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기도 용인시 백남준아트센터(2022년9월15일)

백재은 2022. 10. 18. 11:09

신갈고등학교
백남준아트센터

9월15일~중국풍 정감의 아치형 벽돌 교문의 신갈고등학교를 마주보며 여러 겹의 거울 구조와 함께  곡선미의 검은색 장식띠를 두른 출입문 양식인 백남준아트센터가 용뫼산 자락아래 위용으로 빛났다. 21세기 세계적인 에술가의 기념비적  문화재와 걸 맞는 길이길이 역사에 남을 만한 건축예술 작품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었다.백남준아트센터는 국제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젊은 독일 건축가인 카르스텐 쉐멜과 베를린 KSMS 쉐멜 스탄코비치 건축사무소의 마리나 스탄코비치가 공동으로 디자인 하였다. 곡선을 이루는 외관은 백남준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그랜드 피아노의 형태, 그리고 백남준의 영문 이름 성의 첫 글자인 "P"형태를 하고 있었고  외벽은 독특한 여러 겹의 거울 구조로 되어 있었다. 여러겹의 거울 구조의 외벽과 함께 통유리창의 쉼터로 청정한 향기가 가득한 실내공간을 이루었다. 내부 유리창 사이로 언덕을 감싸고 있는 돌담장과 돌바닥을 이룬 산책길이 고성의 정감으로 물결치고 구릉지대 같은 푸른 초원의 언덕이 서양풍 정감으로 빛났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곡선미의 여러겹의 거울 구조 외벽과 마주하며 돌바닥과 돌담장길이 거울의 굴절로 요동치며 율동감이 넘쳤다.야외 테라스 따라 돌바닥과 돌담장을 이룬 귀중한 고성길 같은 산책길로 외벽에 리듬감을 더하며 점점 높아지고 커지는 무한한 순환이 일어나는 움직임 같았다. 시각적 장치로 고성의 정감을  공감각적 경험을 할수 있도록 하고 거울에 투영되는 그림자가  순간의 영속성,시간의 흐름등으로 시각화하여 비밀의 고성 같은 신비로움을 자아냈다.그 길 따라 정원언덕은  AD3세기 후반대 상갈동 유적지가  발굴된 곳으로 선사시대 삶을 영위했던 구릉지대 같았다.언덕을 지나 용뫼산에 둘러싸인 상갈공원으로 자연과 일심동체되는 문화산책길 같았다.상갈공원 언덕아래는 경기도박물관이 위치하며 공원과 산이 어우러지는 문화보고 장이였다.열정의 화신 꽃무릇이 수를 놓고 장대한 소나무가 솔향기를 뿜어 내는 상갈공원으로 용뫼산으로 가는 등산로를 밟게 비추었다.즉 용뫼산 자락 아래 백남준아트센터를 중심으로 유적지,공원,경기도박물관을 이룬 자연과 하나되는 귀중한 문화의 길이였다.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을 단순히 기억하고 기념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닌 작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증진이라는 과업에 적극적으로 임하기 위해 미디어 아트 전문 기관으로 실험적,예술과 창의적 학습활동을 배양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백남준 사상과 예술 활동에 대한 창조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연구를 발전시키는 한편, 이를 실천하는데 주력하기 위해 비디오 서재 볼수 있고 전시해설 오디오 가이드,큐레이터가 설명하는 소장품 5점의 해설영상 제공, 그의 주요작품을 비롯한 소장품35점에 대해 증강현실 전시가이드 제작,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번째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젼"을 가상현실로 만날수 있는 가상체험,소장품 중심으로 그의 작품 감상하고 그의 예술세계 이해 돕기위해 "백&사전"을 제공하고 있었다.전시실은 백남준 탄생90주년 맞이하여 비디오와 빛으로 가득찬 그의 영광스러운 옛 설치작품들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서 기획전시 하였다.백남준은 1932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과 홍콩에서 중학교를,일본 가마쿠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도쿄대학교 미학을 전공한 후 아르놀트 쉔베르크의 음악으로 졸업 논문을 썼다. 15살때 피아노 선생님으로 부터 들은 쇤베르크가 가장 극단적인 아방가르드다라는 말에 즉시 마음이 끌렸다. 전위적 말을 듣자마자 그는 일생의 방향을 정한것이다. 1956년 독일로 건너가 유럽철학과 현대음악을 공부하는 동안 동시대 전위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기존의 예술규범,관습과는 다른 급직적 퍼포먼스로 예술활동을 펼쳤다. 