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관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박수근의 "봄을 기다리는 나목" 주제의 전시회가 열렸다. 2층은 장식 철난간을 이루며 흰색벽체의 검은색 창틀의 무채색으로 2층까지 확트인 천정을 이룬 서양식 건축으로 러시아에서 볼수 있는 원목 목재바닥을 이루며 매우 산뜻했다. 전시실은 박수근이 19세에 그린 수채화 부터 51세 타계하기 직전 유화까지 전 생애 작품과 자료들을 소개하였고 전시제목인 나목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한국전쟁으로 참혹한 시대의 그 시기 곤궁한 생활을 이겨내고 찬란한 예술 꽃을 피운 박수근을 상징하고 있었다. 국민화가 박수근은 양구군 부농가 장남으로 태어나 5세때 서당을 다니고 고운 옷 갖신만 신고 다녔다. 7살때 광산사업을 하신 아버지 사업실패와 전답이 물에 떠 내려가 집안이 기울어졌지만 1926년 12세때 이담에 커서 밀레와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 하나님께 기도하며 초등학교 담임인 오득영선생님 격려로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였다.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셔서 동생들과 아버지를 돌봐야 되기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고학을 해야 했다. 서양화집,양화집,회화집,신문에 소개된 그림,미술잡지,풍물엽서,습작들... 그림공부 자료들을 바탕으로 서양화 모사와 서양화가 스크랩북,서양미술과 통일신라 불상도 포함한 미술 스크랩북을 만들고 미술용어의 메모장을 기록하며 그림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인상주의,추상주의,표현주의,현대 미국회화등...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들을 총 망라하며 독학으로 습득하였다.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그림을 독학하며 1932년 18세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봄이 오다"로 입선하고 1937년 춘천에서 첫 개인전을 갖으며 거의 매년 조선미술전람회 작품을 출품하며 4번이나 선전에 입선하면서 화가의 꿈을 다졌다. 1940년 김복순과 결혼하고 평안남도 도청 서기로 취직하여 근무를 하다가 1945년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취직하였다. 1950년 전쟁으로 남하하여 1952년 가족들과 남한에서 재회하고 미군 PX에 초상화가로 취직하였다.1953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집"으로 특선하였고 1957년부터 미국 일본,한국에서 개인전을 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963년 미국 개인전 준비중 신장과 간이 나빠지고 백내장으로 한쪽 눈이 실명되어 1965년 타계하였다. 1970년 "박완서"가 박수근의 삶을 "나목"이란 제목으로 실화가 아닌 소설을 발표하였고 부인 "김복순"여사가 이구열 선생님의 제안으로 1977~78년 "박수근 화백의 인생기"를 저술하여 2015년 "아내의 일기"로 간행되었다. 즉 박수근의 인생은 어린시절,전쟁체험,화단활동,병마로 시기를 나눌수 있었다. 1950년대,1960년대 한국 사회 서울 풍경 사람들의 일상을 상상해 볼수 있는 4개의 전시실은 각각 물질적으로 고생이 되지만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달라는 ...박수근의 결혼고백 편지의 주인공인 부인 김복순여사,소설가 박완서,박수근 아들 박성남,일찌기 박수근의 진가를 알아본 컬렉터와 비평가의 시선따라 구성하고 박수근이 살았던 서울 창신동부터 그가 일하고 자주 찾았던 명동,을지로 까지 박수근의 공간을 담고 있었다.
