속 펼쳐지며 매우 낭만적이였다. 아름다운 정원에 둘러싼 카페 더 레이크,달과 별의집이 서구의 동화나라처럼 비추었다.호수를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당이 매우 운치가 있었다.천연계와 십자가의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예배당으로 매우 진귀했다. 교회당 앞에는 신앙간증이 적혀 있었다. 원래 이곳은 나무가 울창한 곳이였는데 아래길에서 낙엽을 긁어모아 태우다가 불길이 거세게 확산되었다. 타오르는 불길에서 예수님이 나타나 큰불이 점점 한가운데로 모이더니 꺼져 버리고  즉시 예수님이 사라지고 대상포진의 통증과 기관지 천식이 모두 치료되는 김준영 장로님의 체험이 적혀 있었다.예수님이 나타나신 바로 이곳에 교회당을 세운 것이였다.즉 매우 아름다운 금강 대청호를 바라보며  신비로운  바위와 하나님 사랑이 깃든 교회당의 매우 환상적인 호수위의 정원이였다.교회당을 지나  산길로 호수를 품은 숲속길이 이어졌다.산길을 등지고 큰 잔디밭에서 사진을 찍어 주셨던 뮬란대장님,정다운 작가님,여러 회원들과 합류하여 언덕 내리막길의 바람길 정원으로 향했다.갖가지 봄꽃이 매우 탐스럽게 피어난  실내정원,천연 기념물 앵무새,바람길 정원으로 매우 화사했다.다같이 꽃내음에 흠뻑 취하며 사진촬영에 모델이 되었다.돌담위에 고개를 내민 달과 별의 집이 서구의 성처럼 비추었다. 자연 그대로 이용한 정원과 꽃밭으로 자연 친화적인 수목원 같았다.이와같이 천상의 정원은  금강 대청호를 배경으로 흑색 황강리층 변성퇴적암,예수님이 나타나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유럽풍 건축물과 자연 친화적인 정원,각종 수생식물과 지천에 피어나는 야생화 그리고 푸른 하늘,푸른 산, 푸른 호수가 어우러져 내면의 깊은 쉼을 할수 있는 치유의 정원이였다. 천상의 정원을 갔다와서 아이리스님이 고구마말림을 주어 감사했다.뮬란대장님의 배려로 여행공지에 없던 정지용문학관육영수생가에 갔다. 향수5길로 평온한 시골마을 같았다.1902년 옥천에서 출생한 정지용은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휘문고보에 다닐 때부터 습작활동을 시작하여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만든 교내 잡지 "요람"에 참여하였다.1919년 "서광" 창간호에 단편소설 "삼인"을 발표하였다.1922년 "풍랑몽"을 쓰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시문학,구인회 등의 문학 동인과 가톨릭 청년 문장등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휘문고보 교원을 거쳐 해방후에는 이화여전 교수,경행신문 주간,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 인민군에 의해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어 이후 남북되어 그해 9월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행적은 알수 없다. 시집으로 "정지용시집","백록담","지용시선"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문학독본","산문"이 있다.천재적 기질과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향수","고향","호수" 등 주옥같은 명시를 발표하였고 120여 편의 많지 않은 작품들이지만 시골(전통)과 도시(근대),동심(동요)과 구언(종교사),바다(이미지즘)와 산(동양 정신) 등이 빛나는 언어로 완성되어 있다. 절제된 감정과 사물에 대한 정확 묘사 그리고 섬세한 언어 감각으로 빚은 시편들을 통해 그는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하였다.정지용 생가옆  문학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정지용문학관

당시 문학흐름과 시대적 상황,지용의 일대기가 나란히 열거되었다. 당시 문학의 흐름은 1910년대 최남선등 "조선광문회"조직하여 고전을 간행 운동을 하였다.김억 등 "태서문예신보" 창간하여 상징주의 이론을 소개하였다. 1920년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천도교 게열 종합지 "개벽"에 연재되었고 월간지 "조선지광"은 프로레탈리아 문학을 지향하는 문인들이 주로 참여하여 창간하였다.1924년 이광수,염상섭,김소월 등이 참여한 "조선문단" 창간과 1925년 박영희,김기진,최학송 등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결성으로 신경향파 문학운동을 일으켰다.1931,1934년 카프사건으로 1930년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원 피검하였다.1934년 최재서와 김기림 등이 주지주의 문학운동을 시작하였다.1935년 카프가 해제되었다.1940년대는 조선일보,동아일보,문장,임문평론이 폐간되고 1942년 민족운동 혐의로 조선어학회 회원에 대한 대검거가 시작되었다.1945년 "조선문학동맹"이 결성되고 1946년경향신문,조선중앙일보가 창간되었다.카톨릭 신자인 지용의 삶과 문학은 네갈래로 나뉘어 졌다.

