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22대왕 조선후기 문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정조"는 신도시 수원을 건설하고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축성하여 천하명당 수원 화산에 모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호하고 아버지 곁에 묻혀 생전에 하지 못한 효도를 사후에 하려고 했다. 정조의 효심이 깃든 수원화성을 영원히 세세토록 역사에 길이 남기는 "수원화성박물관"으로 "동북공심돈"의 수원 화성을 본따 건축한 박물관의 화성 문화재 보고로 위용을 간직하며 2009년 한국 건축 문화 대상의 작품을 뽐내고 있었다. 박물관을 마주 보며 자주빛과 회색의 벽돌바닥으로 깃발들이 휘날리는 정조의 매제인 정재화 초상화로 사도세자 계보의 명문대가로 더욱 더 귀중한 보고로 빛나고 있었다. 사도세자 부마인 홍은위 "정재화(1754~1790)"는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의 1766년 둘째 딸인 "청선공주"와 혼인한 정조의 매제로 "영조"의 선택에 의해 조선의 부마가 되었다. 명문대가 영일정씨 출씬 가사문학의 일인자로 좌의정을 지낸 송강 "정철"의 8대손으로 정재화 부부 아들 "정의"는 수원판관과 화령전령을 지내며 수원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후손들이 대대로 비장해 오던 홍은위 초상화와 왕실 하사품을 포함한 1천여점의 유물일체를 2019년 수원시에 기증하였다. 문화재적 가치를 규명하여 영일정씨 왕실 유물의 우수성을 알리고 가문의 역사와 위상을 드러내 선조들을 추모하고 빛내고자 하는 후손들의 아름다운 뜻을 알리고자 특별기획실에서 "사도세자의 부마 홍은위 정재화"의 주제로 전시되었다. 임금의 사위인 부마는 과거에 응시할수 없고 벼슬길에 나갈수 없는 왕실인사로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높은 신분으로 그 가문은 왕실 인척으로 조선시대 정치 문화사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부마는 왕실문화를 주도하기도 했으며 부마 가문은 정치 실세로서 왕의 후견인 역할도 했다.정재화는 한중록 기록처럼 용모가 준수하고 처신이 신중하여 처남인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우선 정재화의 선조이신 "정철"은 문정공파 시조로 시문집인 "송강집"을 편찬하였고 필사본 문집 인 1860년"송강유사"를 편찬하였다. 송강 정철의 현손인 장암 "정호(1648년~1736년)"는 정철의 4세손으로 그의 시문집인 1756년"장암집"을 편찬하였다.1860년 명문대가 영일정씨 "정재화"는 강릉공파에 해당되며 감무공파 12세 정철의 둘째아들 "정종명"의 후손으로 "영일정씨 족보"를 간행하였고 유물로 1752년~1759년 "영일정씨파보"와 1872년"영일정씨세보"가 있었다. 정재화 아버지인 정인환(1724년~1784년)은 1766년(영조42) 청선공주와 혼인할때 "정인환 차첩"으로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한 부마의 아버지에게 벼슬을 내렸고 1774년(영조50) 진휼에 공이 있는 예천군수 정인환에게 "영조가 정인환에게 내린 유서"인 상을 내렸고 1784년(정조8)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태조대부터 정조까지 왕실족보인 1783년 "선원계보기략"과 함께 혼례절차 기록으로 1764년(영조40)청연군주(1754년~1814년)와 김두성의 혼례과정 기록한 등록 "청연군주가례등록",1766년(영조42) 정재화와 청선군주 혼례 절차 가운데 친영때 사용된 문서인 1766년"친영홀기"와 혼례 대한 일체를 기록한 등록인 "청선군주가례등록"이 전시되었다. 