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익산시 아가페정원,서동공원,익산국립박물관(2024년5월21일)

백재은 2024. 6. 5. 10:37

아가페정원
서동공원
익산국립박물관

 

5월21일~우리함께 걸어요 밴드모임에서 익산시로 여행을 갔다.분홍달맞이꽃이 웃음을 짓고  황토흙이 곳곳에 잔재하는 익산 마을길로 매우 풍요로운 자원을 지닌 역사의 도시 같았다.아가페정원은 천주교 고 서정수신부가 무료 노인복지요양원 시설인 정양원을 설립하며 내부에 자연친화적 수목정원을 조성한 정원이다.수목원처럼  잘 가꾸어진 늘 푸른 숲을 시민들에게 개방하여 정서함양과 휴식을 제공하고자 2021년 3월 전라북도 제4호 민간정원 등록 후 정비사업을 거쳐 시민쉼터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장대하게 우뚝솟은 수풀림사이로 다양한 색채의 패랭이꽃,양귀비,수레국화,부채붓꽃,끈끈이대나물등이 향기를 뿜어내며  매우 화사했다. 매혹적인 자태로 압도되는 소나무 가로수길을 지나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물결로 사색의 정취를 자아냈다. 흰장미와 설악초가 순결의 향기로 가득한 포멀가든으로 평화로운 안식처 같았다.서동공원은 금마저수지와 미륵산을 배경으로 금마조각공원 이름으로 개원한 공원이다.백제 무왕의 도시 익산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깃든 공원으로 선화공주와 서동 왕자 조각상과 서동요 조각,88점 조각공원,마한박물관,무왕루,선화공주와 결혼한 무왕의 서동요 전설이 깃든 궁남지 연못으로 백제의 무왕 발자취를 되새길수 있는 공원이였다.

마한전시관  

전시관 앞  백제무왕과 선화공주와 함께 2층 탑과 북들의 장식으로 백제시대 찬란했던 무왕의 사랑 찬가,왕의 찬가  같았다. 기획특별전으로 "독널 죽은자를 모신 항아리" 주제로 전시되었다. 

(1)익산~익산은 고대 문화 고속도로라고 할수 있는 두 줄기의 물길이 있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다른 곳으로 전하기에 적합한 곳이였다. 금강과 만경강 사이 옥야로 불릴 만큼 비옥하고 너른 들이 펼쳐져 있어서 한 국가를 세우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러한 인문지리적환경을 갖춘 익산은 청동기시대 이래 문화의 거점이자 고조선의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이였으며 마한의 중심지였다. 백제 중흥의 꿈이 담긴 터전이자 백제 말 화려한 문화를 꽃 피웠던 곳이다. 익산지역은 큰강과 작은 천이 발달되어 있어서 구석기와 신석기문화가 발달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후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익산지역 곳곳에 모여 살면서 고대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익산은 일찌기 선학들에 의해 평양,경주와 함께 청동기문화권으로 설정될 만큼 청동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많이 확인 되는 곳이다.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문화적 배경이 위만에게 패한 고조선 준왕이 바다를 건너 익산지역에 터를 잡게 되는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2)구석기문화~익산에 살던 구서긱인들은 금강과 만경강 등 강과 하천에 따라 생활영역을 넓혀 갔다. 자갈돌  특히 석영암을 이용해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뗀석기의 석기문화가 시작되었다.

(3)청동기문화~집터는 낮은 구릉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분포되어 장방형,방형,원형의 다양한 형태를 띤다. 장방형 집 안에서는 화덕과 벽을 따라 기둥자리가 확인되었다.아라기무늬가 새긴 토기인 가락동식 토기가  출토되었다. 방형과 원형집터는 장방형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집터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가 조성되었다. 아가리가 밖으로 퍼지고 배가 불룩하게 나온 송구리식 토기와 슴베가 있는 돌칼 등이 출토되었다.청동기 시대 움집이 후기로 가면서 집모양이 차츰 바뀌었다. 장방형집은 난방과 조명,취사용으로 두루 쓰이던 화덕이 집안에 2개씩 있어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던것을 증명하고 있다.

(4)마한의 중심 익산 금마~ 마한의 중심 익산 금마는 기원전 3세기부터 4세기경까지 한반도의 서쪽 소국연맹체를 말한다. 역사서에는 고조선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바닷길을 통해 이곳에 와서 한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 준왕이 남래(기원전194년)하기 이전에 이미 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준왕이 정착한 곳에 대하여 제왕운기,고려사,세종실록 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마 즉 익산으로 기록하고 있다.전북지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철기가 등장하고 한국식동검문화가 더욱 발전한다. 청동기와 철기를 만드는 기술력은 익산지역에서 여러 소국들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마한이 성장하였다.

(5)고조선 준왕 익산 금마에 닿다~금마군은 원래 마한국이다.후에 조선왕 기준(준왕)이 위만의 난을 피해 바다를 건너 남쪽 한의 땅에 이르러 개국하였는데 마한이라 하였다고 고려사에 실려있다.  

(6)마한 성립기 익산~새로운 무덤을 쓰고 철제 농공구를 만들었다. 준왕이 남천한 시기는 마한의 성립기에 해당하는 초기철기시대이다. 이 시기에는 땅을 파고 들어가는 목관을 안치한 돌무덤이 조성되었다.한국식동검과 청동유물과 새로운 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덧띠토기가 만들어지고 쇠로 만든 도끼등이 제작되었다. 이 지역이 청동기시대부터 중국이나 한반도 서북부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전북지역에 철기가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2세기경 준왕의 남천 직후에 해당된다.

