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재를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버스 차창가로 정조의 비통한 역사 행렬로 빛추는 장안문과 수원행궁,팔달문으로 정조의 참배와 화성행렬의 장엄한 곡조따라 로얄팰리스에서 "송정로" 도로길에 소나무 가로수길로 독특한 도심의 소나무길을 이루고 "송정초등학교"에서 "송정로" 따라 노송지대를 이루고 있는 수원시 향토유적 제14호인 "만석공원"과 "수원미술전시관"까지 울창한 소나무길을 이루고 있었다. 곧이어 정조의 노송의 슬픈역사를 빛내고자 하 듯 울창한 소나무숲의 언덕에 정자가 검은빛 돌담장에 에워싸며 우리고유 문양 기와장식으로 사각지붕을 이루며 밝은 황토색으로 숲길을 밝게 비추고 있는 "만석공원"을 마주 보며 "경남아너스빌"에서 "북수원시장"으로 가는 길인 "파장로"로 따라 소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져 정조 슬픈 역사를 되새기며 걷고 싶은 유혹으로 다가왔다. 도시 도로변에 이색적인 소나무 가로수길로 지지대고개로 부터 정조 능행차시 노송길을 빛내주듯 역사의 슬픈 그림자로 녹아내렸다. 정조가 이곳을 행차하시면서 아버지에 대한 가슴에 박은 못의 피를 흩 뿌리며 얼마나 가슴을 저몄을까?...하고 하늘을 향해 우뚝솟은 소나무들도 짙회색빛의 자욱한 슬픔에 드리우며 정조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감동하는 울림으로 가득찼다. 바로 그 길따라 매우 산뜻한 현대양식의 "SK스카이뷰 아파트"를 마주 하며 "수원SK아트리움"의 "정자문화공원"과 매우 고즈녁한 색채들의 마술사로 벽체를 장식한 "다솔초등학교"로 문화산책길을 이루어 노송지대 역사의 길를 비추며 빛내주고 있었다. 문화의 향기 따라 "파장사거리" 부근에 이르니 지지대고개부터 이어지는 정조 능행차길의 노송지대인 "노송공원"으로 노송이 역사의 침묵과 함께 살아 숨쉬고 있었다. "해우재"는 "노송지대"의 지지대고개를 가로 질러 "이목중학교" 도로길의 못다한 사랑의 곡조가 흐르는 해바라기,풍년의 소식인 맨드라미등이 나붓거리며 텃밭이 펼쳐지는 소박한 지방 마을 정취를 자아내는 "장안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해우재"는 근심을 푸는 집이라는 뜻으로 수원시장이셨던 고 심재덕이 삶에서 화장실이 가장 중요한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을 기념하고 세계인에게 화장실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30년간 살던 자신의 집을 2007년 고기웅의 설계로 변기모양으로 짓고 "해우재"라고 명하였다. 심재덕 사후 유족들은 해우재를 2009년 수원시에 기증하고 전시관으로 열어 그 뜻을 기리고 있었다. 수원시장의 명예에 걸맞는 수려한 자연환경도 아닌 매우 소박한 시골길의 서호천의 물줄기가 흐르는 해우재로 고 심재덕의 희생적인 사랑과 검소한 그의 인간미를 엿 볼수 있었다. 싱그러운 열매들이 송글 송글 맺힌 초목이 미소짖는 넓은 잔디에 흰 변기모양과 유리창 장식의 독특한 화장실 모형건축으로 격조있는 생활 문화공간으로써 화장실의 위상을 드높이며 빛내주고 있었다. 해우재옆 야외정원에는 화장실에 관한 우리나라 역사적인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중화장실이 설치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백제시대(BC18~AD660) 백제30대 무왕때(AD600~641) 조성되어 고려시대까지 운영했던 한국최초 대중공중화장실인 초가집 아래 변기들인 "왕궁리화장실"이 있었다. 그 모형이 장식되며 그 당시에 사용했던 변기들과 동물 모양용 남자용 소변기가 진열되었다. 신라(BC57~AD935)시대는 귀족들이 "노둣돌"로 우리나라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을 이루었는데 그 공간을 장식하며 조선시대 임금이나 왕비들이 사용했던 매화를 속에 넣은 매화그릇과 휴대용 변기가 진열 되었다. 하인이 사용했던 지붕과 문이 없는 "지붕없는 뒷간"과 똥을 기름으로 쓰기 위해 옮길때 쓰는 농기구인 똥장군과 똥지게 기구,똥과 재를 섞어 만든 거름인 똥재를 지게를 지고와서 팔았던 모습,새끼줄을 걸어 놓고 항문을 문질렀던 밑씻개,놋쇠나 양은 사기 따위로 만들어 방에 두고 사용했던 요강,아기를 낳으면 아기 똥을 먹일 개를 장만하고 오줌을 싼 아이는 키를 쓰고 소금을 얻어 왔던 우리 전통들을 인형들로 장식하여 생생한 우리나라 고유 화장실 문화를 표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통화장실인 뒷간의 "시골 화장실", 울릉도에서 사용하는 움집형 "투막화장실",돌로 벽을 만들고 돼지를 키워 인분을 소비하는 가장 자연 친화적인 화장실인 "퉁시변소"가 전시되어 어릴적 추억의 그림자로 가득했다. 그리고 정원 중앙에 동심을 자극하는 키를 쓴 인형과 생리적인 배설을 하는 모습인 생동감 넘친 조각들 사이로 수도시설 발달로 변기 밑에 물이 흐르도록 하는 고대 로마변기로 부터 걸상식의 변기를 성벽에 매달고 배설물이 하수와 함께 흘러 나가게 한 중세유럽변기,뒤상의 샘으로 일반 소변기가 예술품이 된 현대의 변기로 과학적인 서양 변기들의 진열로 변기역사의 흐름을 볼수 있었다. 