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향했다. "남수문"에 이르니 "팔달문" 기준으로 미복원 성벽 푯말이 붙어 있었다. 남수문에서 팔달문 동쪽으로 이어진 구간으로 "남암문"과 "남공심돈"이 있었다. 비상시 출입구인 "남암문"은 축성 당시부터 문 바깥쪽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고 남암문에서 약 36m 떨어진 곳에 성밖을 살피는 망루인 "남공심돈"이 있었다. 이 구간은 1920년대 도로를 넓히기 위해 철거된 후 복원되지 못했던 것으로 일제시대 사진의 기록만 침묵하고 있었다. "매향교"를 건너 "수원화성박물관"에 이르니 정교하고 생동감 넘치는 정조대왕 태실 장식과 역대 수원감찰사로 일했던 선정비,화성 축조시 사용했던 유형거,거중기,녹로를 정원에 장식하며 문화 산책길을 이루고 "동북공심돈"의 수원 화성을 본따 건축한 박물관이 화성 문화재 보고로 위용을 간직하며 2009년 한국 건축 문화 대상의 작품을 뽐내고 있었다. 박물관 복도부터 단풍이 물든 팔달산을 바라 보며 "봉돈"의 아름다운 성곽 사진이 싱그러운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예술작품을 이루고 있었다. 수원화성은 동.서양 군사시설 이론을 잘 반영하고 방어기능이 뛰어난 성곽의 꽃으로 성곽조형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이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러한 화성 신도시를 건설한 정조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시킨 개혁정신과 노력을 알리기 위해 화성박물관이 건립 되었다. 1층 "기획전시실"에서 정조대왕 서거220주년 기념 "융,건릉 원찰 수원 화산 용주사 기념 사진전"으로 아버지 지극한 효심의 역사적 의미와 재조명으로 100년전 사진엽서부터 최근까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조는 왕위에 즉위하지 마자 반역죄로 죽은 생부 사도세자 왕위 정통성을 복권시키고 왕위계승 정통성 확립하기 위해 사도세자 추숭사업 추진하고 왕권강화를 확립했다. 수원부 화산으로 1789년 "현륭원(융릉)"을 옮기고 이를 보호하고자 신도시 수원을 건설하며 1790년10월 융릉의 재궁으로 사도세자 명복을 비는 국왕이 창건한 왕실 원찰로 "용주사"를 건립하였다 .국왕의 지휘 아래 궁궐관아 건축양식과 왕실의 전목적인 지원으로 왕실에서 제작한 각종 물품 과 정조가 지은 화산 용주사 봉불기복게(1795년)가 하사 되었다. 1789년 체제공이 쓴 용주사 상량문 중에서 수원은 용처럼 형체의 기세가 신비롭게 변화하고 구불 구불 꿈틀거리며 황홀하게 하늘 끝까지 다다라 임금자리 용이 하늘에 있는 형세 닮았고 산이 빛난다고 할 정도로 화산은 매우 아름다운 곳이였다. 1789년(정조13년) 정조는 현륭원을 배알하고 일어 나지 못할 정도로 눈물을 쏟으며 탄식하였다. 그후 1800년1월 화산을 아름답다 이 산이여!... 감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1800년6월28일 정조가 승하 하였다. 이 또한 하늘의 뜻인걸 어찌하리!...신하들이 탄식하며 평소 소원대로 아버지곁에 묻혔다. 정조의 건릉의 석물은 구성,규모,문양,조각수법이 생부 융릉의 석물과 유사하다. 정조승하 후 정조 명복을 기원하는 기능과 함께 효의왕후,혜경궁홍씨의 명복을 기원하는 조선후기 최대 규모의 왕실원찰이 되었다. 그후 오늘날에 와 호성전과 홍살문을 재건하고 사도세자 기신제 되살리며 정조 뜻 본받아 효행박물관을 건립하였다. 즉 화산의 "현륭원(융릉)"과 "용주사"는 아버지 한을 평생 간직하며 아버지와 함께 극락에서 꿈을 실현하는 정조의 통곡소리 결정체였다. "기획전시실"에서 나와 2층 전시관으로 올라 갔다. 회색벽돌로 이룬 내부로 둥글게 타원을 그리며 계단을 형성하고 옥상 천정 유리창으로 햇살이 비춰 쾌척했다. 2층 전시관은 "화성축성실"과 "화성문화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화성의 축성과정을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화성축성실" 전시관으로 들어 갔다. 들여쌓기의 일본 히메지성,벽돌쌓기의 중국 평요고성,유럽 최강의 요새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에 있는 르네쌍스양식의 크론보르성,우리나라 성인 벽돌로 쌓은 강화외성,석재로 쌓은 삼년산성,흙으로 쌓은 풍납토성들의 양식등 사이에 화성은 일본과 중국의 장점을 결합하여 만든 건축 결정체였다. 