첫째 향수로 정지용 부친은 중국 등지를 전전하면서 익힌 한의학으로  약국을 경영하며 여유있는 생활을 하였으나 어느 해 여름 홍수의 피해로 집과 재산을 잃고 경제적으로 무척 어렵게 되었다.1913년 12살에 결혼해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정지용은  휘문보고와의 인연은 깊었다.1918년 17세에 휘문보고에 입학해  "요람" 동인을 결성하여 문학적인 정열을 불태웠다. "문우회" 활동에도 참여하고 "휘문"지 창간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919년 첫번째 소설 "삼인"을 "서광지" 창간호에 발표했다.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정감을 초가 작품의 주된 소재로 삼고 있다.그의 삶과 문학에 있어서 휘문보고와의 인연이 각별했다.5년 동안의 학생시절, 일본 유학비용을 부담한 학교, 귀국 후의 교사 생활  등 49년 그의 생애 중 27년을 휘문과 함께 했다.그 세월동안 문학 습작을 시작했으며 새로운 문물과 문학 이론에 눈을 떴고 문학의 동반자들을 만나 새로운  시운동을 주도했고 그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완성했다. 그가 고향을 떠난 시기는 일제의 억압으로 농촌 붕괴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1918년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면서 농민들은 농토를 빼앗기고 고향에서 쫓겨나야 했다.경부선은 착취의 동맥이 되었으며 농민들은 도시로 만주로  연해주로 떠났다. 그에 따라 민중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뼈아프게 느끼며 살아가야 했다. 정지용의 향수는 이미 고향을 잃어버린 많은 우리 민중들의 정서였던 것이였다.둘째 바다와 거리(청춘은 나의 조국)로 유학시절 1926년부터 공식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해 그의 시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이 시기 그의 시적 재능이 인정받기 시작하여 "학조","조선지광","신민"등의 잡지에 수준 높은 작품들을 많이 발표하였다.시인으로서의 출발과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시기였다.도시샤 대학에서 정지용은 서구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특히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심취해 블레이크의 시를 다수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였다.동경 유학 중 바다에 몸을 얹고 생동하는 바다와 만나 심취했다.그로부터 28살 때까지 정지용은 6년이 넘는 기간을 현해탄을 건너서 고향에 오곤 했다. 이미지즘의 특성을 지닌 정지용에게 바다는 시각적으로 강력한  인상으로 달려든 동영상으로 바다에 관한 많은 시를 썼다.  일제 강점기 지식인으로  민족에 대한 정신을 감상주의자로 차가운 이미지로 담담하게 그렸다.세 나무와 산으로 종교적 신앙과 성신의 구원에 적극 참여하였다. 현대시사에서 만해 한용운이 불교시를 썼으면  정지용이 독실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시편을 꾸준히 발표하였다."시문학"동인으로 한국 현대시사에서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이제까지 전통적인 언어관에서 벗어나 시어에 대한 현대적인 인식이 이 시기부터 싹떴다. 이제 시는 영탄조의 청각성에서 벗어나 회화적이며 시각적인 형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언어의 작업이 바로 민족 언어의 완성이라는 높은 차원의 의미를 획득하였다. 동인으로 정지용을 비롯해 박용철,김영랑,이하윤,신석정, 김현구 등이 있었다.1930년대 한국시단은 정지용에 의해 주도될 만큼 문장지 심사위원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첫 시집 이후 1930년 후반부터 1941년까지 산을 중심으로 자연을 소재로 시화한 시를 여러 편 썼다. 기행산문과도 관련이 있는 우리의 산야를 기행하던 시기에 쓴 것들이다. 번잡한 세속의 거리를 벗어나 동양적인 고고한 정신 세계를 보여준다. 차분한 마음으로 자연을 관조하며 시를 훨씬 원숙한 경지로 끌어올렸다. 날카로운 언어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무위자연의 세계를  그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전달하였다. 그리고 상당수의 시편들이 산문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시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측면이 되고 있다.카프는 조선프로레탈리아에술동맹 영어 약자로 문학 자체의 순수성보다는 사회 변혁과 무산계급혁명이라는 목표 아래 문학 행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반해 "구인회"는 1933년 반카프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을 옹호하자는 취지로 발족한 문학공호인 들의 모임이였다. 이들의 활동은 우리 현대문학사에 모더니즘을 도입해 문학적 완성도를 높였다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그리고 이들 구성원들이 시와 소설, 희곡,평론  등 각 문학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는 측면에서도 문학사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네째  산문과 동시로  유년시절 추억과 유학시절,카톨릭 신앙이 담겨져 있다.8.15해방 후 정지용은 시보다 산문 활동에 주력하여 우리 민족 앞날을 걱정했다.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그해 7월 그의 집을 자주 드나들던 젊은 문인 4~6명이 찾아와 한참을 이야기하다 그들과  함께 나간 뒤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남북되어 처형됬다는 소문만 무성한 채  분단의 비극과 함께 천재시인의 최후가 되었다. 

