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으로 가기 위해 우리집 근처에서 8800번 버스를 탔다. 1970년~80년대 대전에서 서울로 교수님께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오고 갔던 길들인 고속도로로 "ㄷ자형" 유리창 장식으로 한 "두산'이 성남 신도시 위력을 자랑하고 서울 도심의 변하지 않은 고가도로와 길사이로 새롭게 우뚝솟은 즐비한 빌딩들로 옛 향수 그림자로 가득했다. 신한은행 본점 버스정류장에 내리니 출입문 광장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바다 섬과 지구의 모양의 벽화로 친환경으로 뻗어가는 물결 같았다.목재 출입문과 대리석 벽체의 옛 고전 양식과 파도 물결같은 유려한 곡선의 유리창 장식의 서울시청으로 환상적인 현대 건축의 위용을 뽐내며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역사를 간직한 "덕수궁"을 마주보며 역사의 발자취 따라 세계로 우뚝솟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저력으로 빛났다. 덕수궁의 역사는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온 후 1593년 월사대군 후손의 저택을 임시 궁궐로 삼고 "정릉동 행궁"이라 하였다. 1608년 "석어당"에서 선조가 승하한 후 1611년 광해군이 "즉조당"에서 즉위하고 "경운궁"이라고 칭하였다.1615년 광해군은 거처를 "창덕궁"으로 완전히 옮기고 1618년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석어당"에 유폐하였다. 1623년 인조가 "즉조당"에서 즉위하고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그후 역사는 흘러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로 문호개방을 시작하여 1895년 을미사변후 고종은 19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1897년 "경운궁"으로 옮겨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라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선포하고 대한제국 위상에 걸맞게 여러 전각들을 세우고 궁궐의 영역을 확장시켜 궁궐은 정동과 시청 앞 광장일대를 아우르는 현재 규모의 3배 가까이 되었다. 서구 문물을 적극적 수용하여 여러 서양 건축물을 세우고 전각 내 전등과 전화등 신문물도 설치하였다.그러나 1904년 대화재로 중화전,석어당,함녕전등 전각이 손실되어 다시 복원하였고 1906년 대안문을 수리하고 대한문으로 개칭하였다.1907년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하였고 1910년 "석조전"을 완공하였다. 1919년 "함녕전"에서 고종이 승하 이후 "덕수궁"은 빠르게 해체되고 축소되었다. 1938년 "석조전 서관"을 완공하여 이왕가 미술관으로 개관하였고 "석조전"에서 1946년~47년 미소공동위원회 열렸다. 즉 임진왜란으로 인한 선조와 가슴아픈 인목대비 한,대한제국의 역사와 일제 식민지의 가슴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덕수궁이였다. 덕수궁 내전은 세속의 정화인 다리를 건너 황제의 위용으로 압도 되는 거대한 "중화문"을 거쳐 황궁의 정전인 "중화전"으로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바른 성정을 나타내는 전각으로 제국주의 세계 열강 속에 고종의 극심한 고뇌를 엿볼수 있었다. 창건 당시 2층이었으나 1904년 대화재로 단층으로 축소되었다. 2단으로 쌓은 넓은 월대 위에 높은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공포는 다포식과 기둥사이의 분합문을 이루며 은은한 색채의 단청을 이루고 있었다. 중화전 기단부 계단의 답도에 새긴 용문양과 황색의 창호와 함께 사방으로 웅장한 날개로 용솟음 치는 처마로 소나무에 드리우며 운치와 황제의 위용으로 주변 "함녕전","덕홍전","석어당","즉조당","석조전"을 바라 보며 높은 주춧돌 아래로 위엄을 나타내고 있었다. 중화전을 감싸는 행각은 사라진채 중화전 뜰 모퉁이에 전각을 이룬 쉼터로 "중화문"과 조화를 이루며 고즈녁했다. 즉 중화문에서 이어지는 2단으로 쌓은 넓은 월대 위에 높은 주춧돌을 놓고 지은 "중화전"을 중심으로 사방에 행각들을 두른 덕수궁의 중심 공간을 이룬 설계로 매우 놀라웠다. "중화전" 뒷 잔디마당으로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이였던 익공의 겹처마를 이룬 "준명당"으로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된 일자형의 체계적인 공간으로 빛났다. "준명당"의 뒷뜰로 가니 "ㄱ억자형"을 이루고 돌출된 창호와 단청을 이루며 우리 고유 장식문양의 굴뚝의 정원과 서양풍 모임지붕의 석조전이 비추어 매혹적인 길을 이루었다. "준명당"옆은 현존하는 2층 목조의 중층 전각인 "석어당"으로 1904년 화재로 다시 건축하였다.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2층 목조의 향기가 고귀한 문화유산의 매우 귀중한 가치로 아름답게 빛났다. 