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충북 청주시 운보의 집(2023년2월19일)

백재은 2023. 3. 1. 20:14

운보의 집
운보미술관
운보의 집~조각공원

2월19일~수려한 자연환경과 전통한옥이 잘어우러진 문화예술공간으로 충북의 자랑거리인 운보의 집은  운보 김기창화백 어머니의 고향으로 1976년 부인 박래현화백과 사별한 후 7년에 걸쳐 1984년 운보의 집을 완공하고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이곳에 정착하여 자연을 벗 삼아 작품활동에 전념하며 타계할때까지 노후를 보낸곳이다.조선후기 호위무사하는 양반주택처럼  행랑채에서 대문으로 들어오면   빼어난 소나무가 절개를 상징하며 운치있게 연못과 정자를 드리우고 수려하고 매우 아담한 일본풍 정감의 정원이 펼쳐지는 안채로 매우 사색적인 공간을 이루고 있었다.목련이  수줍듯이 고개를 내민 뒷마당의 안채는 흰벽체 창호양식의 일본풍 정감으로 매우 정겨웠다.우리고유 전통양식인 한옥으로 행랑채와 안채를 이루며  비단잉어가 노는 연못의 정자와  매우 소중하게 가꾼 정원이 잘 조화되어 한폭의 그림을 연상하는 4계절 매우 운치있는 곳이였다. 김기창 혼이 살아 고동치는 듯한  안채의 지하는 계단과 벽,바닥이 목재를 이룬 1970.80년대 양옥양식으로  예수생애특별전시관을 이루고 있었다. 운보 김기창 화가는 7살때 열병으로 귀를 먹는 소리세계와  단절된 적막의 세계로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을 실감하며 소외된 나를 찾기위해 예술가 화가가 되었다. 그는 1978년 나의 심혼을 바친 갓 쓴 "예수의 일대기"에서 눈부신 햇빛이 가득한 방에 앉아 화필을 들고 예수 행적 더듬는 선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어두운 동굴속에 빛줄기가 비추었다. 바로 그 빛줄기는  예수의 시체를 앉고 통곡하는 꿈이었다고 고백하였다.어릴적 그는 어머니 손잡고 주일학교에서 예수를 그린 예쁜카드를 선물을 받았는데 어린 마음에 그리고 싶었던 충동을 느꼈는데 그 꿈을 30년안에 실현하게 되었다. 1952년 전북 군산 피난처인 처가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며 이땅에서 전쟁이 끝나고 통일된 평화오길 기원하며 피난생활 동안 예수일대기가 동족상잔의 비극과 유사함을 깨닫아 복음을 연구하고 성화를 제작하여 회화로 승화하였다.1952~1953년 30편 주제를 30폭화폭 화선지에 담음으로 우리나라 최초 풍속화로 표현된 성화로 한국 회화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그의 예수생애특별전시를 감상하면서 예수의 생애 사복음서를 다시 새롭게 회상하게 되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사탄에게 시험으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설교와 병자 고치심,오천인을 먹이는 기적, 물위를 걷는 기적, 어린이들을 축복, 예루살렘의 입성등..주제로 나누어 그 주제에 기초하여 줄거리를 파악하고 신앙교훈을 얻을수 있다는 길잡이를 얻게 되었다. 예수생애특별전시관의 안채를 지나 언덕으로 사슴공원과 분재공원,수석공원으로 이루어진 운보미술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는 인자한 모습의 김기창화백 동상이 입구를 드리우며 청와대에서 볼수 있는 팔작지붕과 둥그런 기둥양식의  건축양식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장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1층 전시실에는 그의 매우 화려한 약력들이 나열되었다. 그의 생애를 3시기로 구분할수 있었는데 제1시기는 (1914년~1946년)까지로 다음과 같았다.1914년출생으로 1921년 서울 승동보통학교 입학 첫날 대운동회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장티푸스로 인한 열병으로 청각이 상실되었다. 