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함백산 만항재,민둥산역~영월역 태백눈꽃열차,영월 청령포와 장릉(2023년12월31일)

백재은 2024. 1. 3. 19:40

청령포
함백산 만항재
민둥산역
장릉

12월31일~굿모닝여행사를 통해 여행을 가게 되었다. 잠실역1번 출구에서 엘리베이터 타고 횡단보도 건너니 롯데마트앞 4번출구였다.여행객들과 관광버스들로  복잡해 너무 불편했었던 동백여행사의  3번출구와는 달리 너무 한산하여 시간표대로  너무 편하게 버스에 오를수 있었다.차내에서 가이드님이 강낭콩이 들어간 팥떡과 생수를 주었다.버스안에서 집에서 가져온 견과류,고구마,귤,삶은 달걀과 함께 먹으면서 서두름 없이 꼭꼭 씹으면서 먹을수 있어 너무 좋았다.생각보다 빨리 9시45분쯤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에 도착했다.청령포로 가는 입구는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문양과  말타고 유배지로 떠나는 단종 벽화가 장식타일로 장식되었다.가이드님이 직접 배를 타고 청령포까지 여행객들을 인솔하였다.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절벽으로 막혀있어 천혜의 유배지였다.청령포의 설경이 한폭의 수묵화 작품 같았다. 비참한 최후의 단종역사 그림자로 얼룩지며 애상의 곡조가 흘렀다. 청령포 맞은편은 영월강변저류지로 영월동서강정원청령포원을 이루고 있었다.정원갤러리길,영월의숲,대지의숲등..가을정원길,계절정원길,은행나무터널 등이... 조성된 피톤치드가 샘솟는 곳이였다.청령포에서 함백산 만항재로 향했다.버스 차창가로 함백산 만항재로 가는 고개길이 펼쳐졌다.드높은 산봉우리가 에워싼 숲으로 생명을 움츠리며 안식하고 있었다. 만항재로 가는 도중 오전내내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며 눈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눈 내리기를 고대했는데 하늘이 도운것처럼 때에 맞춰 눈이 내려 기적 같았다.함백산 만항재는 우리나라 고원 드라이브 코스 정수이자 차로 오를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갯길이였다. 만항재는 강원도 정선과 영월 태백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무려 1330M에 달한 남한에서 6번째로 높은 곳이였다.함백산 만항재입구 산상의 화원으로 가는 도로길부터 절개를 상징하듯 눈꽃을 피운 즐비한 전나무숲이 매우 수려한  수묵화 작품 같았다. 나무가지와 잎들에 조각을 새기듯 진주빛으로 눈꽃을 피워 매우 환상적인 산상의 화원을 이루었다. 산상의 화원의 등산길 따라 올라가니 만항재 입구였다.눈내리는 날씨로 길을 헤멜까봐 가이드가 직접 오셔서 전나무 숲길을 안내해 주었다. 안개쌓인 하늘을 향해 장대하게 뻗은 전나무숲으로 매우 신비롭고 몽환적인 설경을 자아냈다.나무 하나 하나 마다 매우 환상적인 눈꽃향연으로  보기만 해도 저절로 감탄사가 연발아 치며 힐링되었다.함백산에서 민둥산역으로 향했다.버스창가로 암벽에 연결된 누각으로 신비의 성 같았고 수마노탑이 유명한 정암사가 비추며 유구한 역사의 길임을 나타내고 있었다.민둥산역에 도착하여 가이드님의 안내로 점심을 웰빙한방마을에서 먹었다.무려15가지 반찬이 차려진 곤드레돌솥밥상으로 너무 감동으로 다가왔다. 곤드레 향기가 가득한 곤드레돌솥밥으로 파간장의 파향기와 조화로운 맛을 이루고 한방차의 누룽지 숭늉으로 고소한 맛이 되어 힐링이 솟구쳤다. 바삭하고 짭쪼름한 가자미튀김,브로컬리, 맛깔스러운 파래무침,익은 무생채,젖갈향기 가득한 젓갈무침,베이컨 향이 가득한 베이컨볶음,마른나물무침,고사리볶음,도라지무침,고추잎무침,톳무침,묵은 열무김치,묵은 파김치,달큰한 김치,전통 강원도 된장맛의 된장찌게로 음식 하나 하나 너무 맛깔스러운 환상적인 맛이였다.특히 강원도 된장은 진한 밤색으로 구수하지는 않지만 맛깔스럽고 뒤끝이 시원한 맛으로 어느 음식이나 간이 잘 맞는 된장이였다.젓갈,채소류,해조류 무침등은 본연의 재료의 향기가 살아있는 맛을 간직하고 있었다.직접 담근 열무김치,파김치는 장독대에서 익은 효소의 맛이 살아있어 매우 환상적인 맛이였다.최고의 지역 특산물의 재료를 사용하여 본 재료의 향기와 나물향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양념소스로 최고의 음식 맛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담겨진 밥상이였다.민둥산역에서 영월역까지 태백눈꽃열차를 타기 위해 민둥산역에 갔다.정선의 명소로 장식한 역내부와 자연의 신비로운 자태의 목재선반을 이룬 쉼터로 매우 아늑했다.드높은 산봉우리들이 사방으로 비추는 그리운 고향역 향기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 1시47분 민둥산역을 출발하여 2시27분 영월에 도착하는 기차로 능선을 따라 달리는 구간으로 협곡의 경치를 느낄수 있는 곳이였다. 