이 때부터 새로운 미디어를 이용한 예술의 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1963년 텔레비젼의 내부회로를 변조하여 예술작품으로 표현한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젼"을 통해 미디어 아티스트 길에 들어섰다. 그는 1964년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비디오를 사용한 작품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비디오 영상 뿐만 아니라 조각,설치,작품과 비디오 영상을 결합하고 자유자재로 편집할수 있는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개발하였으며 여기에 음악과 신체에 관한 끓임없는 탐구까지 더해져 백남준만의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였다. 그의 작품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뒤로 하고 그는 기술자와 만나며 기술자와 예술가를 분리하지 않았다. 모두가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려 했다.1978년 그의 상황은 넉넉치 않아 생계 때문에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교수직을 승낙하였고  1977년 "도큐멘타6"을 통해 위성을 이용한 비디오아트의 가능성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기회는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독일과 뉴욕을 오가며 작업을 계속했고 1982년 휘트니 미술관의 회고전을 거쳐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하며 다시 새로운 작품세계를 보여 주었다.1980년대부터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필두로 위성 기술을 이용한 텔레비젼 생방송을 통해 전위예술과 대중문화의 벽을 허무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기획하였으며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독일관 대표로 참가하여 유목민인 예술가라는 주제의 작업으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레이저 기술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가던 가운데 1990년대 중반 뇌졸중이 발병, 하지만 2006년 타계할 때까지 그는 예술적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그가 위성을 통해 멀리 여행 떠나고자 했던 새로운 지평선은 우주였다. 클래식작곡가 꿈을 키우다가 텔레비젼 세계에 무모하게 뛰어든 23세 청년 백남준은 자신의 모든것을 바쳐 새로운 예술을 개척한 아방가르드로 언제나 더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었다. 첨단 장비를 구입하는 데 드는 엄청난 돈과 불확실한 길을 간다는 두려움과 함께 그길을 타계할때 까지 계속 행진했다. 그는 미디어 아트의 개척자로서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실험적이고 창의적으로 작업했던 예술가였다. 예술가의 역할이 미래에 대한 사유에 있다고 보았으며 예술을 통해 전지구적 소통과 만남을 추구했던 그는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동시에 엔지니어인 새로운 예술가 종족의 선구자였다.아주 특별한 진정한 천재이자 선견지명 있는 미래학자,가장 현대적인 예술가로서,자신의 삶을 항상 새로운 예술로 잡아끄는 근원이었음을 고백하였다.이 당시는 비디오를 합성하고 편집할 때 비디오 신디사이저 등을 사용했는데 지금 우리는 비디오를 디지털 파일로 편집하고 공유 한다. 아날로그 몰입으로 오늘날 초고상해상도의 디지털 영상으로 구현되는 대형 미디어 파사드나 디지털 프로젝션 매핑으로 만들어진 디지털 몰입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였다.  1964년 "로봇 오페라"는 그가 로봇k-456을 조종하며 거리를 걸어 다니고 샬럿 무어먼이 그 옆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퍼포먼스다. 로봇 오페라는 모든 거리와 광장에서 시간,날짜,장소 그리고 관객까지도 미정인 채로 열린다. 그는 로봇k-456과 거리로 나가 파블로 피카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고 우연과 소음으로 가득찬 해프닝을 벌였다. 그의 소통방식은 당당하고 항상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1969년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는 카메라 영상을 실시간으로 믹싱하여 새로운 영상을 만들었다. 