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기도 용인시 포은아트홀(장욱진전시회)~(2022년8월16일)

백재은 2022. 10. 18. 09:39

경기도 용인시 포은아트홀

모든 인류가 예술로 하나가 되는 형상같은 조각이 적벽돌벽체에 기대고 유려한 곡선미 유리창 장식이 돋보이는 용인포은아트홀이 신세계백화점을 마주보며 거리를 휘감고 있었다.직사각형 유리창 장식과 회색벽체를 이루며 계단으로 올라가는 홀이 문화공간의 위력을 과시하며 빛났다.용인문화재단은 창립10주년을 맞아 한국 근현대화가 대표 화가인 장욱진을 전시하였다. 장욱진이 용인시에서 1986년부터 1990년까지 생애 마지막 예술혼을 담아 그린 220점 작품 중 가치가 높은 다수의 유화작품을 전시회에 담았다.그가 용인에 정착한지 36년만에 최초로 대형 회고전이였다.화가 장욱진은 1917년 충남 연기군에서 출생하였고 1926년 경성사범부속보통하교 3년때 전일본소학생미전 1등 수상하였다.1930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경복고등학교 입학하여 일본인 교사의 공정치 못한 처사에 항의하다 1932년 중퇴하였다.1933년 17세에 성홍열을 앓아 수덕사에서 정양하며 화가 나혜석을 만났고1936년 체육 특기생으로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 편입하였다.1937년 동아일보주최 학생미전 가작상을 두차례 수상하고 22세 1938년 조선일보주최 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 "공기놀이를" 출품하여 최고상을 수상하였다. 193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현재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학과 입학하였고 24세 1940년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소녀"으로 입선하였다.1941년 이병도박사 맏딸 이순경과 결혼하고 1943년 제국미술학교 졸업과 동시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언덕"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1945년 국립박물관 진열과에 취직하고 퇴사한 후 1947년 덕수상업고등하교 미술교사로 취직하였다.1949년 1947년 김환기,유영국,이규상등과 결성한 신사실파에서 1949년 제2회 신사실파전 출품하였고 1951년 부산피난 이후 아이들과 함께 연기군으로 귀향하여 대표작 "자화상"을 완성하였다.1953년 신사실파전 출품하였고 1954년~1960년까지 서울대학교 미대 대우교수로 역임하였다. 1961년 권옥연,유영국,이대원등과 2.9동인회 조직하여 제1회 2.9동인회전 출품하였다.그의 작품시기를 크게 4시기로 분류되는데 1963년~1975년 덕소시기때 덕소에 화실을 두어 1970년 아내의 첫번째 초상화를 완성하였고1975년~1979년 명륜동시기때 부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완성하였다.1980년~1985년  수안보시기때 판화집을 출판하였고 1986년~1990년 용인시기때 1987년 중앙일보에서 지정한 예술대상을 받았고 73세 1989년 미국 뉴저지주의 버겐예술과학박물관에서 개최된 한국현대회화전 출품하였다.그의 약력에 그의 작품사진들이 붙어 있었는데 일찌기 그의 재능의 매우 탁월함을 엿 볼수 있었다.1938년 "공기놀이"는  아기업는 소녀와 머리를 길게 땋은 소녀들이 양반집 담장길에서  공기놀이 하는 매우 정겨운 아이들의 일상모습과 우리 전통을 살리려는 매우 운치있는 색감처리로 일찍부터 그의 재능이 돋보였던 매우 놀란만한 작품이였다.1940년 "소녀"는 커다란 얼굴을 강조한 소녀상으로 가난한 삶속에 불굴의 의지가 넘치는 표정으로 일제시대 가난했던 우리 소녀의 초상화 같았다. 22세때 보여주는 사실주의 접근에서 일본유학 중 모던니즘의 기법을 수용한 영향을 볼수 있었다.1951년 "자화상"은 풍년의 가을 들녁을 배경으로 화가 자신의 신세대 모습을 멋지고 당당하게 표출하고 있었다.그의 작품들은  4시기로 나누어 그림들이 전시되었다. 제1시기는 서울을 표상하는 문명이 싫다면서 서울대 교수를 그만두고 한강이 문턱으로 흐르는 덕소에 화실을 잡아 나를 바라보고 발견하는 시기이다.