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강화도 화개공원,소창체험관(2024년5월1일)

백재은 2024. 5. 27. 11:58

화개정원
화개정원~모노푸드
소창체험관

 

5월1일~우리함께 걸어요 밴드모임에서 강화도로 여행을 갔다. 차창가로 기암괴석의 섬이 있는 드넓은 강으로 강화도 섬으로 향하는 길목 같았다.화개공원 입구부터  꽃장식의 꽃밭으로 매우 화사했다.화개공원을 산책하기 전  배가고파 박미주님과 함께 식당에 들어갔다. 따쓰한 햇살이 비추는 통유리창으로 화개공원의 전경들이 펼쳐지며 싱그러웠다.모노푸드에서 박미주님에게  원조떡복이를 대접하며 밀가루라 먹지 않는다고 했더니 배가 고프면 안된다고 새싹비빕밥을 나에게 사주었다. 새싹의 싱그러운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지며 힐링이 솟구쳤다.매우 싱싱한 새싹채소들과 함께 달걀지단,깨소금,참기름,고추장이 어우러져 매우 고소했다.김치,분식요리에 걸 맞는 국물로 비빕밥과 같이 배를 채울수 있었다.식당 곳곳에 꽃장식과 함께 계단,의자,소파 인테리어 장식의 포토존을 이루고 있어 여인의 추억의 장소 같았다.복도로 사진작가 노경학의 "강화도 덕하리 일출"와 "강화도 화개산 일출"사진작품이 걸려 있었다.노을에 비친 빛의 색채가 환상적이였다. 사진작품은 빛의 탐구라는 것을 일깨워 준 작품이였다.식당옆으로  중앙의 소나무섬과 함께 정원을 이룬 계단씩 성벽으로  호수가 펼쳐졌다. 입구부터 화개산 산줄기에서 내려온 계곡을  중심으로 정원언덕을 이루며 전망대까지 이어졌다.물의정원으로 언덕을 오를때 마다 조형물 장식과 함께 갖가지 꽃향연이 펼쳐졌다.리빙스톤 데이지,라벤더,벌개미취,앵초,데이지,패랭이꽃,가자니아,제라늄,과꽃,금잔화,개양귀비,디기탈리스,왜지치,금잔화,칼라(카라꽃),도깨비바늘,아네모네,베들레헴별꽃(오니소갈룸 두비움),라넌귤러스,프리뮬러,오스테오퍼멈(오스테오펄멈),루핀(루피너스),삼색제비꽃등...의 꽃잔치로 매우 향기로운 꽃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오래간만에 꽃향기에 듬뿍 취할수 있어 힐링이 솟구쳤다.언덕위로 역사.문화의 정원으로 연산군 유배지 모형과 함께 교동도유배문화관이 있었다. 

교동도유배문화관

교동에 유배된 연산군의 이야기가 전시되었다.연산군은 (재위1494년~1506년) 성종의 장자이자 페비 윤씨의 아들이다.1483년 성종(14년)세자에 책봉되었고 계모 정현왕후의 아들로 성장하였다. 연산군은 즉위 초 국방에 주력하였을 뿐 아니라 빈민을 돕고 "국조보감","여지승람"을 완성하는 등 다수의 업적을 이루었다.즉위 이듬해부터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원시키는 일을 추진하였으나 사후 백년간 폐비 윤씨 문제는 논의에 부친다는 선왕의 유언을 이유로 들어 폐비 복원이 반대되자 감정이 악화된 연산군은 사림파 제거를 추진하게 된다. 

(1)무오사화(1498년)~무오사화는 (연산군4년)에 일어난 사화로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사관이 기록한 역사 기록)에 수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의 내용을 문제삼아 사초 작성에 관련된 인사,교류 문인과 비호 관원들을 처벌한 사건이다.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부관참시하였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유배보냈다. 연산군은 세조에 대한 반역이라는 입장에서 관련자들을 처벌한 것이다. 

(2)갑자사와(1504년)~갑자사와는 (연산군10년)에 일어난 사화로 페비 윤씨 사건과 관련 성종의 후궁을 비롯하여 훈구파,사림파 대신들을 처형하거나 부관참시했다.연산군은 폐비 문제와 직결된 이극균,윤필상,성중,김굉필,등도 숙청하였는데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되었다.또한 페비 사태를 주도했던 성종의 두 후궁은 살해하였다.당시 연산군은 할머니인 인수대비와 크게 다투었고 훗날 폐비 윤씨를 복위하는 문제로 재차 다투다가 당시 병으로 누워 있던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그 후유중으로 인수대비는 사망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초상 때에도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상을 끝냈다.   

