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숙,손란원장님과 함께 수원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효성초등학교 교문에서 만났다. 따쓰한 햇살이 내리 쬐는 봄의 향기를 맡으며 청렴한 하늘 햇살이 창가로 반사되어 푸르게 빛나는 "광교 센트럴 비즈 타워" 맞은편에 이르니 매우 아담한 언덕 도로길에 "수원성당"과 "수원외국어고등학교"와 함께 "수원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언덕 초입부터 정원에 둘러싸여 명상하는 "수원성당"이 마당의 돌계단 위로 성당별관과 함께 숲속의 별장처럼 정겹고 아늑한 보금자리 처럼 고요하게 빛났다. 짙푸른 소나무 가로수길 따라 명문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는 "수원외국어고등학교" 교문 맞은편으로 "수원박물관"이 숲속의 전원공간 처럼 우뚝서 있었다. 즉 4계절마다 색다른 정감을 자아내는 전원마을 언덕길 같았다. 박물관 정문 언덕부터 조선시대 수원 관찰사를 지낸 선정비등...야외 유물들을 전시하며 문화 산책길을 이루었다. 야외공연장을 바라 보며 회색빛의 박물관과 함께 좌우로 화강석 계단 사이 등성이가 솟은 잔디언덕을 지그재그로 화강석 조각상을 장식하며 잔디길을 형성하여 매우 귀중한 우리문화를 간직한 보고로 위용을 자아냈다. 지금까지 본 정원 중 매우 독특한 정원길로 고즈녁한 문화향기로 매혹 되었다. 위용있는 잔디길을 지그재그로 거닐며 박물관앞 정원의 경치와 주변 광교도심들의 경치가 펼쳐져 마음이 확 트일 정도로 너무 상쾌했다. 박물관 출입문앞은 건물 사이로 굳은 정절를 표상하는 싱그러운 대나무 장식과 광대한 하늘과 햇살이 빛나는 "ㄷ자형" 건축을 중심으로 잔디를 이루어 저절로 힐링이 되는 기분 이였다. 즉 박물관 내부로 들어 오기전 부터 심신을 맑게 정화해 주는 아이디어로 건축가의 배려가 느껴지는 공간 같았다. 2증 서예관에서 조선서예 500년을 되돌아 보는 "서풍만리"라는 주제로 서예역사 흐름을 알수있는 서예 전문 전시관이 있었다. 중국의 한자가 사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상형문자로서 회화성을 지녀 문자가 예술의 한 분야가 되었다. 글씨와 그림의 뿌리는 같다는 "서화동원" 개념으로 한자는 그림으로 시작하여 점차 기호로 변화 발전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서예"라는 독창적인 예술 분야가 탄생되었다. 중국 고대 역사의 시작인 하,은,주시대 서예 기원이 시작 되었고 한과 진나라때 이르러 서예가 예술로 승화 되었다. 당나라 이후 명필들의 개성 넘치는 서체가 대거 출현하는 화려한 서예문화를 창출했다. 즉 중국 왕희지를 비롯해 안진경,구양순,조맹부등의 서법이 서예예술의 경지에 이르러 우리나라와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암석에 새긴 그림인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나라와 시베리아,몽고,동북아시아 대륙,중앙아시아,중동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표현 대상 전부를 쪼아내는 "면쪼기" 기법과 그 윤곽만을 쪼아낸 "선쪼기" 기법으로 새겨진 것으로 우리나라 조각이나 그림의 초기로 문자가 일반화 되기 이전에 사람들의 생각을 나타낸 것인 글씨의 출발이였다. 한자 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중국서법을 수용하여 서예가 시작되어 통일신라시대 이를 발전시켜 고려시대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즉 삼국시대 이래 서예를 자기화시켜 서채별,서풍별,시기별로 다양한 서예를 발전시켰다. 특히 조선시대는 법고창신의 가치 아래 고법을 연구 학습하고 이를 토대로 새롭고 다양한 서풍을 자기화 시키고 창안해 내어 우리만의 고유색을 한껏 발현된 독창적인 서예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조선의 서풍은 만리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고려말에 유입된 조맹부의 송설체 영향으로 조선초에 여러 서체가 혼용되었지만 신진 성리학자 중심으로 부드럽고 유려한 "송설체"가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이 개국하자 태조(1335년~1408년)의 어필을 시작으로 이들 중심으로 송설체가 나라의 글씨로 자리잡아 가게 되었다.