(6)마한문화의 꽃을 피우다~ 익산의 마한문화는 초기 철기문화의 유입으로 성립하여 3세기에서 4세기경에 꽃을 피웠다. 좀 더 발달된 기술로 만든 토기와  토기를 만드는 생산도구와 새에 대한 생각과 신앙을 엿 볼수 잇는 새모양토가 발견된다. 당시 금이나 은보다 더 귀하게 여긴 구슬장신구와  유리옥구슬을 만들던 틀,시신을 담았던 독널을 보면 마한사람들의 생활문화를 엿볼수 있다. 

(7)마한의 집과 구조~얕게 땅을 파서 네모난 흙방에서 생활하였다.토기로 만든 굴뚝의 배연시설과  배수시설이 확인되었다.

(8)독널무덤~ 독널무덤은  죽은자를 모신 항아리로 사람을 매장하기 위해 사용한 큰 항아리 모양의 그릇을 의미한다.청동기부터 익산지역에 널리 퍼진 독널무덤과 그 문화는 마한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독널은 신석기시대 처음 등장하여 본격적인 축조는 청동기시대로 볼수 있다. 특히 청동기시대 송국리문화 단계부터 널리 확산된다. 청동기시대 큰돌이나 토기를 이용해 뚜껑을 덮은 경우가 많다.청동기시대 독널은 유,소아용 또는 시체를 썩히고 남은 유굴을 안치하는 방식인 세골장을 위해 주로 제작되었다.구멍이 뚫려 있는 경우가 많은데 배수나 방습,의례행위와 관련된것으로 추정한다.

(9)마한 성립기 독널~청동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된 독널은 서기전3~1세기인 마한성립기에 들어와 더욱 더 활발하게 나타난다. 독널은 당시 일상에서 사용하던 덧띠토기,손잡이 달린 항아리,바리 굽다리토기 등 다양한 종류의 토기를 이용해 만들었다.가로로 눕혀 매장을 해 청동기시대와 대조된다.이용된 독널의 수도 2개 이상의 독널을 사용해 입구를 맞붙이는 방식이 대부분 차지한다.마동유적의 독널은 청동기시대부터 이어온 송국리형 토기를 많이 사용해 이를 통해 이 지역에서는 마한성립기에 들어서도 청동기시대 송국리문화 요소가 오랜 기간동안 지속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0)마한발전기 독널~흙무지무덤은 2~5세기 등장한 마한의 대표적 무덤 양식이다.등장 초기 1개의 무덤에 1명만 안치하는 방식을 사용하다가 3세기 중반이 되면 규모가 대형화되며 하나의 봉분안에 여러 명 시신을 안치하는 매장의 양상이 나타난다.이러한 흙무지무덤에는 독널,나무널 등 다양한 관이 사용되었다.마한발전기 3세기 이후부터는 새롭게 관을 제작된 전용독널이 등장하였다. 대형으로 제작되었는데 성인의 관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널을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용독널은 입구 부분은 넓고 어깨부분이 발달되었으며  바닥부분은  비교적 뾰족한 형태를 가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입구와 어깨부분이 직선적인 형태로 변화되었다.

 