(3)중종반정(1506년)~중종반정은 (연산군12년)에 일어난 반정으로 1506년 성희안,박원종,유순정이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옹립한 사건이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더욱 더 난폭해졌다. 그러자 대신들중에는 연산군의 횡포에 맞서려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 중 이조참판을 지내다 연산군을 비웃는 시를 쓰는 바람에 관직에서 물러난 성희안이 박원종을 찾아갔다. 박원종과 성희안은 영의정과 우의정 등을 끌어들여 연산군을 몰아내는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 날도 술을 마시다가 잠이 든 연산군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고 연산군이 소리를 질렀으나 아무도 반란군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침실로 몰려 들어와 연산군의 몸을 꽁꽁 묶었다.이로써 연산군은 임금이 된 지 12년 만에 왕의 자리에서 쫒겨나고 박원종을 비롯한 신하들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을 왕의 자리에 앉혔다. 중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하들에게 연산군을 죽이지 말도록 명했다. 중종은 연산군을 교동으로 위리안치 하였고 연산군은 귀양 간 뒤 병으로 죽었다. 조선시대 가장 패악한 군주로 알려진 연산군은 학정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1506년9월2일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그날 페위돼 강회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교동에 유배된 조선의 왕과 왕족

(1)광해군(1575년~1641년)~광해군은 조선15대왕 선조의 둘째아들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세자로 책봉되어 7개월 동안 강원도와 함경도 등에서 의병모집등의 활동을 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전라도에서 모병과 군량 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왜란 평정에 공헌하였다.1608년 (선조41년) 즉위 이후 형인 임해군과 능양군(후일의 인조)의 아우 능창군을 제거하였다.1613년 김제남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이복도생인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배시켰다가 1614년 살해하였다.1623년 서인니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페위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641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중 67세 나이로 죽었다. 

인조반정은1623년 광해군(15년) 이서,이귀,김유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세운 정변이다.1623년3월13일 조선 16대 임금 인조가 즉위했다. 

(2)영창대군(1606년~1614년)~선조가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 할 것을 의논하던 중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후 형 임해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궁에 유폐하였다.또한 영창대군 마저 역모 연루죄로 서인으로 강등시켜 교동으로 위리안치하였다. 영창대군은 1614년 만8세의 어린 나이에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3)안평대군(1418년~1453년)~수양대군은 손수 안평대군에게 편지를 보내어 "네 죄가 커서 용서할수 없으나 다만 세종,문종께서 너를 사랑하시던 마음으로 너를 용서하고 더 이상 다스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좌의정 정인지등이 안평대군을 사사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마침내 안평대군을 그해 유배중에 교동에서 사약을 받았다. 안평대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이라 불렀으며 당시 문화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1447년(세종29년) 도원을 꿈꾸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손수 그림의 제목과 시와 글을 썼다.몽유도원도에 찬문을 남긴 인물은 신숙주,정인지,박연 ,김종서,최항,서거정,성삼문 등으로 모두 안평대군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다. 몽유도원도의 그림과 곁들여진 시와 글씨는 조선 초기 문화예술의 성과가 집대성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4)그밖에 능창대군(1599년~1615년), 숭선군(1639년~1690년),낙선군(1641년~1695년),경안군(1644년~1665년),복평군(1648년~1682년),임성군(1665년~1690년),임창군(미상~1724년),은언군(1754년~1801년),영선군(1870년~1917년)이 교동에 유배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강화는 무인집권기에 이르러 왕의 유배지로 이용되어 희종,강종,고종이 이 곳으로 유배를 온 바 있다. 그러나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자 강화는 교역과 교통의 중계지로서 만이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로서 부각되었다.1232년(고종19년)강화군으로 승격된 강화는 고려의 수도인 강도라 지칭되었다.고려말에는 왜구와 홍건적이 침입하는 과정에서 강화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어 성곽 및 행궁과 진보와 봉수등의 시설이 재건되었다. 또한 이 곳은 고려말 격변하던 정치와 관련하여 충정왕,우왕,창왕 등이 유배되었다. 