영조,정조,정재화가 서로 지어 올린 시인 1772년"기과갱재록"과 1766년"어제금일흥회시첩",1771년"속광국지경록"이 있었고 김두성,정조,정재화가 서로 지어 올린 시인 1768년"집경당갱운첩"이 있었다. 임금하사품인 영조대 왕실에서 내려준 기록이 적혀 있는 책이 모두 7책으로 19세 왕세손 정조예필의 놀라운 글씨가 적힌 영조시첩인 1770년 "어제여방기회서첩",1767년 어제독서록,영조가 지은 시인 1772년"기상패인갱재록",(영조49)임금 좌우에 서서 호위하는 신변보호 임시벼슬인 별운검을 정재화에게 기용한 것을 알수 있는 1773년 "경운궁갱재록",영조가 82세 나이로 정조를 격려하기 위해 교훈이 되는 내용을 지은글인 1775년"어제 팔순유곤록"이 있었다. 정조가 용주사에 하사한 사도세자 명복을 비는 1796년"어제화산용주사복불기복게"와 부모님 은혜를 담고있는 1796년 "운설대보부모은중경"를 사도세자 부마인 정재화에게 하사 하였다. 정조는 즉위하자 마자 1776년 아버지 무덤을 영우원이라 하고 1789년 화산에 왕을 버금가는 현륭원을 조성하였고 현륭원의 행궁과 같은 용주사를 건립하였다. 현륭원 옆 아버지곁에서 안식하고자 수원화성에 신도시를 건설하여 1795년 수원행차 여정을 하게 되었다. 창덕궁에서 출발하여 한강을 건너 노량행궁에서 점심을 먹고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그 다음날 만안교에서 휴식하고 사근평행궁에서 점심을 먹고 지지대고개에서 휴식을 한 후 노송지대,진목정,만석거,장안문을 통과하여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이러한 과정에서 영우원정비와 현륭원조성등 사도세자 명예회복사업에 정재화를 사도세자 자손으로서 적극 참여시켰고 정재화와 청선군주와 함께 그의 아들 정의도 1795년 수원행차 여정과 혜경궁홍씨 회갑연까지 참여 시켰다.영조와 사도세자, 정조와 누이동생 가계도와 함께 청선군주 가마 자료가 실린 "화성원행반차도","원행정리의궤도","한강주교도","환어행렬도"와 혜경궁홍씨 회갑연인 "봉수당진찬도"가 전시 되었다. 정재화와 청선군주는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아들 "정의"(1781년~1832년)는 임금이 하사해준 경행방의 집에서 낳았다.정조가 지금의 정의 이름을 하사하고 순조임금이 또 자를 하사하고 자설을 내려주어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 시문과 서화에 뛰어난 정의는 1795년 혜경궁홍씨회갑연에 참석하고 현륭원령과 수원판관 겸 화령전령등를 지내며 수원과 각별한 인연을 지녔다. 그 증거 자료로 (정조18)1794년"돈녕부 직장에 임명하는 교첩",1795년 정의교첩,1814년(순조14) "수원판관에 임명하는 고신"과 "수원판관 겸 화령전령으로 임명하는 고신"이 있었고 1821년(순조21) 1821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현륭원 동쪽 언덕에 조성된 정조의 건릉을 서쪽으로 옮겨 함께 합장릉을 조성하는데 정의가 참여하여 건릉 조성의 공로를 인정해 정의를 정3품 관직으로 승급시키는 고신인 "통정대부 행 인천도호부사" 교지가 있었다. 정의가 왕실에서 하사받은 책들은 1777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위해 건립한 정각인 자경전에 대한 내용인 "어제자경전기"로 1808년 정의가 하사 받은것으로 추정되고 1796년" 중용"은 정조가 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800년 순조의 명을 받아 지은 정조 건릉지문 탑본첩인 "건릉지문"과 1800년 3월18일에 종이와 먹 붓을 왕실에서 하사한 내용을 기록한 문서인 "하선장"으로 실제 기증유물에는 대량의 봉투를 포함한 편지지 묶음과 기름을 먹인 두꺼운 장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정의가 죽은 후 가족들에게 임금이 하사한 책은 1836년 순조와 익종의 시문을 수록한 책인 "열성어제"와 1661년 선조12번째 왕자인 인흥군 이영의 아들인 명필가 낭선군 이우가 현종2년에 역대 명필25인의 필적을 돌에 새겨 간행한 석각본 서첩인 "관란정석각"이 있었다. 