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강진 월출산 다원,백운동원림,강진병영성성곽길,하멜기념관,강진오감통시장,사의재,김영랑생가,시문학파기념관 (2025년12월28일)

백재은 2026. 1. 7. 12:33

 

12월28일~향기식당에서 조식을 부페를 먹었다.누룽지,카레라이스부터 반찬,분식,빵,떡,과일,메실차,수정과에 이르기까지 매우 푸짐하게 나왔다.매우 쫀득한  잡곡밥은 먹으면 먹을수록 힐링이 솟구쳤다.지금까지 먹었던 잡곡밥 중 제일 맛있었다.부페 상차림 중 특히 호박죽, 국수육수,연근조림,콩나물국은 환상적인 맛이였다.착한가격의 매우 감칠맛있는 맛으로 감동했다. 신비한 기암괴석의 산봉우리들과 함께 여명을 알리는 산수화같은 경치가 펼쳐지는 월출산 다원이 매우 낭만적이였다. 드넓은 차밭을 지나  백운동정원으로 가는 숲길로 신비로운 적막이 흘렀다.백운동 원림은 조선 중기 처사(도덕과 학문이 뛰어나면서도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이담로가 조성(1660년경)한 낙원이다. 유불선사상을 바탕으로 자연과 풍광을 사유하고 삶의 의미와 유희를 깃들여 조성하였다.원주 이씨 가문의 정원으로 계유정난(1453년)때 강릉 부사였던 이영화가 수양대군에게 참화를 입자 호남으로 이거하였고 후손 이남은 을묘왜변,이억복은 함경도 절제사때 순국하였다.사도세자 스승이였던  동강 이의경이 은거한 곳으로 6.25전란으로 폐허가 되는 등 극심한 환란속에서도 13대 350여년간 지키고 보전 해 온  가문의 유산이다.고려시대에는 고승들의 수선처였고 조선 중기 이후 호남의 대표 명원으로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등 조선 후기 명사들의 시서화가 창작된 문화의 산실이다. 차 전문서와 차문화로 부국강병을 주장한 동다기를 남기며 후손들은 향명,월산 작설차,백운 옥판차를 만들어 전승해 오고  있다.차의 생산,제다,명선이 모두 이뤄지고 그 역사와 기록이 전승된 우리나라 차문화사의 산실이다.자연과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원림은 담양 소쇄원,완도 부용정과 더불어 호남의 3대정원으로 내원과 왜원으로 구분되는 자연 속에 파묻힌 은거문화의 정점의 국가 명승이였다.월출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계곡과 주변에 조성된 깊고 울창한 숲 가운데 이담로의 묘가 수비하듯  드리우는 별서였다.별서 뒤편의 늠름하게 하늘로 솟은 왕대나무 숲인 제12경 운당천운인 운당원이  드리우며 고혹적 향기로 가득했다. 수소실을 이룬 유상곡수로 매우 운치가 있었다. 유상곡수 제5경으로 잔을 띄워 보낼 수 있는 아홉 굽이의 작은 물길이였다.마당으로 흘러든 시냇물이 아홉 구비를  만든다. 제9경 십홀선방인 취미선방은 초가지붕으로 고즈녁했다. 취미선방은  산허리에 있는 꾸밈없고 고즈녁한 작은 방이였다. 별서안에는 갖가지  나무들의 정원을 이루었다.수소실 앞마당의 감나무와 금목서,수소실 옆  모란이 심어져 있는 모란체 제8경 화계모란, 모과나무 윗단에 바위 언덕에 심어둔 백 그루의 홍매의 제3경 백매오,백매암향으로 사계절 사색적인 정원이였다.수소실을 중심으로 화단이 있는 돌계단위로 취미선방을 이루고 취미선방에서 돌계단  맨위로 자이당이 배치되었다. 스스로 기뻐하다는 뜻인  자이당은 돌계단의 뒷마당과 함께 담장을 이루어 고즈녁했다.자이당의 뒷문으로 나가니 왜원으로 신세계가 펼쳐졌다. 무릉도원같은 별천지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월출산 남쪽으로 흐르는 백운계곡으로 뻗어나가는 물줄기인 홍옥폭과 함께 기암괴석,석림원의 매우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매우 환상적이였다. 제4경 풍리홍폭인 홍옥폭은  단풍나무 빛이 비친 폭포의 홍옥같은 물방울을 이루는 곳이였다.홍리폭 계곡을 지나  제2경 유차성음 별서 정원으로 들어가는 동백나무 숲의 작은길인 산다경이 자리잡고 있있다. 매우 울창한 석림원을 드리운 홍리폭으로 백운유거(정문)가 비추며 매우 운치가 있었다. 홍리폭을 따라  웅장한 기암괴석의 창하벽이 버티고 있었다.제6경 창벽염주인 창하벽은 붉은색 글자가 있는 푸른빛 절벽이었다.제10경 홍라보장 청하벽 위에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심어진  풍단으로 창학벽을 드리우며 운치가 있었다. 청하벽 위 제11경 선대봉출인 정선대는 신선이 머물렀다는 옥판봉이 보이는 곳이였다.