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와 융릉,건릉(2020년9월26일)

백재은 2020. 10. 4. 12:46

과꽃

 

뮤즈음악학원 원장님과 청계산을 등산하기 위해 우리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10시30분에 만났다. 거의 1시간 정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아 표지판을 봤더니 코로나로 인해 버스가 토요일은 휴업한다고 붙여 있어 화성시 용주사와 융.건릉으로 향했다.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854년)때 세워진 절로 고려때 잦은 병란으로 소실된 빈 터에 1790년 정조대왕이 보경스님으로 부터 부모은중경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사도세자 넋을 위로하기 위해 새로 지워 극락왕생을 발원하였다.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 밤 정조대왕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고 하여 사찰이름을 용주사라 하였다. 이러한 정조대왕의 효심을 계승하기 위해 효행교육 중추적 역활로 사찰내 효행교육원과 정조대왕이 직접 돌과 나무에 새겨 기증한 부모은중경과 그의 친필인 봉불기복게,김홍도의 사곡병풍 문화재가 전시된 효행박물관이 있었다. 용주사는 시골경치와 같은 도심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진노랑 수술를 단 보라빛과 진분홍빛의 과꽃이 사찰 입구 삼문을 화사하게 장식하고 매혹적인 자태의 하와이 무궁화가 손짓하고 연못가에 연꽃이 덕스러운 자비로 미소짓는  사찰안은 홍살문을 통과하여 2층 누각인 천보루가 목조기둥 아래 석조기둥의 높은 초석으로 경기도문화재 제36호로 5층석탑과 역사를 간직한 채 위용을 나타내고 있었다. 즉 삼문과 홍살문,천보루 양식은 궁궐 건축에서 볼수 있는 양식으로 왕이 되지 못했던 죄인인 아버지를 올바른 역사적인 평가로 추존하고 극락왕생에 이르는 정조 염원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사찰을 감상한 후 그곳에서 가까운 융.건릉이 있는 화산으로 향했다. 화산 주차장 앞에서 점심을 뮤즈음악학원 원장님 대접으로 코다리밥상을 먹었다. 무우와 시래기가 소스에 잘벤 맵지않는 기름의 고소한 맛으로 시골향기가 가득한 코다리찜으로 찰진 밥과 함께 고소하고 싱싱한 콩나물,마늘향이 강한 맑은 해산물 맛으로 뒤끝이 개운한 미역국,진한 나물향에 들깨 고소함으로 환상적인 맛인 곤드래무침,알맞게 익어 싱싱한 맛이 살아있는 짜지 않은 열무김치가 매우 감칠맛 나는 입맛 돋구는 맛으로 일품요리였다. 아주 맛있게 점심을 먹은 후 융.건릉에 갔다. 사적 제206호인 "융릉"은 화산의 동쪽에 위치한 정조의 생부와 생모의 릉으로 정조가 즉위 후 1776년 부친의 존호를 "장헌세자"라 하고 경기도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휘경동)에 있던 물이 차서 썩지 않았던 죄인인 무덤인 "수은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를 융숭하게 보답한다는 뜻을 지닌  "영우원"으로 고친 후 1789년 조선 최고 천하제일의 길지인 화산으로 옮겨와 "현륭원"이라고 승격하였다. 그후 정조 부친을 1899년 "장종"으로 존호하고 황제로 추존하여 "융릉"으로 높였다. "건릉"은 정조와 효의선황후가 모셔진 릉으로 화산의 서쪽에 위치한 곳이였다. 화산은 입구부터 학과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을 수놓은 것 같은 카리스마가 넘친 장대한 소나무의 매우 웅장한 숲길이 양지바른 남향 산정상의 릉 둘레를 감싸고 여러갈래의 숲길로 이루어져 지금까지 걸어 본 숲길 중에 최고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환상적인 길이였다. 즉 정조의 평생  잊을수 없는 한의 통곡과 효심으로 하늘이 감동하여 내린 천혜의 왕릉으로 하늘이 예비하신 축복의 자연조건을 갖춘 릉이였다. 조선 왕릉은 재실에서 금천교의 진입공간과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정자각,비각등...제향공간과 왕이 잠들어 있는 능침공간인 3부분으로 나누어 졌다.