제1전시실은 박수근의 생애와 1950년대 박수근이 수집한 독학자료와 함께 초기의 작품들과 삽화,서양화 모사,1950년대 마티에르 기법의 작품,수채화,1950년대 연필과 색연필로 그린것으로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그의 진귀한 그림들이 전시되었다. 특히 인상적인 작품들은 1930년대 "봄이 오다","일하는 여인","봄","농가의 여인","화창한 날","맷돌질하는 여인"의 초기의 입선작품들로 밀레 화풍의 영향을 받아 노동의 숭고함과 평화로운 농촌풍경을 나타내고 있었다. 수채화 작품인 1933년 "철쭉"과 1934년 "겨울풍경"으로 따쓰하게 감싸는 빛과 주변의 섬세한 그림자 표현으로 그의 소박한 인간미가 느껴진 정겨운 고향같은 추억의 향수를 젖게 하였고 1950년대 "춘일"과 1955년 "마을 풍경"은 섬세한 그림자 표현과 절제된 색상으로 먹물에 농담을 칠한 동양화풍 정감이 흘렀다. 연필로 그린 수채화 작품인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전반"오리한쌍"은 화사한 색채로 서양화기법의 동양화풍 정감으로 원왕같은 박수근의 부부를 표상하는 것 같았고 "과일이 있는 정물","고무신","책가방"작품으로 배부르게 먹을수 있는 과일들과 그 당시 유행했던 디자인의 고급스러운 물품들로 생활이 안정되어 가는 박수근의 모습을 엿 볼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60년대 전반 연필로 그린 풍경과 꽃,일상모습들로 묵직한 선들에 정겨움이 묻어 나고 있었고 서양화 모사로 야수파와 초현실적인 화풍등 현대 서양화풍을 부단히 답습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냈다. 색연필과 펜으로 그린 1950년대 후반~60년대 전반 "나뭇잎"으로 고난속에 희망으로 기다리는 박수근의 모습 같았다. 유화 작품인 1952년 "감","도마위의 감자","도마위의 굴비","도마위의 조기","굴비"로 고흐의 생선을 그린 정물화의 영향과 밀레의 정서를 융합하여 우리나라 정감으로 승화하였다.숭고한 노동을 통한 일용한 양식의 감사 기도가 넘쳤다. 1964~1965년 펜이나 색연필로 그린 "한국전력삽화"는 매우 단순한 그림에도 불구하고 정이 묻어난 어릴적 동심이 흘렀다. 즉 황토색 계열과 무채색의 마티에르 화가로만 알았었던 그의 선입견을 깰수 있었다. 마티에르 기법 작품들은 1953년 "기름장수",1950년대 전반 "노상에서","맷돌질하는 여인"," 절구질하는 여인"으로 한국전쟁 으로 참혹한 시대의 곤궁한 생활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모습들을 숭고한 모습으로 창출하였다. 특히 1936년 "일하는 여인"과 1938년 "농가의 여인" 작품들은 1952년,1956년,1960년대 전반에 걸쳐 "절구질하는 여인" 제목으로 마티에르 기법으로 승화하여 다시 그려 냄으로써 가장 진실한 모습을 화폭에 담고자 고군분투하는 그의 태도를 보여 주었다.12세때 다짐했던 밀레가 그렸듯 농촌의 풍경과 일상을 소재로 평범한 이웃 생활에 관심 같고 20세기 현대미술의 기법을 독학으로 습득하여 안정된 구도와 묵직하고 입체적인 선을 구축하고 유화의 새로운 방향인 절제된 색채의 독특한 마티에르 기법으로 우리나라 농촌 풍경과 평범한 일상생활의 모습을 이웃사랑의 인간미와 숭고한 정신으로 발현하였다. 초기 작품들인 1930년부터 우리나라 삶의 모습을 대변하는 국민화가의 모습을 볼수 있었다.
제2전시실은 박수근이 1953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집"으로 특선한 후 평론가들과 인정을 받으며 왕성한 활동을 했던 시기로 "미군과 전람회" 주제로 전시 되었다. 박수근은 6.25전쟁으로 남한으로 피난하여 가족들과 재회하고 서울에서 생계를 위해 미군 PX에 초상화가로 취직하였다. 박수근의 실화가 아닌 예술가 삶을 증언했던 나목의 저자 "박완서"는 그 당시 미8군 PX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로 미군 물자와 미군 상대로 한 장사는 딴 세상처럼 시끌시끌한 활기가 넘쳤고 전쟁의 불안에 찌든 우리가 밖에서 보기에 화려한 별세계였다. 미군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는 품목은 스카프에 그리는 초상화였다. 1달러 30센트한 스카프는 아주 잘 팔렸다. 