덕소는 척박한 환경이지만 평화로운 강가에 홀로 거주하며 향토적인 소재와 색채,새로운 표현을 발견하여 덕소의 달,비,바람,덕소의 모든것을 애기하며 장욱진만의 정체성을 찾아나갔다. "나를 발견하다"시기였던 제1시기 작품들인 "무제"는 대상의 특징을 강하고 굵은 선으로 기호화된 도형으로 표현하여 대상을 단순화한 작품이였다.대상의 재현에 구애됨이 없는 화가의 이념이 더욱 과감한 형태로 표출되었다."나무와 새"는 붉은색으로 새와 달이 어우러지는 풍경으로 비현실적인 붉은색 밤배경과 함께 기하형으로 단순화된 나무와 달.새의 모습으로 추상화 경향을 엿 볼수 있었다. 빛나는 둥근나무가 나무이면서 동시에 달과 함께 해로 파악할수 있는 경치 같았다."물고기"는 화면에 대상은 나타나지 않지만 앵포르멜 영향으로 두꺼운 표면의 질감효과를 강조하여 물고기의 내면과 외면이 대칭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뼈만 남은 물고기가 색채와 선을 써서 여러가지 형상을 표현하는 회화적기법으로 매우 인상적이였다."초당"은 화선지위에 먹물이 번지듯 유채로 수묵화적 효과를 내고 공간 구성이 첩첩히 배열하여 투시 원근법에 구애 받지 않은 전통 산수화에서의 공간 표현의 특징을 이루었다.아래쪽에는 초당의 인물과 차 달이는 동자,중앙은 쓰러질 듯 하면서 경쾌하게 휘감은 나무와 그 밑에 쉬는 사람,위쪽은 커다란 새와 해를 그림으로써 차를 달이고 맛보는 신선도 같은 신선들의 풍류의 정취를 나타내고 있었다."까치집"은 화면 가득한 푸르스름한 새벽녁에 더 푸른 반달이 떠 있고 올려다 본 나무에는 둥지를 튼 까치가 머무르고 그 위로 마치 꿈속이나 상념의 한 부분을 보는 것 처럼 둥글게 구획 지은 화면안에 집들과 나무,새,아이,강아지,해,산으로 이루어진 이상화된 풍경으로  어느날 새벽 문득 바라보게 된 제비집을 통해 떠오르는 아련한 감상을 담고 있는것 같았다.제2시기는 서울 명륜동시기로 덕소에서 12년을 지낸 후 도시개발로 주변이 번잡해 지자 서울 명륜동으로 올라와 집안에 관어당 정자를 짓고 가족과 애틋한 시간을 보내며 독실한 불자인 아내와 함께 전국 사찰유람하고 깊은 불교 가르침을 경험하여 이때부터 그의 그림에 불교와 도가적 소재가 자주 등장하였다.즉 12년만에 다시 함께 지내게 된 가족들을 그리며 예술을 향한 깨달음을 경험한다. "가족을 품다" 시기였던 제2시기 작품들인 "진진묘"는 화가 부인의 초상으로 색채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검정 선으로 만 이루어진 수묵화 같은 느낌의 그림이였다.그림주제와도 잘 어울리는 진진묘라는 붓글씨와 함께 형태가 간략하고 투명하게 얇은 바탕에 담채로 처리하여 문인화적 느낌을 주었다.인물의 외형보다 부인의 보이지 않는 성정을 잘 형상화하여 불자로서 부인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는 대상의 본질을 나타내는 초상화였다.화면 우측 하단의 그릇은 향합으로 화가가 인사동에서 구입하여 부인에게 선물한 것으로 인물과 함께 불교적인 분위기로 가득했다."여인상"은 화창한 배경을 뒤로 하고 건강하고 깨끗한 여인의 이미지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갈색의 황토 위에 맨발로 서 있는 건강미와 두손을 모은 다소곳한 여인의 모습으로 불도에 심취되어 갈고 닦은 여인의 품성을 보여주는 전통적인 여인상으로 강한 불교적인 힘이 내포되고 있었다."어머니상"은 둥근 공간 한 가운데 선 여인은 포근하면서도 건강미 넘치고  좌우 대칭 화면은 그 여인에게 어떤 절대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하늘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어 시간의 영원성 나타내고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상을 상징하며 도상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팔상도"는 불자인 백성욱 박사와 가까이 지내면서 시골의 사찰을 많이 찾으며 금강경을 더욱 가까이 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건강이 악화된 화가는 백 박사가 건강을 걱정하며 절을 지으라고 건의하여 1977년 현대화랑에서  범당 건립 기금마련을 위한 도화전을 가졌다.그때 전시된것으로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것이다. 