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7일~ 사당역으로 가기위해 새벽 5시45분쯤 버스를 탔다. 버스 차창가로 흰눈이 쌓인 거리 경치로 너무 상쾌했다. 7시 사당역에서 리무진 버스에 오르니 혼자 앉을수 있는 좌석은 벌써 꽉차 둘이서 앉는 좌석에 앉게 되었다.아쉬움과 함께 옆에 남자분이 앉을까봐 신경쓰고 있는 중 리더님이 임철환님을 내옆으로 오라고 하는 것이였다. 남자가 내옆에 앉는것 싫고 불편하다며 거절하게 되어 안도하였다.차창가로 설경의 경치들이 펼쳐졌다. 비록 눈꽃을 피우지 않았어도 상큼한 향기를 마음 한가득 담아 주었다.여행 떠나기 전 날씨를 보니 평창군은 맑은 날씨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리더님이 대관령은 오전에 눈이 온다고 해 설래였다.리더님 말대로 평창군에 이르니 흰눈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흰눈이 쌓인 언덕이 광활한 대지로 보이며 생명이 발돋움하는 상쾌한 내음으로 가득찼다.굽이치는 산들이 비추는 대관령양떼목장 휴계소와 전나무 가로수길을 이룬 입구로 광활한 자연형세의 주변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초목에 드리우며 시냇가가 흐르는 언덕길 따라 올라가니 매표소였다.통나무양식 건축과 함께 흰눈이 쌓인 목장길로 높은 구릉성 대지가 펼쳐져 목가의 향기로 가득찼다.4계절 각기 다른 감성적으로 다가오는 사색적인 정감을 자아냈다.같은 회원들이 몰려가는 자작나무쉼터로 따라 올라갔다.회원들과 번갈아 가며 임철환님이 사진을 찍어 주셨다. 작년 안동여행때도 사진작가처럼 독사진을 잘 찍어주셨는데 이번 여행에도 만나게 되어 감사했다. 멀고도 멀게 느껴졌던 목장길이 10분도 안되어 먹이주기 체험장에 이르렀다. 미국 서부의 정감인 1970년대 특선작 초원의 집 같았다. 부드러운 양털과 함께 순한 눈매를 가진 양으로 하나님을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여명을 여는 목장길로 가슴에 평안한 안식을 가득 담아 주었다. 먹이주기 체험장 부근에서 여행객에게 사진을 부탁했다.햇빛과 배경을 고려하며 성심 껏 찍어주고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처음 보는 사람에게 친절을 배우는 즐거운 여행길이 되었다. 칼바람에도 손을 녹이며 걸었던 목장 길에서 잠시 쉴수 있는 휴계소가 있어 들어 갔다. 잠시 몸을 녹일수 있는 난방설치로 쉼을 가질수 있어 힐링되었다.휴계소에서 원점으로 회귀하였다. 모이는 시간이 많이 남아 바람의 언덕 커피숍에 들어갔다. 목재장식의 창문과 목재천정의 복층을 이룬 내부로 중앙 재래식 난로가 버티고 있어 별장같은 정겨움으로 다가왔다. 먼저 온 리더님과 회원님들이 추위를 녹이며 휴식하고 있었다. 사과향이 가득한 사과쥬스를 마시는 중 리더님이 과자를 챙겨 주어 감사했다.시클라멘속이 인고의 생명을 피우고 덩치 큰 강아지가 커피 내부를 돌아다니며 손님을 맞아주는 천연계와 더불어 숨쉬는 생명력으로 가득찼다.다같이 모이는 시간이 되어 버스에 올라 강릉시로 향했다.강릉시에 이르니 눈이 내렸던 평창군과는 다른 햇살이 비추는 맑은 날씨로 반겨 주었다.시내 중심으로 남대천이 흐르고 있었다.드넓은 강같은 남대천이 청푸른 색채의 바다색채로 빛나며 너무 아름다웠다.안목해변 정류장에서 내려 각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안목커피거리로 분주하게 달리는 자동차의 도로길을 건너며 버스정류장 근처로 가니 해물전문점 식당이였다. 저! 멀리 짙푸른 바다가 출렁이며 매우 아름답게 비추었다.다시 방향을 돌이켜 이리 저리 식당을 찾아 걸었다. 안목해변을 감상하기 위해 점심을 빨리 먹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황급히 식당을 찾다 보니 미역국 전문점이라는 간판을 발견했다.식당안을 들어가니 안목해변을 바라 볼수있는 2층과 야외 테라스를 갖추며 매우 깔끔한 실내내부로 청결했다. 