이 정선대는 유상곡수 옆문으로  갈수 있는 곳으로 정선대로 올라가기 전  자이 이시헌의 묘가 있었다.백운동 원림을 조성한 이담로(1627~)의 6대손이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제자인 이시헌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차 전문서인 동다기를 필사기록으로 남겨 우리나라 차의 역사를 새로이  쓰게 했고 삼증삼쇄라는 독특한 제다법으로 차를 제조하여 보급한 다도인이였다. 그 제다법은 지금까지 이어져 백운동이 차문화 성지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의 후손인 이한영(1868~1956)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최초로 백운옥판차라는 상표를  만들어 차를 판매하였고 그 제다법과  상표가 지금까지 이어져 백운동 차문화의  전통을 잇고 있다. 백운동은 조선후기 차문화 중흥의 진원지였으며 그 중심은 다산과 그의 제자 이시헌이 있었다.창하벽위 정선대는 제7경 유가홍린을 드리운 곳이였다. 제7경 유가홍린인  정유강은 용 비늘처럼 생긴 붉은 소나무가 있는 언덕이였다.정선대에서 석림원과 운당원에 둘러싸인 별서와   월출산 구정봉의 서남쪽 봉우리인 제1경 옥판상기가 비추며 매우 환상적이였다. 옥판상기와 함께  저! 멀리 산봉우리들이 비추며 명산에 오른 기분 같았다.별서 내원은 자이당의 뒷문,취미선방 옆문,백운유거(정문),유상곡수 옆문을 이루며 홍옥폭과 창하벽의 정선대,운당원으로 갈수 있도록 문이 배치되었다. 월출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계곡과 주변에 조성된 원림으로 운당원과 석림원을 통해  백운계곡과 안운제로 갈수 있는 등산로가  펼쳐졌다.이와같이 백운동원림은 운당원과 석림원에 둘러싸인 원림으로 사계절 각기 다른 감성으로 다가오는 매우 환상적인 지상낙원이였다.이담로의 입신 양명의 미련을 버리고 은거하기 위해 지은 별서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1경부터 12경까지  시를  짓고 노래하며  백운동도를 그린 무릉도원이였다.백운동 원림을 지나 매우 수려한 월출산이 드리우는 월출산 다원으로 차문화 성지를 이루고 있었다.월출산 다원 앞에는 강진백운동전시관이 있었다. 기획 전시실에는 문봉서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백운동 원림을 묘사한 수묵화로 환상적이였다. 상설전시실에서는  풍류가 흐르는 원림 주제로 전시되었다. 백운동은 강진 월출산의 천불봉 남쪽 기슭에 있다.앞쪽으로는 석대가 있어 올라가 굽어볼 수 있고  뒤편에는 하늘을 뚫은 층층의 바위산이 옥처럼 우뚝 서 있다.선비의 이상향 자연 인연 명연이 울창한 낙원,백운동 원림 조영자 이담로의 생애와 기록, 원주이씨 가문이 일궈낸 인물과 유산,백운동을 찾은 시인 묵객들, 백운동에서 맺은 사제의 인연, 명차의 대를 이은 백운동, 다산의 삼증삼쇄 제다법이 전시되었다. 백운삼연은 자연,인연,명연을 생육하고 우려낸 세가지 보배였다. 꾸미지 않은 원시 자연 속 수려한 풍광의 자연과 학문,예술,종교(유교,도교,불교),충절로 삶을 꽃피운 백운동 사람들의 행적 인연이였다. 다선 초의 선사 다산 정약용,백운동주 이시헌은 스승과 제자의 인연 뿐만 아니라 차로 맺은 명연이 세대로 이어졌다. 다산과 이시헌,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이시헌의 아들 이면흠까지 차로 맺은 가문간의 우의가 돈독했다.한국 전통차 명맥을 이어온 차의 산실인 명연이였다.하멜기념관으로 가는 길로  산과 평야가 펼쳐졌다. 귀리농사를 짓는 강진을 알 수 있었다.강진병영성성곽길로 유채꽃단지를 이루며 강진의 월출산을 비롯해 산봉우리위로 구름이 띠를 이루며 아름답게 비추었다.성안 중앙으로 홀로 서있는 나무가 사색을 드리우며 이슬에 맺힌 야생화들이 신비롭게 비추었다.남문을 지나 소나무가  고결한 자태로 빛났다.초목의 긴가지로 동문,남문,객사를 드리우고 줄눈이 서로 맞물린 성벽들이 덩쿨에 드리우며  역사의 그림자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 건물 서측에 대형 연지가 있는 객사가 눈에 들어왔다. 객사가 연못에 반영되며 아름다웠다.객사 담장으로 작은 연못을 두며 전라도 지역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건물 중  최대 규모의 객사임을 보여주고 있었다.