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9일~노르웨이 화가이자 판화가인 에드바르 뭉크 (1863~1944)는 표현주의 선구자이자 유럽 현대 미술의 대표주자이다. 파격적인 실험으로 모더니즘에 공헌한 뭉크 작품 조명하는 전시회였다. 아시아 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의 뭉크 회고전인 이번 전시회에서 절규와 같은 그의 상징적인 모티프의 출현과 소멸 그리고 재료를 기반으로 한 모더니티에 대한 그의 공헌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작품 제작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 작업하면서 판화,사진,콜라주 회화 등 예술 매체간의 전통적인 경게를 넘나 들었다. 모티프에 대한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조합론과 위반을 포함하는 더 넓은 범주로 나아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재료를 다루는 방식 그리고 재료의 실제 소멸에 중점을 둔 작업을 통해 뭉크는 당대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그는 로스쿠어 방식을 차용하여 대담하게 색채를 덧입혔고 표면을 긁어내거나 비와눈에 작품을 노출시키며 사진과 무성 영화 프레임을 작품에 적용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매체와 표현기법의 경계를 넘어서고 작품의 노화를 가속화시켰다. 뭉크는 물질 중심 모더니티의 일환으로 실제 물질의 소멸을 예술적 과정으로 선언하며 그것을 순간적변화의 일반적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뭉크는 평생에 걸쳐 작품의 형태 재료 및 색상에 있어 관행적 예술 규범을 무시해 왔으며 그의 개인적 경험은 모더니티의 상징이 되었다.
(1) 크리스티아니아에서의 초년: 인상주의 및 상징주의와의 만남~젊은 시절 크리스티아니아 주변지역의 소박한 풍경을 그리고 주변 환경과 사람들을 기록했다. 전통적 노르웨이 풍경화에 영감을 받은 그의 생동감 넘치고 정밀한 표현을 하고자 했다. 1880년 화가로 데뷔한 그가 처음으로 그렸던 소형 유화들은 노르웨이 자연주의 화가인 프리츠 타우로프와 크리스티안 크로그의 영향을 받았다.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은 뭉크의 관심은 인간을 향했다. 1888~1889년에 제작한 "아스타 칼슨" 과 같은 작품에서 물감의 투명성을 파격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스타일을 자연주의와 분명하게 구분지었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물감을 빠른 속도로 여러 겹에 걸쳐 바른 뒤 전체를 긁어내거나 깊숙이 파내는 방식으로 작업의 물리적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1880년대 후반 그의 작품에서 풍경은 인간의 기분과 감정을 투영하는 화면으로 변모했다. 1889년 "그물을 고치는 남자"에서 뭉크는 풍경 위에 인물을 겹쳐 놓으며 소재 간 상호작용을 통해 외로움,우울감과 같은 감정 상태를 표현하기 시작했다.나는 자연으로부터 그리지 않는다. 나는 그 영역으로부터 그림을 얻는다고 말하였다.
아스타 칼슨(1882)과 자화상(1882~1883)은 고전적인 분위기로 극대의 공포감을 그린 뭉크의 선입견을 버릴수 있었다. 팔뼈가 있는 자화상(1895)은 팔뼈와 초상화를 같이 그림으로써 고독과 우울함을 극대화하였다.병든아이(1894)는 매우 초췌한 병든 모습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마주 앉아서(1894)는 인물들을 서로 겹쳐 마주보며 고독함을 극대화하였다.