미역을 재료로 들깨,해물,북어등 여러가지 메뉴를 출시한 힐링식당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황태미역국을 먹었다.황태의 고소함과 미역의 조화로운 맛으로 국물이 시원하고 담백했다.젓갈이 벤 생김치,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가득한 시금치무침과 삶은 얼갈이무침,입안에서 매우 부드럽게 씹히는 목이버섯의 정성 가득한 상차림으로 힐링되었다. 황태미역국이 뜨거워 접시를 찾으러 정수기 옆 선반으로 가니 반찬을 가져갈수 있도록 진열 되었다.밥상에 없는 반찬들인 열무김치,무우절임무침,양파와 마늘 간장절임을 접시에 담아와 먹었다. 싱싱한 맛의 열무김치,숙성된 간장으로 더 달큰해진 양파절임과 마늘향이 가득한 마늘절임, 된장에 절인 무우무침으로 매우 감칠맛이 있었다.특히 짜지 않는 된장에 절인 무우를 간 맞게 무친 무우절임무침이 입맛을 돋구었다.비법 절임소스를 지닌 기억에 각인 될만한 맛이였다.여러가지 다양한 반찬들이 제공되어 저절로 기쁨이 넘쳤다.명소 유흥가에 위치한 식당임에도 불구하고 힐링을 목표로 주인장의 정직한 마음이 담겨져 매우 감동적이였다.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 안목해변을 산책했다. 조개껍질과 함께 희고 베이지빛 자갈들의 모래사장이 신비로운 색채를 띠고 갈매기가 춤추는 매우 짙푸른 바다로 매우 환상적이였다. 흰 포말이 바위에 부딪치며 소리를 내고 파도치는 장관이 강렬하고 웅장했다. 겨울바다 파도는 바람,중력,지진 3요소로 인해 친다.바람으로 인해 올라온 물결이 중력의 영향으로 아래로 내려가 운동에너지 만들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반복하여 진동이 커진다. 달의 인력으로 형성되는 밀물과 썰물의 기조력도 조석파라는 파도를 형성한다.이러한 자연현상의 매우 신비로운 바다를 그저 가만히 서서 한참동안 바라 보았다. 바라만 봐도 매우 환상적인 바다를 15분이상 감상하고 제방위로 가니 물결이 바위를 치고 올라오고 물색이 점점 옅어지는 빛의 색채에 따라 바다색이 달라지고 있었다.안목해변에서 오죽헌으로 갔다.
오죽헌
오죽헌은 보물제165호로 신사임당과 이이가 태어난 곳이였다. 신사임당 조충도 화단이 소나무가 드리운 섬과 함께 아치형 다리의 연못으로 모네의 연꽃수련장 같았다.연못을 바라보며 구용정정자가 있었다. 구용정은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의 자신장에 나오는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 지녀야 할 9가지 몸가짐에사 따온 것이였다.초충도 주요소재인 오이,수박,가지 맨드라미,양귀비,봉선화,원추리 등 심어 화단을 조성하여 벌,나비,잠자리,여치,방아깨비,쇠똥구리 같은 날벌래가 서로 공존하도록 하였다.선비모습의 율곡 이이 동상을 지나니 자경문과 입지문이 있었다.자경문은 오죽헌 안팎을 가르는 문으로 성인이 되고자 쉼없이 노력한다는 입지,수양과 공부는 서두르지 않고 계속한다는 용공,마음을 정하는데는 먼저 말을 적게한다는 과언,정심,매사에 공손하며 삼가고 조심한다는 근독,독서,금욕,진성,정의,감화 수면의 뜻을 지니고 있었다.자경문과 입지문에 들어 서니 광장을 이룬 율곡기념관과 바깥채 문2개와 함께 오죽헌으로 질서 정연한 서원 같았다. 구부러진 소나무와 가느다랗게 솟은 대나무가 드리운 바깥채 문을 들어가니 강릉 시화로 지정된 600년된 베롱나무가 반기고 있었다.나무가지들이 힘차게 기상의 나팔부르듯 황기로의 필체 같았다. 율곡송에 드리운 문성사가 선비지조를 품고 있었다. 문성은 인조가 1624년 율곡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이 없이 통하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문성사 안에는 병풍과 이이의 영정으로 제향을 올리느냐 발길이 끓이지 않고 있었다.