산봉우리에 물안개가 피어 오르고 깊은 협곡을 이룬 산의 정기아래 마을을 이룬  정겨운 정취를 담고 있었다.기와집을 이룬 영월역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장릉에 갔다.장릉은 국가지정 사적 제196호로 조선 제6대 단종의 능이다.입구부터 산속의 숲속길로 이룬 조선왕릉과는 달리 도로길 옆으로 공원의 능 같아 쓸쓸했지만 그의 생애와 사육신의 충절을 되새기기 위해 세운 전시관인 단종역사관이 있어 돋보였다. 단종(1441년~1457년,재위1452년~1455년)은 1441년7월23일(세종23년)제5대 문종의 아들로과 현덕황후 권씨 사이 원자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이다.현덕왕후 권씨가 25살때 난산으로 간신히 아이를 낳고 기력을 완전히 빼앗긴 탓으로 3일만에 숨을 거두었다.현덕황후는 세종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였는데  후덕한 여자인 혜빈양씨는 세손 홍위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째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겼다.홍위가 8살 되던 1448년 세종(30년)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에문관제학 윤상으로 부터 학문을 배웠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7월20일 홍위는 세손에서 왕세자로 10살때 책봉되었다.1452년5월18일 문종이 승하한 후 단종은 12세 어린나이에 제 6대왕으로 즉위하였다. 단종은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정도로 어릴때부터 명석하였다. 세손시절 성삼문,박팽년등 집현전학자들의 지도를 받았고 왕세자 책봉이후는 이개와 유성원이 그의 교육을 맡았다. 단종은 즉위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수 없었기에 왕권이 유명무실하여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렀고 왕족의 세력이 팽창되기 시작하였다.  왕족간의 권력다툼이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켰다. 1453년10월10일 단종의 작은아버지로 왕권 탈취를 노리던 수양대군은 권람,한명회,신숙주등과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켰다.김종서 황보인 동생 안평대군등 단종 측근 세력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어린 조카를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든 수양대군은 그 과정에서 김종서,황보인등의 대신들이 안평대군 주변에 모여들자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자신의 수하인 한명회,권람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 피살하고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죽였다.고명 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랐고 왕을 대신하여 서무를 관장하며 왕권과 신권을 장악하였다. 자신의 집권 거사에 참여한 인물을 정난공신에 봉하고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안평대군 사사하고 우직은 진도에 유페시켰다.계유정난 이후 단종은 아버지 문종의 2년상이 끝나기도 전인 1454년 단종(2년) 1월22일 15세인 송현수 딸을 왕비(정순왕후)로 맞이드렸는데  이때 성삼문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반대하였으나 왕실 내부를 장악하려는수양대군에 의해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1455년6월11일 단종은 자신을 보호하던 금성대군,한남군 등 마져 수양대군에 의해 유배 보내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처해졌다. 결국 경회루 아래에서 수양대군에게 어보를 건네고 상왕이 되어 창덕궁으로 물러나고 수양대군은 근정전에서 조선 제7대 왕으로 즉위하였다.단종 15세때 숙부 세조에게 왕위 찬탈당하고 그해 7월 공의 온문태상왕이 되고  창덕궁 수강궁에 거쳐를 옮겼다.정순왕후는 의덕왕대비로 봉해졌다. 1456년(세조2)숙부인 세조에게 억울하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당한 충절을 지킨 충신들을 사육신이라하고 세조 즉위 후 벼슬을 하지 않고 평생 단종을 위하여 절의를 지킨 신하를 생육신이라한다. 1456년6월1일(세조2년) 상왕(단종)은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려하였다.