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지도박물관(2021년6월4일)

백재은 2021. 6. 5. 10:14

단순한 재료의 대조되는 장식으로 고전미와 서양적인 정감을 자아내는 건축양식인 "광교원천마을의 가람카페거리"를 지나니 고풍스러운 서양장식의 흰 철망 담장으로 적벽돌의 "원천동 천주교 성당"을 마주 보며 우뚝솟은 광교 신도시에 둘러싸여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박물관"이 버티고 있었다. 드넓은 잔디정원들이 펼쳐진 1970.80년대 정원과 건축의 양식들이 잔존하며 지구를 관찰하는 신비한 과학적인 연구의 장으로 빛났다. 계단의 언덕으로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의 업적을 기리며 매우 섬세한 부조장식과 생명력이 넘치는 김정호의 동상으로 우리나라 지도의 위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기준점 모형,수원 위성기준점,대한민국 경위도 원점등...을 제시하고 있었다. "위성기준점"은 영국 그리나치자오선을 중심으로 지구타원체와 측지좌표에 근거로 전국 위성기준점 배치도를 형성하였다. "위성기준점"은 국가기준점으로서 범지구 위성 위치 결정시스템 신호를 수신 저장하여 국토지리정보원에 송신한다. 전국에 위성기준점에서 수집된 위성 신호는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정밀하게 국민들에게 실시간 제공함으로써 정확한 위치 정보를 안내하고 있었다. "위성기준점"을 이용한 측량 결과는 각종 건설공사,국민생활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국가기본도 제작,지적측량 등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통합기준점"은 국토에 대한 평면적 위치와 높이 그리고 중력 값에 대한 지리적 분포와 시간적 변화를 종합적으로 알 수 있도록 설치한 국가 기준점으로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과 개발,국가 기본 측량,지적 측량,지도 제작 및 지리 정보 시스템 구축 등에 중요한 측량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수준원점"은  우리나라에 사용하는 모든 높이의 기준을 정하기 위해 설치한 국가 시설물로 등록문화재 제247호로 지정되어 이를 활용하여 도로,철도,각종 건설공사 등 국토개발과 재해 방지에 필요한 정보를 제시해 주고 있었다. "지자기점"은 지구가 가지고 있는 자석의 성질을 측정하는 국가 기준점이다.  지구상의 모든 몸체는 지구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받고 있는데 이것을 중력이라고 한다. "중력 기준점"은 중력의 크기를 땅의 모양이나 시간의 변화에 따라 정확하게 재는 것을 중력 측량이라고 하는데 중력 기준점은 이렇게 측량한 중력의 크기를 표시한 국가 기준점이다. "수준점"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상하수도,하천 제방 및 교량,도로 및 가종 기반 시설물 등의 토목공사에 필요한 높이를 결정한다."삼각점"은 지구상의 평면적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 산봉우리 등 각 지점에 경도,위도 등을 정해 놓은 국가 기준점이다. 그밖에 한국과 일본의 지각운동을 연구하기 위해 "초장기선 전파 간섭법"을 이용하고 "대한민국 경위도 원점"의 표시와 "절대중력 관측소"가 있었다. 야외 전시장을 둘러 본 후  철망으로 장식을 두른 건축양식인 박물관 내부로 들어갔다. "세계지도"의 유형은 중국과 조선 중심의 "동양식 세계지도"와 하늘은 둥글고 땅은 사각형이라는 천원지방사상으로 둥근 원 안에 세계를 그린 "원형 천하도","서양식 세계지도"로 나눈다."서양식 세계지도"는 1602년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만든 "곤여만국전도"로 1603년 조선에 도입된 이후 서양지도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다. 서양의 고지도는 최초로 선사시대의 것이 발견되며 이집트의 "파피루스지도"와 바빌로니아의 "토판지도"가 전래되고 있다. 지도제작이 활발해진 그리스와 로마시대는 "에라토스테네스","스트라본"등이 지도를 만들었고 특히 "K.프토레마이오스"가 그의 저서 "지리학"의 부록으로 게재한 세계지도는 후세의 지도제작에 큰 영향을 끼쳤다.중세에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세계관을 지도화한 "T.Q"지도가 생겨났고 13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지중해의 항해지에 의해 지중해와 흑해를 중심으로 한 정밀한 해도인 "푸르토리노 해도"가 제작되었다.