후손이 기증한 한글편지 151편 중 왕실과 주고 받은 편지는 140여통이 넘을 정도로 정의는 왕실간 편지를 주고 받았다. 혜경궁홍씨가 정의 집으로 보낸편지 77편중 정의와 혜경궁홍씨가 주고 받은 편지가 55편인데 외손자 태어난 시간에 맞춰 축원하는 외손자에 대한 사랑의 감동으로 전율하고 눈이 안보인다는 노환의 혜경궁 홍씨모습을 알수 있었다. 정의가 외할머니 혜경궁홍씨에게 생신축하편지와 혜경궁홍씨가 정의의 아내인 연안김씨에게 보낸 편지와 정의의 누나 안부를 묻는 편지로 혜경궁홍씨는 외손자인 정의,외손자 며느리인 연안김씨,자신보다 먼저 별세한 청선공주의 자식들을 알뜰히 챙겼던 모습을 알수 있었다. 정조가 청선공주에게 보낸 편지,청연공주가 연안김씨에게 보낸 편지,효의왕후가 연안김씨에게 보낸 편지,1791년 "정조어필 봉투와 홍은부위가 한글로 기록된 봉투",순원왕후 전 "김상궁이 연안김씨에게 보낸 편지"로 왕실과 각별한 인연을 갖으며 지낸 것을 볼수 있었다. "홍은위 가문의 생활문화"로 부마 가문의 가계와 전승,혼례,장례,생활상의 부마문화를 조명하고 있었다. 1739년 "정인환이 혼례 때 "신부집에 보낸 납폐서"와 조선후기 "사주단자 봉투",1802년 "혼수비용에 관련한 문서"와 함께 조선후기 저고리치수,도포길이,저고리길이,바지길이,두루마리치수등 혼인을 정하고 신랑이 입을 옷의 치수를 적은 단자인 "두루마기와 저고리 치수를 기록한 의양단자"와 "도포와 저고리 등의 치수를 기록한 의양단자",부녀자가 혼례복에 갖추어 쓴 관인 "족두리"와 홍색은 양인 남성을 상징하고 청색은 음인 여자를 상징하는 "청실홍실",혼례를 치르고 신방에 있는 "화조도 자수병풍"의 혼례문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제사에 관한 자료들은 19세기말 한 나라의 왕과 왕이 돌아가신 날인 제삿날을 기록하는 "국기"로 사도세자,혜경궁홍씨,정조등의 기일을 기록하고 왕릉명칭과 위치를 절첩으로 기록하였다. 정인환(1724년~1784년)을 기준으로 작성된 7대조에 이르는 선대조상들과 백숙부 형제자매및 외조부모의 기일을 기록한 절첩본 "선대기일"과 집안의 생신과 기일등 집안 대사 날짜를 기록한 "생신기일록"이 있었다. 시신을 안장할 묘위치와 장례절차 등 장례에 관련 설치 방향등이 기재 된 문서인 19세기 "장택기",1888년 경기도 양주 미사리에 조성된 영일정씨 세장묘역의 "묘도",1899년 김용준이 부친을 당한 수령 정운석에게 보낸 고목인 "김용준이 고을 수령 정운석에게 보낸 고목",1925년 대홍수로 정운석(1869년~1934년)이 지평에 있던 묘소를 양주 노원으로 옮긴다는 내용을 돌아가신 고조부모(정재화)로 부터 부모등에게 고하는 "축문",정재화의 고손자인 "정운석의 장례에 김영한이 쓴 만장",1935년 척질 김영한이 정운석의 소기를 맞아 그에게 올리는 "제문",1944년 정재화의 5세손인 정구택이 사판(위패)을 지협(지평)의 병사(묘막)로 옮겨 모신다는 내용을 고하는 "고유문",1940년 정구택이 작성한 "부의록과 조문록",그릇의 목록를 기록한 "그릇발기",집안 행사를 위한 "음식목록과 떡 관련 기록"의 장례 문화를 알수 있었다. 