(2) 프랑스에서의 시절:달빛,키스,생 클루의 밤까지~1889년부터 1892년까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뭉크는 센강 과 니스의 화려한 지중해 풍경을 다루며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회화 기법을 명시적으로 탐구했으며 자연주의에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1893년 "생클루의 밤"은 실의,슬픔,우울한 불만 사이 우울감의 표현을 강조했다. 비록 절망에 빠져 창가에 앉자있는 인물로 덴마크 시인 에마누엘 골드스타인을 그렸지만 뭉크는 이 그림을 통해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의 심경을 드러낸 것처럼 보인다. 1890년대에는 "뱀파이어 인어"(1893~1896)를 포함한 뭉크의 첫 상징주의 작품들이 탄생한다. 이 작품들에 물감을 바르는 방식은 휘몰아치며 역동적이다. 독특한 빛의 효과는 신비로우면서도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기는데 신비로운 요소는 늘 존재하고 드러나며 발견하면 할수록 설명할수 없는 것들이 더 많아진다는 뭉크의 견해이다. 다색 목판화 "달빛"(1896년)에서 신비로운 빛의 요소는 전면에 드러난 여인의 얼굴과 배경에 있는 집의 나뭇결을 강조한다. 자연의 변형과 요소들의 의인화는 북유럽의 신비주의를 연상시킨다. 불타오르는 사랑의 절정을 상징하는 "키스"는 생의 프리즈 시리즈에서 가장 상징적인 모티프이다. 남녀의 시각적 융합을 완전한 방황의 순간으로 묘사한다. 함께함은 일시적이며 개인성을 잃은 대가로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이별,질투,우울,깊은 절망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이라는 주제가 항상 그 뒤를 따른다. 뭉크는 1880년대부터 사망직전까지 "키스"라는 주제에 전념했으며 수많은 스케치,드로잉,열점의 판화,12점의 회화 작품에서 이를 다양하게 다루었다. 뭉크는 후에 목판화에서 어떠한 공간적 관계도 드러내지 않으며 키스하는 커플은 사랑의 상징으로 변모한다. 서로 굴복하는 순간 남녀의 융합은 그들의 정체성과 개성으로 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빠른 붓터치와 함께 사물과 인간관계를 연결하며 우울감,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배치도가 특이했다.
(3)회화기법의 실험, 스타일의 변화 및 해체:모더니즘에 대한 독창적 기여~1892년부터 1895년까지 베를린에서의 시기를 지나 1896년부터 1897년까지 뭉크는 파리에 체류하며 석판화와 목판화 작업에 집중했다.이후 수년간 그의 화풍은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이 기간은 뭉크가 회화와 사진에 대한 실험에 몰두했던 시기로 그의 작품에 독특한 스타일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의 작품은 더 표현적으로 변모했고 색채의 적용은 더 직접적이었으며 색조는 강렬해졌다. 양면회화 "난간 옆의 여인"과 "목소리"는 뭉크의 상징적 모티프인 "목소리"의 초기 버전을 캔버스 뒷면에 담은 그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뭉크가 사용했던 로스쿠어라 불리는 환영적인 물감 층과 화판의 물리적 완전성을 공격하고 입체적 실체로서 작품의 파괴를 계산한 혁명적 처리방식의 핵심 사례이다. 필연적으로 실패를 수반하는 이 기법을 개선하기 위한 아이디어 변증법은 의식적인 과정이자 뭉크의 작업 과정 일부로 식별될 수 있는 이 비정통적인 방법의 기반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과정 지향적이며 시간을 강조하는 급진성은 물질 기반 모더니즘에 대한 뭉크의 초기 및 지속적 공헌을 대변한다. 이러한 초기 실험에서 그의 후기 작품들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예로 뭉크는 1917년 "목욕하는 여인" 속 목욕 장면을 평생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려냈다. 사진의 이중 노출 효과를 의도적으로 실험한 듯 보이는 이 작품에는 지표적 연관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림 위에 또 다른 그림이 필름처럼 투명하게 겹쳐져 있는 표현 방식은 사진이 이중 노출 효과와 유사하다. 이중 노출은 물질화와 비물질화의 상호 작용을 나타내는 지표로 해석할 수 있다.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우울,고뇌 감정속에 낭만적인 시적인 정감을 불러 일으켰다. 시인과 같은 뭉크의 다른 이미지를 볼수 있는 작품들이였다. 그의 그림은 뚜렷한 윤곽선으로 색채가 매우 화사하게 빛나며 신비로운 분위기로 압도되어 매우 인상적이였다.