야외정원 전시마당을 감상한 후 펌프 수도위로 물레방아가 돌며 초가정자를 이루고 적벽돌에 기대며 주황빛의 포근한 사랑의 빛으로 봉선화가 미소짖는 식당길 따라 해우재를 에워싸고 있는 배나무 골과 작은 시냇가를 이룬 해우교 주변을 산책했다. 시냇가의 산책로에서 바라 보니 높낮이가 서로 다른 유리창 장식의 유려한 곡선미를 뽐내는 "해우재"로 미래의 우주로 향한 꿈의 날개로 빛났다. 즉 배나무골이 에워싸며 작은 갯천이 흐르는 "해우재"로 시골마을의 전원주택 경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관람 예약시간에 다가와 "해우재" 안으로 들어갔다. 생물학자 라이얼 왓슨이 말하듯 화장실은 직립보행을 하는 사람이 배설을 하면서 배설물에서 냄새가 많이 나기 시작함에 따라 화장실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인간 주거지가 일시적인것으로 부터 상시적인 것으로 변하면서 적절하게 처리할 필요성을 느끼며 위생관념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면서 탄생되었다. 즉 인간이 정착생활을 하면서 화장실 문화가 시작되었는데 신석기시대(BC500년) 정착생화를 하면서 화장실을 이룩하고 청동기시대(BC500년~AD0년)에 농경생활의 시작으로 주거 내부에 공간이 나누어지고 규모가 조금씩 커져갔다. 철기시대(AD1년~AD300년)는 농경생활의 정착으로 화장실의 퇴비 저장소가 필요해지고 철기시대 이후(AD300년~ 이후) 화장실은 농사에 편리한 방법 위주로 조금씩 변화되었다. 화려한 그림들이 새겨진 예술품과 같은 중국,일본,서양의 요강과 동아사아의 중국 마통,일본의 청화백자변기로 위상이 높은 화장실 문화를 이룩한것을 볼수 있었다.이와 반대로 우리나라는 생활 필수품으로 사용된 매우 소박한 요강과 삼국시대부터 널리 사용했던 뒷간의 수거식과 잿간 화장실로 배설물들을 밭에 거름을 주기위해 사용했던 오줌장군,거름통과 똥바가지로 농경생활과 연계되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우리 선조들의 뒷간은 생리적인 배설공간과 함께 농사를 위해 필요한 공간이였다. 뒷간에서 모아둔 똥과 오줌을 짚과 재를 썩어 질 좋은 퇴비를 만들어 농사에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분재는 가장 널리 사용했던 비료로 효과 좋은 거름이 되기 위해 퇴비를 숙성시켜 밭에 뿌려 맛과 모양도 좋은 수확물들을 시장에 팔았다. 그리고 말린 소똥은 마당에 차곡차곡 쌓아 두고 난방 연료로 사용하였다.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들을 과학적으로 활용했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엿 볼수 있었다. 그후 1910년~30년사이 가족 중심의 공간구성으로 화장실과 부엌이 개량되고 1930년대 쪼그리고 앉는 동양식 수세식 변기가 화신백화점과 반도호텔과 같은 곳에 등장했다. 1940년 조선주택영단이 설치되면서 주거공간에 화장실이 들어온 형태인 문화주택 (영단주택)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1958년 우리나라 독자적인 기술로 처음 건설된 종암아파트 내부에 수세식이 아닌 변기가 설치되었고 대통령 지시에 따라 관공서의 화장실부터 남.여 를 구분하여 개조하고 청결을 위한 소독반이 배치되는 공중화장실의 커다란 변화로 근대화 과정에서 위생개념이 생겼음을 알수 있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사업의 일환으로 대한주택공사가 설립되어 아파트식 주거형태가 보급되어 1962년 세면기,욕조,변기로 구성된 화장실이 마포아파트에 처음 설치되었다. 즉 농경생활과 연관된 화장실에서 근대의 경제발전과 함께 수세식으로 위생적인 격조있는 화장실문화로 변모했던 우리나라 화장실 변천사를 알수 있었다. 각 나라의 기후와 종교,생활방식에 따라 화장실 문화도 달라지는데 기온이 영하 60도까지 내려가는 북극에서는 실외에서 소변을 볼수가 없어 에스키모 인들은 실내에서 배설을 해야하고 매우 건조한 이집트 사막은 사막에서 용변을 보면 10분이내로 건조되고 모래로 뒷처리를 할수 있는 "사막화장실"을 이룬다. 몽골에서 유목민들은 땅은 화장실이라고 불릴정도로 이동 중 어디에서나 용변을 보기도 하고 유목생활을 하는 특유의 방식 때문에 천막식 이동형 가옥형태의 "유목민 화장실"을 사용하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교의 나라로 하루에 몇번이고 물로 몸을 깨끗이 하는 습관으로 용변 후에도 왼손으로 물을 받아서 항문을 씻는 "이슬람의 화장실"을 이룬다. 아마존 수렵 채집 원주민은 화장실을 따로 만들지 않고 야외 적당한 곳에 배설하여 뒷처리는 나뭇잎으로 하고 강가에서 물로 씻는 "아마존의 화장실"을 이룬다. 불교 발상지인 인도에서 갠지스 강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발상지고 죽어서 돌아가는 장소로 여겨 자기 몸에서 배설물들을 강으로 흘러 보내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며 강 가운데 똥을 누는 경우가 많은 "불교식 화장실"을 이룬다. 