강진병영성과 마주하며 하멜기념관이 있었다. 병영은 조선 지방군의 육군이 주도한 곳이다. 전라도 일대는 고려시대에 해로를 통한 국제교류가 활발한 지역이다. 해상교통 발달은 강진의 청자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왜구들의 침략로이기도 했다. 왜구들의 끓임없는 약탈로 1377년 고려 우왕은 각 도 요충지에 산성을 짓도록 지시했고 이때 수인산성이 축조되어 방어성 역할을 하였다.조선 개국 후에도 왜구들의 침략이 계속되자 태조은 군사제도 정비하면서 바닷가와 인접한 곳에 군대를 주둔하였다.이 무렵 전라병영성이 강진으로 이설되어 육군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다.전라병영성은 동서남북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이다. 특히 남쪽으로 9개의 섬이 있고 강진만을 통해 완도의 고금면,군외면과 가까워 제주도와 바다의 통로역할을 한다.뿐만 아니라 병영성 주변은 들판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고 땅이 기름져 풍족한 곡식을 거둬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요새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골짜기에 성문을 설치해 적의 공격에도 노출이 되지 않도록 했다.병영성의 축성 성벽의 안쪽과 바깥쪽을 모두 돌로 쌓는 협축기법을 사용했다. 돌을 불규칙하게 층층이 쌓고 작은돌로 틈을 막았으며 줄눈이 서로 맞물려 있어 견고하다. 자연석을 다듬어 썼으며 하부에 큰돌을  놓고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 돌을 쌓았다. 또 성벽 일부는 외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쌓은 편축기법으로 지어진 곳도 있다. 하멜의 강진 생활기가 전시되었다.1653년 8월16일 네덜란드 무역선 스페르베르 호가 심한 풍랑으로  난파되어 선원 64면 중 36명이 제주도에 상륙했다.조선 조정은 청나라에게 외교 간섭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하멜 일행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이송시켰으나 청나라 사신 행렬에 하멜 일행 중  일부가  뛰어들어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소란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하멜 일행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어 전라병영에서 1656년3월부터 1663년 3월까지 생활하였다. 헨드릭 하멜 일행은 13년 28일 동안 억류되었다가 1666년9월4일 탈출에 성공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멜은 억류 생활 동안 보고,듣고, 느낀 사실을 기록해 하멜표류기로 출간하였으며  프랑스,영국,독일 등 서양의 많은 나라들에서 번역 간행 되었다.고된 노동의 한국에서의 일상을   자세히  일기형식으로 써 내려간 내용들이 심금을 울렸다.우리나라 말은 쉽다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한 내용이 실려있어 매우 감동이였다.전시실 내부는 높은 천정과 함께 중앙으로 성벽장식을 이루어 병영성의 역사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강진사찰음식체험관부근으로 오감통시장이 있었다.천정을 이룬 시장으로 둘러보기가 좋았다.사의재로가는 길로 강진의   벚꽃길이 운치있게 펼쳐졌다.고개길로 물안개가 피어오른  산봉우리들이 수묵화를 담아내고 저수지가 펼쳐져 아름다웠다.사의재는 다산 정약용 선생 최초 유배지로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 딸  보살핌을 받으며 4년간 머물렀던 곳이였다.정약용의 금동상을 위시한 사의재는 동쪽 우물가 주막 집터를 원형 그대로 2007년 복원된 것이였다.청조루를 지나 사의재옆  250년된 팽나무 보호수가  강진읍 동문샘을 드리우며 매우 운치가 있었다. 동문샘은 마을 안에 있는 샘으로 정약용 유배지가 더욱 정겹게 다가왔다.사의재 주변으로 전통한옥양식으로 전통마을 길 같았다.