(4)생의 프리즈~생의 프리즈는 그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핵심을 이룬다. 이 시리즈는 삶의 순환과 관련하여 생식,수정,배아,생명의 나무,유년기,청년기,메혹,키스,이별,절망,절규 그리고 죽음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이러한 주제들을 그의 작품 전반을 관통한다.이 문제들을 탐구하면서 그는 사랑,고통,우울,죽음에 대해 상징적이고 강렬한 표현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러한 주제들의 레퍼토리를 바탕으로 생의 프리즈 변주를 제작했다.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 전시실에서 열린 "사랑을 위한 연구(1893~1894)라는 제목의 개인전은 뭉크가 이 프로젝트에 전념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이 전시에는 오늘날 모더니티의 아이콘으로 이어지는 마돈나,키스, 뱀파이어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1902년 베를린과 1903년 라이프치히에서 개인전을 통해 생의 프리즈 시리즈 선보였다. 그는 일생 동안 탐구한 주제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갔는데 병든 아이의 무수한 변주가 이를 대변한다. 그는 삶의 주기를 주제로 끝까지 탐구를 추구하며 자신의 생의 프리즈에 매진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절규나 불안을 주제로 한 콜라주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데 이 콜라주는 유색 셀로판 종이 또는 다양한 추상학적 관념을 대변하는 천 조각을 이용해 제작되었다. 뭉크의 생의 프리즈는 현대 미술의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로 여겨진다.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이 자행되었던 제1차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절규"는 20세기 상징과도 같은 작품으로 자리잡았으며 가장 많이 복제된 그림 중 하나로 손꼽힌다.자연의 거대하고 무한한 비명을 들은 뭉크는 요동치는 풍경 그림을 대각선으로 가르는 다리 난간 극도로 과장되게 기울어진 풍경을 통해 문명인으로서의 두려움,패닉,극한의 공포를 묘사한다.또한 주인공의 고립은 그의 정서적 상태와 필연적 강박을 더욱 잘 보여 준다. 전시된 절규 채색 판화본은 그가 직접 채색한 것으로 작품에 독특한 인상을 부여한다.
가장 인상적이였던 작품인 절규는 극도의 공포를 표현하였고 마돈나 작품은 신비스럽게 다가왔다.
(5)공포와 죽음~"불안" 인물들은 절규의 고립된 개인과는 대조된다.모든 사람들은 현대 사회의 초석적인 공포를 상징하는 인물로 변모한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질병,죽음,애도를 겪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여동생 잉에르의 출생 이후 결핵을 앓다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3세가 되던 해 뭉크 역시 결핵에 걸렸으나 살아남았고 이후 자신 누이 소피에가 극심한 고통을 겪다 사망하는 것을 목도했다. 이렇게 엄청난 트라우마적 사건들을 겪으며 그 기억으로 "병든 아이", "임종의 자리에서", "병실에서의 죽음"과 같은 작품들이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죽음과 질병에 대한 표현은 19세기 후반 널리 다루어지던 종교적 소재들이기도 했다. 고통과 죽음이라는 기독교적인 주제들을 부르주아 사회의 주된 기반인 가족이라는사적인 요소에 투영시킴으로써 작품에 대한 이해의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작품 안에 표현됨으로써 관람자 자신의 경험과 공포를 대체한다는 점에서 인기가 높아졌다. "병든 아이"는 뭉크의 기억 속 이미지와 작가의 삶 전체를 통틀어 그의 주요 작품 중 하나로 따라다니게 될 현대적인 소재를 결합한다. 동판화 "병든 아이"1894년에는 회화버전과 좌우반전된 구도를 취하는 반면 이어지는 판화 시리즈는 소녀의 머리와 어깨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병든 아이1"의 다색 석판화에 축소된 범위를 유지했다. 그는 직접 색상을 선택했지만 어떻게 조합할지는 마스터 프린터에게 맡겼다. 작품은 석판과 색상의 다양한 조합 가능성과 그가 직접 채색한 부분들이 어우러져 풍부한 뉘앙스를 풍긴다. 차가운 톤과 따뜻한 톤의 변주와 혼합은 소녀의 심신 상태를 반영하는 것 같다."키스"와 같은 그의 상징적 작품에서 다루는 함께함이란 개인성을 희생함으로써 달성되며 일시적인 것이다. 생의 프리즈 시리즈의 이별,질투,멜랑콜리,재는 이러한 측면을 보여 준다. 