그 후 해상교통의 중심이 대서양으로 옮겨지자 네덜란드가 지도제작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폴란드 출신의 지도학자 "G.메르카토르"의 "메르카토르 도법"은 서양의 고지도가 현대지도로 변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지도는 지역 공간만 나타내는 것이 아닌 정치,경제,사회,문화등 세계와 지역의 여러사항들을 보여주는 그림이다.지도의 변천사는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체계 및 그 시대의 정치,역사,문화,환경 등 다양한 상황들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우리나라 지도역사는 삼국시대(B.C57년~A.D935년)에 본격적인 지도제작으로 시작 되었다. 고구려 영류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봉역도"의 고구려 지도를 보냈고 신라가 "지리지"를 편찬했던 것과 삼국을 통일하던시기에 지도를 이용했음을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고려시대에 "백제 지리지"가 남아있었다는 증거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고려시대(918년~1392년)는 지도제작에 관한 여러 기록은 남아 있지만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목종5년(1002년)에 거란에 "고려지도"를 보냈었고 의종2년(1148년)에 이심과 지지용 등이 송나라인과 공모하여 "고려지도"를 송의 진희에게 보내려다 발칵됬고 헌종때 행정구역을 10도에서 5도 양계로 개편하여 전국지도인 "오도양계도"를 제작했다. 조선시대(1392년~1800년대말)는 조선전기 새로운 국가 건설과 함께 많은 지도가 제작되었다. 특히 태종때부터 본격적인 지도제작이 이루어졌다. 태종2년에 "본국지도"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 하였는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전 세계  역사지도를 뜻하는 것으로 권근,김사형,이무,이회가 만든 세계지도로 아시아,중동,아프리카,유럽 등 구대륙 전역을 수록하고 있다. 각나라 이름과 수도의 위치,주요 지명을 표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와 중국의 지리정보가 상세히 표기되어 있다. 특히 조선을 실제보다 크게 그림으로써 전 세계를 향한 자신감과 원대한 포부를 보여주고 있다. 세조때 양성지와 정척이 "동국지도"를 완성하였다. 그후 "삼읍도","연변성자도"와 같은 여러 지방도가 제작되었다. 1602년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만든 서양식 세계지도 "곤여만국전도"가 1603년 조선에 도입된 이후 서양지도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다. 지도의 종류는 도를 단위로 하여 그린 지도인 "도별도"로 조선후기 작품만 전해진다. 16세기 후반 수록된 내용이 적고 지역의 모습이 왜곡된 "동람도" 유형과 왜곡된 부분이 수정되고 새로운 내용들이 풍부하게 수록된 정상기의 "팔도분도" 유형으로 나눈다. 조선시대 통치 기본 단위였던 부,목,군,현을 대상으로 그린 지도를 "군현지도"라고 하는데 지역의 모습을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다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며 산수화처럼 그려진 회화식 군현지도는 예술작품 같다. "관방지도"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군사시설과 군사적 요충지를 그린 지도이다. 주로 조선전기 개척시절이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이후 국방 및 행정력 강화를 꾀하던 시절에 활발히 제작되었다. 조선후기 백두산을 둘러싼 청나라와의 국경문제가 대두되면서 북방지역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특수지도"는 특수한 목적,지역을 그린 지도이다."궁궐도","관아도","천문도","사찰지도",관광지도인 "명승도",풍수적 사고가 반영된 휴대용 지도인 "수진본지도"가 포함된다. 1395년 태조4년 조선초기에 제작된 석각본 "천상열차분야지도"인 천문지도로 황도와 적도가 원으로 그려져 있고 은하수가 흰 띠로 표시 되었다. 1886년 "순천송광사지도"로 순천 송광사의 연혁과 사적,법당등의 규모를 기록한 송광사사적에 실려있는 지도로 조계산의 봉우리들이 마치 꽃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산지의 절벽과 수목,냇물이 회화적으로 묘사 되었다."수진팔도지도첩"은 휴대용 지도로 조선후기 대중화 되었던 지도이다.