용이 날염된 스카프에 대각선 귀퉁이에 초상화를 그려 주면 6달러를 받을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전쟁의 페허속에 화가로써 정착은 매우 힘들었지만 1953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집"으로 특선하여 미군과 전람회,국전등 현대작가 초대미술전에 중요한 전람회 참여하면서 중견 화가들과 나란히 하고 당시 유행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지만 진솔한 소재와 개성적인 화법으로 평론가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1962년 용산 주한 미군 사령부 도서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40여점 전시되었고 다수가 해외로 판매 되었다. 제2 전시실에 전시된 작품으로는 "꽃피는 시절",1953년 "집",1956년 "판자집",1960년 "제비",1954년 "아기업은 소녀",1957년 "절구질하는 여인",1959년 "쉬고 있는 여인"과 "앉아 있는 여인",1961년 "휴식 (노상의 사람들)",1962년 "나무와 두여인",1962년 "소와 유동", 1963년 "유동",1961년 "실직",1961년 "노인","할아버지와 손자",1959년 "한일",1963년 "농악" 작품등으로 전쟁후 불우하고 암담한 그 시절에 희망으로 꽃피는 시절을 기다리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일상속에 흥겨운 흥의 정취로 가득했다. 그중 특히 매우 인상적인 작품들은 1957년 "절구질하는 여인"으로 이번 전시회에서 자주 등장했던 그림으로 그림마다 서로 각기 다른 정감이 흘렀다. 수채화로 그린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전반 "나무와 두 여인"과 1960년초 마티에르 기법인 유화 "나무와 두 여인" 2개 작품은 같은 대상을 그려 낸 작품으로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을 엿볼수 있었다. 연필로 그린 1960년대 전반 "농악"과 유화로 그린 1960년초 "농악" 2작품으로 고통을 열매로 승화하는 풍년의 절정에 달하였다. 1962년 "소와 유동"으로 커다란 소를 상단에 크게 배치하고 옹기종기 모여서 노는 아이들을 하단에 배치하는 안정된 구도안에 순박한 표정의 소와 함께 같은 동네 친구들끼리 놀이하는 모습이 정이 넘쳐 흘렀다.1953년 "집"은 닭이 거닐고 있는 초가집마당에서 일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을 검은색 테두리 선에 밤색계열로 채색함으로써 고혹적인 시골정취로 가득했고 짧은 단발머리의 짧은 치마를 입고 있는 소녀가 동생을 업고 있는 1954년 "아기를 업고 있는 소녀"로 가난에 허덕임에도 불구하고 의엿하게 살아가는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56년 "판자집"은 추상파의 현대화풍을 보여주고 있었고 초가집 대문앞에 아기를 업고 있는 소녀가 지켜보고 아이들이 놀이하는 정취인 1963년 "유동"은 매우 정겨운 추억의 개구장이 사랑이 넘치는 동네길 같았다. 이 시기 평론가들은 단순화된 인생의 정경을 통해 우리는 따뜻하고 어딘가 고독한 그의 인간상을 느끼게 하는 프랑스의 바르비종파 화가 밀레의 그림과 공통점을 보여 주고 있었다. 회색톤에 조용히 스며드는 소박한 정취가 담겨있어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시를 읊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한국적 정서가 담겨 있었다. 커다란 화폭들이 커다란 화강암으로 만든 조각의 울퉁불퉁한 표면과 유사한 효과를 자아내며 창문 용지로 사용되는 까칠한 한지 창호지 질감을 나타내었다. 잘 조화된 장식적인 스타일로 배치하여 한국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차분한 백색과 회색의 색조는 조용함을 풍기고 넓은 형식들은 힘을 보여주었다.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그의 시각은 늘 새롭고 그의 화면은 생명력이 넘쳐 흘렀다. 서양의 유화 도구로서 우리나라의 생활 감정을 담은 소박하고 깊이감 있는 마티에르의 훌륭한 기법으로 우리나라 유화의 방향의 새로운 경지를 대변하였다고 평가 하였다.