그의 저명한 모티프 중 하나인 "재"는 성적 행위에서의 인간의 무능과 낙원적 사랑이 끝나고 난 후의 장면 그 중간 어딘가로 이해될 수 있다. 전시된 "재1"에서는 여자가 입은 드레스의 강렬한 붉은 색채가 남자의 통일된 검은 형태와 대비를 이룬다. 이 작품은 모더니티의 아이콘이며 그 섬세한 채색으로 인해 유일무이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림 속 남자는 "멜랑콜리" 속 모티프의 변형으로 해석된다. 여성의 머리카락에 의해 육체적으로 상징화된 성적 매력은 여자가 남자와의 이별을 선택함에 따라 발산된다. 여성에게는 이별이 곧 해방이지만 남자는 상처받은 채 남겨진다.그의 뱀파이어 모티프에 대한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자전적 기록에서 그는 이것은 경고다...여기 이 그림은 사랑이 죽음과 함께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표현한다. 뭉크의 친구 스타니슬라브 프지비셰프스키가 뱀파이어 라는 제목을 붙였으며 1894년 스톡홀름에서 처음으로 이 제목을 사용했다. 흡열귀의 입맞춤은 치명적이지만 사랑이나 위로의 행위이기도 하다. 연인 뒤에 숨어있는 그림자는 위협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매개체일 수도 있다. "뱀파이어"라는 문학적인 제목은 뭉크의 세계에서 공유된 좁은 범주의 해석에는 부합하면서도 그의 개인적인 견해 역시 반영하고 있다. 40년 후 그는 그 모호함을 버리고 사실 이것은 여성이 남자의 목에 입을 맞추는 것 뿐 이라고 솔직하게 밝히기도 했다. 그는 뱀파이어라는 제목으로 두 개의 석판화를 만들었다. 첫 번째 버전은 창문과 커튼 모티프로부터 공간적 관계를 느낄수 있지만 더 규모가 큰 두 번째 버전은 작품에 등장하는 남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여기에 크레용 외에도 석판화 잉크를 사용했으며 긁어내는 기법을 이용해 인물을 더욱 강조하였다. 1902년 첫 다색 판화가 만들어졌으며 두 가지 색상의 석판과 톱으로 자른 네 개의 목판 그리고 판지 스텐실을 십여 가지 조합으로 이용해 다양한 변주를 탄생시켰다. 그는 색판을 사용하여 석판화를 보완했는데 이 때 기존의 목판화 작업방식이 아닌 목판을 다양한 형태로 절단하여 컬러 스텐실을 만들었다. 이후 두 개의 다색 판화를 대조해 보면 변형된 범위의 그림자가 명확하게 구분되거나 배경과 융합되는 것까지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핸드컬러드 버전은 아주 희귀한 파스텔 작품 중 하나와 함께 전시된다. 뱀파이어 모티프를 통해 뭉크는 사랑과 고통 ,입맞춤과 죽음사이를 오가는 작품을 창조했다.
(6)풍경~그에게 풍경은 인간의 감정과 마음 상태르 투영하는 공간이었다. 자연 모티프와 풍경을 종종 인간과 관련시켜 그들의 감정을 강조하는가 하면 종종 풍경만을 묘사하기도 했다. 1909년 신경쇠약에서 회복되고 코펜하겐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노르웨이로 귀국한 뭉크는 작은 연안 도시 크라게뢰의 스크루벤이라는 넓은 목조 주택을 임대하여 첫 번째 대형 야외 스튜디오를 설치했다.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 전원 숲 암초와 같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주제를 찾았다. 그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해안선과 바위로 구성된 거칠고 황량한 피오르 풍경을 좋아했는데 이는 그의 20세기 초의 정신적 풍경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바위나 초원의 선과 대조 되는 넓은 눈밭은 특히 형태의 동적성과 풍경의 개방성이 순수한 자연적 경험을 드러내는 곳에서 색채의 미묘한 차이를 통해 강조한다. 그는 1898년 "겨울풍경"을 포함해 몇몇 판화 작품에서 겨울 풍경을 제시했다. 이 목판화에서는 처음으로 그림의 구조가 철저하게 붕괴되는 조짐이 보인다. 1916년 에켈리에 집을 산 뒤 그는 주변 환경을 탐험하고 "눈 속의 거친 나무줄기"와 같은 그림에서 다시 한 번 겨울 테마를 다루었다. 1910년에서 1920년대 초 그는 작품에서 움직임과 소실점에 대한 영화적 표현이 드러난다. 이 기간에는 많은 회화 작품들이 이러한 연관성을 드러내었으며 그의 작품 변화는 영화의 발전과 유사했다. 초기 무성영화 마니아였던 그는 1012년 자신의 그림 " 벌목지"에서 영화와 같이 강조된 깊이감을 투영했는데 이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기법으로 스칸디나비아 목재 산업의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그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미래파들과 달리 그는 이 작품을 포함하여 다른 작품에서도 움직임 자체에 관심을 갖은 것은 아니었으며 내용 표현을 하기 위해 사용했다.
풍경화작품들이 낭만적인 시를 읊픈 기분 같았다.낭만주의 회화처럼 다가왔다.