색을 변조하고 형태를 뒤흔들고 서로 다른 영상을 뒤섞었다. 마치 혼동에 빠진듯한 전혀 새로운 우리 자신을 뮤직 비디오속에서 발견한다.그는 기계로 텔레비전 수상기를 캔버스 삼아 방송용 콘텐츠를 만들수 있다고 선언했다.1970년대부터 처음 선보인 1974년 TV부처는 현재까지도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이다.그는 텔레비젼을 보는 경험을 선불교의 명상적 체험에 빗대어 종교적 의미나 그리스 신화의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현실에 기반을 둔 전자 선이라고 말하였다.부처를 비추는 카메라로 지루함은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그의 또 다른 예술적 전략이였다. 1977년 "나의 축제는 거칠것이 없어라" 음반을 발표하였다. 아놀드 쉔베르크의 정화된 밤(1899년)곡을 4배로 느리게 재생한 소리를 담았다.백남준은 14살때 그가 이 곡을 무척 듣고 싶었으나 당시 서울에서 구할수가 없었다. 쉔베르크는 백남준이 아무도 가보지 않은 예술의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독일에서 그는 쉔베르크학파 음악에 실망하여 이윽고  존 케이지 음악에서 새로움과 충격을 발견했고 자신만의 예술의 길을 떠났다. 그는 스스로 방법대로 쉔베르크를 업그레이드해 버리고 바로 자신이 아방가르드임을 밝히며 거칠것 없는 축제가 계속 될것을 선언했다.1980년 "MS-플럭서수스 교향곡7번"은 독일 라인 강변에 작은 프로펠러가 달린 바이올린을 백남준은 강가에 서서 무선 조종기를 들고 바이올린을 조종하였다. 바이올린에 달린 작은 프로펠러가 강의 거센 물결을 거스리고 소리를 낼수 있을까?...하며 플럭서스 정신에 입각해 예술이 취할수 있는 형태의 급진적 변화의 모색은 그에게 예술의 원천과도 같았다. 특히 이 작품에는 교향곡7번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바이올린의 소리외에 수많은 물결과 물결으 일으키는 바람,주변의 소리까지도 모두 교향곡의 일부가 된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는 1984년1월1일에 뉴욕과 파리를 위성으로 연결하여 양쪽에서 일어나는 퍼포먼스를 생방송으로 송출하며 전세계로 방송했던 작품이다.파리와 뉴욕 방송국은 중앙 통제실 없이 실시간으로 소스를 주고 받으며 방송 내용을 갖자 자유롭게 송출했다. 그는 생방송이란 전화처럼 서로 대화가 오고 가는 소통이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그는 텔레비젼에서 응당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소통의 방식,즉 쌍방향 텔레비젼이 실현되었다. 그는 위성방송은 마치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뉴욕과 파리의 작가들이 만나고 팝 아티스트와 아방가르드들이 서로 대화를 주고 받으며 완성된다고 생각하였다."비디오 샹들리에  NO.1"샹들리에 어원은 촛대를 상징하는 라틴어 칸델라브룸에서 유래했다.그는 이 작품에서 당시 최신 기술인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에니메이션 영상을 재생시키면서 구 소련에서 생산된 텔레스타 흑백 CRT모니터를 선택했다.이 모델은 흑백이지만 그 당시로 획기적인 무선 휴대용 텔레비젼이었다. 그는 공간에 구속되지 않는 텔레비젼으로 샹들리에를 만들어 가상의 공간을 자유롭게 누비는 그래픽 이미지를 보여주며 더 이상 공간에 구속되지 않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이 작품은 우리에게 흑백텔레비젼 속 오래된 영상과 매체의 아름다움으로 먼저 다가오는 한편 촛불을 밝히는 과거의 기술로 부터 무선 통신의 최신기술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넘나드는 그의 기술적 상상력을 보여준다."시스틴성당"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처음 전시되어 독일관 대표로 황금사자상 수상하였다.천장이 높은 독일관의 가운데에 비계를 쌓아올리고 프로젝터를 매달아 영상이 벽으로 투사되도록 했다. 이 구조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 벽화를 20미터 높이의 비계위에서 그렸다는 역사적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비계위에서 고통스럽게 벽화를 그렸던 화가의 역할이 이미지를 순간적으로 투사하는 수 많은 기계들이 대체된 것이다.시스틴성당은 무작위로 재생되는 느낌을 준다. 불변의 건축공간을 움직이는 이미지로 장식했다. 관객들은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쏟아지는 영상과 사운드에 파묻히고 만다. 