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기도 용인시 경기도박물관(2022년8월23일)

백재은 2022. 10. 18. 10:21

경기도박물관

8월23일~상갈동거리 언덕위로 입구부터  진주처럼 빛나는 조형물로 찬란한 문화를 표출하고 있었다.정원언덕으로 선돌,지석묘와 통일신라시대 고분으로 주위 거리를 비추며 문화유적지에 온 기분 같았다. 팔각지붕의 겹처마를 이룬 음고정의 정자아래로 바위절벽을 이루며 연못가를 이루고 매우 정교한 조각을 이룬 고달사지승탑,화암사지 쌍사자 석등으로 문화산책길을 이루었다. 형형색깔들의 벽체 장식을 이룬 경기도어린이박물관으로 동심의 창조관 같았고 용뫼산 자락 상갈공원에 둘러싼 경기도박물관으로 아늑했다.기획전시실은 제1부 대한제국의 비극,그들의 선택 제2부 항쟁과 학살,그날 그곳을 기리다 제3부 친일과 일제잔재,제4부 유물로 만나는 경기도의 독립운동가로 나누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관한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상설전시실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물들이 전시되었다. 한반도와 비슷한 해안선 만들었던 시기는 신석기시대로 최초 도기인 석기와 간석기사용,기하학적 무늬를 새긴 빗살무늬토기인 토기를 제작하여 신석기혁명을 이루었다.청동기시대는 장식을 거의 안한 민무늬토기와 매장의례에 쓰는 붉은간토기나 채문토기를 사용하였다.한나라 침략으로 고조선이 멸망(기원전108년)하고 기원전1세기경 경기지역에 마한에 속한  여러나라들이 있었는데 그중 백제는 고구려에서 온 온조가 하남위례성에 세운 마한의 한나라로 서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여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일찌기 전성기를 누렸다.경기땅에 세운 첫 국가인 백제는 낙랑의 견제를 이겨내고 점차 마한을 통합하여 3세기 중후반인 고이왕때 고대국가 기틀을 마련하였다.수도 한성에 풍남토성을 쌓고 바닷길로 중국과 교류하였다. 4세기경 근초고왕은 고구려와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성기 맞음으로서 백제는 중국-왜-가야등과 연합하여 신라-고구려 연합과 경쟁관계가 되었다.5세기 광개토왕과 장수왕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한강유역을 진출하여 무덤등 유적을 남겼고  551년 신라와 백제 연합으로 한강유역을 빼앗기기 전까지 고구려는 한강유역에 군사기지를 두어 고구려문화가 백제와 신라에 영향을 주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 후 고구려와 백제문화를 수용하여 경기땅은 신라의 대외교류 거점이 되어 중국 선진문화를 수용하였다.도로정비와 우경과 수리시설 발달로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경작지와 생산시설 창고를 마을에 두어 발달된 고대국가를 이루었다. 신라는 8세기경 북방개척을 하며 발해를 견제하였다.900년경 북쪽의 발해와 비교하여 남쪽에는 후삼국인 신라,후백제,태봉(후고구려)세력이 다투고 있었다.918년 태봉의 신하들은 민심을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개성출신 왕건은 민심을 수습하는 정책을 펴서 지방세력인 호족과 협력하여 후삼국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후백제와는 세력대결을 벌렸는데 결국 후백제의 내부분열과 신라항복으로 왕건은 후삼국을 936년에 통일 하였다. 옛고구려,백제,신라,발해유민까지 받아들여 새롭게 통일국가를 이룩하였다.고려초부터 개방적인 대외정책으로 중국 당나라가 멸망하고 등장했던 5대10국을 비롯하여 송나라,여진,거란,일본,베트남,오키나와 등과 교류하며 무역을 하였다. 경기지역 벽란도는 세계와 통하는 관문으로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 방문하였다.그중 송과 가장 교류가 활발하여 송의 불교,유교경전,의술,약재,도자기,음악등 발달된 문물 받아들이고 송에는 인삼,나전칠기,화문석,먹,종이,삼베,모시등을 수출했다.경기는 서해발달로 해상교통을 통해 세계와 교류한 곳으로 새로운 문화 문물,풍습이 먼저 전해지고 도자기 제작 기술 전해져 청자와 백자를 만들고 대장경을 수입하여 고려대장경을 제작하였다.금속활자를 세계최초로 발명하여 활자기술의 꽃을 피웠다.백자 만드는 기술은 청자제작 방법 전해질 무렵 들어왔는데 경기지역 초기가마에서 처음 찻그릇 만들다가 정교한 백자제기와 청자를 생산하였다.백자제기는 왕실과 지방제사에 사용하였고  중국 송나라 백자를 수입하기도 하였다.12세기무렵 전라도 강진과 부안에서 백자제작 기술을 발전시켜 고려특성이 드러난 아름다운 백자를 만들었다.청자는 10세기경 중국 기술 받아들여 시작하였고 12세기에 이르러 비색청자는 중국 뒤지지 않는 천하 제일의 평가를 받았다.13세기와서는 고려만의 독특한 상감청자가 유행하여 세계수준의 도자기로 자리를 잡았다. 삼국시대 불교 전래와 함께 발달된 인쇄문화는 고려의 금속활자 발명으로 정점에 이루었다. 금속활자는 13세기초 발명하여 개경과 경기에서 널리 쓰이다가 지방에 까지 퍼져 고려말까지 사용하였다.목판에 비해 신속한 인쇄가 가능하게 되었다.농업관련 책과 "향약구급방" 의학서가 목판으로 만들어져 전국에 보급되 백성들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부처의 가르침인 불교경전 전체를 대장경이라 하는데  983년 중국 송나라가 세계 최초 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초조대장경은 고려의 거란침입때 왕은 남쪽으로 피난가고 수도 개경을 빼앗겼을 정도로 위태로운 때 부처님 힘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극복하고 불안한 백성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만들었다.