에피그램 스테이가  유려한 곡선의 한옥 대청마루로 매우 인상적이였다. 정약용이 주막집을 사의재로 명명하였는데 사의재란 생각은 마땅히 담백하고 외모는 단정해야 한다. 말은 적어야하고  움직임은 무거워야한다는 뜻이였다. 초가집 주막과  돌담으로 하늘높이 솟은 초목이 드리우며 운치가 있었다. 주막앞 동천정과 다리의 연못으로 정약용이 가꾼 연못처럼  매우 고즈녁했다.주막 마당에는 정약용 선생을 따쓰하게 맞이했던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 딸의 주모상이 버티고 있었다. 신분과 여성이란 이유로 역사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것이 매우 애석했다. 죽고싶은 심정의 정약용 선생을 따쓰하게 맞이했던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 딸의 주막집으로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역사의 현장이였다.사의재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이 강진에 유배되어 4년간 (1801~1804) 거처하였던 집터로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 딸  보살핌을 받으며 이곳에 머물렀다. 죽고 싶었던 다산에게 주막 할머니의 충고와 강진의 인심으로 마음과 몸을 열어 1802년 10월경부터 최초 제자 황상을 시작으로 이청등..강진읍 6제자에게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제로 교육을 베풀었으니 당대 최고 권위의 학당이 이곳에 창설되었다.경세유표,애절양,상례사전,아학편훈을 이곳에서 집필하였다.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배려로 실학이 집대성 할 수 있었던 곳이였다.정약용은 사의재를 떠나 두번째로 1805년 겨울부터 1년가까이 보은산 고성사의 보은산방에 머물었다.보은산방에서 강진읍 6제자를 교육하는 한편 총 52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주역사전과 상례사전 등의 저작에 몰두하였다. 강진 차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무렵이었고 큰아들 학연이 강진에 내려와  스님과 더불어  6제자들과 주역과 예기를 논하며 밤이 새는 줄 몰랐던 시기이다. 보은산방은 정상에 올라 멀리 흑산도 유배중인 형 약전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던 그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1806년 가을 장진읍 이학래의 자택으로 옮겨 교육과 연구에 더욱 정진하며 2년가까이 머문다.다산은 강진지역현실에 천착하면서 지역이 대변하는 조선적 모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실학 연구토대를  더욱 굳걷히 하였다.이학래는 강진읍 6제자 중 막내였다. 이학래는 다산학단의 일원으로 다산의 방대한  문집 간행에 중심적으로 참여 하였다. 지리지인 대동수경주는 이학래가 엮고 다산이 감수한것이다.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600여 권에 이르는 엄청난 연구 저술과 실학 집대성은 불세출 대학자의 집필과 지휘 그리고 강진의 24제자(강진읍 6제지와 초당18제자)들의 거룩한 공동 연구지원이 이루어낸 금자탑이었다.1808년 봄 이학래의 집에서 도암 귤동마을 다산초당으로 거쳐를 옮겨 유배 해제될 때 1818까지 10여 년간 머물게 된다. 다산초당은 원래 윤단의 산정으로 후손들을 가르치기 위해 1천여 권의 장서까지 갖춰놓은 가문의 도서관같은 곳이었다.다산은 여기에서 윤단의 손자 6명을 포함한 초당18제자를 교육한다. 흑산도 귀양중이던 형 정약전 1816년사망 소식을 듣게 되는 곳도 다산초당이었다.1801년 유배길 나주 율정점에서 눈물로 헤어졌던  이들 형제는  상봉하지 못한 채 기구한 운명이 되었다. 다산은 대한민국 학보 제1호인 불후불멸의 대저 목민심서를 비롯한 600여 권의 저술을 완성 짓는다. 민족의 큰스승으로 영원토록 부활화는 대서사시의 종장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다.점심을 돌담 한정식집에서 한정식을 먹었다.고등어와 조기구이는 짜지 않고 담백해서 너무 좋았다.소고기미역국은  기름지지 않고 맑았다.새콤하고 달자지근한 묵은지김치찜은 환상적인 맛이였다. 