문성사 옆은 오죽헌(몽룡실)으로 온돌방옆 마루는 조선 초기 별당건물의 마루로 당시 특징을 잘 보여주는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곳이였다. 오른쪽 온돌방은 이이를 낳은 곳으로 신사임당 영정이 있었고 왼쪽 마루방은 이이가 6살때까지 공부하던 곳이였다. 오죽헌과 안채,어제각 뒷산에 자생하는 오죽은 대나무 한종류로 가지가 얇고 검은색 띤 외떡잎식물 벼목 화본과의 목본식물에 속한것이였고 죽순은 5~6월에 나오며 첫해 초록색이었다가 다음해 검게 된다. 60년을 살고 꽃이 피면 죽는 식물이였다. 오죽헌 옆으로 마당에 오죽헌에서 가장 오래된 율곡매가 있었다. 세종22년 1440년경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별당 후원에 심었다.그후 신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꾸었다. 신사임당은 매화그림을 그렸고 딸을 매창이라고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천연기념물 제484호로 나무 7m높이 매화나무였다. 연붕홍색 홍매종류로 알이 굵은것이 특징으로 봄날 운치를 더할것을 상상해 보았다.오죽헌을 지나 사랑채와 안채가 있었다.가장 오래된 건축에도 불구하고 운치있는 ㅁ자형구조를 지닌 재벌 양반가의 주택 같았다. 방마다 율곡제 초대전 출품작이 전시되었다.여러가지 글씨체의 서예작품들과 대나무 그림이 걸려 있었다. 바람에 춤추는 듯한 잎파리와 곧은 대나무의 그림으로 고결했고 여러가지 글씨체를 볼수 있어 카타르시스가 넘쳤다. 안채 뒤뜰에 담장으로 검은 대나무가 우뚝 솟으며 선비의 혼이 녹아 내리고 있었다.안채를 지나니 임금의 권위와 같은 대학자 권위 어제각이 있었다.어제각은 1788년 정조가 율곡이 쓴 격몽요결과 어렸을때 사용하던 벼루를 직접보고 격몽요결 서문과 뒷면에 글씨를 써서 돌려 보내며 별도의 집을 지어 보관하도록 한 어명으로 지은 것이였다.오죽헌을 나와 자경문과 입지문에 둘러싸인 율곡전시관이 있었다.
율곡전시관
오죽헌~오죽헌은 조선초기 병조참판을 지낸 최용현의 집이었는데 둘째 사위 이시온을 거쳐 이시온의 외동딸이자 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 소유가 되었다. 용인이씨는 서울사람 신명화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친정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강릉에 내려와 줄곧 오죽헌에 살았고 사임당도 외가인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사임당은 혼인한 후에 홀로 된 친정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한동안 오죽헌에서 지냈다. 몽용실에서 율곡 이이를 낳아 오죽헌은 우리 역사에 큰 궤적을 남긴 두 인물이 태어난 집이 된 것이다. 용인 이씨는 생전에 다섯 딸에게 재산을 분배하면서 조상 묘 잘 돌보라고 오죽헌을 4째딸에게서 난 외손 권처균에게 물려 주었다. 외할머니부터 물려 받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많은 것을 보고 권처균은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했는데 이것이 훗날 집 이름이 되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주택 건물 가운데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이다. 온돌방과 대청마루 뒷마루로 이루어진 정면 세 칸 측면 두칸의 일자형 기와집으로 공포가 새부리 모양을 한 익공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주심포양식에서 익공양식으로 변해가는 건축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전시관 입구에 커다란 동양화가 걸려 있었다. 이씨 분재기 국역 동양화 그림으로 사실적 풍경을 간략하게 날렵한 선들로 그려 화려했다.