사도세자 무덤을 수원으로 이전할 때 한강을 건너기 위해 배다리를 설계한 정약용이 성리학,토목학,건축학을 공부하고 실학의 완성자로 기존의 조선의 축성술을 총망라 하고 중국과 일본 성곽 장점을 참조하여 축성의 편리한 시공과 기술자의 안전성과 효율성,축성 비용 절감효과로 거중기,유형거등 여러가지 기구들을 설계하였다. 명나라때 중국에 들어 온 선교사 요한네스 테렌츠가 지은 "기기도설"이 참고가 되어 거중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거중도설"에 싣고 "성설","옹성도설","포루도설","현안도설","누조도설","총설"등에 화성축성 글을 실었다. 화성을 축조하는데 팔달산,여기산,숙지산에서 석재를 이동하고 벽돌은 백문동 가마,서봉동 가마,북성밖 가마에서 조달하였다. 목재는 화성시 비봉면 구포 항구를 통해 수원으로 유입되었고 수원화성 축성에는 석재를 올리고 내리기 위해 사용된 거중기와 녹로, 운반도구인 유형거,동거와 평거등과 같이 다양한 축성 과학기구가 사용 되었다. 공사 책임자는 영의정 채제공으로 건설 감독관은 조심태 지휘하에 성역소를 두어 현장을 관리 감독하고 성과급제,공사실명제를 시행하여 1794년1월에 시작하여 2년9개월 만에 1796년 공사가 완공되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비문이 쓰여 있는 "화성기적비"가 말해주듯 왕의 효도와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는 인자함과 만물에 두루 베푸는 지혜가 담긴 화성역사의 신도시가 건설되었던 것으로 1796년10월16일 화성행궁 낙남헌에서 수원화성완공축하 잔치로 백성들까지 참여하여 음식,춤,음악으로 흥겨운 잔치인 "낙성연"이 베풀어 졌다. 본래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5~6호였던 수원의 본격적인 도시 성장은 1789년 정조13년 수원부 읍치 이전하고 화성건설로 화성으로 개칭됨으로써 성장하였다. 1793년 정조17년때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정조실록 권39 1794년1월15일 기록처럼 몇년이 안되어 큰 도회지인 대도시로 성장하여 수원 유수부가 되었다. 관청은 동향이고 도로도 남북방향을 주 도로로 하는 십자형 길 생성하는 지형으로 서울에서 뻗어나오는 도로를 연결하여 상업활동을 원활하게 하는 교통 중심지가 되었다. 정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농업과 상업이 발달함으로써 일거리를 찾아 유입하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여 서울에 버금가는 도시로 성장되었고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와같이 정조업적은 그의 생부이신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바탕으로 한 왕권강화로 정치인생의 업적을 볼수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776년 3월10일 왕으로 즉위하여 영조의 죽은 아들인 효장세자 아들로 입적 되었던 자신을 사도세자 아들이라고 공표하여 사도세자 정통성 복권을 위한 준비와 왕위 정통성 문제를 사전에 처단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를 시작하였다. 1776년 3월20월 생부이신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고치고 수은묘인 무덤을 영우원,사당을 경모궁으로 칭하였다. 1776년9월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로 당파간의 쟁쟁을 화합하고자 목표를 두었다. 1788년1월 왕권강화로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1789년7월15일 사도세자 무덤을 화산으로 이전 추진하고 1789년8월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여 화성행궁을 건설하였다.1789년10월 아버지 무덤인 현륭원을 조성하고 참배하기 위해 첫 수원행차를 하였다.1790년2월 현륭원의 재궁으로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왕실 원찰 용주사 창건하였고 6월18일 차남 순조가 탄생하였다. 