직접 만든 생두부는 참기름을 뿌려 더욱 고소했다. 죽순들깨볶음과 표고버섯볶음은 힐링맛이였다.귀한 식재료로 먹을수록 입맛을 돋구었다.매생이무침은 바다향기로 가득했다.메추리알장조림, 들깨샐러드,숙주나물무침, 고추무우지짐으로 감칠맛 있었다. 좀 익은 동치미는 깔끔한 맛이였다.잘익은 김치는 정겨운 맛을 담고 있었다.집 반찬과 같은 한정식차림으로 매우 감칠맛을 추구하는 일류 맛집이였다.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 식당길 따라  김영랑생가로 향했다. 돌담에 드리운 탑골샘의 초가 우물과 성벽같이 쌓은 돌담장의 텃밭으로 정겨운 마을길 같았다.덩쿨이 가득 채운 담장길을 이루며 문학의 길 같았다.김영랑 생가 앞으로 한국 최초의 유파 문학관인 시문학파기념관이 위시하며 강진문학의 숨결로 빛났다.김영랑생가는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우리나라 대표 서정시인이자 항일 민족지사였던 영랑 김윤식 선생(1900~1950)이 1903년  장남으로 태어난 곳이다.1915년 강진보통하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학 한 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휘문의숙 재학시절이던 1919년 강진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에서 수학하며 용아 박용철 선생 등과 친교를 맺었다.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에는 시 창자활동에 몰두하였다.영랑은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이하윤,정인보,변영로,김현구,신석정, 허보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과 더불어 우리 현대시의 새 장을 열었다.1934년 4월 문학지 제3호에 불후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을 발표하였으며 1935년  영랑시집을 1949년에는 영랑시선을 출간하였다.선생은 조국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한 채 흠결 없는  대조선인으로 의롭고 의롭게 살았다. 광복 후 신생 조국 정부에 참여하였던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부상당하여 47세 일기로 타계하였다.선생은 생애 87편의 시를  남겼다.시비가 있는 마당으로 사랑채의 담장과 안채의 문간채로 이루고 있었다.장대한 은행나무가 드리운 사랑채와 곳곳마다 초가지붕을 이루어 매우 정겨웠다. 안채의 높낮이가 다른 마루와  부엌의 조그마한 방양식이 매우 인상적이였다.장독대와 샘으로 하늘높이 우뚝솟은  나무가 드리우고 뒷마당의 계단씩 돌담 정원위로 빽빽한 대나무숲을 이루며 매우 운치가 있었다.초가 돌담장으로 드리운 빽빽한 대나무가로수사이로 대나무숲길이 펼쳐져 매우 환상적이였다.즉 평지지형의 초가한옥과 함께 높은 언덕의 대나무숲 담장을 이룬 숲길로 매우 이색적인 생가였다.대나무 담장과 연결된  볕짚의 계단길로  세계모란공원으로 가는 길을 이루었다.시문학파기념관앞  언덕길을 따라 빽빽한 대나무숲이 드리운 초가 돌담장의 영랑생가를 두른 세계모란공원 길이 펼쳐져 매우  낭만적이였다.그 당시 매우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던 영랑생가였음을 알 수 있었다.김영랑생가 옆 시문학파기념관 광장으로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을 주도했던 영랑 김윤식.정지용.용아 박용철 3인의 동상이 위시하며 우리나라 순수문학의 태동을 알리고 있었다. 이들이 발행한 시문학은 당대를 풍미했던 프로문학과 낭만주의 문예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이 땅에 순수문학을 뿌리내리게 한 모태가 됬다. 입구부터 시문학파 동인 대표들의 주요작품들이 장식되었다.시문학파 탄생 이전의 대표적 문학유파는 1920년대 전반 "동인지"를 중심으로 감상적 낭만주의 풍조의 문단 활동이 전개 되었으며 1920년대 후반은 카프를 중심으로 프로문학이 위세를 떨치던 시기였다. 1930년 창간된 "시문학"은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구현하여 시의 순수성을 회복한 의의가 있다.  