1925년 서울 승동보통학교에서 선생님 강의를 들을수 없어 공책에 그림낙서를 하며 그림공부와 글짓기의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1923년 아버지 사업실패로 진명여고를 나온 어머니 한윤명이 생계를 위해 개성 정화여학교 교사로 취임하였고 1928년 15세때 잡지 어린이에 "매미" 응모하여 당선되어 그해 7월호에 실렸다.1930년 승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수일 바라던 아버지뜻 반대 무릅쓰고 어머니 뜻대로 그 당시 유명한 김은호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판상도무"로 첫 입선하여 어머니로 부터 운포라는 이호를 받았다. 1932년 300호 대작 "수조" 입선하였고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급사하였다.1934년 제13회 선전에 "정천"이 입선하였고 그해 "전복도"를 제작하였다.1935년 제14회 선전에 "가을"이 입선하였고 그해 "소와 소년" 작품을 완성하였다. 1936년 김은호에게 배우던 백윤문,장우성, 이우태,조중현등과 후소회를 결성하였고 1937년 제16회 선전에 "고담"으로 특선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였다.1938년 일본방문하여 일본미술계를 접하였고 제17회 선전에 "하일"이 특선되었다. 1939년 제18회 선전에 "고완"으로 특선하고 1940년 제19회 선전에 "여일"로 연4회 특선하여 비로서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해 구신회를 창립하고 " 월야가인" 대표작을 제작하였다.1942년 제21회 선전에 추천작가 출품을 하였고 그의 아내였던 우향 박래현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다니고 있었다.1943년 제22회 선전에서 추천작가로 "석존"을 출품하였고 박래현과 처음 만났다. 그해 스승 김은호 주선으로 함흥에서 제1회 개인전을 하였고 박래현이 선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였다. 1945년 운보로 호를 고쳤고 1946년 박래현과 결혼하였다.즉 제1시기 주요한 약력은 신여성이였던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으로 청각이 상실된 운보를 그 당시 유명한 화가 김은호에게 그림공부를 시키며 운포라는 이호까지 주셨지만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한채 1932년 급사하셨다.1931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을 시작으로 선전에 추천작가까지 되는 운보의 끓임없는 열정과 노력,1946년 박래현과 결혼으로  하늘이 맺어진 운명적인 예술가 부부가 탄생되었던 시기였다.제1시기 조선미술전람회와 선전에 출품된 그림작품 특징은 고전미가 넘치는 여인상을 비롯하여 그 시대  일상모습을 그린 향토적인 애수를 불러 일으키는 정감으로 가득찬 작품들이였다.제2시기는 (1947 년~1976년)으로 박래현이 타계할때까지 그와 예술가의 동반자로  예술 혼을 피웠던 시기였다. 교육과 문화계 활동은 1947년 자유신문사 문화부 기자 취직으로 시작하여 1947년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취임하였고 1955년 홍익대 시간강사,1962년 수도여자사범대학교 미술교육과 전임강사,1966년 성신여자사법대학교 동양학과 교수역임,1972년수도여자사범대 회화과장,1974년 수도사대사임이였다. 1957년 백양회창립하여 전시활동을 하며 1969년 제18회 국전 심사위원 부원장에 피션(제18회,21회,23회),1974년국립현대미술관 운영위원회 위촉,한국미술협회 고문초대,1974년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위원회 위촉,한국미술협회고문으로 초대되었다.이러한 문화예술계 활발한 활동으로 1962년 제2회 5월 문예상미술본상수상과 1971년삼일문화상을 수상 하였다.부부전개최는 1947년 우리나라 최초 제1회 부부전 개최를 시작으로 히와이 호놀룰루 초청 부부전,뉴욕 동남아시아박물관 초청 부부전,워싱턴 오벨리스크화랑 초청 부부전,로스앤젤스초대 부부전개최1971년미국 펜실베니아주 아렌타운 미술관 및 뮤렌버그대학교 공동주최 부부전등...미국,대만,홍콩까지 부부전 진출하여 1967년 로스앤젤스미술인협회 명예회원으로 부부를 임명하게 되었다.