수십년걸쳐 만든 대장경 목판은 1232년 몽골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불타 없어져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는데 경기는 대장경 목판과 금속활자가 제작되며 인쇄 중심지가 되었다.코리아는 여러나라와 무역을 했던 고려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려는 1300년경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카울리,솔장가등으로 노래하였다.예성강 어귀 벽란도는 국제항구로 개경은 국제도시를 이루었다.14세기와서 주로 원(몽골)과 교류하며 우리나라는 동서양을 잇는 세계무역 중심지가 되었다.13세기 동아시아에 들어선 몽골은 서쪽으로 중동,유럽,동쪽으로 고려까지 침략하였다. 몽골과 30년 전쟁을 외교로 끝낸 고려는 80년간 몽골의 내정간섭 영향을 받았다. 원의 풍습이 고려 지배층 중심에 퍼지고 고려의 복식,음식,음악이 원의 상류층에 유행하였다.원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개경과 경기에는 몽골,중국,아랍, 중앙아시아 등 사람들이 오가며 동서양 문물이 접촉되었는데 이때 주자학(성리학), 라마교,달력(수시력),면화,농업기술등 보급으로 고려 생활에 변화를 주었다.고려말 전해진 주자학은 조선시대 정치철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려는 신라말부터 부처를 받아들여 섬겼던 불교가 민심을 좌우하는 신앙이였다.왕실도움으로 절이 세워지며 운영되었고 절에는 원을 두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짐승이나 도적으로 보호하는 여관역할을 하였다.불교영향으로 화장을 하며 영혼의 세계가 있다는 믿음으로 각종 물건을 무덤에 집어 넣었다.지배층은 죽은이의 일생기록한 묘지명을 세우고 신분에 따라 석실,석곽,석관,옹관등에 묻었다. 문벌집안을 형성하였고 딸과 아들에게 재산을 고르게 나누며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관계를 이루었다.고려역사를 기록한 대표적인 책으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남겼다.공민왕 시기 원의 간섭을 벗어나 고려의 변화하는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권문세력에 맞써 새롭게 성장한 무인세력과 사대부들은 근본적인 개혁을 촉진하려 시도 했지만 결국 정도전의 중심으로 급진개혁파는 온건개혁파인 이색과 정몽주를 제거하고 1392년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조선을 건국하였다.고려후기 원나라에서 들어온 성리학(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유교 이상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백성은 나라의 근본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며 명나라 교류를 통한 새로운 문물을 받아 들였다. 건국초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정책을 펴고 점차 사회가 안정되면서 학문과 과학을 크게 발달시켰다.조선건국 한양을 도읍하고 태종때 전국을 8도로 나누게 되어 나라의 뿌리로 경기역할이 강화되었다. 경기는 국가 근본의 땅으로 새로운 학문 사상과 문물이 경기로 들어와 수용되고 경기에서 재창조되었다.국왕의 가르침이 제일 먼저 시행되었고 조선시대 사대문화 중심으로 양명학,실학등 개혁을 탐색하는데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지지하는 뿌리로 새로운 사회로 가기 위한 물줄기였다.경기도는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로 교통의 중심지와  물자수송을 물길을 통해 전국을 잇는 수문의 중심지였다.그리고 외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서로간 왕래하던 사신들의 행차로 사행은 선진문물을 체험하고 외부세계와도 통하는 문화교류의 장이였다. 조선후기 대동법 실시로 상품화페와 경제발전으로 전국적으로 장시가  활성 되었다.장시는 사람과 사람,지역과 지역의 상품과 문화를 연결해 주는 공간으로 조선후기 사회,경제 ,문화변화와 생활상을 총제적으로 담고 있었는데 경기도는 지리적으로 사통팔달 교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각종 문물 집합소로  전국 장시 중심지로 발전하였다.주인공의 겉모습,성격,인품,정신적면을 담고있는 초상화는 기록이나 예술작품으로 만  의미하지 않고 제작준비 시점부터 정성을 다하고 완성후에 살아있는 사람과 똑같이 여겼다. 자신의 모습을 남기거나 누군가 기억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리며 복을 염원하였다.문인화의 새로운 화풍이 등장하였는데 문인화는 사대부가 그린 그림으로 중국화법을 수용하고 고려전통과 유교문화를 받아 들이며 시와글씨 그림을 일치시키는 사상이였다.의복은 정교한 바늘 땀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의복의 무늬에 담아 염원과 소망을 기원하였다.의복을 통해 사대부의 가치관과 규범이 고스란히 담아 예를 다하였다.상설전시실을 지나 1층 참여 기증실에 정조가 극찬한 경기명가 용인이씨 가문에서 3차례 기증한 자료가 전시되었다.조선후기 경화사족의 역사와 문화를 상세히 볼수 있는 교재와 문집,초상화,편지를 천년까지 전통 계승한 명가의 모습 엿볼수 있었다.