(1)고려21대왕 희종(재위1204년~1211년)은 당시 지권자인 최충헌을 제거하기 위해 궁깊이 자객을 숨겨두고 최충헌을 유인했다.호위병 없이 단신으로 임금 앞에 선 최충헌이 꼼짝없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빠졌다.다락방에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한 최충헌은 희종을 페위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내고 명종의 아들인 강종을 즉위하였다.희종은 다시 교동으로 옮겨 졌다가 1219년 고종(6년)유배가 풀려 개경으로 돌아갔으나 복위의 음모가 있다하여 최우에 의해 강화도에서 교동으로 내몰렸다가 사망하였다. 

(2)고려22대왕 강종(재위1211년~1213년)은 어린 시절부터 무신정권의 틈바구니속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지냈으며 1197년(명종27년) 최총헌이 부왕인 명종을 퇴위시킴에 따라 14년 동안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1210년(희종6년)에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희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그후 1213년지병으로 병상에 누워 62세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3)고려30대왕 충정왕(재위1349년~1351년)은 왕위에 오른지 3년 만에 폐위되어 강화로 쫓겨났다. 유배된지 5개월 만인 1352년 독살되었다.

(4)고려32대왕 우왕(재위1374년~1388년)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왕족의 혈통이 아니라는 신진 사대부의 주장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에 유배되었다.개경을 떠난 우왕이 최영의 딸 영비와 연쌍비와 함께 강화에 머물렀던 기간은 약3개월 이었다.우왕은 자신을 몰래 찾아온 김저,정득후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고자 모의하었다가 실패하면서 우왕은 강릉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아들 창왕(재위1388년~1389년)도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로 추방되었다.1389년 우왕과 창왕은 살해되었다. 

조선시대의 교동

조선시대 교동은 폐군이나 종친의 유배지였다.교동으로 유배된 폐군으로는 연산군과 광해군이였으며 종친으로는 세조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원종의 아들 은언군 등이 있다.  

 