특히 "안평대군"은 20대에 이미 자기만의 예술세계로써 송설체에 능숙하였고 세종,집현전 학자들,문종도 이를 따라 하였고 성종에 이르러 완전히 조선에 정착하였다. 이러한 흐름속에 김구는 "왕희지 서체"를 익혀 이루었고 송설체의 유려한 맛을 덜어 낸 기품을 더하는 서예를 이루었다. 조선중기에는 고려말에 들어온 송설체가 조선초기 정착단계를 지나 완전히 토착화되어 "송설체인 촉체"로 변모되었다. 그리고 송설체의 부드러운 멋을 제거시키고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강경하고 단단한 "석봉체"가 등장하였다. 또한 왕희지체를 완전히 소화하여 "동국진체"라는 고유색 짙은 서체를 탄생 시켰고 조선 명가가 출현하여 "양송체"가 형성되었고 금석학 연구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조선후기는 위진고법과 송,명,청대의 서예를 수용해 발전시키고 백하 "윤순"의 뒤를 이은 원교 "이광사"가 "동국진체"를 완성하고 촉체와 함께 조선 고유색을 완전히 드러내자 조선 사회를 크게 풍미하였다. 청조 고증학의 부속 학문인 금석학이 발달하고 비학이론이 전해져 오던 시기에 추사 "김정희"가 등장하여 고증학을 바탕으로 비학파의 혁신적인 서법이론을 주장하며 "추사체"를 창안하여 서풍이 크게 변화되었다. 추사의 지인과 제자들이 뒤를 이어 추사체를 추종하였지만 정수를 체득하지 못했다. 구한말에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조선이 망하자 순국한 "심석재","송병순(1839년~1912년)"글씨가 중심을 이루고 자아 상실과 전통 단절을 겪으며 더 이상 서예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주자성리학을 지키며 망국의 울분을 달래던 유학자들에 의해 조선 선비 서법만이 겨우 명백을 유지했다. 구한말에서 광복 이후 다양한 서풍들이 보여주는데 추사의 말년제자 소치 "하련"을 비롯하여 "정학교","김성근","김가진"등은 조선후기 이래의 전통적인 서풍을 구사하였고 "안중식","오세창","김돈희","이한복"등은 중국 서풍이 좀 가미된 양상을 띠었다. 그외 독립운동가 "조소앙"과 특유의 한글체를 창안했던 "손재형"등은 강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임금이 지은 어필(어제)은 임금의 권위가 절대 신성시 되는 존승의 대상으로 인식되며 가족이나 궁궐 전각의 현판,선대 임금과 충신의 비문등...을 썼다. 역대 임금의 서풍은 조맹부의 송설체가 가장 애호 되었고 왕희지의 진체를 이상적인 글씨로 인식되었고 옛 명필이나 선왕들의 서풍을 따르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서예의 시대별 서풍흐름을 사진을 찍으며 수집한 후 전시관안에 조선시대 사랑채를 장식한 마루에 앉아 휴식을 하였다. 박물관에 전시된 서예작품들과 함께 옛 선비들의 문화가 느껴지는 공간으로 맑은 정신과 건강한 육체가 합일하도록 끓임없이 심신을 단련하여 서예의 아름다움의 문자예술의 극치를 이루어 낸 우리전통 서예의 아름다움 향기로 마음의 평화가 가득했다. 즉 전시회 작품들의 감상과 함께 우리고유 문화 향수로 승화되도록 장식한 인테리어가 매우 인상적이였다. 사랑채에서 휴식을 취한 후 매,난,국,죽의 은은한 풍모와 변치 않는 절조를 나타내는 사군자와 어부도,신선도,파교 심매도의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명상에 이르는 동양화 작품에 동화되며 문방사우의 아름다운 조각장식들을 감상하였다. 서예관 작품들을 모두 감상한 후 복도로 나오니 맑은 햇살이 비추는 창가로 일본풍 분위기의 대나무가 우뚝솟고 창가 아래로 "ㄷ자형" 박물관 전경이 잔디와 함께 펼쳐져 마음이 상쾌했다. 즉 문화감상을 통해 누적된 피로를 해소할수 있도록 정원을 장식하고 설계된 공간으로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복도에서 휴식을 취한 후 역사관으로 들어 갔다. 수원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곳이였다. 선사시대 수원은 동물의 뼈나 뿔을 거칠게 다듬은 연모와 뗀석기를 사용하여 사냥과 채집생활로 식량이 풍부한 곳을 찾아 옮겨 다니면서 동굴이나 강가에서 살았다. 신석기시대는 물이나 식량이 풍부한 강가에서 주로 생활하며 움집을 짓고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옷을 만들었으며 사냥과 채집,고기잡이들을 하면서 살았다. 