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인간이 다시 태어날수 있다면 피아니스트,바이올린니스트,성악가등...작가,화가,무용가,연구실적을 쌓아가는 교수.. 이러한 직종을 하고 싶다. 김환기 화가처럼 생전에 그림이 팔리지 않아 가난이 찌들지라도 이와같은 직업은 날마다 자기 자신과 맹연습을 통해 자기 발전을 끓임없이 실현하는 성취감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할수 있는 것으로 진취적인 직업들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피아니스트로써 재능을 주신것과 헌신적인 뒷 받침을 해준 우리 어머니에게 눈물나게 감사를 드릴 정도로 지난날 피아니스트로써 삶은 나에게 말로 형용할수 없을 정도의 카타르시스가 넘친 시간들 이였다. 그러나 피아노를 만질수 없을 정도의 직업병과 우리 어머니의 소천으로 말미암아 피아니스트길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동안 피아니스트로써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현실에서 후회없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미련도 없이 그만 두었다. 그리고 음악교습소를 하게 되었는데 음악교습소의 운영은 아이들과 학부모사이 이해관계의 신경쓰이는 일들이 거의 부지기였다. 그로인해 기빠지는 쓸데없고 부질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진취적으로 발돋음 하는 직업이 아니였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가 생전에 하셨던 피아노학원들을 생각하며 신체 모든 기관들이 뒤짚어지는 심장이 저미는 괴로움으로 눈물 그칠날이 없이 울며 우리 어머니의 고뇌와 심정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들 노는 시간에 일찍부터 철이 들어 열심히 공부를 해서 병원을 운영하는 존망 받는 의사들과 대기업 회사를 거느리는 사업가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자기 사업장을 지키기 위해 관리하는 책임감으로 얼마나 골몰이 아펐을까?...하고 돌기 직전의 상태에 이를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에 비하면 아주 조그마한 음악교습소를 지키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며 나를 위로 했고 그 공간에서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일들도 나의 자존심을 버리며 참아내는 인내와 상대를 설득하는 말의 힘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동안 입시와 대학교 레슨으로 아이들의 피아노 교육의 방법은 관심조차 없었는데 재능이 없는 아이들도 손가락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나의 아이디어로 매일 아이들에게 계이름을 빨리 익히는 방법과 기구를 이용한 손운동, 각 조성별로 손연습 방법을 제시하였다. 나의 생각대로 재능이 없는 아이들도 원활하게 손가락이 돌아갔고 학부모도 날이 갈수록 아이가 발전한다고 기뻐하여 보람이 있었다. 즉 실험을 통해 아이들의 피아노교수법을 나의 나름대로 정립할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알고 아이들이 찾아왔을 때 큰 교훈을 얻었다. 첫째 학생에게 사랑을 주는 것이 피아노를 가르키는 첫째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1984년 대학교2학년때 부터 피아노를 가르켰는데 그동안 나는 학생들에게 기분 상하지 않고 잘해 주며 잘가르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였다. 특히 입시와 대학교 강의들은 잘못된 피아노 테크닉을 교정하는데 중점을 두어 인기있는 강사가 되었지만 제자들에게 첫째로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했던 것으로 후회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음악교습소를 운영하면서 하나님께 날마다 음악교습소를 인계할 때를 알려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코로나가 발생한지 1달후 그곳에서 나오라는!...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기도를 드렸다. 정말 하나님 뜻이면 이곳에서 일하실 분을 보내 주시라고 기도 드렸다. 그런데 내놓은지 하루만에 60대 작곡 선생님이 찾아 오셨다. 작곡을 전공해서 음악학원을 경영했었고 남편의 직장따라 해외에서 거주하며 딸을 중학교때부터 음악박사까지 외국에서 바이올린 교육을 시키신 훌륭한 어머니셨다. 딸을 세계적인 바이올린니스트에게 교육을 시키며 키웠는데 한국에 귀국해 보니 지금까지 거의 10년동안 교향악단과 대학교 일자리를 얻을수가 없었다며 딸에게 음악교습소를 운영하도록 마련해 주고 싶다고 하면서...교습소를 보고 가셨다. 이러한 음악계 현실은 1990년대 중반부터 빚어진 현실로 너무나도 엄청난 인구의 음악 유학으로 일자리 수요는 너무 적어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아 유학을 갖다와도 대학교 강단에 썰수 있는 상황이 20프로도 안되고 나머지는 실질자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수원에서 2군데 음악학원을 하고 계시는 남자 원장님이 오셨다. 그런데 그 분은 교습소를 보자 마자 계약을 했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난 후 딸을 헌신적으로 박사까지 바이올린을 교육시키신 작곡 선생님이 전화가 왔다. 계약을 하고 싶다 하여...바로 전에 다른 분이 계약을 했다고 했다. 즉 기도끝에 1년반 동안 운영했던 음악교습소를 내놓은지 하루만에 기적처럼 인계하게 되었다. 음악교습소(음악학원)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키는 교육의 장으로 가치를 지니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일을 하면 매순간 마다 매우 소중하고 의미있는 시간이 된다. 그러나 혼자인 나에게는 비젼없는 무의미한 시간들로 인생 경험으로 1~2년정도가 적합한 것이였다. 그리고 음악교습소를 운영하는 동안 하나님은 나에게 홀로 이 세상을 버티며 살아갈수 있도록 훈련의 장으로 삼으셨다. 그리하여 조그마한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과 말이 씨가 되는 부정적인 말은 하지 않도록 긍정적인 말과 괴로운 일도 혼자 정신적으로 버틸수 있는 힘이 길러지는 삶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즉 "긍정"과 "된다"는 힘과 정신적으로 "홀로서기"로 승부하는 삶이 되고자 경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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