좌측 상단에서 부터 부처의 일생을 그린것으로 부처의 탄생 장면이 그려지고 태어나자 마자 하늘을 가르키며 천상천허 유아독존이라는 아기 석가가 그려져 있고 출가하는 장면,수행하는 장면,열반에 들어가 부처가 되는 장면등이 이어진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머리 위에 까치를 그려 화가의 평화의 동심을 나타내고 있는것으로 부처는 이상향과 고향에 대한 정서를 대표하는 초월적인 존재이며 더 나아가 종교적 심성까지도 지닌 상징적인 존재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제3시기는 명륜동 집을 뒤로 하고 아내 이순경과 함께 첩첩 산중속 수안보에서 생활했던 시기로 너무 소박한 산골생활의 불편함의 연속 가운데 평생을 비운 화가에게는 너무 평화로운 곳이였다. 아틀리에 가까이 사찰이 있고 아내와 벗 삼아 주변을 다니면서 자연의 기운을 받아  집을 비롯한 그 주변 풍경이 많이 묘사하며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수안보 근처는 산세가 높았기 때문에 이 시절 등장하는 산은 높고 수안보 화실 주변의 빼어난 풍경에 화가가 매료 되어 1980년대 이후 풍경이 강조되었다.1980년대 초반 먹그림 스타일 유화가 완전한 정점을 이루며 산수화와 수묵화 모습이 점치중첩하였다.위대한 자연의 감동을 담아 맑고 신성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자연을 벗 삼아"의 제3시기 작품들인 "제비둥지"는 덕소 화실 처마 밑에는 제비둥지가 있었는데 화가는 덕소를 생각하며 이 작품을 그린 듯  제비는 아래쪽 처마 밑에 둥지를 틀고 위쪽 지붕위에는 제비와 다른 모습의 새들이 늘어져 있으며 화목한 모습을 담고 있었다.화가가 과거 풍경을 회상하며 자연을 명상하는 모습 같았다. "도인"은 산사의 처마 끝은 풍경이 바람에 날리고 도인이 앉은 곳으로 여인과 강아지가 산을 오른다. 화면 상단으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새의 모습은 사실적이고 원근법적이라 마치 화면 바깥으로 뛰쳐 나올것 같고  산사에 부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아무런 욕심없는 도인의 마음을 상징 하듯 멀리 보이는 산과 해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나무"는 둥근나무가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상단에는 작은집과 개들이 보이는데 둘 사이는 극단적인 크기의 대비로 인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흰집"은 드물게 둥근바탕에 그린것으로 이 시기 국제화랑에서 4점의 둥근액자로 된 캔버스를 선물을 받았는데 둥근 캔버스에 그린 것을 화가가 매우 힘들었다고 부인은 전하고 있다.전래동화같은 장면으로 한복을 입은 남자는 어디를 찾아가는지 길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듯하고 그 뒤쪽에는 마치 그가 찾아가려는 목적지 같은 성스러워 보이는 나무와 집이 그려져 있었다.인물이 비교적 사실적인 형태로 그려지고 화면은 좌우 대칭으로 변화가 없어 실제로 서명적이고 도식적인 형태로 보였다.도인의 길로 향하는 불심을 엿볼수 있는 작품이였다."낚시"는 들을 가로지르는 강과 뒤에 첩첩이 싸인 산,그 속에서 노니는 사람등 풍경의 요소들이 강조된 그림으로 자연을 벗 삼아 소요음영하는 노장적사상과 관련되며 자연속에서 이상적인 삶을 찾고자 했던 무위자연의 풍류적 성격을 대변하고 있었다."달맞이"는 화면 양쪽으로 겹쳐진 언덕 위로 해가 아련하게 떠있고 그 언덕에는 여러명의 아이들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뛰놀고 아이들 친구인 제비와 강아지가 주변을 맴도는 풍경으로 자연속에 묻혀 살고 싶은 화가의 원초적인 욕구가 잘 드러내고 있었다."가족과 나무"는 짙은 초록의 나무에서 강렬한 힘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나무 아래에서는 초막에서 신발을 벗고 낮잠을 즐기는 사람과 차 달이는 동자 등 지극히 한가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그림이였다.