아름다운 여성 신사임당(1504년~1551년)~신사임당은 조선초기 서화가로 호는 사임당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고 현숙한 여인 중 한 분이다. 존경받고 있는 사임당은 글씨,그림,시,자수에 뛰어난 예술가로 산수와 포도를 잘그렸다. 풀과 벌레인 초충도는 자연을 허투루 보지 않았던 사임당의 심성과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해 내는 솜씨가 탁월해 숙종이 풀과 벌레 모습이 비슷하며 오묘하다고 과찬하였다. 권상하는 실물과 똑같아 줄기와 잎사귀는 이슬을 머금은 것 같고 풀벌레는 살이 움직이는것 같다고 감탄하였다.1504년 지금 오죽헌에서 어머니 용인 이씨에서 출생하였다. 산수,풀벌레,포도,매화 등 여러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1522년 덕수 이씨와 혼인 하였고 그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1524년 맏아들 선을 낳고 1529년 맏딸 매칭을 낳고 1536년 셋째 아들 이를 낳았다.1541년 강릉 친정에서 서울로 오가는 중 대관령 중턱에서 어머니를 그리는 시 " 유대관령망친정" 지었고 서울로 올라온 후 시댁 모든 살림을 관장하였다. 1542년 넷째 아들 우를 낳았는데 어머니를 닮아 시,서,화에 뛰어났다.1550년 남편 이원수공이 수운판관이 되었고 1551년 48세로 별세하여 파주 자운산에 묻혔다.이이가 "선비행장"에 어머니는 어렸을때 경전을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바느질도 잘하고 수놓기까지 절묘했다. 7세때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린것이 아주 절묘하다.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을 낼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기록하였다. 영오 초충,포도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을 그렸고 글씨도 잘 쓰고 시문에도 능하였다.전하는 작품에는 산수도 ,초충도,묵포도도,묵매도,노연도,노안도,지리도 그림과 초서와 전서와 같은 글씨,친정엄머니를 그리는 내용의 유대관령망친정과 시친등의 한시가 있다.그 자녀 이이 셋째아들은 조선 최고 유학자가 되었고 맏딸 매칭은 조선 중기의 목매양식을 잘 보여주는 목매도 남겼고 막내 아들 이우는 활달한 필치를 보여주는 초서와 그림을 남겼다.
초서병풍과 조충도병풍,그림들이 전시되었다. 집안 꽃밭에서 관찰할수 있는 자연의 생명력이 약동치는 신비로움으로 고결했다.언제나 봐도 질리지 않는 일상의 자연으로 시대를 초월한 그림형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묵포도도는 화면 가득 늘어 뜨린 포도넝쿨로 먹음직스러운 포도송이들과 자연스럽게 말린 덩쿨손을 적절한 농담을 살려 유려한 필선으로 처리해 생명력이 넘쳤다.고문이라 불리는 옛 전서체로 필획이 구불 구불한 특징을 이루며 문자 문양 같았다. 초서는 문자를 흘려서 쓴 서체로 한획을 끝까지 이어가며 써 내려간 글씨 같았다.
겨레의 참 스승 율곡 이이(1536년~1584년)~ 남다른 총명함으로 3살때 말과 글 익혔고 다섯살때 부터 따뜻한 인간애를 보였다. 1542년 어머니에게 글을 배워 신복참전을 지었고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1548년 13세에 진사 초시 합격하였다. 29세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 나아갔다. 병조판서등 국정운영에 참여하고 천도책,성학집요,격몽요결,학교모법등 저술을 남긴 겨레의 참 스승이다.일본 중국침략으로 십만양병론 주장하였고 이황과 더불어 조선 유학의 쌍벽을 열었다.1551년 16세때 어머니가 죽자 선비행장을 지었고 1555년 강릉외가로 돌아와 자경문을 글을 지었다.1556년 21세 한성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557년 성주 목시 노경린 딸과 결혼하였다. 1561년 아버지의 이원수가 죽었다.1569년 정치관 담은 자신의 동호문답을 지어 선조에게 올렸고 1571년 청주목사에 임명하여 향약을 만들어 실시하였다.1572년 37세 3월에 병 시작되었고 우계 선생과 이기설 논쟁을 펼쳤다.1574년 만언봉사를 지어 시국을 바로 잡으려 했고 1575년 성현들의 말과 글을 수신제가평천하라는 주제에 맞춰 정리한 성학집요 지었다. 1577년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격몽요결을 지었고 향약을 만들고 사창제도를 실시해 백성들 경제적으로 구제하기에 힘썼다. 1578년 우리나라 최초 사립대학인 은병정사 건립하고 고산구곡가 지었다. 1581년 임금에게 청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책을 호의하게 하였고 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어 경연일기를 완성하였다. 1582년 왕명으로 인심도심설,김시습전,학교모법을 지어 올렸다.1583년 선조에게 시무6조 바쳤고 십만양병과 공납제도 개혁을 주장하였다. 1584년 49세 1월16일 서울 인사동 집에서 숨을 거둬 자운산 기슭에 묻혔다.