이를 기회로 박팽년,성삼문등 집현전 학사를 중심으로 세조를 처단하고 상왕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김질의 밀고로 실패하고 극형을 받았다. 사육신등의 단종복위운동과 병자옥사 일어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세조는 단종의 장인 송현수 등이 단종복위를 도모했다고 꾸며 1457년6월21일(세조3년)상왕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강원도영월로 유배 보냈다.단종은 6월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후인 윤6월28일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이곳에서 2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큰 홍수로 읍내 광풍헌으로 옮겼다.그리고 문종비 현덕왕후를 서인으로 삼고 그 능인 소릉을 파혜쳐 관곽을 내다 버렸다. 경상도 순흥에 유배가 있던 금성대군은 1457년7월(세조3년)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영월에 있는 노산군(단종)을 복위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지고 노산군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1457년10월24일 이에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고 전해지니 이때 단종 나이 17세였다.어린 나이로 광풍헌에서 승하하였다. 단종의 시신이 영월 동강에 버려진 것을 영월 호장 엄흥도가 거두어 선산인 현재위치에 암매장하였다.단종이 죽은 후 정순왕후는 강봉되어 동대문밖 비구니들이 모여있는 정업원에서 외롭게 살다가 1521년 중종(16년) 82세에 승하하였다.1516년 중종(1년)페허간 된 단종 묘를 찾아 봉분을 갖추고 1581년 선조(14년)상석,표석,장명등 망주석을 세웠다.1698년12월 (숙종24년) 단종 복위와 함께 3개월에 걸쳐 문인석등 각종 석물과 정자각 등의 건축물이 세워졌다. 이때 조성된 석물 체제는 후릉(정종능)을 따르고 수는 경릉(덕종능)을 따라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였다.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신위를 종묘에 모심과 동시에 묘호를 단종,능호를 장릉으로 하였다. 이후 1726년 (영조2년) 엄흥도 비각을 세웠고 1733년 (영조9년) 능침표시를 위한 비석을 설치하였으며 1791년 정조(15년) 268명 제향 인물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배식단을 비롯하여 영천에 비를 세워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순왕후 사릉은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단종의 친누나인 경혜공주가 출가한 정미수의 해주 정씨선산 묘역에 묘 형식으로 조성되었으나 단종 복위와 함께 사릉이라 하였다.사릉에 조성된 석물은 장릉과 함께 후릉과 경릉의 예를 따라 간소하게 조성되었다. 조선왕릉은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조선을 통치한 왕과 왕비 무덤이다. 2009년 6월27일 조선왕릉 42기중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서울 경기지역 중심으로 조성된 조선왕릉은 단종만 유일하게 강원도에 위치하고 연산군과 광해군과 달리 단종만이 유일하게 복위되어 왕릉으로 조성되었다. 어느 왕릉에도 없는 장판옥과 배식단이 세워져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위한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단종 장릉은 충절과 의리를 중시하는 유교윤리가 오늘날 가까이 살아 숨쉬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현재 단종문화제를 이어가고 있는 영월군민들은 1516년  중종(11년)우승지 신상을 보내 치제문을 지어 제례를 올린 것을 기준으로 500년동안 끓임없이 소통이 이어오고 있다. 단종어진은 선양사업의 큰 축으로 단종어진은 각종 문헌기록을 참고하여 추사로 제작되었다. 단종의 생애와 역시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복도로 나오니 단종이 말타고 유배가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몇가지 색채를 이용하여 충절어린 신하와 어진 단종의  모습을 매우 간략하게 표현하였다.단종역사관을 나와 장릉을 산책했다.