시문학파 탄생이전의 대표적 문학유파

(1)동인지 운동의 효시,창조파~ 1919년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를 창간하여 작품활동을 한 시인과 소설가를 이른다.

(2)퇴폐적 상징주의,페허파~1920년 창간한 동인지 "폐허"를 통해 작품활동을 한 작가들이다.동인지  발간은 2호에 그쳤지만 당시 로서는 새로운 문예사조였던  서구의 퇴폐적 상징주의를 소개하고 창작하여 전파하였다.

(3)감상적 낭만주의,백조파~ 1922년 창간된 동인지 "백조"를 중심으로 활동한  문학유파이다. 애수의 신비,동경의 감정과 피안으로의 도피를 찾아 헤매는 방랑의 정신이 주를 이루었고 눈물과 슬픔,생의 비애와 감각적 초월을 통해 현실을 벗어나려는 센티멘털 로맨티시즘이 주를 이루었다.

(4)신경향파 및  프로 시계열~1923~4년부터 새로운 문학이 대두되었는데 이를 신경향파라 불리었다. 이후 사회 문화운동을 통한 계급투쟁을 지향하는 염군사 계열과 문학 예술운동을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삼는 PASKYULA계열이 통합하여 1925년 카프가 결성되어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한 목적주의 문학운동이 전개되었다. 철저한 계급적 자각과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 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표로하였다. 1930년경 볼셰비키화로 그 이념적 투쟁 노선은 더욱 강화되고 문학적  편향성은 경직되었다. 사회적 리얼리즘을 시를 생산한 이들 그룹에는 임화 ,권환,안막,박세영,박팔양,김창술,유완희,이찬,박아지 등이 속한다.