 

매우 아담한 정지용 문학관과 함께 중앙으로 연못이 흐르는 돌다리의 정원으로 매우 정겨웟다. 1970년대 양식의 적벽돌 벽체 양옥의 카페와 마주보며 초가집의 정지용의 생가가 있었다.박창석,윤석빈,박정춘이 제작한 소위에 피리를 부는 소녀의 동상과 함께 우물,봄꽃등이 초가담장에 드리우며 고즈녁했다.정지용 생가를 지나  맞배지붕과 함께 흰벽체양식의 엄마손 칼국수,페인트색칠을 한 주성인테리어,기와집과 함께 황토벽체를 이룬 "ㄱ억자"형 전통문화체험관 화장실양식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전통문화체험관길 따라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보호수가 매혹적인 향기를 발하며 드넓은 연꽃연못이 펼쳐졌다.구읍지역으로 옥천군 관아가 있던 곳으로 교동리 비석군이 보존되어 있었다.향교의 홍살문과  연못을 지나 육영수 생가가 자리잡고 있었다.조선시대부터 옥천의 중심지임을 보여주고 있었다.육영수생가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로 육여수여사가 1925년에 태어나 1950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 까지 살았던 흔히 교동집이라 불려졌던 옥천지역의 명문가이다. 1600년대부터 삼정승이 살았던 집으로 1894년에 전형적인 충청도지역 상류쥬택의 양식으로 축조 되었다.그 이후 1918년 육영수여사의 아버지 종관씨가 매입하여  건물의 기단을 높여 개축하였는데 각기 독립된 아랫집, 큰집,윗집 사당영역으로 구획하고 담장,협문, 부속건물로 적절히 배치하였다. 1969년 본래의 모습과 다른 현대식 한옥으로 개축하여 사용되어오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퇴락 되었고 1999년 철거 되었다. 2002년 생가터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  복원공사를 시작 하여 완료하였다.육영수여사는 어린이를 위한 육영재단을 설립하고 양지회등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자선활동을 하였으며 대통령의 훌륭한 내조자이자 한국의 어머니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생가 안으로 들어 가기전부터 하늘높이 우뚝솟은 초목이  황토기와담장으로 드리우고 목재대문양식을 이룬 아래 대문채로 운치가 있었다.대문에서 들어오자 마자  앞마당으로 정원이 있는 사랑채가 마중을 하였다.사랑채는 주로 귀빈대접 등에 사용되었으며 박정희 대통령 방문 시 임시 집무실로 사용되었다.사랑채 마루로 한복을 입은 육영수여사의 대형사진으로  목련꽃 같은 한국을 대표하는 어머니상으로  빛났다.초등학교시절 방송매체에서 보았던 육영수여사의 모습을 되새길 수 있었다.사랑채옆으로  수생식물인 수련과 창포가 자생하는 연못으로 연당사랑이 마주하며 카리스마스 자태로 압도되었다.연당사랑은 연못의 후면에 배치되어 연못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기기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팔작지붕과 함께 3칸의 규모로 전면에 마루가 구성되어 있었다.연못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으로 비추었다.지금까지 봤던 옛 양반가옥의 정자중  제일 아름다웠다.황토기와 담장이 장식된 안채 마루로 육영수여사의 일생을 볼수 있는 사진들과 함께 육영수여사를 떠나 보내고 적은 박정희 대통령의 글이 장식되며 정겨운 역사 현장 같았다. 안채마루와 마주보며 돌담위의 장독대와 함께 돌계단위 사당으로 매우 운치가 있었다. 위채를 지나니  대나무에 드리운 사당을 마주하는 드넓은 언덕자락의 돌계단으로 황토기와담장과 협문이 펼쳐져 재벌의 비밀의 숲 같았다.협문으로 가는 언덕길로 주위 마을경치들이 펼쳐지며 가슴이 확 트인 기분 같았다. 협문을 지나 잔디마당과 함께 정자가 있는 언덕으로 별장 같았다.사당의 뒤쪽으로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사과나무,밤나무,배나무,포도,자두 등 각종 과일을 재배하였던 과수원 안쪽에 배치된 정자는 1칸 규모의 초가로 육영수 여사가 어린시절 알밤을 줍던 추억의 장소였다.육영수여사의 아버지 육종관씨가 사용하시던 영사기,뒤주,대형 연자방아,석빙고,우물로 그 시대 재벌의 위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즉 20세기초 명문가 재벌의 대저택 위력을 보여주는 환상적인 곳이였다. 

유진규~목련화
유진규~쌍곡추경
휴게소에서
찔레꽃
모란
불두화
부소담악
방아실촌 돼지명가
천상의 정원
천상의 정원~카페
정지용생가
정지용문학관앞
정지용문학관 복도
1
정지용문학관
육영수여사 생가가는 길
육영수여사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