초막 옆 날아오르는 새들과 나무 밑을 걸어간 사람들,조그맣게 그려진 강아지까지 활기찬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새벽"은 새벽녁 정자에 앉아 있는 화가에게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개를 데리고 찾아오는 정겨운 장면 들로 하늘의 광활함과 시원한 해가 인상적이며 녹색으로 한붓으로 그린 나무가 단순한 화면 구성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드넓은 자연 속에서의 휴식과 사랑이 멋들어진 장면이였다."무제"는 이 작품은 술을 마신 상태에서 그린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도가 안정적이고 색감 처리에 물감의 층과 깊이가 옅었다.자연과 벗하며 매우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골아이들"은  보통 도식적으로 그렸던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이례적 작품으로 뜨거운 태양아래 새들이 날아가고 시골 아이들이 뛰놀고 개도 신나 하늘을 뛰어 오르는 장면이였다. 시골 자연과 이아들의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었다."마을"은 미색계통의 엷은 색감을 사용하면서 집의 형태를 윤곽선으로 그리고 지붕의 다양한 형태로 이루고 있었다. 특히 뒤쪽에 나란히 서 있는 집들은 사이좋은 형제처럼 느껴졌다."산"은 호랑이와 아이,소와 아이,산에 오르는 아이,나무와 정자 등 주제가 한 화면속에 함께 구성하고 있었다. 화가는 멀리서 조망하는 방식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담담히 그리고 있었다.제4시기는 마북리 용인시에서 터전을 잡고 새로운 시도를 완성하며 마지막 열정을 남김없이 쏟아내 평생 남긴 작품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자기 명대로 사는거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격식보다 소탈이 좋은 심플하다고 외치며 끓임없이 자기를 내려놓은 시기이다. 이 시기에 상당량의 종이그림을 남겼는데 종이그림은 선으로 그리는 것으로 화가의 조형적 구성능력이 단도적입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종이그림은 두가지로 구분 되는데 화선지난 한지에 먹붓으로 붓장난한 먹그림과 채색성 화구인 매직마커로 그린 매직그림으로 이 둘다 수묵화적 표현과 서양화적 틀에 속한 유화 버금가는 완성도를 지니며 그의 심상 일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수안보 시기에 비해 먹그림의 필치는 사라지고 중앙 집중식 기학학적 구성방법이나 아동화적 표현을 다시 시도하여 작품의 구도는 매우 파격적이고 표현은 자유로우며 대다수 작품들은 수행의 경지에 오른 탓에 매우 관념적이다.실제 풍경을 그렸던 수안보시기와는 좀 더 다른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풍경을 많이 그렸다. 색채도 다양해져 완전히 어두운 밤 풍경에서 부터 채도가 높은 순색까지 다양한 색층을 이루었다.즉 폭을 보다 넓힌 종합적인 시도를 해 나갔던것을 파악된다. "끓임없이 그리다"의 제4시기 종이에 매직으로 그린 작품들은 해아래 중앙에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을 중심으로 좌우로 새들이 날아가고 초목이 있는 음양을 상징하는 도교사상이 깃들어 있었고 달과 해,산아래 갈매기가 놀고 물고기가 뛰어 노는 강에서 배를 노젓는 광대한 자연에 심취된 화가의 모습이 그려지고 부처상과 같은 자비로운 어머니상 앞에 누워있는 아이로 부처앞에 보잘것 없는 나를 표현하고 있었다.제주도 풍경은 실제 경치를 선적으로 그려낸 환상적인 제주도 경치의 감흥을 묘사하고 있었다.한지에 먹붓으로 그린 작품들은 모두 무제의 제목들로 서양화기법안에 수묵화적인 우리나라 전통의 멋스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유원지 같은 호수경치로 자연과 동화하는 활기찬 경치와 호수에 붕어와 연꽃으로 세속을 정화는 심성이 엿보이고 ㄱ억자형 팔작지붕 기와집 맞은편으로 나란히 배열된 서로 다른 기와집으로 정겨운 동네마을 흥취를 품어내고 있었다.즉 전체적으로 실제풍경을 선적으로 표현하며 작가의 심성을 표출하고 있었다."나를 내려놓다"의 제4시기 작품들인 "나무 아래 호랑이"는 강렬한 터치로 한 붓에 나무를 그렸고 아래는 친근감 있는 호랑이가 서 있었다. 나무 위에는 까치,집과 사람 뿐만 아니라 강아지도 올라가 있었다."