서동공원 정원에는 서동요의 유래를 알수 있는 그림과 글들이 장식되었다. 아이들이 부른 서동요는 온마을에 퍼지고 마침내 신라 왕 귀에 까지 들려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먼 곳으로 귀향을 보냈다.선화공주가 귀향길 떠나는 순간 서동이 공주를 모시겠다고 하여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후 서동이 찾아 낸 금덩어리를 지명법사님을 통해 신라 왕에게 보낸 후 진평왕의 신임을 얻어 선화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다. 서동의 본명은 장  백제30대 임금 무왕으로 왕자임에도 마를 팔며 평민으로 살다가 선화공주를 만나 왕위에 올랐다. 선화는 신라 진평왕 셋째딸로 어린시절 서동을 만나 서동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서동의 소문은 백제에 전해지게 되어 마침내 새로운 왕이 필요했던 백제왕궁에서는 서동의 자질을 믿고 그를 새 왕으로 모셨다는 이야기였다. 선화공주와 서동의 동화같은 조형장식으로 아이들에게 꿈을 일으켜 주는 그림책 같았다. 정원 곳곳에 서동과 선화공주의 만남을 통한 역사의 흔적을 되새기게 하는 강이수의 "흔적"과 정창훈의 "만남"의  조각으로 서동찬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백제 무왕이 일구어낸 백제시대 찬란한 문화인 연가와  육엽인동연곷무늬수막새가 장식되었다.연가는 배연시설 일부로서 굴뚝 상부에 놓이는 연봉형 장식이다. 비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고 바람에 의해 연기의 역류 흐름을 막는 실용적인 시설이다.연가의 연통은 백제시대 중요 유적에서 출토되었다.익산 미륵사지 육엽인동연꽃무늬 수막새는  건축부재 지붕새 수막새로 막새기와는 처마 아래를 빗물로부터 보호하며 목조건축의 지붕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건축부재이다. 이러한 막새기와 사용은 백제 한성기부터 시작되었으며 부여 익산으로 내려오는 사비기가 되면서 기와의 수요가 급증하여 제작이 본격화되었다. 600년 전후하여 전환기를 맞이하는 백제의 막새기와는 6세기 후엽까지 8개의 장식 없는 연꽃잎의 단아한 디자인을 이루었다. 7세기 이후 연꽃잎의 끝부분이 부러져 각을 이루거나 연꽃잎 안에 새로운 문양이 등장하였다. 익산 미륵사지에 출토된 육엽인동연곷무늬수막새는 연꽃잎이 6개로 줄어들면서 전체적인 이미지는 편평해졌지만 꽃잎에 둘레선이 생기고 안에는 인동 장식이 들어가 마치 연화화생의 불교적 세계관이 꽃을 피우는 듯 한다. 인동장식이 들어간 연꽃무늬 수막새는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되는 백제시기 수막새의 37프로 차지한다. 동시기 같은 수막새문양은 오직 익산에서만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익산 백제 수막새의 고유문양이라 할수 있다. 익산에서 꽃피운 수막새의 문양은 향후 경주와 일본으로 전파되어 익산의 개성을 이어나가게 된다.백제가 국가의 종교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백성들을 통합했던 불교의 연등장식과 함께 탑과 목재가옥,항아리장식으로 삼국시대 정취를 자아냈다. 무왕의 꿈들이 용솟음 쳤던 용의 터널을 지나 공원 중심에  팔작지붕과 함께 목재양식의 2층 누각인  무왕루가 버티고 있었다. 삼국시대 역사동화책속으로 온 듯한 정감으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으로 역사를 인식해 주고 있었다. 궁남지를 바라보며 새천년 평화와 행복한 삶 기원하는 아리따운 자세와 미소로 화관을 든 하늘의 선녀로 표현한 "월계선자" 조각과  인간세상에게 축복을 전하는 선녀인 "천년산화" 조각과 함께  "백제 30대 무왕" 동상이 버티고 있었다. 마치 삼국시대 선녀와 같은 정감으로 널리 인간에게 이롭게 하는 이념을 담고 있었다. 무왕은 익산땅에서 태어난 백제30대 왕으로 41년간 서기(600년~641년) 백제를 통치했다.이름은 장 또는 무강이라 하였으며 서동이란 별명으로 많이 불러졌다. 서동요를 자작 유포하여 신라 진평왕 셋째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고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당시 불안정한  백제의 정세를 안정시키고 통치 왕권을 강화하여 신라 영토에도 세를 확장하였고 백제인의 정신적 통합과 융성한 백제건설을 위하여 익산땅에 동방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궁성으로 지금의 익산 왕궁리  유적을 조성하여 궁성 내불당 제석사를 지었다. 미륵산성,오금산성,낭산산성 등 방어산성을 축조하여 익사전도 기반을 마련하가도 하였다.또한 무왕은 고승 관륵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지리,역본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기도 하였으며 당나라  고조로부터 대방군왕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무왕641년 생을 마치고 익산 땅 오금산 아래 있는 쌍릉에 묻혔다.서동요의 사랑이야기 전설이 깃든 궁남지가 펼쳐졌다. 금마저수지와 미륵산이 바라보는 호수로 즐비한 돛단배 행렬이 삼국시대 정감으로 무왕의 기상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정원은 대한민국 환경조각대전  97 동계  U 대회 기념 조각들이 펼쳐졌다. 나상국의 "잉태",최경선의 "연상",박현대의 "고향",김용진의 "미상",이세덕의 "원죄",김재숙의 "꿈",백경숙의 "나들이",이재국의 "하늘로",정기홍의 "자연으로 부터",게낙영의 "대지",이용철의 "인간",나상국의 "잉태",최경선의 "연상",정은기의 "구조관련",정기홍의 "자연으로 부터",신동희의 "고향이야기",이강원의 "질량이동",심준섭의 "나의 인간 관계",김지삼의 "승무", 박진희의 "사랑", 정현도의 "심혼"   등의 추상주의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작품들 마다 무엇을 뜻하는지는 매우 어려웠지만 과학적인 물리적인 힘을 표현한 실험정신과 사물을 넘어 보이지 않는 물질세계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가들의 영감이 매우 놀라웠다. 추상주의 작품 중 가장 쉽고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작품들은 김지삼의 "승무", 박진희의 "사랑", 정현도의 "심혼"으로 김지삼의 "승무"는 승무를 추는 유연한 몸짓에 한이 서려 있었고 박진희의 "사랑은" 두남녀가 서로 포개어 사랑의 합일체가 되는 사랑의 결정체를 보여 주고 있었다. 정현도의 "심혼"은  갈아 깍듯이 마음의 상처 자국을 그린 조각으로 심금을 울리게 했다.이름 모를 작가의 "연가"와 김동헌의 "사랑"은 사실적인 조각작품이였다.플륫을 연주하는 소녀의 "연가"는 아름다운 자태에서 품어져 나오는 소리로 사랑의 찬가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김동헌의 "사랑"은  연꽃무늬가 그려진  남녀의 합일체로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을 표현한 것 같았다.궁남지 둘레로  조각작품들이 진열되었다.이정환의 "사랑의 힘"은 듬직한 y자 형태와 구름사이에 여인을 표현한 조각으로 가정에 싹트는 꿈과 희망을 표현하였고 "가족"은 서로 마주보는 가족의 형상으로 절대적 사랑을 표현하였다. "꿈"은 추상주의 작품이였다.국경오의 "얼굴"은 순박한 소녀의 얼굴을 정감어린 모습으로 조각하여 따뜻하고 친근한 인간애가 드러났고 "명상"은 남녀 얼굴과 새의 형상을 통해 이상적 세상을 꿈꾸는 염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풍경"은 담장 밖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을 조형화하여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과 꿈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고광국의 "가을 바람"은 쓸쓸한 가을바람에 낙엽지듯 흩날리는 여심을 사색에 잠긴 형상으로 표현하였고 "탄생"은 새 생명  자궁안에 알을 품은 신비적인 모형의 추상주의 작품이였다. 김삼순의 "입맞춤"은 두 남녀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완전한 사랑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였고 "꽃과 나비"는 꽃의 형상에  나비를 투조하여 서로 상호상생하는 자연의 섭리를 나타냈다.김남수의 "음과 양"은 음과 양의 조화로 우주만물을 창조하듯 하나가 되려는 생성의 원리를 나타내었고 "기다림"은 추상주의 작품이였다. 이와같이 마한의 역사와 백제 무왕의 역사 발자취와 함께 현대 조각작품들의 진열로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서동공원이였다.