선돌
통일신라시대 고분
고달사지승탑
화암사지 쌍사자 석등
정원
경기도어린이박물관
경기도박물관

기획전시실)

난죽괴석도병풍
오세창 전서
안중식~노근란도
2.8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상설전시실)

뼈항아리 (통일신라)
당초무늬 암막새(통일신라)
청동 정병(고려)
청동거울(고려)
청자 상감 국화무늬 향합(고려13세기)
청자 상감 꽃과 새 무늬 의자(고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초상(조선)
조선 태조 어진(조선)
여진족 시전부락 토벌도(조선)
한양지도(조선18세기)
이중로 초상(조선)
이돈상 초상(조선19세기)
홍명호 반신상(조선후기)
소나무 아래의 김육(조선1637년)
소나무 밑에서 피리를 부는 동자(조선)
뛰노는 강아지(조선)
명나라 황제가 내린 여덟 가지 선물(조선)
헌종의 혼례 축하진치(조선)
곤륜산연못에서 열린 잔치(조선)
묵죽도 병풍(조선)
경기 감영도12폭 병풍(조선)

 

은장도(조선)
향주머니(조선 20세기초)
중국의 명산을 그린 오악도(조선)
눈내리는 양화나루(조선)
배와 김상숙의 글씨(조선후기)
관리들의 계모임(조선후기)
의금부 도사들의 계모임(조선)
청나라 연경 여행기 연행일록(조선1720년0
백동삼층장(일제강점기)
이층나전칠기장(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