그의 해외 진출 경력은 1956년 미국 수정조각품국제전시회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검무도" 출품,1958년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 초대 한국현대미술전에 "군마도"와 "복덕방","구멍가게" 출품,그의 작품인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 작품이 바티간 교황청소장하게 되었다.1970년 일본 오사카초대미술대전출품, 뉴욕문화센터초청 "예수성화전",1972년 제4회 카뉴회화제 출품,1962년 필리핀 미술기관 초청 한국 미술전 출품,제1회 세계문화자유초대전,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유산의 이미지"와 "태고의 이미지" 출품,1967년 프랑스예술인협회 한국의 빛 극동회화에서 "황혼"출품,1968년 프랑스렌에서 순회전 한국동양화전"한국의 빛" 주제로 출품하였다.주요 작품은 1951년 군산 피난시절 "예수생애 성화"를 제작하였다.1952년 동양화의 사실적 평면구성에서 입체적 구성을 시도하여 "구멍가게","노점" 제작하였고 1953년 입체파 실험작인 "복덕방"과 "풍경"을 제작하여 일찌기 현대미술의 실험에 정진했다.1957년  제6회 국전 "홍락도"출품하고 1955년  대작 "군마도"와  1961년 "태고의 이미지"와 "상상이미지"를 제작하였다. 1962년  추상작업에 몰두하며 1967년 "아악의 리듬" 과1968년 뉴욕에 머물면서 "태양을 먹는 새","나비의 꿈"등 티쉬즘풍 현대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1969년 "화가난 우양" 과 1970년 "청산도"제작,"청록산수"를 처음으로 발표하였다.1971년 인사동에 운향화실을 개원하며 1974년 판화공방작업에 몰두하였다.1971년 "조국통일" 제작과 1972년 월남전기록화가로 문공부주최 월남전쟁기록화전을 출품 하였다.1974년 을지문덕장군영정과 1973년 세종대왕영정,1974년 을지문덕장군영정,1975년 신승겸장군영정을 제작하였다. 1975년 부인 우양이 와병중에도 제24회 백양회전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을 출품하였고 1976년 백병원에서 우향이 꽃스케치를 남기고 타계후 바보산수전 개인전과 "오수"를 제작하였다.그의 저서는 1976년 수필집 "침묵의 세계에서" 출간하였다.제2시기 주요한 약력전임교수로서 교육계 활동을 하면서 많은 상들을 수상하였고 미국,대만,홍콩까지 진출하면서 부부전을 개최하였다.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 작품이 바티간 교황청에서 소장하게 되었고 예수성화전과 함께 추상파와 현대미술작품이 해외까지 전시되며 아내와 동반자로써 운보의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였다.제2시기 그림작품 특징은 1951년 우리나라 최초 풍속화로 표현된 성화로 세계미술사에 기록될 만한 대작을 탄생시켰다. 1952년부터 1967년까지 동양화의 사실적 평면구성에서 입체적 구성을 시도하며 현대미술 실험에 정진했던 "구멍가게","노점","복덕방","홍락도","아악의 리듬"은 우리나라 삶과 흥을 노래하는 율동감과 리듬감으로 매우 충만한 작품 이였다.날렵한 선과  입체적인 중첩의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는 평면도구에도 불구하고 원근감이 느껴지며 평화와 순결을 내포하고 있었다.1961년부터 추상파 작업에 몰두하며 "태고 이미지"와 "심상이미지"추상파 작품을 탄생시켰고  태양의 기운으로 정열의 불꽃이 타오는듯한 이국적인 "태양을 먹는새"의 티쉬즘풍 현대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1955년부터 우리나라 가마민족을 상징하는 "군마도"로 대양을 향해 돌진하는 기상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문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작품들을 제작했던 그는 1970년부터 깊은 산중에서 뿜어내는 청명한 소리와 기운으로 가득 찬 우리나라 아름다운 금수강산인 "청산도"를 비롯하여 조국통일을 기원하는 작품,월남전 기록화,우리나라 위인들의 영정을 제작하며 대왕과 장군의 기세와 위엄을 표출하며 우리민족에 대한 강한 조국애를 드러내고 있었다.1974년부터 판화작업에 몰두하며 끓임없는 실험에 정진해 갔다.  