 

서동공원에서 익산국립박물관으로 가는 차창가로  나무 수풀림으로 드리우는 하천 다리로 교회가 연결된 금마교회가 매우 정겹게 다가왔다.

 

익산국립박물관

익산은 일찌기 고조선 준왕의 새로운 터전이였고 마한의 중심지였다. 그리하여 7세기 초 백제의 부흥을 꿈꾼 무왕(재위600년~641년)은 부여(사비)를 떠나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자 하였다. 고대 동아시아 도성 개발사의 한 축을 차지하는 왕궁리유적,백제 1탑1금당,가람배치의 완성형 제석사지,백제의 마지막 왕릉으로 주목받는 쌍릉 등 무왕이 꿈꾼 백제의 미래가 우아한 백제후기 문화로 완성되어 익산에 남아있다. 백제의 최대 사원 미륵사는 백제 문화의 꽃으로 백제 무왕때 건립되었다. 왕궁리유적에서 북서쪽으로 5km남짓 떨어진 익산 금마면 미륵산 아래에 위치한다.현재는 석탑과 당간지주만 남아있을 뿐 본래 3탑 3금당 형식의 장대한 가람배치를 한 거대사찰이였다.사리장엄구는 미륵사와 무왕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백제사 속 미륵사의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익산이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때 처음 등장하였다.지금 박물관이 위치한 금마면 일대는 옛 익산의 중심지였다.북쪽과 남쪽으로 만경강과 금강,서쪽으로 서해를 두르고 있는 이곳은 강과 바다를 기점으로 내륙과 산간지역을 연결하는 교류의 중심지이자 호남 관문으로 문물이 유입되는 창구이기도 했다. 

제1전시실 익산백제

[백제의 고도 익산]

(1)수부가 찍힌 기와~수부는 국왕이 거쳐하고 중앙 행정기구가 있는 곳을 뜻한다. 수부가 새겨진 기와는 익산이 백제의 또 다른 도읍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2)유리의 달인 금은의 고수~ 금은의 고수 전문 공방은 왕궁리유적 서북편 일대에서 궁궐에서 필요한 물건을 만든 곳이다.  관영공방 장인들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이들만이 왕궁에서 근무했을 것이다. 오아궁리 유적 유리제품은 녹색빛을 띤다. 구리와 철소성분의 영향이다. 또 유리의 녹는 온도를 낮춰주는 납 성분도 함유된다.금제품은 80프로 이상이 20k~24k해당된다.

(3)비교불가 왕궁의 화장실~왕궁리유적 북서쪽에 삼국시대 가장 큰 화장실터가 있다.왕궁 사람들이 쓴 공동화장실이다. 분뇨가 일정 높이에 이르면 연결된 물길을 따라 성밖으로 배출되는 오늘날의 정화조와 같은 원리였다. 

(4)관인의 공간~백제의 귀족과 관인은 16관등제 편성되었다.16관등제는 왕을 정점으로 한 신분질서로 사회를 통합하고 국력을 모으는데 기여하였다. 백제는 또 22부(내관12부 외관10부)를 설치해 정교한 통치를 실현하였다. 외관 사도부 소속 태학은 전문관인과 기술자를 양성한 국가교육기관이다.백제 관인들은 유교경전과 역사서를 즐겨 읽었으며 음양오행과 점복술 그리고 불교계율에 익숙하여  유,불도를 이해하고 행정실무에 능숙했던 사람들이였다. 왕궁리유적을 설계하고 건설할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관인과 기술자들 덕분이다. 

(5)율령과 그릇~백제후기 지배계층이 식기로 애용한 굽달린 그릇이 있다. 엄선한 흙으로 모양도 균일하게 만들었다.이 그릇으로 식사를 한다는것은 신분질서를 재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왕궁에서 사원으로]

(1)왕궁리 오층석탑~ 얇은 지붕들과 3단의 지붕받침돌 그리고 단층의 기단을 가진 왕궁리 오층석탑 국보 제239호는 가장 유명한 백제계 석탑이다. 

(2)금과 은으로 만든 금강경~가장 귀한 소재에 가장 값진 부처의 가르침을 담었다. 금강반야바라말경은 부처와 제자 수보리의 문답형식으로 모든 집착을 버릴 것을 가르치는 대승불교경전이다.종이가 아니라 은판 19장에 금강경 전체를 옭긴 후 도금했다.원판위에 은판을 놓고 수백번씩  두들겨 글자를 돌출시켰기 때문에 여러 개의 사본을 만들수도 있었을 것이다. 