뒷뜰의 소나무에 드리우며 운치를 발한 "석어당"으로 살구나무가 우뚝솟은 앞마당의 돌계단 아래로 "중화정"과 함께 더욱 더 위용의 자태로 매우 웅장하게 압도 되었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드넓은 뒷 마당에 "준명당","즉조당","석어당"으로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삼고 근대 개혁을 추진한 서양 근대화로 발돋움하는 고종의 발자취가 새겨진 "석조전"이 확트이게 비추며 동.서양의 건축이 매우 조화롭게 아우르는 낭만적인 공간을 이루었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덕수궁의 서북쪽의 "석조전"은 1900년 공사를 시작하여 1910년에 완성한 황실가족의 생활공간을 갖춘 대한제국 대표적인 서양식 건물로 "석조전 서관"과 화강석 야외 복도로 연결하며 "ㄱ억자형"을 이루어 서양풍 국립 박물관을 방불케했다. 벽돌 장식을 한 시멘트 기둥의 덩쿨나무 쉼터 서양풍 정원 사이로 비추는 "석조전" 마당은 서양식 분수정원으로 "중화전"과 2층 목재 "석어당"이 매우 고즈녁하게 드리웠다. "석조전"은 화강석의 모임지붕과 둥근 기둥,돌계단을 이루며 서양풍 웅장함으로 화려하게 빛났다. 화강석 조각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검은색 창틀의 긴 직사각형 창문과 밤색 출입문,화강석 장식의 복도 난간,우뚝솟은 둥근 장식기둥의 선들로 화강석의 건축의 위엄을 표출하며 더욱 더 장엄한 행렬을 이루었다. "석조전" 복도로 전통문양의 팔작지붕을 이룬 "준명당"이 소나무에 드리우며 매우 청렴하게 비추고 전각들의 정원과 "석조전 서관"이 비추며 사색의 정감을 발하였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덕수궁의 동북쪽에 내전으로 "덕홍전"과 "함녕전"이 있었다. 덕홍전"과 "함녕전" 기와담장과 계단씩 소나무 정원을 이룬 전돌로 만든 아치형 "유현문" 담장 따라 언덕 위 사신들의 접대 정각인 "정광헌"까지 학의 날개짓을 하는 기와 처마의 유려한 곡선미와 조화를 이루며 매우 고풍스러운 건축 담장의 걸작품을 이루었다. "덕홍전"과 "함녕전"으로 가는 "광명문"으로 제국주의 세계 열강속에 대한제국의 하늘 광명 햇살이 비추는 고종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진 사랑으로 빛났다. 고종의 침전과 편저였던 팔작지붕의 전통문양을 한 "함녕전"과 외국 사신 접견할 목적으로 지은 "덕홍전"은 서양식 샹드리로 매우 산뜻한 조선후기 전각으로 맑은 햇살에 더욱 더 청초하게 빛났다. "덕홍전"의 뒷뜰인 계단씩 소나무 정원에서 "유현문"의 기와 담장 사이로 "중화전"과 중층 목재건축인 "석어당"이 기와 처마의 날렵한 웅장함과 학의 날개처럼 우아하게 날개짓 하는 아름다움 자태로 고개를 내밀고 있어 궁궐의 평화로운 안식처 같았다. 매우 울창한 소나무 정원의 계단위로 사신들의 접대 정각인 "정관헌"으로 굳은 충직의 향기가 서려 있었다. "정관헌"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슬래트 지붕의 초석위에 기둥과 난간들의 아름다운 장식을 이루며 내부는 적벽돌 벽체와 둥그런 돌기둥,서양식 커텐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과 서양 건축양식의 절충된 독특한 동남아풍 이미지로 매혹 되었다. "정관헌"의 뒷 벽체는 적벽돌 벽체와 함께 시멘트 계단위로 아치형 띠 장식의 목재문과 목재창을 두른 아치형 띠장식으로 옛 근대건축 양식의 고전미가 묻어나는 길이 길이 간직할 만한 근대 양식으로 고혹적인 향기로 가득했다. "정관헌" 마당의 소나무에 드리우며 "함녕전"과 "덕홍전"을 비추고 있어 모든것을 포용하고 섭렵하는 열린 공간으로 매우 탁월한 공간 설계를 이루었다. 덕수궁의 내전을 둘러싼 산책길을 따라 장대하게 우뚝솟은 나무들과 "함녕전" 담장사이로 벽돌문양 시멘트 기둥의 덩쿨 쉼터와 연못가를 이루며 사계절 다른 정감을 다가 갈수 있는 낭만적인 길을 이루었다. 이와같이 "덕수궁"은 "중화전"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기와담장으로 둘러 싼 내전과 계단씩 소나무 정원위로 "정관헌"을 이루고 "중화전"을 중심으로 서북쪽에 "석조전"을 이루며 황제 위엄으로 서양 근대화로 발돋움 하는 동.서양의 매우 조화로운 확트인 공간 설계로 매우 감탄할 만한 경이로운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덕수궁을 감상한 후 수원의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차창가로 고풍스러운 1960년대 화강석 벽체의 밤색 창틀의 "한국전력"앞 소공로로 생동감있는 조각 분수가 광장도로를 이루고 현대건축의 위용으로 뽐내고 있는 "우체국"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어릴적 주말마다 서울로 오가며 피아노레슨을 받고 1983년 대학교때부터 2018년8월까지 살았던 추억의 도시인 서울로 "발전"하는 서울이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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