제3시기는 (1977년~2001년까지)해외진출 경력은 1978년 한국회화 6명구성 한국화 구주 순회 전시회 스웨덴전 참가,1980년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소장된 "무녀도" 제작,1981년 뉴욕한국문화원에서 화도50주년 기념 김기창초대회고전,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게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 작품 기증,1985년 LA한국문화원 운보개인전,1991년 황금백자전개최,IOC가 올림픽1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세계유명작가50인 판화집에 한국대표로 선정,1991년 뉴욕 크리스티의 한국미술품 경매에 6폭 병풍 "새와 꽃","꽃", "성화인 마구간의 예수"등  3점이 올려졌다.이시기 주요작품은 1977년 태종 무열왕","문무왕 영정",1978년 "산수vi","모내기","어락",문자 서체풍의 "작품B,C","십자가","군상V" 제작하였고 1983년 풍물스케치전 개최하며 "라인강변","모로코의 여인","플라멩고 추는 무희"를 제작하였다.1985년  한자조형작업에 재심취하여 "문자도"를 완성하였고 1986년  "청산비학"을 제작하였다.1988년올림픽조직위원회 올림픽 현대미술전 참가하였고 1989년 점과 선을 주제로 한 "심상시리즈" ,1990년 "한정",1993년 점과 선 시리즈 제작하였다.1996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후소회 창립60주년 기념 식장에서 뇌졸증 쓰러져 청주에서 은거하면서 2000년 미수전을 개최하였다.수상경력은 1981년 예술원정화위원위촉, 국민훈장모란장서훈,1982년제27회 예술원상미술부문수상, 중앙일보사 중앙문화재단 중앙문화예술상수상,1986년 5.16민족상,서울시 문화상 수상1988년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미술인 선정,1999년 20세기 빛낸 한국의 예술인 선정되었다.문학활동1977년 산문집 나의 사랑과 예술 출간, 1978년 성화집 예수의 생애 발간 기념 특별전시회 성화전,1983년세계화필기행문화집발간,1988년 운보자서전 "침묵의 심연에서" 출간하였다. 문화와 사회활동은 1977년 운향미술관개관,1978년 청주에서 전통한옥으로 미술관과 화실 짓기 시작,1978년 청주에서 전통한옥으로 미술관과 화실 짓기 시작하였다.1985년 카톨릭 개종하여 김수환 추기경에게 영세를 받았고  WFO세계농아연맹의 부위원장을 하며 강남구 역삼동  청각 장애인 복지회관 청음회관개관하였다.1988년  청주 운보의 집에 운보공방설립하였다.2001년 1월 타계한 후 그의 빛나는 업적으로 금관문화훈장수여하고 운보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즉 제3시기 주요한 약력은 스웨덴과 파리까지 해외 진출하여 우리문화를 알리는 미술작품에 기여하였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게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 작품을 기증하며 1985년 IOC가 올림픽1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세계유명작가 50인 판화집에 한국대표로 선정되었다. 그후 1991년 뉴욕 크리스티의 한국미술품 경매에 6폭 병풍 "새와 꽃","꽃","성화인 마구간의 예수"등  3점이 올려졌다.활발한 저서활동과 함께 청각장애인을 위한 사회사업을 하며 미술관건립과 운보집을 완공하며 문화사업에 기여했다. 제3시기 그림작품 특징 우리나라 위인들의 영정을 비롯하여 1976년  자연과 벗 삼은 한가로운 경치의 "오수"와 1986년 우리나라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표현한 "청산비학",1990년 "한정"의 동양화인 한국화에도 맥을 끓지 않았다.1980년 무희의 경쾌한  숨소리와 함께 우리나라 민속 흥이 화면전체에 울려 퍼지는 "무녀도"로 제2시기에서부터 실험했던 입체적인 구도를 실현해 나갔고 1983년 "플라멩고추는 무희","모로코의  여인"의 정열 화신과 이국적인 정감을 표출하는 풍물스케치를 시도하였다. 1978년 문자 서체풍의 "작품B,C","십자가","군상V" 작품을 시작으로 1985년 한자조형작업 심취하며 "문자도"를 완성하였다. 1989년 점과 선을 주제로 한 "심상"과 1993년 점과 선의 시리즈로 추상파 실험에 정진하였다.그의 약력과 함께 1층 전시실에는 그의 대작들이 압도하듯 한눈에 확 들어왔다.