(3)왕실사원제석사~왕궁리유적 동쪽으로 제석사를 두어 왕실 내불당을 이룬 호국사찰이다. 신라와의 전쟁을 위한 정신적 바탕 등 다양한 해석이 뒤따른다. 일찍이 여러 왕조가 궁궐 안 사원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4)칠층탑과 금당의 소조상~6세기 중국 남조의 지원으로 시작된 백제의 소조공예가 7세기전반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다.소조상은 흙으로 빚은 형상을 말한다.나무뼈대에 흙을 겹겹히 발라 입체감이 탁월하다. 원래 금당과 복탑에 봉안되며 경배의 대상  불교도상에서 악귀는 사천왕에게 짓밟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그 사천왕을 이끌고 인간을 보살피는 존재가 제석천이다.제적사지 소조상이 동아시아 공예 교류사가 담겨있다. 

(5)제석사~ 제석사는 무왕의 고난과 영광을 함께한 사원이였다.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던 639년 불에 탔다.익산 천도설 주된 근거자료이다.재만 남은 칠층탑 초석속에서 수정병,목칠함,동제금강반야경이 온전하게 발견되었다. 대왕이 법사를 불러 참회하자 사라졌던 사리6과도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무왕이 마침내 종교적 기적을 앞세워 권위를 회복하고 제석사를 재건하였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미륵사지를 제외하고 백제사원 중 가장 크다. 

(6)익산 쌍릉~ 익산 쌍릉은 가장 드라마틱한 백제왕릉이다.대왕릉 봉토의 가장 큰 특징이 성벽이나 대형 건물의 기초를 튼튼히 다질 때 필요한 치밀한 판축기술이 쓰였다. 

(7)나무널장식~죽은자가 휴식하는 공간이자 죽은 왕을 무덤까지 운반하는 들것이엇다. 타국의 조문사신들에게 나라의 품격을 과시하는 효과를 가졌다.대왕릉의 나무널은 고급목재와 화려한 금속공예품으로 만들었다.나무널에 부착된 금속공예 품은 투금구,좌금구,널못이다.좌금구에는 축조기법으로 세밀한 무늬가 새겨졌다.산 모양 투금구는 세련된 감각을 지니다. 널못은 도금한 청동제 머리와 동제 몸을 접합해 완성하였다.대왕릉의 나무널은 백제후기 최고급 나무널로서 소재는 일본에서 수입한 고급 금송이다. 

[전쟁과 자비의 시대]

(1)백제가 그린 미래~백제의 국력은 정교한 통치시스템에서 비롯 되었다.백제가 아막성 전투602년 시작으로 60여 년간 대신라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국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위덕왕~무왕대의 지방지배강화와 국가 체제 정비가 있었다.율령을 시행하고 전국을 5방으로 나누어 군과 성단위의 하위 행정구역을 두었다. 또 관등을 가진 중앙정부 관료를 파견했다.이 때문에 인력,조세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할수 있었다.백제는 비록 1400년 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백제가 남긴 고도의 통치기술과 정치 감각은 오늘날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제2전시실 미륵사지

[미륵사지 백제후기 문화의 꽃]

석탑을 수리하던 2009년 1월 탑의 한 가운데 떠받치던 받침돌(심주석) 안에서 부처님 사리를 담은 그릇과 문자기록이 발견되면서 이곳은 백제사 연구의 가장 흥미로운 무대로 떠올랐다. 미륵사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절이다. 

(1)3원 가람 미륵사 하나뿐인 절~7세기 전반 무왕(재위600~641년)때 세워진 미륵사는 백제에서 가장 크고 독특한 절이였다. 삼국유사 기록과도 일치하는 미륵삼회로 미래에 예정된 미륵불의 세차례 설법으로 미륵사의 3원 가람은 미래불 미륵의 가르침과 구제를 상징한다.미륵사지 모든 건물터에서 서까래기와가 출토되었다.이 기와는 녹색 유약을 발라 구운 것으로 유례를 찾을수 없는 것이다.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는 중국에서도 궁전이나 황실이 만든 사찰에서만 사용될 만큼 귀한 것이였다.이렇게 귀한 녹유 기와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용된 곳이 미륵사이다.서까래기와는 해가 들면 아름답게 반짝인다.

(2)미륵사 목탑과 목조건축~모두 사라졌지만 지붕위를 장식하던 거대한 치미 녹색으로 반짝였을 서깔래기와와 건물 벽화그림조각들이 남아 있었다. 옛 미륵사 규모와 아름다움을 짐작해준다.미륵사 건물의 지붕은 기와를 올렸다.기와지붕의 무게를 기둥에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둥머리에는 다양한 형태의 공포를 올렸다. 공포 구조 중 남아있는것은 소로조각이다. 금당바닥은 백제때 만들어진 녹색유리판이 깔렸다.

(3)미륵사목탑~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탑은 모두 나무로 지어졌다. 황룡사의 목탑은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가 공사를 총괄하였다.백제의 기술자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의 첫 불교 사찰 아스카데라 목탑(596년 완성)도 세웠다. 이러한 백제의 목탑 건축 기술이 쌓여 미륵사 중원에는 백제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목탑이 완성되었다. 

[미륵사 석탑과 사리장엄]

(1)사리장엄~석탑의 기초도 목탑과 마찬가지로 고운 흙과 돌이 석인 흙 등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쌓아 다졌다. 토층모형  사리장엄은 석가모니 부처 깨달음을 얻은 불교 승려를 화장하여 나온 뼛조각과 재를 가르킨다. 특히 기원전 5세기 인도의 왕자였던  서가모니 부처와 열반 후 얻어진 불사리는 제자들이 나누어 인도 가지의 탑 안에 모셨다. 이렇게 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든 화려한 그릇과 부처님께 바치는 공양물을 모두 합쳐 사리장엄이라 부른다.사리공에 보물을 정확히 계산하여 공간을 만들었다.사리봉영기 발견으로 백제 무왕의 부인에 대한 수수께끼가 시작되었다.