(7)누드~누드는 그가 1902년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에야 그의 작품 중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바르네뮌데에서 그는 여성의 나체를 통해 욕망,질투,증오 심지어 살인과 같은 극한의 감정을 표현했다. 정사각 형태의 작품 "울고 있는 누드"는 바르네뮌데의 호텔 방에 있던 모델 로사 마이스너의 사진을 모티프로 하였다.가구도 거의 없는 체크무늬벽지의 방 안에 고개를 숙인 나체의 여인이 침대 앞에 서 있다. 천장과 그림의 상단 가장자리에 닿을 듯한 그녀의 머리는 공간을 비좁아 보이게하며 압박감을 준다. 그는 여러가지 버전의 "울고 있는 누드" 를 그렸는데 1919년의 "무릎을 꿇은 여성 누드"나 1919~1920년의 "여성 누드 안나"와 같은 작품들이 그 중 하나이다.이러한 작품에서 그는 인물과 주변 환경의 관계를 다양하게 표현했지만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특징은 일관되게 유지했다. 그는 이렇게 비물질화된 형태를 1930년에는 석판화로 1932년에는 청동으로 주조한 조각으로 옮겼다. 그는 자신의 에켈리 자택에 철저히 고립되었고 이성은 그의 삶에서 점점 더 작은 부분이 되어 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모델을 고용하여 여성 누드에 대한 작업을 계속했다. 모델과의 관계는 항상 상호 신뢰와 밀접한 개인적 유대로 특징 지어 졌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모델의 개인적인 특성이었으며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드작품들이 뚜렷한 선들의 특징을 이루며 입체감과 생동감을 주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의 그림이 극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가장 감동적인 작품은 1911년 "해변의 두 소년"으로 친밀한 형제애를 지닌 동심이 느껴졌다.아이의 소중함 과 사랑을 느끼게 하는 모성애를 자극하였다.
(8)마돈나~1890년대 중반 그는 치명적인 여성과 연약한 여성을 하나의 그림에 결합하여 19세기 미술의 전형적인 여성상을 종합한 마돈나라는 주제를 실험적으로 다루었다. 다섯개 버전의 회화 외에도 동판화와 흑색 석판화 그리고 이후 다색 판화도 제작했다.석판화 "마돈나"는 배아와 정자를 모티프로 한 프레임을 묘사하고 있다. 1895년 가을 블롬크비스트의 전시회에서 그가 "사랑하는 여인" 이라는 제목으로 세가지 버전의 그림을 선보인 것에 대해 다룬 두 개의 신문 풍자 만화에서도 프레임과 같은 요소를 언급하고 있다. 현존하는 그의 판화 150여 점은 네가지 형시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의 키스톤과 두개의 컬러 석판을 사용한 1902년 버전은 주로 종이의 종류 채색및 이미지 색션별로 특징지어져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러한 변주는 해석의 다양성을 반영한다. "마돈나"의 모호함과 복잡성은 서로 다른 근본적인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러한 묘사에 담긴 다양한 유형의 혼합은 19세기 여성 이미지의 분열된 모습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프레임의 모티프뿐만 아니라 기대 서 있는 모습, 휴식과 움직임,드러냄과 감추기 등의 요소에서도 나타난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로틱하면서도 황홀한 양면성을 보여 주는 누운 자세,무용수 또는 인어와 같은 서 있는 자세, 그리고 임신과 출산의 지표인 태아의 골격과 정자의 형상이다.
(9)만남~뭉크의 만남은 남성이 여성에게 유혹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실패의 필연성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있는 남자는 말 그대로 여자의 머리카락에 이끌리여 이는 "키스"에서 두 남녀의 결합으로 절정에 달한다. "매혹"의 동판화와 석판화는 남자와 여자의 머리와 어깨로 그 범위를 축소한다. 성적 매력의 중심은 남자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여자의 머리카락이다. 머리카락은 성적매력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애하는 남자를 옭아매는 올무로 변한다. 봄과 동시에 보고 있지 않음을 암시하는 주인공의 모호한 눈빛은 이미 관계의 실패를 예견하고 있다. 뭉크는 남녀의 신체적 접촉에서 파생되는 매력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양하게 표현했다. 세기가 바뀐 후 뭉크는 매혹을 주제로 한 몇 가지 새로운 변형을 만들어 냈는데 바로 "여인의 머리카락 속 남자의 머리"와 "머리카락에 키스를"이다. 뭉크의 작품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에로틱한 애정은 항상 실패와 그에 따른 이별과 이별을 수반한다. 작가 묘사하는 남녀 관계에서는 여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에 대응하는 작품인 석판화 "이별"과 "매혹"은 매혹의 필연젹인 결과로서 이별을 상징한다. 이 작품들은 처음에 서로 마주 보고 있다가 돌아서는 남녀의 초상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자는 탁 트인 바다와 자유로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남자는 섬세한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밝은 얼굴로 숲의 어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남자에게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지만 여자에게는 이별이 해방인 것처럼 보인다. 바다 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그녀의 머리카락이 남자가 멀어진 방향으로 펄럭이는데 이는 그녀가 지닌 강렬한 매력을 의미한다. 남자는 상처받은 채 남겨진다.