교동도유배문화관을 지나 아치형 목재다리의 계곡으로 시원한 물소리가 매우 청량감을 주었다. 수도꼭지 장식이 있는 꽃밭의 소나무쉼터로  교동도 유배문화관 초가집이 비추며 정겨웠다.초목의 나뭇잎으로 천정을 장식한 쉼터로 매우 싱그러웠다.꽃밭과 함께 쉼터까지 정성어린 장식으로 공원길의 발걸음을 설래게 했다.고향땅 시골풍경을 담은 추억의 정원으로  산지나 구릉지에 형성된 계단식의 다랭이 정원에서 추억을 회상하도록 조성된 정원이였다.패랭이꽃이 언덕을 매우 화사하게 수를 놓으며 너무 아름다웠다. 자연의 색채로 마음을 정화시켜 준 정원이였다.패랭이꽃 언덕을 마주 보며 규화목과 규화석이 진열되었다.규화목과 규화석은 나무가 퇴적암 속에 묻힌 후 광물질을 함유한 규토성분들이 스며들어 복잡한 화학작용을 통해 화석으로 변한 것으로 나무형태는 변하지 않고 성분만 변한 것이였다.생성연대는 중생대로 채굴지역은 인도네시아것 이였다.평화의 정원은 고향땅을 다시 찾는 밝은 미래와 희망을 담은 주제정원으로 삭막한 암석밭에서 꽃을 피우는 초화처럼 하루빨리 평화의 종을 울려 고향에 가고 싶은 희망과 염원을 나타내는 공간이였다.바위틈 제방으로 계곡이 흐르는 전망대로 산 중턱에 온 기분 같았다.아주 커다란 솥뚜껑장식과 둥근 우주형체 같은 포토 존으로  꽃향기가 가득한 정원언덕들이 펼쳐지며 상쾌했다. 중앙의 계곡을 중심으로 전망대까지 가는 케이블카가 장난감 모형처럼 비추고 우뚝솟은 숲길이 계곡과 조화를 이루며 산림욕장 같았다.즉 화개산에 위치한 화개공원은 강화동의 역사혼과 함께  미래의 통일을 염원하며 희망, 평화,아픔을 치유하는 정원이였다.꽃들의  꽃향기와 색채에 마음껏 취하며 심신의 치료할수 있는 힐링공원이였다.화개공원에서 조양방직으로 향했다. 차창가로 성곽과 누각이 비추며 고려시대 강화도의 혼이 녹아 내리는것 같았다.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둘러 보았다. 조양방직은 최초의 서울 경성방직보다 3년 먼저 세워진 민족자본 공장이다.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최고 품질의 인조직물 생산했다. 현재는 공장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한 채 카페로 변하면서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조양방직카페 통유리창으로 서양풍 정감의 정원이 비추고 곳곳에 서양그림 장식으로 레트로 감성을 자극했다. 서양가구로 장식된  통유리창으로 낡은 일제시대 슬래트 집이 비추고  목재 미닫이문의 낡은 양식의 방으로 고가구,1960년대 전화기,옷걸이 벽장식으로 고풍스러웠다.카페안을 둘러 보고 박미주님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감사한 마음으로 송영광 대한민국 제과 명장이 만든 빵을 사주었다. 조양방직 신문리미술관에서 손수건만들기 체험을 하러 강화 소창기념관에 갔다.아네모네 꽃이 귀족적인 자태로 빛나는 강화 소창기념관 입구의 목화꽃을 장식한 시멘트 담장으로 일본풍 가옥과 한옥이 고개를 내밀며 매우 고즈녁했다.소창체험관은 구세의원, 한옥카페등..동광방직의 페업 후 남겨진 한옥과 공장을 소창체험관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탄생된 곳이였다. 1938년 건축된 한옥과 염색공장을 2016년에 매입하여 소창체험공간으로 리모델링하여 다양한 강화문화체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강화직물 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수있고 다양한 체험 할수있는 문화공간,한복체험,소창 스탬프체험,직조시연,소창 바느질체험,손수건체험등...을 할수 있는 곳이였다.2조로 나누어 손수건체험을 하였다. 소창천에 장식도장을 찍어 만드는 손수건 체험으로 완성해 가는 성취감이 있었다.처음 해 본 손수건  체험으로 서툴러서 너무 아쉬웠다.만들기 체험을 통해  동기부여와 성취감을 주는 아이들의 교육의 중요성도 깨달을수 있었다.손수건체험을 한 후 소창전시관을 감상했다.일본식 건축과 1938년 한옥이 공존된 앞마당으로 매혹적  향기로 가득찼다. 일본건축 양식인 슬래트지붕의 "소창전시관(직조실)"이  앞마당의 소나무에 드리우며 매우 운치가 있었다.일제시대로 되돌아가는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였다. 1938년 한옥인 "다도관"과  "소창전시관(직조실)"이 마당과 함께 나란히 공존하며 매우 조화로웠다. 팔작지붕의 홑처마를 이룬 한옥으로 짙은  밤색의 창호,온담의 벽체,돌계단으로 20세기초 명문가 집 같았다."다도관"뒤로 "소창기념품전시관"이 정원과 함께 버티고 있었다. "소창기념품전시관"은 유려한 곡선미의 회색벽체로 21세기 매우 산뜻한 건축양식을 자랑하고 있었다. 곱상한 나무가 드리운 "소창기념품전시관" 출입문으로 인테리어를 장식한 정원으로 매혹적이였다."소창기념품전시관"으로 슬래트 지붕의 우물과 장독대,빨간벽돌의 굴뚝,"다도관"이 마주보며 매우 고풍스러웠다.즉 1930년대 일본 건축,1938년 한옥,21세기 건축이 동시에 공존하는 고혹적인 향기로 가득한 곳이였다.바로 그곳에서 점심을 먹으러 수라전통육개장 집에 갔다.강화도의 육개장 명가였다. 옛날전통육계장을 먹었다.소고기 양지,고사리,당면,대파가 들어간 육계장으로 비법 고기육수와 함께 고추기름으로 매우 진하고 구수한 국물맛을 자랑하고 있었다.다른 식당과는 차별화된 것으로 얼큰한 국물과 시원한 대파맛이 조화를 이루어 환상적인 맛이였다.양파향기가 가득한 새콤한 양파절임,시원한 맛의  깍두기,숙주향이 가득한 숙주나물무침으로 입맛을 자극했다.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 서울로 향했다.차창가로 대양처럼 드넓은 한강이  35분이상 펼쳐지며 세계 제1의 한강임을 보여 주며 명실부상한 기적의 한강을 그리고 있었다.

모노푸드
원조떡볶이
모노푸드
리빙스톤데이지
디기탈리스





오스테오스퍼멈(오스테오스펄멈)



라넌큘러스
베들레헴별꽃(오니소갈룸 두비움)
왜리치
도깨비바늘
금잔화
칼라(카라꽃)
제라늄
과꽃
백합
벌개미취
가자니아
앵초
패랭이꽃
데이지
1
아네모네
마가렛트(나무쑥갓)
삼색제비꽃
개양귀비
양귀비

 

라벤더
가는잎미선콩
개화공원~교동도유배문화관
조양방직
아네모네
페튜니아
손수건체험
소창체험관
수라전통육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