 (2)미륵사 석탑은 돌로 지은 우리나라 첫번째 탑이다~미륵사의 사라진 목탑 좌우에는 석탑이 있었다.미륵사지 석탑이 바로 목탑의 서쪽 서원 석탑이다. 미륵사 주변은 예로부터 황등석처럼 질좋은 화강암 산지로 유명했다. 미륵사 이후 우리나라 사찰의 탑은 대부분 돌로 지어졌다.

(3)녹색의 향연 유리제작~동원 금당지를 비롯해 미륵사지 곳곳에는 판유리 조각이 출토되었다. 공방지에서는 판유리조각과 유리를 제작하는 데 사용한 도가니와 도가니뚜껑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미륵사안에서 대량의 유리를 직접 생산하고 사용했던 사실을 알려준다.

(4)미륵사의 일상생활~미륵사 승려들의 일상생활은 승방에서 이루어 졌다.바둑과 차를 즐긴 차와 관련된 도구들이 많은것은 고려 이후 등장한 선종에서 차문화를 단순한 기호가 아닌 수행의 연장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승려들의 학습과 수행방법에서 경전을 그대로 옮겨 적는 사경이 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는 시대에 부처님 말씀을 널리 퍼트릴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5)토기~토기는 사원에서 살던 사람들의 식기나 저장용기로 투박하고 소박하다.

(6)교통과 전란~마구 수레바퀴 출토로 종교적 활동이나 경제적 활동으로 말을 소유하고 이용하였다. 곡식이나 물품을  운송을 위해 수레를 사용하였다. 미륵사는 여러 차례 건물의 소실과 중건이 이루어졌다. 철제무기류는 사원의 자체적 무장 또는 군대주둔등 혼란했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결과로 생각된다.  

[백제이후의 미륵사]

무왕이 죽은 이후 백제의 국력은 기울고 삼국은 통일된다. 삼국사기에서 성덕왕때 벼락이 떨어져  미륵사지가 불탔지만 보수를 하여 고려시대까지 이 지역 중심 사찰로서 세력을 유지하였다. 조선시대 이후 숭불억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명백을 유지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17세기 들어서면 미륵사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이곳을 지나던 문인들의 읊은 노래만 남게 되었다. 

제3전시실 역사문화

[고대 문화의 중심 익산]

익산을 중심으로 한 서북부는 고대국가 형성의 밑거름이자 마한과  백제문화의 완충지였다.중국 요녕 청동기 문화요소가 남아 있는 한국식동검문화의 발전지이자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건 마국,비리국등 마한 소국이 성립된 곳이기도한다. 이후 이 지역까지 백제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토착 지배지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금동관과 환두대도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 이후에는 안승과 견훤 등 시대를 풍미한 이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익산과 전북 서북부의 역사와 문화~익산과 전북 서북부는 강과 바다를 기점으로 내륙과 동부 산간지역을 연결하는 교류의 중심지이다.이 지역은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였다.북쪽과 남쪽으로 만경강과 금강,서쪽에는 서해를 두르고 있는 이 곳은 호남의 관문으로 문물이 유입되는 창구였다. 

(2)비옥한 삶의 터전 익산~익산은 교통의 요지이자 관문이다.익산은 원래 지금의 익산시 금마면 일대의 지명이다. 이곳에서 역사속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책과 지도에서는 풍요롭던 옛 익산의 모습을 볼수 있다. 바다와 내륙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토기와 고려청자는 수상운송의 발달과 소비자에게 도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물에 담긴 이야기에는 비옥한 땅을 배경으로 발전한 익산의 중심 금마를 살펴볼수 있다. 

(3)청자 수상 운송의 발달 속 소비의 흔적~고려 조운제도는 청자유통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려시대는 대부분의 조세와 공물을 배로 운송했다.군산 진성창은 금강하구에 있는 거점포구로서 기착지이자 운송로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중에서도 청자는 대표적인 공물이었다. 청자 생산은 조운제도를 중심으로 국가가 관리하였지만 개인의 수용에 의한 생산도 있었다. 당시의 사원이나 지역 귀족무덤에서 출토된 청자는 부안,고창,강진등의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펼쳐진 청자요업과 소비의 산물이다.  

(4)바다에서 나온 도자기 유통의 기록~고군산군도는 해상교통의 허브였다.고려청자의 해상 운송로는 군산 고군산군도에서  출수된 도자기에서 알수 있다. 대표적으로 비안도,십이동파도,야미도 해저 유적에서 출수된 유물들은 11~13세기 무렵 고려사람들의 공물 포장과 선적방법,해로,선상생활등을 보여준다.

(5)책과 지도 옛 기록과 모습~기록은 사람의 역사를 그림은 땅의 역사를 보여준다.지리서와 지도는 제작된 시기의 시대적 배경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지리서인 고려사 지리지(1451년),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금마지로(1756년)로 본 익산은 마한의 옛 땅 이자 생산물이 풍부하게 오가던 곳이였다. 호남도서도(17세기),해동지도(18세기),대동여지도(1861년)등의 지도로 바라본 익산과 전북 서북부일대는 주요한 수리시설인 황등제,조운로에 위치한 진성창 그리고 물류의 창구인 고군산과 이미 폐사된 미륵사의 모습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6)토기  생산과 소비 속 지역을 잇다~고대 토기에서 익산의 역사를 읽는다.익산 신용리 가마터는 백제 사비기 이전인 5~6세기 부터 익산 금마 일원에서 백제 토기를 자체 생산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미륵사는 통일신라의 중요한 요업 거점지인 보령 진죽리,영암 구림기 가마터 등지로부터 필요한 그릇을 일부 공급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개 운송이 쉬운 물길을 통해 운반했을 것이다. 