가계문화를 알수 있는 자료들로 1823년 "정의의 아들로 정해상을 입양하는 계후입안"과 계후에 관한 입안인 "도광3년11월일 예조입안"으로 정해상(1812년~1873년)은 12세때 1823년(순조23)정의의 양자가 되어 부마 집안의 가계를 계승하였다.19세기 "정해상의 아들로 정이원(1843년~1899년)을 입양하는 계후입안"이 기록 되었고 "정해상을 중심으로 작성한 세계",정해상을 기준으로 간단히 정리한 영일정씨 세계인 "영일정씨세보",휴대하기 좋도록 절첩으로 된 정종은에서 부터 정운석(1869년~1934년),정운철등 영일정씨세계인 "영일정씨세계"의 족보가 완성 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대대로 전해지는 물품들은 11세기 중국 소동파 서체 토대로 독창적인 필법을 창안한 20세기 서예병풍인 "윤용구서병",제사 지낼때 사용하는 "병풍",정재화와 정의 "호패",잣 짜는 도구,다식판,되,목그릇,목쟁반,정재화 집안에서 대대로 사용했던 놋그릇,벼루와 먹등 한곳에 모아 정리하는 문방기구인 "연상과 연적",각양각색의 종이와 묶음상태로 보관된 특징을 갖고 있는 "서간지와 책함"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성의복에 착용하는 장신구인 "세조대"로 조선후기 남성 복식문화 보여주고 있었고 길이,너비,폭,깊이,두께,각도,등을 측정하고 그리는데 사용하는 도구인 "나무 자"로 은입사의 눈금이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생활문화를 알수 있는 자료들은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여 이두와 그 읽는 방법을 한글로 표기해 둔 절첩문서인 "이두용어록"과 읽은 책과 읽기 시작한 시기를 밟혀져 있어 조선시대 여성들이 어떠한 순서에 따라 독서를 했는지 살필수 있는 자료인 "한글 독서기"로 여학총서 시작으로 고금열녀전,계녀어,이태백전,이소저열현기,학기,소학1권~3권,소학언해 순서로 총 9권을 읽었던 것을 알수 있었다. 1876년(고종13) 정재화 증손자인 정이원(1843년~1899년)이 전체 7등으로 합격한 진사시 합격자 명부인 "병자식 사마방목"과 1884년 정이원의 장남 정운석(1869년~1934년)의 "정운석의 과거시험 답안지 시권"이 있었고 조선후기 관청의 업무보고에 대한 왕의 결인 "판부규식"이 있었다. 1830년 정의가 "아들 정해상에게 보낸 편지",1895년 정운철이 "아버지 정이원에게 보낸 편지",1900년경 "정운석과 장인 박정양의 편지"가 있었다. 그중 가장 감동 깊었던 유물들은 사도세자 부마인 "정재화"에게 하사한 19세 왕세손 정조예필의 놀라운 글씨가 적힌 영조시첩인 1770년 "어제여방기회서첩",1796년 "어제화산용주사복불기복게",1796년 "운설대보부모은중경"로 매우 감탄할 만한 정조의 명필의 진면목을 볼수 있었다. "혜경궁홍씨"가 정재화의 아들인 "정의" 집으로 보낸 편지들로 혜경궁홍씨는 외손자인 정의,외손자 며느리인 연안김씨,자신보다 먼저 별세한 청선공주의 자식들을 알뜰히 챙겼던 모습을 알수 있었고 외손자 태어난 시간에 맞춰 축원하는 외손자에 대한 사랑의 감동으로 전율하였다. 왕실에서 하사 받아 대대로 전해지는 11세기 중국 소동파 서체 토대로 독창적인 필법을 창안한 20세기 서예병풍인 "윤용구서병"과 1661년 선조12번째 왕자인 인흥군 이영의 아들인 명필가 낭선군 이우가 (현종2년)에 역대 명필25인의 필적을 돌에 새겨 간행한 석각본 서첩인 "관란정석각",1800년 순조의 명을 받아 지은 정조 건릉지문 탑본첩인 "건릉지문"으로 각기 다른 서체로 심신이 정화되는 맑은 기운이 흘러 넘쳤다. 집에 짐이 너무 많아 1995년에 갖다 버렸던 1970년대 나의 어릴적 한옥의 한기를 막기위해 우리집에 병풍을 쳤던 자수병풍이 매우 그리울 정도로 향수에 젖었던 혼례를 치르고 신방에 있는 자연 친화적인 복을 기원하는 "화조도 자수병풍"으로 가정의 평화와 화목,부부간의 애정을 표현한 새와 모란의 부귀,매화의 절개,석류의 다산,연꽃의 행복을 의미하는 매우 섬세한 입체감 있는 자수의 생동감으로 매우 수준 높은 문화를 보여 주고 있었다.집안 대대로 전승된 각종 문서들이 지체 높은 가문의 문화를 대변해 주며 매우 꼼꼼하게 기록된 기록문화의 절정으로 매우 놀라웠다. 