전시관에 율곡 가르침에 대해 적혀 있었다.학문이란 아버지는 자애,자식은 효도,신하는 임금에게 충성,부부간에 분별이 있고 형제 우애, 젊은이는 어른 공경, 친구간에 믿음 실천하는 것이다.친구에 대한 자세는 베푸는 일과 착한 일 좋아하고 행실이 바르고 엄숙한 사람 진실한 사람 사귀어야 한다.친구와 함께 있으면서 내 마음을 배워 그 사람의 규범과 경계를 받아들여 나의 단점을 다스려야 한다. 독서하는 자세는 글속에 담긴 뜻 깊이를 이해하고 구절마다 반드시 실천할 방법을 행동으로 실행해야 한다. 학문과 지혜의 자세는 들을때 총명,얼굴빛 온화,용모는 공소, 말은 충성되게,일할때 공경,분할때 참는것,재물 얻을때 옳은가 생각해야 한다.이 글귀를 읽으면서 기독교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조선시대 학자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성현에 이르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깨달을수 있었다.초등학교 시절 인격수양을 첫째 목표로 삼아 교육하는 것이 참 교육이라고 생각되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 우리는 하나님 성품을 닮아가려고 얼마나 노력하는가?...반성해 보았다.
이매창(1529년~1592년)~사임당 맏딸 이이의 누나로 여성의 규범을 지켰고 재주가 많고 학식이 깊다. 경전과 사기에도 통하고 사리를 널리 알았기 때문에 이이는 크고 작은일이 있으면 매창에게 자문을 구했다.그림 솜씨가 뛰어나 참새,설경과 새, 달과새 등 서정적인 작품과 조선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전형적인 묵매양식을 보여주는 묵매도를 남겼다.
묵매도와 매창화첩이 전시 되었다.사임당에게 그림을 배운 솜씨가 엿 보이며 서정적인 자연을 노래한것 같았다.사색적인 정감의 묵매도와 낭만적안 매창화첩으로 자연을 시로 노래한것 같았다.
시대의 에인으로 빛나다 옥산 이우(1542년~1609년)~신사임당의 칠남매중 넷째 아들이다. 1565년 진사에 합격 고부군수를 역임하고 벼슬이 군자감정에 이르렀다.비안현감 재임시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경모하고 추대하여 7년이나 더 머룰렀다. 괴산군수로 있을때 임진왜란을 만나 장정을 모집하여 왜적과 항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공로는 관리와 벼졸에게 돌리고 적의 동정을 살펴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온 고을에 기근을 면하게 하였다.장인의 모든 유업 상속받아 낙동강변 매학정의 주인이 되었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고고하고 서화도 능하였다. 거문고,글씨,시,그림 모두 잘한다고 하여 4절이라 불렀다. 소리가 맑고 웅장한 소리를 냈고 옛 곡조에 거문고를 타는 거문고의 대가였음을 알수 있다. 포도,조충,게,매화,난초,국화등 다양한 소재 그림을 남겼는데 이서는 그림의 품격이 빼어난 조화를 이루어 묵화로 풀벌레를 그려내어 길에다 던지자 뭇 닭이 한꺼번에 쪼았다고 기록하였다.묵란도,묵국도,묵포도도 등의 작품이 전한다. 글씨는 사임당의 영향을 받아 단아한 서풍을 구사하다가 황기로의 사위가 된 이후로는 장인의 서풍을 수용하여 서풍을 선보였다.황기로는 초서의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고산 황기로의 필적을 전수받아 웅장해졌다.황기로는 이서의 서한첩 발문에서 이우의 초서에 대해 곱게 쓰기는 나만 못하되 웅건하기는 나보다 낫다 칭찬하였다. 송시열은 옥산시고서에서 옥산의 글씨는 절묘하고 웅장하여 용과 뱀이 날아올라 가는 것 같아 그 글씨를 얻는자는 값진 보석보다 더 귀하다고 하였다.이우의 시에 대해 송시열이 옥산시고서에서 부스러기 금이요 조각 보옥이라 작을수록 더 기이하다고 하였다. 이우는 훌륭한 인품으로 모든 사람의 칭송받았다. 형이 이이가 별세한 후 형의 가족을 진심으로 보살폈다. 저서로 옥산시고를 남겼고 글씨는 소수서원 경렴정 현판등에서 볼수 있다.