제3전시실은 한국전쟁을 참전 후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기록하기 위해 독학으로 사진기술을 습득하여 따쓰한 시선으로 서울 풍경을 사진으로 담은 한영수의 1956~1963년 서울 모습의 사진들과 함께 "창신동 사람들" 주제로 전시되었다. 박수근은 6.25전쟁중 남한으로 피난해 동대문시장과 가까운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피난민들과 같이 정착했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평범한 견해 갖고 페허에서 강인하게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그림에 새겨 넣었다. 판짓집이 줄지은 좁고 누추한 그림속에 등장하는 이웃들은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한국전쟁으로 살아 남는 우리 할머니세대 1950년대와 1960년대 서민들의 삶이 담겨있는 우리나라의 사회상을 볼수 있었다. 10년동안 박수근의 창신동 삶은 전성기를 누렸던 곳으로 그의 화실인 마루는 동네 아주머니와 기름장사 아주머니 각종 행상인이 잠시 걸터 앉아 도란 도란 이야기꽃 피우거나 부채 할아버지 장상길을 재촉하는 쉼터이기도 했다. 때때로 외국사람 몇사람이 서성이며 그림을 감상했던 화랑이였고 나의 친구들이 소란을 피우고 북적거리고 한겨울 따뜻한 햇볕 한구석에 땀과 먼지를 버무려 놓은 옷가지를 조용히 빨래하시는 어머니 빨래터의 생활터였다고 그의 아들 박성남이 증언하고 있었다. 박수근은 주로 노상하는 "과일파는 여인"과 "두여인", 그리고 시장권이 형성되며 활기찬 모습인 1950년대 후반 "시장의 사람들"과 노상하는 시장에서 물건들을 구매하려는 여인들 모습인 "시장의 여인들"등.. 행상하는 여인들의 시장의 모습을 그렸다. 노상하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동생을 보살피고 부모님 사랑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어린 소년.소녀의 모습을 그렸으며 가난에도 불구하고 따쓰한 정이 흐르는 아이들과 노인들의 놀이터로 판자집에서 극심한 고난을 이겨내고 기와집 골목으로 변모하는 창신동 마을을 그렸다. 그중 매우 인상적인 작품들은 1954년 "아기업은 소녀"를 그린 후 1960년대 전반~1964년에 "아기를 업고 있는 소녀"를 3번이나 같은 대상을 그려 냈다. 그 시절 행상하러 나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동생을 돌보는 의엿한 소녀들의 너무 자랑스러운 정겨운 모습이였다. 고아가 되어 행상하는 어린 소녀의 모습인 1950년대 후반 "소녀"로 전쟁의 참혹한 피해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노상"의 작품 제목은 4번 등장하였는데 연필로 그린 1960년"노상의 사람들",유화작품인 1959년"노상의 사람들"과 "노상의 여인들",1950년 "노상에서",색연필로 그린 "노상의 두여인" 작품 처럼 같은 대상을 그렸다. 그 당시 점포도 없이 행상을 하며 가정을 꾸려가야 했던 형편으로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1960년대 전반 "세여인"작품이 2점 전시되었다. 서로 각기 다른 물품을 거리에 앉아 노상하는 모습들로 자식들을 위해 불굴의 힘이 솟구치는 활력이 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1959년부터 1960년대 전반까지 "앉아있는 여인"작품이 3점 전시되었다. 장사가 되지 않을 때 마다 우울한 심정을 극복해가는 그 시절 시장의 여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포데기로 아이를 업고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1964년 "귀로"로 힘든 일을 마치고 판자집촌 창신동 집으로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바삐 걸어가는 "귀로" 작품과 같은 대상을 그렸다. 1963년 "청소부"는 드물게 남자를 그린 청소부의 휴식하는 모습으로 생활의 원동력이 된 지게의 생명바퀴로 표출되었다. 