(10)두사람, 외로운 이들과 다리 위의 소녀들~고립은 마치 붉은 실처럼 뭉크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이 주제는 풍경 속에 한 명의 인물을 묘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림 속 공간안에 두 명 이상의 인물 간의 연결 부제를 묘사하는 방식으로도 다루어진다. "해변의 젊은 여인" 속 젊은 여성 모티프는 드라이포인트,에칭 버전과 다른 목판화 버전의 "두사람,외로운 이들"에서도 반복된다. "두사람 ,외로운 이들"은 마치 인용문 같다. 뭉크는 밝은 여성의 모습에 뤼켄피어와 같은 어두운 남성의 실루엣을 더했다. 뭉크는 두 성별을 밝고 어둠의 대조로 제시한다. 남녀는 서로 가까이 있지만 그 거리는 더 이상 극복하기 어렵게 느껴지며 마비된 듯 각자의 자리를 지킨다. 작품은 대부분 톱을 이용해 세 등분으로 잘린 목판 위에 찍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성의 실루엣은 해안을 따라 연결되어 있지만 여성과 바다는 각자의 형태를 유지한다. 작가는 작품의 일부에 종이 스텐실을 사용해 전경의 일몰이나 일광을 표현하고 두 인물 사이 남근모양의 피사체를 반영하는 데 활용했다. 뭉크는 1917년 이전 이 강렬한 다색 판화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양환 색상 조합 중 일부는 손으로 채색하여 주인공들 사이의 서로 다른 관계를 전달하고 다양한 풍경을 펼쳐 놓는다. 밝은 여성 모티프는 뭉크의 "다리 위의 소녀들"에서도 계속해서
등장한다.
(11)초상화~초상화는 뭉크의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노르웨이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이후 베를린 보헤미안들의 단체 초상화,후원자,수집가들의 의뢰로 초상화를 그렸다. 뭉크는 종종 두 가지 이상의 버전으로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중 일부는 서로 다른 기법과 형식으로 작업했고 어떤 경우에는 몇 년 후에 그리기도 했다. 1890년대 중반 뭉크는 1885년부터 크리스티아니아에서 관계를 유지해 온 보헤미안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이 등장하는 단체 초상화를 그렸다. 세기가 바뀐 후 뭉크는 후원자,친구,수집가들로부터 점점 더 많은 커미션을 받았으며 초상화는 그에게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1904년 코펜하겐덴 프리 우드스틸링에서 열린 뭉크의 첫 개인전에서는 처음으로 그의 초상화가 한 벽면에 하나의 작품 그룹으로 묶여 주요작 중 하나로서 전시되었다. 뭉크는 헨리크 입센을 포함한 여러 현대 작가들의 정신에 따라 표면을 관통하고 피사체의 성격과 숨겨진 인간성을 분석하려는 시도를 통해 표현적인 초상화를 만들었다. 피사체 성격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당사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초상화의 색채가 매우 화사하고 신비롭게 다가왔다.