1791년2월 금남전권을 혁파하고 신해통공을 실시하여 조선후기 상업경제가 활성화 되였다.1792년4월 영남 남인이 사도세자 신원을 주장하는 영남만인소를 작성하였다. 1793년1월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하고 국방기구인 장용영 외영 설치하여 초대 유수 좌의정 체재공을 임명하였다. 아버지곁에서 신도시를 건설하고자 1794년1월 수원화성축성을 시작 하였다. 1795년 윤2월9일~16일 정조는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8일간 수원을 행차하여 회갑연을 열고 수원의 농업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5월 만석거를 준공하였다. 1796년9월10일 수원화성이 완공되어 10월16일 화성행궁 낙남헌에서 낙성연 개최하였다. 1798년4월27일 수원의 농업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만년제와 1799년5월 축만제가 준공되었다. 1800년1월1일 순조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김조순 딸을 세자빈으로 결정하였다. 1800년6월28일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1800년11월6일 평소 정조의 소원대로 아버지곁에 건릉을 조성하였다. 정조의 시문,윤음,교지및 편지를 모은 전집 총184권 100책 "홍재전서"가 전해지고 "화성성역의궤"는 수원화성의 건축 보고서로 정조의 명에 의해 1796년 김종수가 편찬했다. 그가 꿈꾸던 "수원화성"은 오늘날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고 "화성성역의궤"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의 문예 부흥의 대왕으로 그의 발자취는 길이 길이 대대로 문화도시인 수원에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정조의 생부이신 사도세자의 역사적 유물들을 볼수 있었다.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내린 어제정훈과 정치 기본 원칙 10개 항목으로 원대한 꿈을 갖고 대리청정에 임하게 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왕세자의 대리청정기에 내린 그 예가 드문것인 사도세자가 조돈에게 내린 영서로 글씨체가 기발한 필치로 글자예술을 이루었다. 왕의 기질로써 영민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노론과의 당파 싸움속에 정치 희생양이 된 사도세자는 자신의 피값의 댓가로 아버지인 영조의 평탄한 정치인생과 아들인 정조가 왕에 오를수 있었다.!...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의리?..인지 역사의 진실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수 있다. 진실과 원통함이 하늘을 감동했는지 가까스로 사도세자인(장조,장헌세자)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순조가 뒤를 잇고 헌종이 왕이 되었다.그리고 세도정치시대 가까스로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의 후손 인 철종이 마침내 25대 왕으로 등극되고 사도세자 아들 은신군의 아들 남연군의 양자가 흥선대원군으로 그의 아들 고종이 26대 왕으로 등극되고 27대 순종까지 왕의 계보를 이룬 왕의 가계도를 형성하였다. 사도세자 후손들이 대대로 왕가를 이룬 기적같은 하늘의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진것 이다. "화성축성실"을 거쳐 "화성문화실"로 갔다. "화성문화실"은 1795년 정조의 행차와 군사개혁의 핵심인 장용영을 보여주는 공간이였다. 조선후기 수도를 방위하는 중앙의 5군영은 17세기 들어와 오랜기간 무반 가문에 의해 장악되었고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정치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국가 재정 많은 부분을 국방비로 지출하고 있어 국가경제를 어려움에 빠트렸다.