묵포도도와 옥산화첩이 전시 되었다. 묵포도도는 적절한 농담과 매우 유려한 필선을 보여 주고 있었고 옥산화첩은 사임당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엿 보이며 안정된 구도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그림 같았다.
황기로(1521년~1575년)~황기로는 우리나라 16세기 대표하는 초서의 대가이다. 14살때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고산에 매학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세속의 명성이나 이익을 탐내지 않고 글씨와 술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당나라 회소의 초서를 애호하고 또 회소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풍을 보인 명나라 장필의 서풍을 따랐다. 나아가 점차 점획을 간명하게 하고 자형을 간략하게 하는 등 자신만의 독특한 필법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황기로의 서풍은 조선중기 초서풍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황기로의 초서풍을 따른 대표적인 사림이 이우와 이산해이다.이우는 황기로의 딸과 혼인하면서 선산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는데 이후 매학정을 포함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선산은 이우의 그 후손의 세거지가 되었다.
옥산 이우의 후손~13세손인 이종석이 집안에 내려오던 선조들의 유품과 자료들을 정리하여 아들 이장희에게 물려줬다.이장희는 선친으로 부터 물려받은 전세유품에 관련 자료들을 더 수집하여 장손인 이창용교수에게 물려주었다. 유품 대부분이 신사임당,이이,이우, 매창 그리고 옥산공파 (이우의 후손)들것으로 이창용교수는 오죽헌에게 기증하였다.기증유물은 회화,서에,전적 문서와 간찰,민속품으로 구분된다. 회화는 사임당의 채색초충도와 수묵화, 매창과 이우의 수묵화, 서예는 사임당,이우,황기로의 전서와 초서,백광훈과 한호등 조선시대 서예가의 필적으로 이루어졌다.
율곡기념관과 입지문을 나오니 신사임당 조각을 중심으로 화폐전시관과 강릉시립박물관이 있었다.
화폐전시관
한국은행 기능~한국은행하는 일은 화폐발행하고 통화신용정책 수립 및 집행을 통해 물가안정을 도모한다.금융시스템 안정화하고 금융기관 상대로 예금을 받거나 대출 실행한다.정부의 국고금 관리와 지급결제제도를 운영하고 감시한다. 외환시장 안정을 도모하고 외한보유액을 관리 한다.경제에 대한 조사연구 및 통계작성 업무를 수행한다.
화폐역사~ 원시사회는 자급자족 살았다. 물이 흐르는 곳에 자연스럽게 모여 들고 그곳에 마을 형성하여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 농경발달로 인구증가하고 잉여생산물 생겨남으로써 쓰고 남은 물건과 필요하지만 없는 물건 교환이 이루어졌다.물물교환 활발해지면서 조개껍떱데기,소금, 철로 만든 농기구등이 물품화폐수단으로 등장 하였고 나라에 내는 세금으로는 곡물이 통용되었다.화폐통용 이전 실물교환이 이루어 졌다.