(7)익산과 전북 서북부지역의 산성~ 전북 서북부지역의 산성들은 대부분 서해에서 내륙으로 출입하는 수로 교통의 요충지였다. 바다에서 금강과 만경강을 거쳐 내륙으로 들어오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요 길목 곳곳에 산성을 설치하였다. 대부분 백제때 만들어진것으로 추정되지만 유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개축되거나 후백제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익산 미륵산성,익산토성,금마저토성 등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기와에는 금마저와 관련된 백제 지명이 확인 된다. 

(8)청동기 발전의 여명~청동기는 기원전4세기 무렵부터 더욱 정교해진 모습으로 전북 서북부 일대에 나타난다. 준왕 이전에 선진적인 청동기 문화가 유입된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9)고조선 남하와 철기유입~고조선의 철기 사용은 중국 연나라의 영향이 크다. 철기는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한반도 남부 까지 파급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 시기는 고조선  준왕의 남하 시점과 맞물려 있다.중국 내륙에서 만 확인되는 전한경이 출토된 익산 평장리유적,쇠로 만든 도끼와 새기개가 출토된 익산 신동리 유적등은 연나라의 간접적 영향으로 철기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0)"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 한조~고조선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 지에 내려와 한왕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11) 고조선의 남하 마한의 형성~만경강 일대 청동기 문화는 일찍부터 중국 한반도 서북부지역 선진문화 유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은 위만에게 패해 물러난 고조선의 준왕이 바다를 건너 한의 영역인 익산 일대에 터를 잡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후 만경강과 금강을 중심으로 새로운 마한연맹체가 가지게 된다. "후한서" 한전에 따르면 준왕 후손이 절멸하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2)익산 평장리유적 무덤~익산 평장리유적 무덤에서는 기원전2세기 무렵의 한국식동검과 청동창,전한시기(기원전202년~기원후8년)로 추정되는 청동거울 조각으로 이로 인해 중국 철기 문화의 한반도 유입상황과 일본에 한국식동검문화가 파급된 시점을 추정하기도 한다. 

(13)마한사람들 문화를 꽃피우다~마한은 익산문화의 바탕이다.기원전3세기 무렵부터 유입된 철기문화 영향속에서 호남 지역은 이후 마한소국이 성장하고 있었다.철을 두드려 만드는 단조기술의 발달은 생산규모의 확대와 맞물려 국가형성과 성장의 견인차역할을 했다.지배자는 흙을 쌓아 분구를 만들고 그 안에 매장시설을 갖춘 분구묘에 묻혔다.안에는 한기 혹은 여러개의 무덤 매장시설인 널무덤,독널무덤이 설치되었다.하지만 기원후 5세기 무렵부터는 백제의 영역 확장함에 따라 새로운 무덤 문화가 유입되었다. 분구묘 안에 굴식돌빙무덤 등 백제 매장시설이 그 안에는 굽다리접시 세발달린 토기 등 백제 토기가 마한토기로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14)안승~백제가 멸망한 뒤 금마저(익산의 옛 이름)는 신라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 유민의 나라 보덕국이 만들어졌다.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왕족 출신 안승을 왕으로 추대 하고 고구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국가통치체제를 성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신라는 옛 백제의 땅에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신라의 이름으로 당나라와 맞서는 정책을 활용하였다. 633년 신문왕은 안승을 경주로 불러 왕족으로 예우하고 이후 보덕국은 해체된다.역사 속의 보덕성은 현재 익산토성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그만큼 익산은 고대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15)견훤~통일신라시대 혼란스러운 사회분위기 속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견훤이 나타났다. 그는 민심을 얻고 성장하여 900년 완산주에 이르러 후백제를 세웠다. 백제를 금마산에서 개국하였다는 견훤의 건립 이념에는 후백제 건국의 정통성을 마한과 백제에 두고 일통삼한의 정신적 역사적 토대를 익산에서 찾으러 했음을 짐작할수 있다. 

(16)대표유물로 금동관모와 신발은 정치적 산물이다~태 뒤쪽에는 반원모양 장식이 연결된 기다란 대롱을 부착하였다.

(17)고분에  묻힌 인물은 백제와 연결된 고위층이였다~입점리고분군은  백제 중앙 영향권에 들었다. 돌덧널무덤에서 부터 굴식돌방무덤,앞트기식돌방무덤 등 다양하다. 중국제 청자항아리,유리구슬,다양한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높은 위상과 금강하구의 중요성을 짐작케 한다. 백제 한성기  말부터 웅진기 초에 전북지역이 완연하게 백제로 편입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18)역사의 지문 그릇~토기는 지난 1만 년동안 전 세계의 생활 필수품으로 사용되었다. 토기는 태토를 준비하고 성형하고 그리고 단단하면서 내구성이 있도록 소성하는 과정을 거쳐 제작된다.서로 수준과 성격이 다른 사회에서 이 기술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응용하여 토기를 만들었다. 토기는 매우 다양한 용도와 맥락으로 쓰였다. 토기에는 중요한 정보가 담겨있어 고대의 블랙박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미륵사 기록집~7세기에 창건된 미륵사는 17세기에 이르러 법등이 끓어지고 흙속에 잠들었다. 1966년 우리손으로 이루어진 첫 조사를 시작으로 40여년에 걸친 조사 연구를  통해 본래의 웅장했던 모습으로 드러났다. 1999년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 수리가 결전되고 20년의 대장정 끝에 2019년 우리앞에 다시 섰다. 이곳에는 1966년부터 미륵사지와 함께 한 수많은 연구진이 써 내려 온 노력과 정신이 담겨 있다.