시스틴성당에서 경험하는 감각은 현실을 복제하여 스크린에 완벽하게 연출하는 디지털 몰입과 다르다. 디지털 몰입이 마치 여기가 아닌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면 시스틴성당은 우리 감각을 복잡하게 뒤흔들고 우리를 각성시킨다.이것은 디지털화된 데이터로 환원할수 없는 퍼포먼스다.그 순간 거기에 존재하는 그 사람만이 경험할수 있는 실존적인 시간과 공간이였다. 백남준은 전자 초고속도로는 복합적 정보가 압축된 광대역 통신으로 얼마나 많은 정보를 흡수할수 있는지에 대한 지적 실험도 되었다고 말하였다."바로크 레이저에 대한 경의"는 1995년 독일의 바로크 건축가 요한 슐라운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을 제작하기로 하고 그 장소로 슐라운이 건축한 로레토 교회를 선택하며 제작한 작품이다.그는 "바로크레이저"가 내용과 미학적 측면 모두 바로크라는 주어진 건축적,역사적,종교적 맥락을 따라 가도록  조용한 침묵속에서 레이저와 비디오 프포젝션을 감상하게 했다. 그는 붉은 레이저 광선으로 촛불이라는 과거의 자연 빛과 현대의 빛인 비디오 그리고 미래의 빛인 레이저를 연결시켰다. 빛을 내는 다양한 기술들이 서로 대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바로크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술이 가진 다양한 시간성을 여행하게 된다."삼원소"는 1997년부터 3년여에 걸쳐 만들어진 세가지 레이저 작품 원,사각형,삼각형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1995년 무렵부터 구겐하임 전시에 이르기까지 그가 레이저를 이용해 천지인의 사상을 형상화하고자 한다고 밝힌것으로 보아 이 세가지 기하학적 도형이 한국전통문화에서 천지인을 나타내는 원방각임을 짐작한다.그가 스스로 레이저 작업의 시기를 포스트비디오라 칭할 만큼 레이저가 지닌 가장 큰 가능성을 내다 보았다. 무엇보다 빛에  천착하였던 그의 예술세계가 비디오 이후를 고민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매체 감각을 찾아 레이저로 확장된것을 볼수 있다.그는 환상적인 레이저 색채를 밀페된 공간에 가두어 놓고 무한공간과는 달리 제한된 공간에서 레이저가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하학적 무늬를 탄생시키며 이것이 진정한 레이저 예술이라고 말하였다.1998년"촛불하나"는 초를 밝히고 그것을 카메라로 찍은 뒤 이것을 다시  여러 대의 삼관식 프로젝터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벽에 투사하는 작품이다. 카메라는 주변에 움직이는 촛불의 불꽃을 촬영하여 영상신호를 실시간으로 프로젝터로 보내고 프로젝터는 비물질적이고 전자적인 이미지를 벽에 투사한다. 벽에 투사되는 이미지는 빛의 스펙트럼 처럼 다양한 색으로 번진다. 이것은 1990년대 주로 사용되었던 삼관식 프로젝터는 RGB 세 가지 색의 브라운관을 통해 이를 합쳐 내보내는 방식인데 그는 이 부분을 조작하여 다채로은 빛을 만들었다.즉 빛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해 내는 기술 미디어의 능력과 비디오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불꽃은 영원하고 초의 그림자는 매우 시적으로  촛불과 텔레비젼 프로젝션을 섞어서 만든 첫 작품이다."촛불TV"는 오래된 텔레비젼의 내부를 비우고 대신 그 안에 초를 하나 밝혀 놓은 작품이다. 빛과 어두움,명상과 기술,촛불이 지닌 신성함과 대중문화의 세속성사이의 긴장과 대립이 연출된다. 텔레비젼의 전기적 빛을 물질을 태워서 빛을 만드는 촛불로 대체하여 텔레비젼의 전자적이고 비물질저인 속성을 역으로 드러낸다. 끓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새로운 기술이 오래된 기술인 촛불에 의해 대체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기술의 본질을 밝혀준다. 그는 텔레비젼으로 자꾸 부서지는 옛날 음극선관 텔레비젼과 달리 절대로 망가지지 않는 어둠속에서도  볼수있는 텔레비전을 만들고자 하였다."슈베르트"는 측음기 스피커와 여러 모양의 진공관 라디오 아홉대로 슈베르트를 표현했다. 라디오에 달린 모니터 영상에서는 살럿 연주하는 모습과 과달카날 퍼포먼스,오페라등 다양한 영상이 나온다. 부가적으로 전시회장에 "메모라빌리아"를 설치하였다. 브룹스트리트에 위치했던 그의 작업실을 재현한 아카이브 컬렉션이였다. 작업실 가구와 소품 그리고 문서를 전체 이관하였고 벽과 창문은 원래와 동일하게 재현하였다.이 작업실은 조수들과 함께 사용하며 전기,기계적 제작을 하던 공간으로 그의 작품 제작과정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는 소품들을 다수 진열되었다.