장릉은 우리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 이곳에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2009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입구 바로 언덕으로 장릉 능선 남쪽에 아담한 정자인 배견정이 위치하고 영월군수였던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인 박충원낙촌비각으로 황토기와 돌담장의 대문과 함께  누각안에 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박충원의 충신을 후세에 알리는 매우 귀중한 비각이였다. 그 옆으로 단종과 정순왕후 영혼이라도 함께 하라는 뜻에 옮겨심은 소나무인 정령송이 있는 능으로 올라가는 길로 이루어져 있었다.영월 장릉의 망주석은 조선 왕릉 중 세호가 없는 유일한 것이였다.박충원낙촌비각길 따라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인 재실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기거하였던 곳이였다.숙종25년 1699년에 건립되었고 1932년 중건되었다.중앙정원을 이룬 재실로 매우 아담했다.장대한 나무가 호위하듯 마당을 드리우며 푸른 생명력으로 충절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재실옆으로 엄흥도 충절 알리기 위해  1726년 영조(2년)어명으로 세운 비각인 엄흥도 정여각이 홍살문을 이루며 버티고 있었다. 그의 충절이 없었으면 오늘날 장릉이 존재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며 역사에 길이 남길만한 최고의 충성된 신하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엄흥도 정여각을 지나니 왕릉으로 가는 길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른쪽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조사위,환자군노위,여인위 총268인 합동 위패  위패 모신 장판옥,1733년 영조(9년)에 세운 릉과 경내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던 곳인 수복실,단종비각이 있있고 왼쪽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단종제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배식단이 있었다.배식단을 지나니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인 홍살문으로 동을지산이 보이는 단종릉을 바라보며  신이 다니는 길인 신로,제향을 드리러온 왕이 걷는 길인 어로,제향때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인 향로가 ㄱ억자로 꺽여 있었다. 일자형인  조선 왕릉과 다른 독특하게 이루져 있었다.홍살문 맞은편으로 단종제 올리는 한식때 제정으로 사용했던 우물인 영천과 능에 제향 지낼때 음식 준비하는 곳인 수라간이 있었고 제향 올릴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시는 정자각으로 제향 올리는 정자 모양으로 단종릉을 바라 보고 있었다.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택지된 곳에 조성한 능이 아니기 때문인지 산수가 수려하지는 않아 너무 아쉬웠지만 다른 조선왕릉과는 달리 충신을 알리는 비각들로 충절의 넋이 깃들여 있어 매우 뜻 깊었다.장릉을 나오니 도로 중심으로 천연계가 약동하는 장릉의 벽화와 굽이치는 산봉우리들이 마주하며  전원마을임을 보여주고 있었다.장릉에서 서울으로 향했다. 저녁 6시쯤 생각하지도 못한 빠른시간내 서울 잠실역5번 출구에 도착하여 너무 좋았다. 잠실역5번 출구는 잠실 롯데몰의 현란한 야광 빛 축제로 매우 반짝였다.우주선으로 향하는 불빛처럼 빛나며 여행의 피로를 풀어 주었다.이와같이 아침의 아주 한산한 버스탐승과 저녁의 빠른 도착으로 너무 편했던 여행이였다.아주 친절한 가이드님의 핵심적인 여행지 설명과 여행객들을 편하게 여행하도록 인솔하는 친절로 지금까지 만난 여행사 가이드님 중 최고였다.환상적인 맛집에서 미각을 즐기며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 시켰다. 청령포와 장릉을 연결하여 단종의 역사를 되새기고 바로  그곳과 가까운 눈꽃의 신세계인 태백산 만항재와 태백눈꽃열차여행으로 매우 알차고 다양하게 짜여진 여행코스였다.즉 역사산책과 미각을 즐기고 눈꽃의 신비로움을 경험했던 카타르시스가 넘친 여행이였다. 

청령포
함백산 산상의 화원
함백산 전나무숲길
웰빙한방마을
민둥산역
태백눈꽃열차
문종실록
매죽헌선생집~성삼문 시문집
경은일고~생육신 이맹전 문집,어계일고~생육신 조려 시문집
추강집~생육신 남효온 시문집
단종역사관
박충원 낙촌비각
재실
엄흥도 정여각
배식단
장릉~정여각
잠실 롯데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