화페의 격~가치와 측정단위 교환의 매개체인 화페발행 이후 편리하게 물건을 사고 할수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주조된 주화는 996년 성종(15년)의 철전이다.형태가 둥글고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어 꿰미로 묶어 창고에 쌓아 두었다가이듬해 길일을 택하여 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동전,은화등이 쓰이다가 1883년 7월러 근대적 상설 조폐 기관인 전환국이 설립되며 화폐제도가 개혁되었다. 1887년에는 독일에서 수입한 근대식 조폐기기를 설치해 주화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전시실에서는 과학적인 원리가 적용된 화폐 디자인들을 보여주고 있었고 고려시대,조선시대와 광복이후 화폐들이 전시 되었다.각 시대별로 전시된 화폐들이 값진 보석보다도 더 진귀하고 격조 높게 빛났다. 화폐에 새겨진 과학적인 문양들이 매우 아름다운 예술로 다가왔다.
강릉시립박물관
강릉시 변천사~ 60만년전 강동면 심곡리 유적, 서기전5000년~1000년 안인리 지변동, 안현동 유적, 서기전1000년~400년 방내리 포남동,안현동, 난곡동, 교동유적, 서기전300년~서기300년 강문동 안인리유적,서기 30년경 동예 영역, 851년 범일 굴산사 창건
강릉선사문화(철기시대)~동덕리,교항리,초당동,강문동,방내리,경문동,안인리,신복사지 유적이 있다. 움집이 해안의 사구지대에 축조되고 안인리 민무늬 토기와 중도식 토기라고 부르는 바리,항아리,대접이 있다.두드림무늬가 있는 목이 짧은 항아리인 타날문단경호가 있다.
불교문화 ~고려시대 지방 호족들의 비호를 받던 불교는 중앙권력이 강화되면서 점차 쇠락해 갔다.조선시대와서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그 명백만 유지 되었다. 굴산사지와 신복사지 유적이 있다.보현사가 세워지고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고려백자~백제와 통일신라시대 귀족층과 사찰에서 중국에서 수입한 도자기 사용하였다.10세기 들어와서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십국이 난립하는 등 대혼란으로 중국과 원활한 교역을 할수 없었던 고려는 수입 도자기 대체할 자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였다.백자는 청자와 같은 시기 제작되었다.청자에 비해 질감 떨어졌고 빛깔도 조선백자와 같은 순백색이 아닌 유백색,담청색,담갈색,연갈색을 띤다.고려백자는 용인,서리,시흥 방산동,여주 중앙리등의 도요지에서 생산되었다. 강릉의 가마터인 도요지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백자상감연당초문합,백자상감모란문매병과 같은 수준 높은 고급 백자를 제작하였다.11세기 이후 고려백자 제작기술은 더 이상 발전 못하고 중국의 질 좋은 백자와의 경쟁에서도 퇴보의 길 걸었다. 현재 남아있는 백자는 바탕흙이 약하고 거친데다 유약이 얇게 입혀져 그릇에서 떨어져 나간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해운정인 단아한 정자를 지었던 심언광(1487년~1540년)은 삭탈관작하고 은둔할때 기거했던 정자로 조선시대역사인물들의 방문처였다고 해운정역방록책에 잘 남아 있다. 이이는 평생 강릉을 오고 갔다.외할머니 위중하다는 소식 듣고 벼슬 버리고 강릉에 왔다고 이이가 선조에게 올린 사교리소와 사교리잉진정소에 내용이 담겨있다.우리나라 최초 사립도서관을 세운 허균(1569년~1618년) 외가는 강릉 사천에 있었다. 임진왜란때 강릉으로 피난와 한동안 그곳에서 거쳐했다.허균의 호 교산은 외갓집 애일당 뒷산 이름에서 따왔다. 그의 저서 상소부부고에는 강릉의 역사와 풍속등을 이해하는데 긴요한 자료가 많다. 우리나라 최초 사립도서관인 호서장서각을 열었다. 고을 학자들과 같이 쓸 목적으로 중국 연시에서 많은 책을 구해 가지고 와 그 책을 호숫가 별장에 있는 누각에 수장해 고을의 선비들이 빌려 읽게 했다. 그러면서 장차 인끈을 내던지고 강릉으로 돌아가서 만권 책속에 촘이되어 남은 생애 마치고 싶다라는 소망을 호서장서각기에 남겼다. 