이와 같은 현실을 타파하고자 정조는 여러 군영을 통합하여 국방비를 아끼고 군사를 정예화하려는 군제 개혁인 1778년(정조2년)6월 4대 국가 개혁 방침을 선언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왕권강화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5군영의 대장이 병조판서의 지시를 받게 하는 군제 개혁을 단행하고 5군영의 대폭적인 축소와 국방비 감축으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노력을 하였다. 정기적인 무과시험외에 특별 무예시험을 실시하여 뛰어난 무인들을 선발하는 인재양성에 노력하였다. 수원화성은 장용외영 군제가 편성되었고 군사훈련서인 "병학지남"등이 간행되었다. 상무정신에 입각하여 문무를 겸비하기 위해 무예를 연마하는 과정으로 정조는 활쏘기를 직접하여 신하들에게 고풍을 내려 무예를 권장하였는데 특히 수원행차시 신하들과 활쏘기를 여러차례 즐기며 수원에게 특혜를 베풀었다. 그리고 정조는 생부이신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수원행차 행사를 2년동안 계획하여 실행하였다. 수원으로 행차할 수 있는 고개길이 많은 길을 피해 시흥을 지나 군포와 의왕을 거쳐 수원으로 이어지는 길인 "시흥길"을 새로 만들었다. 시흥길은 조선후기 새로운 운송로의 경제 활성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수원행차를 위해 한강을 건널수 있는 최대의 난제인 최고의 배다리를 건설하여 배다리 설계과정인 "주교절목","주교지남"과 "한강주교환어도" 그림을 남겼다. 배다리 건설로 한강을 무대로 활동하는 상업용 선박을 활성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배다리가 완성된 후 마침내 을묘년 1795년 윤2월9일 수원화성 완공을 앞두고 정조는 군복인 융복을 입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하여 7박8일동안 수원행차를 시작하였다.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다함과 동시에 왕실의 경사를 백성들과 함께 나누는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친위세력과 백성들을 결집시키고 왕실 권위를 회복 시키고자 하였다. 약6300여명이 넘는 규모 행렬의 재정능력과 왕권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조선시대 최대 국왕 행차로 정조는 화성에 입성하기 전에 황금갑옷으로 갈아 입고 입성하였다. 원행차 첫 행사로 도착한지 셋째날인 1795년 윤2월12일 새벽 정조는 누이동생들과 어머니를 모시고 "현륭원"에 참배했다. 남편을 떠나 보낸지 33년만에 무덤을 찾은 혜경궁 홍씨는 그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설움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화성능행도 중 봉수당진찬도","홍재전서, 권6 시2"의 역사기록 처럼 1795년 윤2월13일 정조 어머니이신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인 화성행궁의 "봉수당 진찬연"은 국왕의 효심에서 우러난 어머니 장수를 기원하며 그동안 모든 회한을 풀어낸 도성을 벗어난 최초 왕실잔치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도 중 신풍루사미도" 기록 처럼 혜경궁 홍씨 회갑연 다음 날 윤2월14일 정조는 어머니의 은혜가 모든 백성들에게 미치도록 왕실에서 기쁨을 백성들과 함께 하고자 화성행궁 신풍루에서 진휼을 베풀었다. 과부와 고아,자녀가 없는 노인,가난한 자등..에게 쌀을 나누어 주어 당시 약 6만명의 수원 인구 중 약 1/10에게 쌀이 지급되었다. "홍재전서 권6 시2","원행을묘정리의궤도 중 낙남헌방방도","원행을묘정리의궤도 중 낙남헌양로연도"의 역사기록 처럼 정조는 수원을 제2의 도시로써 활성하고자 수원 백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 1795년 윤2월11일 수원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의 주민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배려로 "낙남헌과거시험"과 윤2월14일 오전 어머니 회갑을 맞이하는 기쁨을 수원유수부 백성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낙남헌양로연"잔치로 백성을 위한 자신의 정치가 수원을 중심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나가기를 기대했다. "득중정어사도"에서 보여진것 처럼 1795년윤2월14일 수원화성에서 마지막 행사로 화성행궁 득중정에서 활쏘기 시합과 당대 신무기인 매화포를 발사하여 새로운 화약무기를 성공적으로 시연함과 동시에 화려한 불꽃놀이를 백성들과 함께 즐겼다. 6천명이 넘는 장엄한 국왕행렬인 "환어행렬도" 기록 처럼 1795년 윤2월15일 모든 행사를 마치고 수원화성을 떠나 하루밤을 지내기 위해 시흥행궁에 들어갔다. 