무궁화와 백두산을 그린 "조국통일"대작으로  미래 남북통일이 이루어진다는 그의 확신에 찬 믿음과 소망이 화면에 가득찼다.인품과 지성미가 넘치는 세종대왕의 모습을 그려낸 "화페 세종대왕"으로 위대한 화가로써 면모를 확증할수 있었다. "군마도"는 야생마 넘치는 말의 생동감으로 군사 왜적을 무찌르며 나라를 지키고 삶을 영위해간 우리나라 민족적 정기가 넘쳤고 "수렵도"는 땅을 박차며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우리 조상의 기상이 화면 가득히 표출되었다. "화가난 우향"은 자신의 아내인 우향의 화난 모습들을 우스꽝스럽게 표출한 표현주의 작품 같았다.그외 추상파작품은 "점과 선 시리즈","작품","문자도","백두정상" 작품이였고 동양화작품은 이국적인 정감의  "모로코","태양을 먹은새" 작품과 "조국통일", "군마도","독수리","시화","신선도","수렵도","두마리에 기러기", 간결한 선들을 강조한 "수석과 꽃"이였다.1층 전시실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그가 그린 청명한 우리나라 자연,향토적인 삶,현대풍그림과 스케치를 인쇄하여 벽장식되어 매우 정겨움으로 그의 그림이 더욱 더 가치있게 빛났다. 지하에는 미인도,베트남종군스케치,신문연재소설삽화의 주제로 전시되었다.귀가 먹기전 운보가 들었던 마지막 소리는 1919년3.1독립 운동소리로 절망의 심연속에 좌절과 싸움으로 침묵의 세계와 살아왔다.듣지 못하는 극심한 심연에서 운보는 꿈을 꾸었다. 바다위를 걷는 꿈을 꾼 운보는 그림공부를 뜻하는 꿈이였고 미모의 여인의 꿈은 행운의 전조였다. 월계관을 쓴 여인의 꿈은 승리가 주는 최고의 영광으로 그 꿈을 꾸고 최초 선전 특상 최고상인 창덕궁상 받았다. 이렇게 운보는 미인의 수줍은 눈빛과 심장에 떨림을 느끼며 "미인도"를 완성했다.신문과 잡지 삽화로 1960년대 서울신문에서 최인욱 쓴 "임깍정"과 박용구가 쓴 "취장새우",우현민이 쓴 "강남춘곡",김팔봉이 쓴 "군웅"을 그렸고 경향신문에서 정찬숙이 쓴 "비다의 왕자"를 그렸다. 작가가 쓴 내용을 파악하며 빠른 필선으로 그려낸 만화풍의 그림으로 어릴적 향수를 느끼게 하는 만화 같았다.운보는 10인 화우들과  들뜬마음으로 베트남 전선에 초행 하였다.치열한 전투지역 최전선 전장으로  맹호와 백마가 아주 유명해서 단시일 모두 찾아 다니기가 어려워 5명씩 두패로 나누어서 헬리콤터 번갈아 타면서  맹호부대에 머무렀다.  국군의 감성과 대민사업성과를 일반에게 인식 시키고자 직접 눈으로 보고 "베트남 종군 스케치"를 하였다.날렵한 선의 수채화인 전쟁 기록화였다.이와같이 7살때 열병으로 귀를 먹는 소리세계와  단절된 적막의 세계에서 운보는 외할머니,어머니,스승 김은호,아내 박래현의 자기희생과 봉사,사랑으로 위대한 화가로써 성장해 갈수 있었다.듣지 못하면 울부짖고 싶고 때려 부수고 싶지만 터질듯한 가슴 응어리를 그림에 평생 쏟았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눈으로 볼수 없는 "화중유성 성중유화"로 그의 그림들은 붓들고 화지위에 토해 놓은 소리가 들린다. 향토적 우리나라 일상과 문화에 율동과 흥이 넘치고 아름다운 우리나라 자연이 뿜어내는 청명하고 시원한  빛줄기가 쏟아진다. 야생마처럼  돌진하는 기상과 민족적 정기가 깃발치는 조국애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마음이 무심하고 오직 천진한 심정이 고스란히 존재하는 옛 도자기가 그가 좋아하는 소재로 그림의 소재는 천진난만한 자연 그대로의 성질이 발하는 것이고 미술품은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와 생명을 암시해주는 존재로 화가는 다양성과 무한성을 추구하는 분방과 자기 성장확장의지가 중요하다  말하였다.그가 말한것 처럼 부부와 함께 해외까지 진출하며 동양화,입체파,추상파,티쉬즘풍,풍물스케치,위인영정,전쟁기록화,만화,판화로 다양성을 추구하였고  화가로써 뿐만 아니라 교수,문학가,장애인을 위한 사업 ,미술관과 화실을 짓는 문화사업까지 자기 확장에 평생을 쏟은 위대한 예술가였다.운보 그림작품들과 더불어 1층 전시실에는 그의 아내였던 박래현 전시실이 있었다.태양을 중심으로 나무와 새들이 약동치는 생명의 소리와  빛이 전해지는 김기만의 "태양을 따르는 한마음"(2000년)병풍이 전시되며 박래현의 작품들이 펼쳐졌다. 김기창과 박래현의 "화조도"로 모란의 꽃향기가 화면 가득 퍼지며 살찐 닭의 생명이 꿈틀거리는 부귀와 생명의 가정화목을 상징하는것 같았다."