최초 수세식 변기는 16세기말 영국에서 발명되어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의 수세식 변기가 개발되었다. 화장실속 과학원리들이 숨겨져 있는데 변기 내부의 하수도와 연결된 부분에 U자형 관을 "사이펀"이라고 한다. 배설을 한 후 손잡이를 내리면 물탱크의 마개가 열려 변기 안에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이 들어간다. 그 물의 압력으로 사이펀이 물이 완전히 채워지면서 사이펀 내부는 진공상태가 되고 변기의 물과 배설물이 함께 하수구로 빠져 나가게 된다. 과학자 베르누이가 좁은 통로를 지나가는 공기는 넓은 통로를 지나가는 공기보다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수도관을 통해 온 물이 샤워기의 작은 구멍을 통과하면서 수압을 세게 만들어지고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 나오면 중력에 의해 점점 속도가 빨라지면서 압력이 감소된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며 속도가 빨라진 물은 압력이 감소하며 가늘어진다. 이 원리를 수도꼭지에 베르누이가 착안한것으로 "베르누이 원리"라고 한다. 그리고 유기물로 이루어진 똥은 자원으로서 활용가치가 많다. 55~75% 물과 천연가스(LNG) 주성분인 25~45% 메탄가스 물질로 이루어져 현재 지구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바이오 에너지로 사용할수 있다. 즉 화장실 내부의 과학적인 원리와 매우 유용한 물질인 사람의 배설물들이 더욱 더 발전된 미래로 갈수 있는 자원과 더 격조높은 화장실문화를 이룩할수 있는 패러디엄으로 새롭게 인식할수 있었다. 그리고 "해우재"가 탄생하기 까지 고 심재덕 수원시장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알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86 서울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등 국제행사를 개최하며 화장실 청결운동이 진행되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96년 한일월드컵 축구 경기를 2002년에 수원에 유치하기 위해 그 당시 고 심재덕 수원시장은 수원시의 공중화장실을 개선하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을 만들 것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화장실 문화운동을 시작 하였다. 1996년 화장실문화운동이 수원에서 시작되면서 1997년12월 수원시 월드컵 개최도시로 선정되고 1999년 수원에서 한국화장실협회출범하여 2004년 세계 최초 공중화장실법을 제정하고 2006년 세계화장실협회 설립을 최초로 제안하게 되어 외교사절단이 수원시 공중화장실 투어를 하였고 2007년11월 화장실 혁명이 인류 미래를 바꾼다고 슬로건을 걸고 국제 민간단체인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세계보건기구에 의하면 세계인구의 40%가 적절한 화장실이 없어 수인성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화장실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장소이자 위생의 핵심으로 2007년 세계화장실협회는 창립이후 개발도상국 공중화장실 건립 지원을 하였다. 즉 화장실문화운동이 세계화로 뻗어가게 되었다. 2009년1월 심재덕 사망후에도 그의 발자취 따라 개발도상국 공중화장실건립 지원사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고 화장실 발전을 위한 연구 및 기술교류,문화적 전파를 위한 시도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해우재"는 세계유일의 화장실테마파크로서 화장실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 및 보존 등 체계적 관리를 하고 있다. 이와같이 "해우재"는 수원시의 근대 역사이래 가장 자랑스러운 고 심재덕 수원시장의 사랑과 헌신,근면함의 그의 존경스러운 인품과 함께 세계로 향한 화장실문화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귀중한 산실이였다. 해우재를 나와 서호천의 작은 갯천을 따라 덕스러운 달리아(다알리아),겸손의 호박꽃,엉겅퀴의 시골정취의 향기를 맡으며 "장안 STX KAN" 입구의 가로수길로 버스정류장에 이르러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고 심재덕에 대한 존경의 박수와 우리 어머니와 같이 살았던 나의 고향 대전집의 뒷간을 추억하며 그 다음날까지 감동물결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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