이와같이 백남준이 활동했던 시기에는 1956년 소련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로 시작하여 1961년 최초 가정용 비디오테이프출시,1964년 필립스 최초 1인치 릴테이프 발명,1965년 휴대용 릴테이프레코더 출시,1969년 최초 3/4 방송용 비디오시스템 출시,1984년 한국에서 모든 텔레비젼 방송 컬러로 송출,1986년 디지털비디오시대가 개막된 시기였다.그런데 백남준은 일찌기 1964년 로봇을 예견했고 1968년 전자 초고속도로인터넷 확장 개념을 인식하였다. 1969년 다양한 방송용 콘텐츠 활용개념,1970~80년대 전 세계의 네트워크 위성방송,1980년 무선 조종기,1994년 로봇이 자유롭게 발언하는 시대를 예견했고 1995년 레이저를 사용하여 일찌기 미래 기술사회를 전망하였다.자연을 포함한  모든 소리와 전자가 주는 빛의 세계를 창출하기 위해 첨단기술을 내다 보며 모두 이용한 늘 새로운 기술을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와 미래를 상상할수 있도록 하였다.다시 말하면 전자 초고속도란  먼곳을 빠르게 이동할수 있는 통로개념을 전자통신인 인터넷까지 확장시킨 개념으로 그는 그 당시 전자통신이 눈에 보이는 고속도로처럼 사회의 기반시설로 자리 잡고 엄청난 사회경제적 발전을 가져와 사람들의 삶을 바꿔 놓을것 예견하고 인터넷의 시대가 실험되고 있다는 견지를 가졌다.위성을 이용한 작업인 위성생방송으로 서로 묻고 대화하는 소통방식 형식을 추구하였다. 직접 무선 조종기로 악기를 조종하였고 유토피안적인 관점에서 인터넷과 미래사회를 바라보고 인간이 아닌 로봇마저 자유롭게 발언할수 있는 미래적인 사유를 보여주었다. 전자음악,텔레비전,비디오설치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했고 마지막으로 레이저를 이용한 작업을 매진하였다.그의 빛은 촛불로 시작하여 텔레비젼,비디오,레이저에 다다른다.그에게 레이저는 가장 빠르고 강력한 정보와 빛의 전달 매체이며 기술과 예술의 끝없는 가능성을 의미하였다. 비디오랜드 목표는 세계평화와 지국의 다양한 소수문화를 보존하는 자유로운 비디오 정보의 유통으로 유튜브를 예견하였다. 비디오를 통해 글로벌을 지향하였다.즉 전시회를 통해 백남준의 미래 기술사회 전망이 오늘날 현실로 이루졌음을 깨달을수 있어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더 까까이 다가갈수 있었다.

사이버포럼(1994년)
TV부처(1974년)
플럭서수스 교향곡7번(1980년)
칭기즈 칸의 복권(1993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년)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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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오페라(1964년)
슈베르트
비디오 샹들리에 NO,1
촛불하나
백남준~삼원소
메모라빌리아
상갈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