화면에 가득 메운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가슴에 품고 있는 1960년대 전반 "모자"로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 넘쳐 흘렀다.1960년대 전반 "노인들"과 1962년"노인들의 대화"는 같은 대상을 그린것으로 가난의 굴레에서 이웃끼리 오붓한 정이 흐르는 동네 정취가 느껴졌다. 1950년대 후반 "판잣집"으로 1956년 "판자집"과 같은 대상을 그렸다. 박수근은 미군 PX에서 초상화부에서 일하면서 창신동에 집을 마련했다. 담장과 마당이 없는 판잣집은 가난의 상징이지만 따쓰한 색채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온기를 표현 했다. 1950년 후반 "창신동 기와집"으로 대문과 담장이 있는 기와집으로 황토색의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페허속에 꿋꿋하게 살아가며 이루어낸 성장을 표상하고 있었다. 연필로 그린 1954년 "창신동 풍경"과 같은 대상인 1950년 후반 "창신동 풍경"으로 박수근 작품에서 드물게 복잡한 배경과 인물들이 함께 그려진 작품이였다. 고목나무가 높이 우뚝솟고 고운색 치마 저고리를 입은 아이들이 노는 작은 한옥들이 밀집해 있는 골목길로 피땀 흘려 이루어 낸 한가로운 쉼이 느껴지는 동네길 같았다.1950년대 후반 "독서"로 박수근의 장녀 박인숙의 책읽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어여쁜 저고리 색상과 함께 화면을 한가득 채운 독서하는 딸의 모습으로 아버지 애정이 듬뿍 담고 있었고 1952년 소년(장남,박성남)의 인물화로 둥근 머리의 뚜렷한 이목구비로 건실하게 성장해 가는 아들의 모습 같았다. 어릴적 동네 사진관의 추억의 아이들 표정처럼 빛났다. 1950년대 후반 "아기업은 소녀와 아이들" 1962년 "공기놀이 하는 소녀들",1961년"그림그리는 아이들"로 가난을 개의치 않는 천진난만 동심의 멜로디가 흘렀다.
제4전시실은 박수근이 살았던 서울 창신동부터 그가 일하고 자주 찾았던 명동,을지로 까지 공간을 담은 "반도화랑"과 "나목"을 주제로 전시 되었다. "반도화랑"은 우리나라 최초 상업화랑으로 반도호텔1층 로비에 마련되었다. 반도호텔은 외교관 사업가 관광객을 위한 영어와 미화가 통용되는 곳으로 반도화랑 주요 구매자는 외국인들로 서양의 유화를 한국적으로 잘 해석한 화가인 박수근의 작품들이 시선을 끌었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반도화랑을 통해 그의 작품들을 구매함으로써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되였다.특히 1956년 한국을 방문한 "마거릿 밀러"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화가 박수근"을 소개하며 박수근과 친분을 통해 미국에 70점 작품 판매 주선을 하였고 "씨리아.즤머맨"은 "한국현대화가"로 그를 널리 알렸다. 1965년 박수근이 타계하고 1965년 코리아저널 기사와 1965년 유작전을 통해 더욱 더 알려지고 1970년대 말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한 후 그의 그림은 비로소 국내에서 인기리에 거래되었다. 그의 10주기 기념전,회고전,유작 소품전등을 통해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당시 그는 겨울의 추위가 두려울 정도로 너무 추워 지긋지긋하고 진짜추위는 정신적 추위로 이루어 놓은 것이 무엇인가 더걱 겁이 난다고 고백하였다. 봄의 생각만 해도 가슴에 벌써 오월의 태양이 작열하다며 봄을 기다리는 나목임을 말해 주었다. "나목" 주제 작품들은 다음과 같았다. 희망을 꿈꾸며 행상하러 가는 모습인 1964년 "나무"와 1964년"강변",강철같은 의지로 화사한 저고리를 이고 행상하러 가는 1960년대 전반 "고목과 여인" 작품들이 푸른 잎새가 맺힌 나무를 그린 1960년대 전반 "나무와 두여인" 작품으로 숨가쁜 여인들의 일상들이 희망찬 미래로 승화 되고 있었다.1962년 고목을 바라보며 머리에 이고 귀가하는 "귀가"와 아이를 손잡고 머리에 짐을 이고 고목이 우뚝솟은 집으로 향하는 1964년 "귀로"로 같은 대상의 그림을 그렸다. 