나무"는 갈색 둔덕 위로 기울어질 듯 서 있는 호미 같은 나무를 중심으로 까치,집,개가 삼각형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균형과 동세를 확보하며 동물끼리 서로 적극적인 관계로 재미를 주고 있었다."나무"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찬 옅은 황토빛의 배경으로 호미같은 나무를 중심으로 소와 개의 배치와 나무위에 올라온 까치가 구도의 안정감을 주며 천연계가 약동치는 생기를 주고 있었다."시골풍경"은 화가의 서명과 함께 낙관을 찍은 특이한 작품으로 중앙에 작품에 드문 가지가 남은 나무가 등장하고 그위에 많은 새들이 앉아 있고 사람은 도인의 모습처럼 수행을 통해 해탈한 화가의 모습 같았다. "언덕 위의 가족"은 학이 등장하는 그림으로 뒷짐을 지고 걸어가는 노인의 품격이 도인의 경지에 가까워지려고 경주하는 화가의 모습을 엿 볼수 있었다.화면 가득히 그린 아이나 여인은 화가가 자주 취하는 소재로 "아기"는 둥근 얼굴의 건강한 사내아이를 중심으로 흙 둔덕과 까치,옆에는 두 나무,뒤쪽에는 마을을 정확한 대칭구도로 그려내고 있었다.절대적인 생명력과 건강한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는 구복적인 성격을 띤 민화의 맥을 같이 하는 작품 같았다."새"는 아름다운 자연산세 아래 정제되면서 멋스러운 길,눈썹 같은 달과 새의 형상을 그려낸 솜씨가 단순한 구도안에 세련된 느낌을 주고 있었다."감나무"는 화가의 집 마당에 감나무가 겨울에 죽은 줄 알았으나 이듬해 봄에 새순이 돋는 것을 보고 제작한 작품으로 감격스러운 화가의 마음 전해지는 작품이였다.달과 해,흙의 자연의 기운을 받아  감나무에 불꽃처럼 새순이 뻗고 돋아나는 새잎들의 신비로운 생명력에 대한 찬가가 느껴지는 그림으로 나무는 구불구불한 굵은 가지로 주위 배경은 밝은 노랑으로 마치 뒤편에서 빛이 뻗는 것처럼 강한 생명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화가의 작품에서 일반적으로 나무는 자연 또는 근원적 생명을 상징한다. "나무"는 인물을 중심으로 까치와 집이 정확하게 양분되고 있었다.수묵효과를 활용하여 두 나무는 마치 기념비 같고 중앙의 인물이 서 있는 길은 엷은 빛처러 처리되어 숭고함이 느껴졌다. 지향점처럼 읽혀지는 작고 붉은 중앙의 해와 양쪽의 길이 붉은색으로 안정감 있는 삼각구도를 형성 하여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특이한 구도로  종교적 숭고한 심성을 표현한듯 주제와 대상의 상징성을 담고 있었다."나무"는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을 기반한 작품이였다.1960년대 같이 강한 마티에르는 등장하지 않고 스며드는 듯한 물감의 담담한 효과는 계속 유지하고 있는 작품이였다."도인"은 전통적인 문인화 소재로 기와집 안에 한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고 학,수석,난,화분이 마당에 있고 비슴듬히 서 있는 한 그루 나무가 이러한 정경에 둘러싸고 있었다."밤과 노인"은 1951년 모더니스트 신사의 모습으로 등장했던 자화상과는 달리 80년대 후반에서는 학과 더불어 자연을 완성하는 선비모습으로 속세를 떠나 하늘을 나는 도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35살 젊은 서구식 모더니스트는 막막한 시간을 상징하는 자신이 걸어야 할 붉은 길 위에 유유자적하며 당당했는데 74살된 그는 집과 아이,나무,까치를 남겨 두고 그가 살아온 길인 구부러진 붉은 길 위의 하늘을 달과 함께 유유자적 떠다니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조형적 길 위에서 솔직하고 당당한 삶과 작품과 자신에 대해 평생 지켜온 진실성을 입증하고 있었다.즉 모든것을 비운 도인 화가는 해탈속에 자유를 얻은것 처럼 수행의 결과 경치를 바라 보는 감각도 달라지고 화가의 심성도 달라진 구도가 파격적이지만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닭과 아이"는 화면 가득히 크게 그려진 수탉,날아 다니는 아이,비스듬히 걸려있는 초승달, 닭 앞에서 방향을 튼 나무 등이 서로 적절히 관계하며 구성하고 있었다.수탉은 평면적이고 장식적 이로 인해 화면이 상당히 유쾌하며 수탉의 다리 아래에 조그맣게 그려진 강아지도 왜곡된 비례에도 불구하고 재미가 있어 보였다. 