(12)급직적 혁신가~1909년 뭉크가 신경쇠약에서 회복되어 노르웨이로 돌아온 후 그는 주제와 상관없이 작품을 날씨의 영향에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는 작업을 계속했다.이 과정은 과격 치료라 불리는 그의 로스쿠어 기법의 일종이다. 이러한 후반 작업은 점차 작품의 노화와 퇴화에 대한 일반적인 예술적 표현으로 변화했다. 뭉크는 크라게뢰의 대형 야외 스튜디오 그 이후에는 에켈리 정원 숲과 암초 등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서 작품 소재를 찾았다. 1911년부터 뭉크는 "화분이 놓인 창가의 남녀"와 같은 회화 작품에서 사진 매체를 활용해 보다 급진적인 접근 방식으로 움직임에 대한 사진적인 표현을 선보였다. 그는 사진용 플래시를 이용하여 실험을 진행한 뒤 이를 과장된 빛 반사의 형태로 그림에 옮겼다. 남녀의 모습은 말 그대로 번쩍 빛을 받은 순간을 포착한 듯하다. 이는 이후 그의 작품 중 장노출을 모방한 "남과 여"(1913~1915) 속 변형된 피사체를 처리한 방식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두 작품 모두 화가와 모델을 주제로 한 뭉크의 일련의 작품과 관련이 있다. "남과 여"에서는 천장의 빛이 화면 안으로 사라지면서 소실점이 여자의 가슴 높이까지 내려와 방의 깊이가 뚜렷하게 만들어진다. 전경 인물의 두 번째 스케치 실루엣은 움직임의 한계를 나타내며 사진적인 관점에서 조리개를 열었다가 다시 닫을 때까지의 노출 간격을 나타낸다.주제적 측면에서 "남과 여"에 대한 관심은 전경 인물의 익명성과 (작업중 인)작가의 손이 없다는 점에서 특정 작가와 모델의 관계에서 벗어나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탐구로 옮겨갔다.1916년 크리스티아니아 근처에 위치한 에켈리 저택을 구입한 후 1918년부터 뭉크는 "남자와 말"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 풍경,농부,노동자를 그리는 데 점점 더 집중했다. 이 작품에서 뭉크의 혁신적인 회화 기법과 원근법은 장면의 역동성을 훌륭하게 포착한다.여러 개의 윤곽선과 대담한 획을 사용하여 마치 영화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 관람객을 녹색 풍경 속으로 끌어들인다.
(13)목판화와 실험~뭉크의 판화 작품은 동판화,석판화,목판화 등 750여개의 주제와 최대 30000여 장의 판화로 남아있다. 그러나 뭉크는 판화를 제작한 후 수년 뒤 이전 판 위에 변형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기 때문에 주요 판화 작품의 경우 정확한 연대기를 파악하는 것이 복잡하다. 뭉크는 작품 제작 갯수에 대해 고려한 적이 없으며 작품에 번호를 매기지도 않았다. 게다가 많은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변형 작품을 반복해서 만들어 내는 일이 없었고 전통적인 의미에서 체계화할 수 없었다. 뭉크는 "두 사람,외로운 이들"에서 사용한 동일한 스텐실을 훗날 "해변의 두 여인"의 몇몇 다색 목판화 작품에서도 사용했다. 1920년대까지는 보다 다양한 색상의 판화를 찍어내면서 뭉크는 새로운 회화적 요소를 위해 리놀륨 판을 사용했으며 손으로 채색 했다. 고독한 모습의 서 있는 실루엣의 여인은 화면을 거의 등지고 있다. 해골 형상의 얼굴을 한 앉아 있는 노파는 그녀와 한 덩어리로 표현되며 젊음과 노년, 처녀와 과부,삶과 죽음의 대비를 표현하는 상반된 한 쌍을 구현하고 있다. 단순한 수정 혹은 색상의 강조일 수도 있지만 수작업으로 추가된 부분의 투명도는 거의 불투명한 정도부터 스케치하듯 칠한 것까지 다양해 원본 판화에는 없는 새로운 모티프를 제공한다. 뭉크는 판화작업에 있어 실험의 일환으로 이러한 수정 작업을 이어나갔다.1930~1940년대에 뭉크는 그의 목판화 시리즈에서 모티프가 지워질 정도로 나뭇결을 남기기도 했다. 피사체는 판의 순수한 물성을 드러내기 위해 뒤로 밀려나며 자연의 재료를 이용하여 구조적으로 그리고 다색으로 재현된다.