을묘년 수원행차 최종보고서인 1797년(정조21년)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정조의 명으로 편찬하였다. 새로 주조한 금속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의궤로 활자와 목판화,당대 최고 화원들이 생생하게 그린 그림과 꼼꼼한 행사 내용들을 기록한 조선시대 의궤 모범으로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을묘년 7박8일 동안 수원행차시 화원들의 화가들이 그린 "화성성묘전배도","서장대야조도","한강주교환어도",등...과 같은 역사적인 사실도는 매우 세밀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경탄할 만큼 장엄한 예술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후세에게 역사를 남기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우리나라 기록문화 절정을 이루었다. 역사는 흘러 일제 식민지 시대 들어 와 일제는 정책일환으로 조선관광을 홍보하기 위해 손꼽히는 명소로 수원화성들을 사진으로 찍고 풍속풍경사진첩에 수록하며 사진엽서로 제작하고 관광의 고도인 수원관광안내지도를 채색지도 형식으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들어 온 외국인들은 화성을 보며 신비스러운 나라로 인식하며 매혹되었다. 주한 이탈리아 영사관의 제3대 영사이자 해군 제독이였던 카를로 로제티(1876년~1937년)는 수원을 비롯한 인근지역을 방문하며 조선풍물에 관한 "꼬레아 에 꼬레아니" 책을 펴냈고 1910년 수원에 정착한 조선이주 1세였던 일본인 사카이 마사노스케는 명소인 화성을 채색화 하여 화보로 담아 1915년 "화성내영"을 편찬했다. "엘리자베스키스"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조선의 아름다운 화성을 그렸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베버"신부가 수원화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수원화성박물관" 전시관들을 모두 감상한 후 정원길 따라 흑색벽돌의 성곽모형을 장식하며 수려한 곡선미를 이룬 "팔달세무서"에 이르니 익공이 있는 모임지붕 아래로 자주색 기둥부분에 장식과 자주빛 난간에 청색으로 문양을 이룬 정자가 연못과 정원을 바라 보며 문화유적지 산책길 처럼 장식되어 아늑했다. 해가 저물어 가며 찬바람이 몰아치는 추위를 문화산책 향기로 녹이며 "창룡문"으로 향했다. "수원화성박물관"옆 도로길로 20분쯤 올라가면 화성들이 펼쳐지는 길로 매우 정감이 넘치는 길이였다.높은 언덕에 1970년대 주택들이 옹기종기 밀집된 창룡대로 골목길 사이로 2층 빌라주택이 눈에 들어 왔다. 맞배지붕의 밤색계열 벽체로 유리창을 검은색 띠로 2층을 장식하며 지하 주차장위 사각형 문양 난간 벽돌장식으로 옥외 테라스와 미색벽의 1층을 이루고 있었다. 높은 언덕길의 좁은 공간을 지하 주차장과 함께 기둥으로 옥외 테라스와 내부공간을 이룬 합리적인 설계로 지하 벽돌장식과 함께 검은색 기둥이 받치며 검은색 띠의 베란다로 맞배모양 지붕을 이루어 골목길의 위용을 자아냈다. 바로 그 길따라 등성이가 솟은 잔디 언덕위로 "창룡문"으로 향하는 성곽길이 펼쳐졌다. 팔달산 아래로 진노랑 해가 아름답게 저물어 가며 창룡대로 주변 도심의 경치와 드넓은 "동장대(연무대)"와 "동북공심돈" 성곽들이 펼쳐져 산의 중턱에 오른것 처럼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상쾌했다. 일몰과 일출경치의 명소로 새벽과 저녁,사계절마다 운치를 자아내는 성곽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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