간석기와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며 농경 및 정착생활을 하였다. 청동기시대는 금속기가 처음 등장하고 주로 간석기나 민무늬토기,구멍무늬토기등을 사용하였고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지으며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초기 철기시대는 중국 연나라와 교류로 거푸집으로 만든 철기가 보급되면서 시작된 시기로 청동기시대의 비파형동검은 점차 가늘고 길어져 세형동검으로 변화하였고 토기는 원형덧띠토기가 새로 등장하였다. 원삼국시대는 청동기와 고인돌이 사라지고 두드려 만든 철기가 널리 사용되는 등 철기 생산이 더욱 본격화되었다.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보다 단단한 토기가 사용되었고 새로운 토기 제작 기술이 도입되어 두드림무늬토기가 만들어졌다. 수원은 475년 고구려때 매홀군 설치로 시작하여 553년 신라때 신주(수성군)설치,757년 통일신라시대 수성군 설치,고려시대 940년 태조23년에 수주로 승격,1271년 원종12년에 수원도호부 승격,조선시대 1395년 태조4년 수원부 경기좌도로 편입되었다. 본래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5~6호였던 수원의 본격적인 도시 성장은 1789년 정조13년 수원부 읍치 이전하고 화성건설로 화성으로 개칭됨으로써 성장하였다. 1793년 정조17년때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정조실록 권39 1794년1월15일 기록처럼 몇년이 안되어 큰 도회지인 대도시로 성장하여 수원 유수부가 되었다. 서울에서 뻗어나오는 도로를 연결하여 상업활동을 원활하게 하는 교통 중심지가 되고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농업과 상업이 발달함으로써 일거리를 찾아 유입하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여 서울에 버금가는 도시로 성장되었고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후 1896년 경기도 수부로 도청소재지,1914년 수원군 설치,1931년 수원읍 승격,1949년 수원시로 승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수원의 근대거리를 드라마 세트장 같은 장식으로 재현되어 전시관의 활력을 주었다. 즉 우리나라 옛 선조들의 자연을 이용한 의,식,주,예술문화와 조선시대 정조의 신도시 건설로 발전된 수원의 문화를 알수 있었던 역사관 이였다. 역사관에서 나오니 복도 창가로 화성모형의 정원을 이룬 마당이 펼쳐지고 박물관1층 복도문으로 나가니 푸른 하늘 햇살이 반사되는 유리창으로 장식된 박물관 건축에 둘러싸여 언덕 숲속과 화성모형 정원이 펼쳐졌다. 즉 2층 역사관 복도와 1층 복도문 밖에서 볼수있는 정원으로 피톤치드 향기로 가득했다. 박물관에서 나와 출입문앞 언덕 잔디에 앉아 김광숙,손란 원장님이 가져 오신 생강차,귤,미숫가루차,과자를 맛있게 먹었다. 간식을 먹고 호기심에 박물관 커피숍 부근으로 갔다. 높은 언덕자락 돌계단으로 경기대 캠퍼스와 이웃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수원박물관은 박물관으로 향하는 정겨운 언덕길로 부터 문화산책길 정취를 자아내는 정원,귀중한 문화 보고의 고즈녁한 향기의 잔디언덕,출입문앞 피톤치드 가득한 건물구조와 장식,전시관 내부의 우리고유 문화 향수 인테리어,복도 창가에 비친 건축과 정원,담소와 안락할수 있는 쉼터로 건축가의 신선한 아이디어로 승부한 지금까지 본 박물관 중 최고의 건축예술을 이루었다. 건축,자연,문화 합일체로 심신 정화와 힐링으로 군데 군데 건축가의 세심한 배려와 합리적인 설계가 느껴지는 공간으로 카타르시스가 넘쳤다. 박물관에서 봉녕사 후문으로 걸어가 우리동네 이르러 "bc800"커피숍에 갔다. 100프로 사과쥬스와 블루베리쨈 빵을 김광숙 원장님이 대접해 주었다. 고소한 버터와 단 초코,블루베리쨈,생크림이 혼합된 아주 부드러운 빵을 맛있게 먹으며 즐거운 담소를 한 후 다음 모임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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