(14)말년과 뭉크의 자화상~1916년 에켈리 부지를 구입한 후 뭉크는 주변의 풍경,정원, 그리고 공간의 표현에 전념했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 보이는 실제적익 물리적인 소멸의 형태인 변화함과 일시적임은 덧없음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자 동시에 뭉크의 특유한 모더니티의 특징이 되었다.1930년에 제작된 유화 흐트러진 시야는 묘사된 두 인물의 빠른 움직임을 나타내는 왜곡된 신체 원근법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원근법의 단절,놀랍도록 왜곡된 신체 원근법,실물 크기의 전경 인물을 통해 뭉크는 관객을 거의 물리적으로 이 공간과 마주하게 한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1932~1935)은 선과 악의 양극화를 다루고 있다. 작가 자신이기도 한 한 남자가 창문 앞에 서 있는 흰 옷을 입은 인물 옆에 겹쳐있는 어두운 옷을 입은 인물을 향해 소총을 조준하고 있다. 인형처럼 보이는 인물이 피를 흘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첫 번째 총알은 발사되었고 선이 다시금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노년의 뭉크는 스스로 고립된 상태에서 고독과 노화라는 주제에 점점 더 집중했다. 1930년 오른쪽 눈의 혈관 파열로 일시적으로 실명에 가까워진 것이 클로즈업 자화상 연작을 제작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투명성과 해체에 대한 그의 집착은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죽음을 상징하는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더욱 강렬해졌다.1940~1943년작 "자화상"에서 그림자는 죽음의 순간을 예견하는 하나의 자율적인 인물이 되고 신체의 투명성은 소멸을 예고한다. 작품에서 그는 머리카락이 없는 대머리로 표현되어 있다.신체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닌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져 인간의 비물질화와 소멸을 강조한다. 뭉크는 1944년 1월23일 에켈리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15)프리즈 오브 라이프 인 퍼즐~뭉크는 1902년 베를린과 1903년 라이프치히에서 생의 프리즈 전시를 직접 기획하였다. 그는 작품들을 연이어 배치함으로써 삶과 사랑,불안,죽음이라는 생의 연속성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번 생의 프리즈 퍼즐 전시는 세계 최초로 뭉크의 1902년과 1903년 생의 프리즈 전시를 재현하였다.뭉크는 자신이 창작해낸 이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판화에 매료되었다. 그는 색감 , 질감,구성 등에 변화를 주어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동일한 뱀파이를 주제로 하더라도 어떤 판화작품은 사랑스러운 느낌이 나는 반면 거친 선으로 이루어진 다른 판화작품에서는 공포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또한 예전에 자신이 창작한 유화작품을 선과 구성,색감 등을 달리하는 새로운 판화작품으로 재탄생 시키기도 하였다. 뭉크의 판화에 대한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태도는 드라이포인트,에칭, 리토그래피,우드컷 등 다양한 방식의 판화기법을 활용했다는 점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새로운 직소퍼즐 방식의 판화기법을 개발한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혁신적인 직소퍼즐의 판화기법은 1896년 파리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 바 있다. 전통적으로 여러 색깔의 판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색깔별로 판형을 여러 개 제작하여 해당 부분에 색을 입혀 여러 번 종이에 찍어내곤 하였다. 하지만 뭉크는 직소퍼즐처럼 하나의 판형을 색깔별로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어 각각의 색의 입힌 조각들을 모아 한번에 종이에 찍어내는 방식을 고안해 내었다.
이번 생의 프리즈 퍼즐 전시는 뭉크의 직소퍼즐 방식의 판화기법에 착안하여 최신 기법으로 제작되는 직소퍼즐로 구성하였다. 8만 조각 이상으로 이루어진Dance of Life 등 수천 수만의 퍼즐 족가들을 통하여 생의 다양한 모습과 감정을 표현하고자 한 뭉크의 예술성과 혁신성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었다.
뭉크는 내 그림에는 약간의 햇빛과 흙먼지 그리고 비가 필요하다. 때로는 그것이 컬러를 더욱 조화롭게 한다. 새롭게 그린 그림에는 무언가 단단한 느낌이 있다.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내 그림을 깨끗하게 하려고 하거나 오일을 덧칠하려고 할 때 너무도 초조해진다. 약긴의 흙먼지와 몇 개의 구멍은 그림의 완성도를 더할 뿐 이다라고 말하였다. 20세기 급직적인 실험으로 현대미술가의 창시자임을 알수 있었다. 내 그림들 이외는 자식이 없다고 선언하며 예술은 결정화하기 위한 사람의 욕구이다. 자연은 예술이 그 자양분을 얻는 영원하고 위대한 원천이라고 하였다. 숨쉬고 느끼고 고통받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인간을 그릴 것이다. 당신은 일상의 성스러움을 이해해야 하며 이 일상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말하였다.일상의 성스러움의 명언이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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