그리고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가장 인상적인 유물로 조선후기 남성 복식문화를 보여주고 있었던 남성의복에 착용하는 장신구인 "세조대"와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여 이두와 그 읽는 방법을 한글로 표기해 둔 절첩문서인 "이두용어록"과 읽은 책과 읽기 시작한 시기가 밟혀져 있는 "한글 독서기"로 조선시대 여성들이 여학총서 시작으로 고금열녀전,계녀어,이태백전,이소저열현기,학기,소학1권~3권,소학언해 순서로 총 9권 독서를 했는지 살필수 있는 자료로 지체 높은 가문의 여성문화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이와같이 정철의 자손과 사도세자 부마인 정재화의 영일정씨 가문의 전시회를 통해 사도세자의 부마로써 정조의 사도세자 복원사업에 적극 참여 하였던 정재화는 왕실과 교류하며 서로 시를 주고 받고 임금에게 책을 하사 받았고 그의 아들 정의도 왕실과 계속 교류하며 서로 시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임금에게 책을 하사 받았던 매우 수준 높은 문화교류로 왕실가문의 위상을 드러냈다. 봉건적인 신분사회 체계와 제사의 유교이념에 의한 혼례와 장례문화를 이루었고 왕실족보와 발맞춰 영일정씨족보간행과 부마 집안 가계를 계승하기 위해 입양이 사회체제로 자리를 잡았다. 왕실가문의 집안 대대로 전승된 한글로 기록된 각종 문서와 한글사책은 지체 높은 가문의 여성문화를 대변해 주는 규방유물로 주목되고 있었다."수원화성박물관"의 "사도세자의 부마 홍은위 정재화" 전시회를 모두 감상한 후 정원길 따라 거북이위 용솟음 치는 용문양의 비석과 연꽃이 피어 오르는 듯한 매우 아름다운 석물인 정조대왕 태실모형이 흑색벽돌의 성곽모형을 장식하며 수려한 곡선미를 이룬 "팔달세무서"로 비추어 매우 운치 있었다. 춘하추동의 아름다운 경치인 수원화성 사진이 장식된 "팔달세무서" 담장길 따라 벽돌담장으로 익공이 있는 사각지붕 아래로 자주색 기둥부분에 장식과 자주빛 난간에 청색으로 문양을 이룬 정자가 연못과 정원을 바라 보며 비추고 있어 문화유적지 산책길 처럼 고즈녁했다. 그 길 따라 "창룡대로"로 등가구들을 장식한 "SOLSOL ISLAND" 카페와 회색빛 벽돌 벽체의 출입문으로 홑처마 기와를 이룬 "행궁파출소",2023년 완공을 목표로 한 "수원시 복합 미디어센터" 신축 건립공사의 신한옥의 조감도로 화성박물관으로 가는 길을 옛 문화고전 향기로 가득찼다. "창룡대로 빌라주택" 언덕으로 박석이 깔린 정원으로 짙은 밤색빛 벽돌 벽체의 통창양식인 "MAVEN Coffee"와 밤색 철문의 연한 베이지빛 벽돌 담장과 함께 모임지붕의 연한 베이지 빛 벽돌 벽체의 흑색 철난간을 이룬 양옥집,통창양식의 대각선 타일 벽을 이루어 성과 같은 분위기의 상가양식으로 화성 성곽길을 가는 길을 정겨운 정감으로 안내해 주고 있었다. 수원화성의 "동일치"부터 성곽길을 걸었다. 성곽길 아래 등성이가 솟은 잔디 언덕으로 미색벽체의 모임지붕 상가가 고성과 조화를 이루고 창룡대로 마을을 감싸며 성벽들이 굽이치고 있어 평화로운 요새와 같았다. 화사한 문양의 사각지붕인 "동일포루"부터 "창룡문"까지 등성이기 솟은 잔디 언덕으로 장대하게 펼쳐져 가슴이 확트인 기분처럼 상쾌했다. "창룡문"의 팔작지붕 각루 아래 화강석 계단과 아치형 문으로 평화 깃발이 나붓거리며 풍악의 나팔이 울려 퍼졌다. 둥근 옹성을 비추는 자주빛 대문의 천정으로 용이 꿈틀거리며 매우 아름다운 "창룡문"의 걸작품을 이루었다. 즉 "수원화성박물관"의 문화 향기 따라 "창룡문"까지 문화 유적지 길로 고풍스러운 카타르시스가 넘친 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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