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은 나무향기 가득한 목조건물로 돌담위에 기와지붕과 창이 있는 재기고와 같은 창고가 좌우로 연결된 대문앞에서 중앙에 돌이 깔린 마당과 행랑채가 정겨운 양반집 같았다. "재실"안의 마당은 오래된 향나무와 천연기념물 제504호인 개비자나무가 고즈녁하게 기와를 받치고 있어 거룩한 향이 피어 오르는것 같았다. 세월을 녹아내린 "금천교"는 융릉으로 가기전 속세와 성역의 경계인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다리로 그 옆은 "곤신지"라는 연못이 있었다. "곤신지"는 왕릉에서 보기 드문 연못형태로 융릉에서 내려다 볼때 용의 머리가 되는 부분으로 여의주 모양으로 둥글게 연못을 만들어 왕이 되지 못한 아버지가 여의주를 물고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르기를 비는 정조의 애절한 염원이 담긴 곳이였다.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인 "정자각"은 뒤주에 갇힌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한을 풀고자 릉과 정면으로 바로 보지 않게 두어 구름이 장대하게 펼쳐진 맑은 하늘에 따쓰한 햇살이 릉을 감싸듯이 비추어 드넓은 싱그러운 초원처럼 마음이 상쾌했다. 그리고 "비각"은 두칸으로 만들어 후대에 아버지가 정당하게 평가되기를 염원하는 정조 한이 담겨진 곳으로 그의 소원데로 1899년 황제로써 장종과 융릉으로 추존되는 역사가 새겨졌다. 왕이 잠들어 있는 능침공간은 릉을 지키는 늠름한 자태의 "무석인"과 "문석인"과 함께 능둘레는 모란과 연꽃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진 "병풍석"으로 병풍석위에 인석은 필듯 말듯한 연꽃모양으로 석물들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즉 융릉은 아버지가 후에 추존되길 열망하며 왕릉으로 모셔서 숨막히고 처절한 비통의 죽음에서 매우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안식하고 극락에서 아버지 꿈을 이루도록 배려한 정조의 효심을 엿볼수 있었다. 화산을 왕릉으로 조성한 후 정조는 아버지가 잠드신 곁에서 미래의 꿈을 실현하고자 화산 근처인 수원화성(1794년~1796년)을 건설하였다. "건릉"은 릉을 둘러싼 3.3km 숲길인 소나무와 상수리 나무가 울창하게 뻗은 숲을 50분정도 걸어서 갔다. 진한 소나무 향기가 가득한 숲길로 저! 멀리서 왕관과 같은 구름이 펼쳐지고 소원을 비는 돌탑이 서로 조화로운 고즈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건릉주위에 이르자 참나무가 싱그러운 이끼와 공생하며 길고 장대하게 펼쳐져 수려한 서양풍 정원 같았다. "건릉"은 산봉오리 형세로 인해 융릉보다 소박해 보였는데 아버지를 존대하기 위한 정조의 배려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곁에 묻힌다는 정조의 모진 풍파를 견디며 참아온 통곡 소리의 결정체로 아버지 옆에서 미래를 꿈꿨던 수원화성에서 삶은 이루지 못하고 평생 잊혀지지 않는 아버지의 가슴 아픈 한을 품은 채 역사속에 사라져 이곳에 비로소 안식했던 비운의 왕릉이였다. 이와같이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비통한 죽음(1762년)으로 인해 11세부터 말로 형용할수 없는 하늘에 사무치는 한을 간직한채 하루 하루 살얼음판 길을 걸어야 했다. 죽음과 같은 너무나도 험난한 길을 거쳐 마침내 왕위(1776년)에 올랐고 즉위하자 마자 노론의 공격에 대한 죽음을 무릎쓰고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외쳤다. 이러한 지극한 효심을 바탕으로 후대에 올바른 역사평가를 염원하며 아버지의 존호(1776년)를 바꾸고  최고의 천혜지역인 화산에 왕릉(1789년)으로 모셨다. 그리고 바로 그곳 융릉(1789년)에서 가까운 용주사(1790년)를 세워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화산에서 가까운 아버지 곁에서 미래를 실현하고자 수원화성(1794년~1796년)을 건설하였다. 즉 용주사와 융.건릉은 정조 가슴 아픈 한과 효심이 하늘에 사무치는 통곡의 진혼곡이였다.

 

용주사입구~과꽃

 

 

용주사 효행박물관 앞~하와이무궁화

 

 

용주사 연못~연꽃

 

용주사 천보루

 

 

점심~"코다리가"

 

융.건릉 재실

 

융릉으로 가는 진입공간

 

융릉 금천교

 

 

융릉 곤신지

 

융릉 정자각

 

 

융릉

 

건릉으로 이어지는 숲속길

 

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