홍매"는 두텁고 거친 나무가지에 살포시 피어난 홍매로 굳은 신의와 절개로 가득했다."매화도","석류","꽃"은 동양화 단아한 여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동양화 작품이였고 "여인들"은 풍요를 상징하는 달빛아래 정열의 여인들로 우리고유 미를 잘 전달하고 있었다. 전시된 작품 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무희들"은 입체파로 세잔 영향을 받은 작품 같았다. 추상파  판화 작품은 "기원A"와 "회상A","시간과 인간작품"으로 "기원A"는 이집트 상형문자 같은 인간의 소통 문자를 상형한듯 소리와 글자의 생명력이 전달되었고 "회상A"는 뇌의 회로에서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빛의 속력과 움직임이 전달되는 작품 같았다. 판화에도 불구하고 양감과 질감이 느껴지는 입체감으로  공중에서 회로하는 우주체 같았다."상" 은 추상파 작품으로 역사의 시간속에 인간의 귀중한 정보 매개체 같았다."시화2","폭풍"은 고전미를 지닌 추상파 작품이였다. 즉 1950년대부터 추상파 실험 작업에 몰두했던 박래현은  율동감과 빛의 속력이 공간과 시간속에 울려 퍼지는 우주가 약동치는 생명력 있는 추상파를 이룩하였다.우리고유 정서가 흐르는 한국화를 바탕으로 동양화에 현대화풍을 접목시킨 입체파를 형성한 실험주의 정신으로 끓임없이 정진했던 화가임을 입증할수 있었다. 운보미술관길 따라 조각공원으로 연결 되었다.연꽃 연못따라 산책길에 조각공원으로 이일호의 "아침을 기다리며" 작품이 시선을 자극했다. 누워서 운동을 하는 두여인의 매우 아름다운 자태로 신비스럽게 다가왔다.공원 초입부터 매우 매력적인 조각작품으로 공원길이 더욱 더 가치있게 빛났다.세청년작품 같은 조각으로 민중의 열기로 불태우는 강렬한 이미지가 매우 인상적이였다.추상파 작품은 "여인"과 "가족",소녀같은 작품이였다. 잔디광장으로 여인의 서있는 누드와 발레하는 모습,돌부처 처럼 복스러운 우리나라 어머니상 같은 모녀 작품이 펼쳐지며 매우 정겨웠다.조각공원 언덕으로 운보우향묘소로 가는 돌계단으로 주변 자연경관과 잘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기와 돌담에 에워싼 한옥과 문화예술공간,조각공원,운보우향묘소를 이룬 역사 길이 길이 빛날  매우 귀중한 문화재급 운보의 집이였다.

수태고지
아기 예수의 탄생
동방박사들의 경배
아기예수 이집트로 피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
사탄에게 시험받다
산상설교
병자 고치다
오천인을 먹임
물위를 걷다
어린이들을 축복하다
?
예루살렘에 입성
최후의 만찬
재판받다
수난 당하다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힘
시체를 옮기는 제자들
부활
막달라마리아와 만남
승천(1952년~1953년)
운보미술관
김기창~조국통일(1972년)
김기창~수묵화 습작
김기창~독수리(1964년)
김기창~점과 선 시리즈(1993년)
김기창~군마도(1984년)
김기창~작품(1989년)
김기창~문자도(1984년)
김기창~신선도(1986년)
김기창~모로코(1983년)
김기창~수렵도(1967년)
김기창~귀가 (1980년)
김기창~여인(1960년)
김기창~백두정상(1990년)
김기창~태양을 먹은새 판화
김기창~수석과 꽃(1960년대)
?
김기창~두 마리에 기러기 (1960년대)
김기창~시화(1950년)
운보미술관 1층
운보미술관 지하로 내려가는 길
미인도
베트남 종군 스케치
임깍정~글 최인욱,그림 김기창 서울신문(1962년~1965년)
취장새우~ 글 박용구,그림 김기창 서울신문(1960년~1961년)
바다의 왕자 글 정찬숙, 그림 김기창 경향신문(1960년~1961년)
강남춘곡~ 글 우현민,그림 김기창 서울신문(1961년~1962년)
군웅~글 김팔봉, 그림 김기창 서울신문(1955년~1956년)
김기만~태양을 따르는 한마음 (2000년)
김기창 박래현 화조도(1960년)
박래현~홍매(1991년)
박래현~기원A(1973년) 판화
박래현~회상A(1972년) 판화
박래현~시간과 인간(1972년) 판화
박래현~상(1973년)
박래현~시화(1950년)
박래현~폭풍(1960년)
박래현~시화(1950년)
박래현~여인들(1950년)
무희들(1960년대)
박래현~매화도(1960년)
박래현~석류(1950년)
박래현~꽃(1950년)
이일호~아침을 기다리며
조각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