백제인이 남기고 간 긴 역사의 발자취를 익산의 유적과 유물에서 만날수 있었다.백제는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9층석탑 모형으로 만 봐도 과학성과 정교함의 웅장함으로 백제의 찬란한 문화 결정체를 볼수 있었다.

 

이와같이 서동공원의 마한전시관과 익산국립박물관 관람을 통해  마한의 형성과 후백제의 역사 줄기를 알수 있었다. 만경강 일대 청동기문화는 일찍부터 중국 한반도 서북부지역 선진문화 유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위만에게 패해 물러난 고조선 준왕(기준)기원전194년 바다를 건너 남쪽 의 땅에 이르러 개국하였는데 마한이라 하였다.의 영역인 금마(익산)일대에 터를 잡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그후 만경강과 금강을 중심으로 새로운 마한연맹체가 가지게 된다. 준왕 후손이 절멸하자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여 마한사람들은 문화를 꽃피웠다.마한은 익산문화의 바탕이다.익산을 중심으로 한 서북부는 고대국가 형성의 밑거름이자 마한과  백제문화의 완충지였다.중국 요녕 청동기 문화요소가 남아 있는 한국식동검문화의 발전지이자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건 마국,비리국등 마한 소국이 성립된 곳이기도 하다.삼국시대 무왕은 익산땅에서 태어난 백제30대 왕으로 41년간 서기(600년~641년) 백제를 통치했다.당시 불안정한  백제의 정세를 안정시키고 통치 왕권을 강화하여 백제인의 정신적 통합과 융성한 백제건설을 위하여 익산땅에 동방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당나라  고조로부터 대방군왕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찬란한 백제문화를 꽃피웠다.백제가 멸망한 뒤 금마저(익산의 옛 이름)는 신라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 유민의 나라 보덕국이 만들어졌다.고구려 왕족 출신 안승을 왕으로 추대 하고 고구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국가통치체제를 성립하였다.신라는 옛 백제의 땅에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신라의 이름으로 당나라와 맞서는 정책을 활용하였다. 633년 신문왕은 안승을 경주로 불러 왕족으로 예우하고 이후 보덕국은 해체되었다. 통일신라시대 혼란스러운 사회분위기 속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견훤은 민심을 얻고 성장하여 900년 완산주에 이르러 후백제를 세웠다. 금마에서 견훤이 백제를 계승하였다.후백제 건국의 정통성을 마한과 백제에 두고 일통삼한의 정신적 역사적 토대를 익산에서 찾으러 했다.

 

익산국립박물관을 관람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송엽국(람프란서스)이 화사하게 핀 우리맛 황토쌈밥에서 점심을 먹었다.여러가지 다양한 채소쌈으로 저절로 힐링이 솟구쳤다.새콤한 우렁초무침,제육복음,매우 구수한 된장찌게,우렁의 담백함이 담긴 우렁쌈장,싱싱한 배추맛의 김치,달큰한 오이김치,나물향기가 가득한 돈나물, 들깨의 고소한 맛의  나물볶음으로 봄의 신선한 맛으로 가득찼다.청경채의  싱그러운 맛이 살아있는 청경채무침은 집에서는 맛보지 못하는 맛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였다.달고 시고 짜지않는 깻잎짱아치는 매우 맛깔스러웠다.재료의 양과 재료선택, 온도 숙성에 따라 달라지는 절임의 미각의 세계를 담고 있었다.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 서울로 향했다. 차창가로 금계국이 도로변을 수를 놓고 있어 화사한 봄마중이였다.

 

아가페정원)

설악초
부채붓꽃
장미
패랭이꽃
개양귀비
아가페정원~끈끈이대나물

서동공원)

마한전시관

서동공원

무왕루
강이수 흔적
정창훈 만남
이강원 질량이동
나상국 잉태
최경선 연상
박현대 고향
김용진 미상
연가
신동희 고향이야기
김지삼 승무
이세덕 원죄
김재숙 꿈
박진희 사랑
김동헌 사랑
백경숙 나들이
이채국 하늘로
정기홍 자연으로 부터
?
정현도 심혼
심준섭 나의 인간관계
정은기 구조관련
최경선 연상
나상국 잉태
이용철 인간
계낙영 대지
정기홍 자연으로 부터
백제 30대 무왕
월계선자
천녀산화
국경오 얼굴
국경오 명상
국경오 풍경
이정환 사랑의 힘
이정환 꿈
고광국 가을바람
고광국 탄생

 

김삼순 입맞춤
김삼순 꽃과 나비
김남수 기다림
김남수 음과 양
김남수 기다림
이정환 가족
서동공원~궁남지

익산국립박물관)

1

 

제1전시실 익산백제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

제2전시실 미륵사지

 

제3전시실 역사 문화

순금불상좌상

 

금동관모
금다리 긴 목 항아리
익산국립박물관
익산 미륵사
우리맛 황토쌈밥~송엽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