(5)민족문학의 부흥,국민문학파~1920년대 중반부터 계급문학에 대항하여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문학의 민족적 개성을 주장한 문학론을 펼쳤다. 최남선의 조선주의와 시조부흥운동,이광수.김동인의 역사소설,염상섭.양주동 등의 절충주의 문학론이 주축을 이룬다. 1920년대 후반의 민요시 운동이나 한글부흥운동도 이 경향의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6)순수시 운동의 선구,해외문학파~ 1927년 동경에서 창간된"해외문학"을 중심으로 활동한 유학파 작가들이다.서구문학을 번역,소개하면서 자신들의 순수시 세계를 전개하였다. 해외문학파 시인 중 일부는  시문학파에 포함되어 1930년대의 한국 시단을 이끌기도 했다.   

시문학파

(1)태동~시문학파가 형성된 1930년은 일제의 강점이 한층 더 폭압적으로 강화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 하에서 국내의 문단 상황은  일제강점기에 대한 저항이라는 목적의식은 같았지만 사회주의 문학운동과 순수민족문학운동간 심각한 대립 양상을 보였다.해외문학파에서 발아된 순수문학 운동은 시문학파에 이르러 구체화되었고 이후 "구인호"와 모더니즘 운동  그리고 "시원"과 "시인부락" 동인지로 이어지면서  1930년대 한국 현대시의 맥을 형성하였다. 

(2)시세계~시문학파는 정치적 경향 시에 반발하여 문학에서 정치성이나 사회성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지향하고자 한 점이 가장 중요한 특색이다.1920년대의 감상적 낭만주의 시나 민요시 또는 KAPE 의 경향시가 모두 자유시의  특성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지 못햇던 데에 반해 시문학에 실린  김영랑,박용철,정지용 등의 작품에서는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조화에 의한 자유시가  씌어지고 있다. 특히 시에서 언어의 조탁이라는 면에 그들이 의식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 다른 중요한 특색으로 시문학파의 시에서 은유와 심상이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물론 1920년대의 시에도  은유나 심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문학파의 그것과는 근본적이고 질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1920년대  은유나 심상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대부분인데 비하여 시문학파의 은유나 심상에는 의식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3)의의~"시문학"지는 1930년3월5일 창간하여 그해 5월20일 제2호,1931년10월10일 제3호를 끝으로  종간되었지만 당대를 풍미했더 카프계열의 프로문학과 감상적 낭만주의 시조에서 벗어나  이 땅에 본격적인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모태가 되었다. 시문학파의 문학사적 의의는 첫째 1920년대의 이데올로기 문학의 근본적 결함을 극복하고  시의 자율성을 확보한점,둘째 시적 기교와 전통적인 가락을 통해 순수시의  새 경지를 개척한 점,셋째 1920년대와 1930년대 시문학의 분획점으로서 현대시의 분수령을  이룬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시문학파 탄생이후의 대표적 문학유파  

1930년대 시는 질적으로 심화되고 양적으로 풍요로워져 현대시다운 미적 형상화를 성취한 시기이다. 그 시적 개화의 물결은 시문학파의 문학적 동력에 의해 이끌어졌고  주지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세례를 받은 모더니즘과 생명현상의 본 모습을 탐구한 생명파를 탄생시켜  한국 현대시의 큰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이다. 

(1) 한국어의 미적 성취 추구,시문학파~1930년대 한국시는 시문학파 시인들에 의해 그 막이 열렸다.  1930년3월에 창간된 "시문학"을 무대로 활동한 시문학파는 프로문학의 목적주의 문학관에 반발하여 개인의 내면 서정을 조화로운 언어의 조탁을 통하여 표현하는 순수시를 추구하였다. 이들의 시는 창의적인 리듬과 참신한 현대적 감각이 돋보여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현대시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 이데올로기 순수서정 추구 경향과 언어에 기울인 각별한 애정에 관심을 두었다. 인생과 사회에 대한 거창한 주제가 가능한 배제되어 있는 대신 모국어의 세련미에 몰두하여 한국시의 예술적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시문학 작품에 게재한 시인들은 김영랑,박용철,정지용,이하윤,정인보,변영로,김현구,신석정,허보 등이다. 