극심한 고난의 행진을 희망을 노래하는 고목을 바라보며 견디어 가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희망을 내다보며 나무에서 안식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인 1960년대 전반 "나무아래"가 은은한 바탕색의 소나무 향기로 그윽한 1964년 "나무와 여인"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열매를 맺은 여인의 모습으로 승화하고 있었다. 강직하게 시련을 견디어 내는 겨울의 1960년대 전반 "고목"이 1961년 색연필로 그린 수채인 "고목"으로 은은한 향기를 발하며 꽃망울을 맺힌 고운 새각시 모습의 "고목"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수채화인 "고목"은 "ㄱ자"모양과 "Y자"모양의 두그루 고목나무를 넘실거리는 가지로 화면을 가득 채우며 수평과 수직방향으로 반복적으로 채색해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로인해 나무가지를 따라 흐르는 짧은 붓터치에서 생동감이 넘치고 은은한 색채의 배경과 함께 그 사이 사이 피어있는 흰 꽃에서 고운 향기로 가득한 여인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1960년을 전후해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던 그의 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였다.연필로 그린 1959년 "나무"와 같은 제목인 푸른잔디로 푸른잎새들을 맺은 나무들인 1960년대 전반 "나무"로 싱그러운 향기로 가득찼다. "꽃피는 시절"과 같은 대상의 맥락으로 곤궁한 생활을 이겨내고 찬란한 예술 꽃을 피우는 박수근 자신의 모습 같았다. 연필로 스케치한 1950후반~1960년 전반 "모란"은 민화를 참고로 한 그림으로 1950.60년대 화단에 서양미술이 급격히 유입됨으로써 새로운 현대미술을 모색하고 전통 미술에 관심을 두어 한국적인 것을 탐구했던 모습을 엿 볼수 있었다. 1960년대 전반 "모란" 작품들로 고난속에 숭고한 열매를 맺은 한국적인 미소로 빛났다. 1960년대 전반 "복사꽃"과 1960년 "목련"은 은은한 색채의 동양화풍 미인도를 자아내며 화가 자신의 희망 찬 노래 같았다. 즉 고목인 화가 자신의 마음과 곤궁의 시련속에 희망을 노래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한국의 어머니를 숭고한 이미지로 승화하고 있었다. 고난속에 희망을 잊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면 반드시 작열한 태양이 떠오른다는 교훈을 주고 있었다. 향토적인 향기로 가득찼던 작품들은 다음과 같았다. 수채화로 그린 1950년 "춘일"과 같은 제목으로 유화로 그린 1950년대 후반 "춘일" 2점이 전시되었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늘어선 골목길로 늦은 오후 길가에서 노는 아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목가적인 그림으로 한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겼다.1959년 "산"은 2점이 전시되었는데 황토색을 기본으로 신비한 산의 형세를 입체감 있는 선들과 검은색 선,색채변화로 산의 양감과 질감을 표현하여 향수어린 우리강산을 표현했다. 산기슭 기와집 아래 초가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렸던 1958년 "초가집"과 같은 대상인 작품을 1960년대 전반 2점이 전시되었다. 그중 1점의 "초가집"작품은 그림재료가 부족했던 박수근이 캔퍼스외에 나무,종이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는데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종이보드를 사용해서 그렸다.목재담장의 초가집으로 황토 흙에 에워싸며 생명의 기운이 넘쳐 흘렀다.1960년 전반과 1964년 "농촌풍경" 2점은 수채화인 1955년 "마을풍경"과 같은 대상작품으로 황토벽의 초가집에서 항아리를 이고 일하는 여인의 모습과 산아래 기와집과 초가집앞 논밭으로 소를 끌고 밭을 갈고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의 농촌풍경으로 농촌의 일상풍경을 그려냈다.