사랑과 신선을 노래한 허난설헌(1563년~1589년)은 아버지 허엽,오빠 허성 허봉,동생 허균과 더불어 허씨 오문장가라 불릴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그녀의 시적 천재성에 대해 허봉은 배워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하였다. 허균은 시어가 맑고 깨끗하여 익힌 음식을 먹는 사람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라고 했다. 27세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허균은 누나 유고를 수습하여 1608년 난설헌집 을 간행하였다. 난설헌집에는 210수 시와 부록으로 광한전백옥루상량문,한정일첩,몽유광상산시서를 실었다. 난설헌 작품 가운데 채련곡,장간행,죽지사와 같이 젊은 여성의 풋풋한 사랑과 정한을 노래한 시도 있고 곡지,기하곡처럼 자식을 잃은 어미의 절절한 슬픔,유배간 오빠에 대한 그리움과 시름을 노래한시도 있다.신선세계를 노래한 작품도 많다. 신선세계 궁궐의 상량식에 초대 받아 글을 짓는 것을 상상하여 쓴 광한전백옥루상량문과 긴 호흡으로 신선세계를노래한 87수의 연작시 유선사가 돋보인다.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이룬 관동지방은 명산대천을 찾아 다니던 신라 화랑의 순례지였으며 조선 문인들이 선망하던 산수 유림지였다.조선 후기 우리 산하에 관심이 높아지고 직접 유람하는 일이 유행하면서 방문객이 더욱 많아졌다. 문인들이 와유산수 장소로 애호하던 대표적인 곳이 금강산과 관동팔경으로 화가들도 빼어난 경치를 화폭에 담기위해 이곳을 방문하였다.금강산은 우리나라 명산이자 아름다운 산수의 대명사로 고려시대,조선시대 내내 발길이 끓이지 않았다.중국인들조차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 보는 것을 소원했다. 금강산의 빼어난 절경은 시문과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관동팔경은 강원도 동해안에 위치한 8곳의 명승지이다. 통천 총석정을 시작으로 해안따라 고성 삼일포,간성 청간정,양양 낙산사,강릉 경포대,삼척 죽서루,울진 망양정,평해 월송정이 속한다. 조선시대는 강원도에 속해 있었으나 지금은 망양정과 월송정은 경상북도에 삼일포와 총석정은 북한에 있다. 이곳을 방문했던 신라 시선 영랑,술랑,남석행,안상의 발자취가 남아 있고 문인들과 화가들의 시문과 그림도 많이 전한다.대표적인 시문으로 임춘의 동행기, 안축(1287년~1348년)의 관동별곡,이곡의 동유기,남효온(1454년~1492년)의 유금강산기,이이(1536년~1584년)의 풍악행,정철(1536년~1593년)의 관동별곡,김창협(1651년~1708년)과 김창흡(1653년~1722년)의 금강기행시등이 있으며 그림으로는 정선(1676년~1759년),김윤겸(1711년~1775년),정수영(1743년~1831년),김홍도(1745년~1806?년),김하종(1793년~?)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강릉국보~ 강릉 유일의 국보로 고려시대 객사인 임영관 삼문과 조선시대 강릉향교가 있다. 임영관 삼문은 배흘림 기둥양식으로 고려시대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시실에는 매우 화려한 색채의 신화적인 그림, 유교적 윤리관을 담은 문자도로 생동감이 있었다.
강릉박물관을 나오니 담장으로 강릉오죽 한옥마을이 비추었다. 팔작지붕과 함께 사뿐한 날개의 처마를 이룬 흰벽체 한옥이 매우 단아해 보였다. 강릉에서 볼수 있는 독특한 한옥양식 같았다.버스정류장으로 회화나무 보호수가 버티고 있었다.
1982년12월13일 보호수로 지정된 570년된 회화나무로 역사 그림자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서울로 향하는 버스 차창가로 우뚝솟은 소나무 바위절벽의 폭포를 이룬 연못 정원이 강릉 도로 중심을 가로 지르며 선비 지조의 향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오죽헌)
율곡전시관)
신사임당
율곡이이
이매창
옥산 이우
기증유물
옥산 학정공파 집안 유물
화폐전시관)
강릉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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