(2)문명비편과 주지적 태도,모더니즘~1930년대 모더니즘은 김기림,정지용,김광균 등이 주도하고 장만영,정서언 등이 포함되는 영미 이미지즘 계열과 이상과 "34문학" 동인들의 초현실주의 계열에 포함한다. 영미 이미지즘 계열의 모더니즘은 시문학파의 순수실운동을 기교파.예술지상주의파라고 비판하는 한편 1920년대 동인지문단의 센티멘털 로맨티시즘과 프로문학의 내용 편중주의를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시창작의  기술적문제에 초첨을 맞추었던 시문학파의 방법적 정신에서 나아가 지성을 바탕으로 시대나 문명에 대한 비판까지를 내포한 의식적 방법론을 주장하였다. 그 특징은 첫째 정서적 우세에 대하여 지성적 우세를,둘째 현실에 대한 초월적 태도에 대하여 현실 비판적 적극성을,셋째 청각적 요소에 대하여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였다.한편 이상과 " 34문학" 동인들의 초현실주의 계열의 시는 기존의 상식화된 시적 의미와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다다이즘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무의식 세계 안에 잠제된 불안과 공포,부정과 반도덕적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시를 발표하였다. 억압된 심적 상태를 해방하는 수단으로 자동기술법을 채용하며 도착된 성적 이미지와  변태적 심리상태를 표현하였다. 

(3)생명현상의 본질 탐구,생명파~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생명파는 프로 문학의 이념,순수시를 표방한 시문학파의 유미주의적 경향과 관념성,그리고 모더니즘의 감각적 기교주의와 반생명성에 반발하여 등장한 일군의 시인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생명현상의 모순과 갈등,자아탐구와 절대고독의 시세계에 관심을 가졌던 새로운 시인들로서 동인지 "시인부락"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정주,김동라,오장환, 함형수 등과 시집 "청마사초"를 발간한 유치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시세계는 당시 유행하던 모더니즘 시의 도시문명과 기계적 감각화,시각적 회화성과 정물적 묘사에 의해 소홀히 다루어진 진실한 인간주의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어 시의 본본령을 회복하였다는 의의를 지니다. 

(4)자연의 재발견,청록파~1930년대 말 "문장지"의 추천으로 등단한 박두진 ,박목월,조치훈등이 해방 후인 1946년 공동시집 "청록집"을 펴낸것을 계기로 청록파라고  불리었다.자연의 재발견이라는  공동된 주제를 지닌 이들의 시세계는 주관적 정서로 윤색된  감정이입의 대상이 아니라 이상향으로서의 자연을 객관화하여  보였주었다는 점에서  해방 후  우리 시단의 하나의 이정표로 남게 되었다. 

 이밖에  한국현대시의 흐름을 알 수 있는 현대시의 역사가 전시되었다. 시문학파기념관으로 영랑의 생가가 고즈녁하게 비추었다. 시문학파기념관 을 지나 강진을 대표하는 김현구길이 펼쳐졌다. 강진의 문학 향기가 우주로 약동쳤다. 버스로 가는 도중 식당앞에서 식당주인이 직접 말린  반건시를 주어 너무 맛있게 먹었다.서울가는 길로  구름이 수채화를 그리듯 맑은 하늘이 광대하게 펼쳐져 아름다웠다.

향기식당
월출산다원
1
백운동원림

기획전시실)

백운동원림

상설전시실)

 

강진백운동전시관
강진병영성성곽길
1
하멜기념관
사의재
돌담한정식집
김영랑생가가는 길
김영랑생가

 

 

 

시문학파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