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전반 "웅크린 개"와 1960년대 전반 "고양이"는 따쓰한 집마당에 누워 있는 정겨운 향수로 가득했고 색연필로 그린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전반 "소"와 1963년 "오리"는 순박한 사랑을 나타내고 1960년 "새"와 1964년 "사랑(바위와 새)"원왕같은 부부를 묘사하고 있었다. 1963년 "비둘기"는 한쌍의 비둘기를 화면에 조각한듯 벽화같은 그림으로 사랑을 묘사하고 있어 이색적이였다. 1950년대 후반 "복숭아"와 색연필로 그린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전반 "정물"은 같은 대상을 그린 것으로 전통 나무그릇에 익어가는 복숭아의 생명력으로 감사기도가 느껴졌다. 즉 자연과 동물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였다. 1962년 "농악"으로 풍년의 우리 민속놀이 농악으로 흥이 솟구쳤다. 색연필로 그린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전반 "당초문 암막새 프로타주","국화문 연화문 수막새 프로타주","연화문 수막새 프로타주"로 색연필로 문양을 섬세하게 표현하기 위해 한점 한점 선들을 이루면서 겹겹히 층을 만들어 입체감을 표현한 기법으로 매우 놀라웠다. 1958년 우리나라 최초 판화단체인 한국판화협회 창립 회원으로 활동했던 그의 증거인 탑주위를 여인들이 도는 목판화인 "불탑"은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전반 "금강역사"와 함께 전통문화 향기로 가득했다. 즉 전통 민속놀이와 전통문화로 흥과 쉼을 노래하였다. "노인과 여인들",1960년대 전반 "세여인",1961년 "시장의 사람들",1964년 "여인들",1956년 "앉아있는 여인",1956년~1957년 "노변의 행상"으로 여성의 행상하는 모습을 불굴의 의지의 상징으로 당당하게 표현했다. 색연필로 그린 1954년 "빨래터"와 같은 제목을 그린 유화작품 "빨래터"로 시냇가에서 빨래를 했던 여인들의 일상의 모습으로 매우 정겨운 정취로 가득찼다. 즉 페허속에 가난을 이겨내는 여성의 노동의 모습을 평화롭고 숭고한 빛으로 발현하였다. 그 당시 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이 격찬하였다. 우리나라 추상미술이 유행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박수근은 미국에서 들어 오는 추상화를 공부하면서 그의 그림에는 자신의 화풍을 꿋꿋히 고수하며 물감을 여러 겹을 쌓아 올려서 거칠한 질감을 만들어 내고 형태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고 색을 아껴 가면서 그린것이 특징이다.이러한 그림들은 우리나라 옛 흙벽,분청사기,창호지, 화강석으로 만든 불상등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기법은 한마디로 화면을 두껍게 바르고 여러 겹의 층을 형성하는 일로 작업이 되풀이 하는 동안 그의 마티에르는 두께를 더해가고 색층은 빛을 더해간다. 회색을 주조로 하는 층은 박수근의 예술 표정이고 그의 우직성과 더불어 미의 건강성을 빛내고 모든것이 싫증이 나고 변하는 연대에서 그의 작품 가치의 빛이 변하지 않는것은 그의 시간속에 살면서 시간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몇개 초기 작품인 감이나 생선 작품은 강렬한 색상을 나타내지만 이후 작품에서는 이러한 색채들을 본 적이 없었다.옷 같은 데서 가끔 엷은 노랑 푸른색과 붉은색 흔적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 같은 색은 엷게 기름을 섞어서 밑바탕에 칠했다가 다시 헝겊 같은 것으로 씻어낸 듯 하여 그가 얼마나 색을 절제하고 아껴 썼는지 알수 있다. 그의 치밀한 구도로 조작된 구도는 특히 만년 작품에는 볼수가 없다. 치밀하게 계산되었음에도 꾸민데가 보이지 않고 여유있는 배합에서 위치의 경영에 뛰어난 솜씨를 보임으로써 그의 성품은 겸손하고 다정한 성품이 화면의 내용에 나타난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전시실을 통해 박수근의 여러가지 자료들을 만나 볼수 있었다. 