날아다니는 사람, 크게 그려진 동물, 마을 풍경 그들 사이 적절한 관계 등으로 인해 샤갈의 환상적인 그림 같았다."황톳길"은 화가의 고향 내판의 전형적인 풍광으로 황톳길이 더욱 선명하게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황톳길 뒤편 산꼭대기의 천상의 마을로 가는 통로처럼 표현되어 그 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였다."집"은 두마리 병아리가 정겹게 노는 마당의 집으로 화가가 살았던 용인시 집 같았다.먹색의 다양한 울림을 풍부하게 하고 배경에 촉촉한 물기를 주는 듯한 밝은 회색으로 부터 농도를 달리하며 그려진 담장과 집,그리고 나무의 가장 짙은 먹색까지 단순하지만 다양한 농담의 변화를 잘 표현한 작품이였다. 1980년대 초반 먹그림 분위기 절정을 달했을 때 먹빛의 다양함을 표현한 작품은 보기 힘들었는데 그때에 비해 필력은 덜하지만 안정된 수묵의 효과를 창출하고 있었다.부분적으로 사용된 붉은색은 먹색화면에 작은 파격을 두며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가족도"는 높은 부감 시점으로 화면을 그린 작품이였다.산의 형태로 하늘과 땅을 구분했으나 색채는 동일하며 집은 앞의 담장과 산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경치였다.화가는 수안보 집을 상상하며 지금까지와는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가로수"는 부인과 아이가 다른 동물들과 함께 나들이 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였다. 화가는 새,강아지,소를 사람과 같은 한 가족으로 표현하여 전반적 색조를 흰색계통으로 조정하고 땅을 붉게 칠하지 않음으로 나무와 사람,동물등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처리하였다.나무 밑동 부분에 엷은 그림자를 그려 넣어 보다 사실적인 풍경을 제시하고 있었다.이와같이 화가 장욱진은 나무,새,달,개작품에 그릴 소재를 자꾸 보고 있으면 자기 체질화 되고 거기에 동화되 그때 비로서 그 대상의 참 모습이 보인다고 그가 말한것 처럼 자연과 우리 일상을 통해 화면에 그려진 동물,사람,자연등의 모습 하나 하나 뜻을 담기며 우리 전통이 깃들여 있었다. 해,달,까치 뿐만 아니라 집과 사람도 전통으로 인식하며 전통을 자연의 이미지로 이야기 하였다. 곧 화가의 자연과 전통은 그저 우리 일상 이야기였다.매체와 기법에 있어 보다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어 먹그림 뿐만 아니라 종교,언어,역사,철학을 포함한 목판그림이 어우러진 전통이 깃든 조형과 인문의 협업체계 까지에도 불교의 가르침을 언어가 아닌 자연의 임지들로 이야기 하였다.전통의 재해석으로 문인화 기풍의 전통의 맥을 유지확장하고 평생 수행적 작업을 통해 자신의 삶과 작품에 일치하였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장욱진의 약력

나를 발견하다)

무제(1958년)
나무와 새(1963년)
물고기(1964년)
초당(1975년)
까치집(1977년)

가족을 품다)

진진묘(1973년)
여인상(1979년)
어머니상(1985년)
팔상도(1976년)

자연을 벗삼다)

제비둥지(1976년)
도인(1985년)
나무(1984년)
흰집(1984년)
낚시(1981년)
달맞이(1981년)
가족과 나무(1983년)
새벽(1981년)
무제(1982년)
시골아이들(1980년)
마을(1984년)
산(1981년)

끓임없이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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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풍경(1978년)
무제
무제
무제
무제
무제
무제

나를 내려놓다)

나무 아래 호랑이(1986년)
나무(1986년0
시골풍경(1986년)
언덕위의 가족(1988년)
아기(1986년)
새(1987년)
감나무(1987년)
나무(1989년)
나무(1987년)
도인(1988년)
밤과 노인(1990년)
닭과 아이
황톳길(1989년)
집(1989년)
가족도(1989년)
가로수(198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