창신동에서 살았던 시기 가족들 사진으로 젊고 순수한 이미지의 잘생긴 박수근과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내 김복순여사의 모습으로 행복했던 창신동 삶의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미술잡지들을 오려서 노트한 박수근 삽화첩,1950~60년대 자신의 삽화를 모은 박수근 삽화첩,박수근의 신문기사와 주요 전시 자료,박수근의 개인 이력서,초청장,개인전 리플릿,반도화랑을 통해 외국과 교류했던 서류와 편지,미술사학자 최순우에게 보낸 연하장,미술기자인 이구열이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부터 1965년 유작전까지 박수근이 참가한 단체전,개인전,반도화랑 운영 현황 등 박수근에 관련한 기사를 모은 박수근 스크랩북,화집,코리아인포머,1955년 제7회 미협전스크랩북과 1956년 제8회 미협전스크랩북,1961년 미술계 스크랩북,1960년~1962년 국제자유미술전 스크랩북등... 그당시 국내외 미술계 동향과 자료들을 알수 있고 박수근에 대해 사실적으로 조명할수 있는 진귀한 역사적인 자료들이였다.
이번 전시회를 통하여 박수근화가의 그림 특징들을 알수 있었다. 그의 그림의 특징은 단순한 구도안에 안정감 있는 배치와 단순한 배경을 두었다. 입체감 있는 선과 우리나라 황토의 생명이 기운이 깃든 황토색을 중심으로 극도로 아낀 색채안에 검은색 테두리 선으로 생동감을 주었다. 마티에르 기법을 구사하여 우리 할머니 시대 삶의 모습을 그린 그림 작품들이 문화재의 보고 처럼 매우 귀중하게 빛났다. 일상의 모습에서 집약적인 내용을 담아내어 페허속에 여인의 투철한 삶의 숭고함을 나타내고 있었다.밀레의 숭고한 정신과 20세기 현대기법을 절충하여 우리나라에 정서에 맞는 황토색을 중심으로 마티에르 기법을 승화한 창조적인 화가였다. 그림안에 후손들이 본 받을 만한 교훈을 주고 있는 나라사랑과 국민사랑으로 가득찼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에서 같은 대상을 여러번 그린 작품들을 발견할수 있었다. "아기업은 소녀","세여인","앉아있는 여인","판잣집","산","초가집"시장의 사람들","절구질하는 여인","귀로"작품들은 같은 대상과 같은 제목으로 여러점들이 전시되었다.1936년 "일하는 여인"과 1938년 "농가의 여인" 작품들은 유화작품인 "절구질하는 여인" 제목으로 마티에르 기법으로 승화하여 여러점 그렸고 "노상"의 작품 제목은 4번 등장하였는데 연필로 그린 1960년"노상의 사람들",유화로 그린 "노상의 사람들"과 "노상의 여인들",1950년 "노상에서",색연필로 그린 "노상의 두여인" 작품 처럼 같은 대상을 그렸다.1960년대 전반 "노인들"과 1962년"노인들의 대화"는 같은 대상을 그렸고 1950년대 후반 "복숭아"와 색연필로 그린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전반 "정물"은 같은 대상을 그렸고 "꽃피는 시절"은 "나무"와 같은 대상을 그렸다. "농촌풍경"은 수채화인 1955년 "마을풍경"과 같은 대상작품이였다. 수채화작품과 유화작품으로 그린 "나무와 두 여인과 "춘일",연필로 그린 작품과 유화작품으로 그린 "창신동 풍경"과 "농악","모란","나무","빨래터"로 같은 제목으로 연필과 수채화,유화를 통한 실험으로 그가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화폭에 담고자 부단한 노력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을 엿볼수 있었다. 모든 작품에서 같은 대상을 그리려는 시도로 그의 끈질긴 경주로 인해 같은 대상일지라도 볼때마다 전혀 싫증이 나지 않는 각기 다른 정감으로 생명의 빛이 넘쳐 흘렀다. 이와같이 물질적으로 고생이 되지만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달라는 ...박수근의 결혼고백처럼 아내에게 약속을 실현하였고 어릴때 꿈꾸었던 밀레와 같은 화가처럼 우리나라 정서를 세계에 알리는 꿈을 성취 시킨 국민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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