병풍처럼 절첩식으로 되어 있고 총 64면에 걸쳐 지도의 지지를 담고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지도제작 기술이 매우 발전하였다. "조선전도"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도로써 선조들의 국토인식과 자연관을 비롯해 지도 완성을 위한 과학지식의 수준,지도제작 기술,예술적 표현 능력등을 알수 있다. 그리고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김정희의 "청구도","대동여지도","동여도","수선전도"등 많은 지도를 편찬하였다. 고산 김정호는 조선후기(순조~고종)때 활동했던 대표적인 지리학자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지도제작에 뜻을 두어 1834년 "청구도"를 편찬하였고 1861년 청구도를 대폭 수정하고 보완하여 목판본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제작한 22첩으로 구성된 전국지도로써 보물 제850호로 지정 되어 있다.목판으로 간행하여 보다 많은 국민들이 이용할수 있고 분첩절첩식으로 고안해 휴대와 열람이 편리하다. 모든 산을 산줄기로 표현하여 산과 산에서 기원하는 하천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고 도로에는 10리마다 표시를 하여 거리와 축척을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하였다.대동여지도는 산맥과 하천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고 행정,국방,교통,경제,문화와 관련된 여러 요소들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또한 휴대가 편하도록 22장으로 나누어 접을 수 있도록 제작된 과학적인 지도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조선의 전통적인 지도제작술을 집대성하여 만든 가장 뛰어난 고지도이다. 그밖에 "동여도"및 서울 지도인 "수선전도"등의 지도를 제작하였고 각 고장의 정치,경제,문화,지형 등 지역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기술한 지리지 편찬에도 힘써 "동여도지","여도비지","대동지지"등을 편찬하였다. 지도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각자로서 정확한 국토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일념으로 국토를 체계적으로 그려내어 우리 과학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조선시대 전해지는 지도는 다음과 같다."천하고금대총편람도"(1666년), 김수홍의 중국중심 "세계지도",흥중징의 "신증 승평지"(1729년),"황도남북항성도", 최한기의 "별자리지도" ,"천하총도","영가지","수진본군사용동국지도","경산지","해좌전도","곤여전도","팔도지리","조선팔도지리","동경지","울산읍지","대한여지도","여지도","여재촬요","오주각국통속전도","수진본목판지도","지명산법","영광읍지",'세계전도","천하총도",대한전도","수진본 여지도","신편표제찬도환영지","머리병풍용 여지도","제주지도","천하지도서","수진본팔도지",'접역지도"등이 있다.일제강점기때는 1909년 탁지부가 토지 조사국으로 개칭되어 본격적인 지도 제작 사업을 착수하였으나 1910년 일제 강점으로 우리나라 자체의 근대적인 지도의 제작사업은 중단되었고 조선총독부에 조선 임시 토지 조사국을 설치하여 한반도의 측지 및 제도 제작 사업을 실시하여 지형도인 "구한말한반도지형도"가 제작되었다. 당시의 지명현대지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을 군사적 목적을 위해 정확한 군대지도를 제작하였는데 우리나라 전역의 지형도인 군대적 대축적지도,군사선이 표시된 "경성부관내도",일본인들의 조선침투를 보여 주는 "한국대지도"를 제작하였다.현대에 와서는 보다 정확한 현대지도로 변모 하였다.1950년 중반 국방부 산하 지리연구소가 창설되어 "국가기본도"를 제작하고 1967년 "남한전역 지도"를 완성하였다.1974년 국립지리원이 설립되면서 "대축척지도"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연안해역기본도","토지이용현황도","위성영상지도"등 다양한 지도를 제작하고 있다.현대지도의 종류는 주제도,일반도,특수도로 나누어 지는데 "일반도"는 주제도 및 특수도의 기본도를 활용하기 위하여 전 국토를 통일된 축척으로 국가가 제작하여 공급한 지도로 "국가기본도","지형도","지세도" 등이 있다. "주제도"는 특정한 주제를 표현 할 목적으로 제작된 지도로서 여러 목적을 표현하는 일반도와는 달리  한 가지 특정 목적만을 위해 제작하고 사용하는 "토지이용현황도","도시계획도","도로망도","행정구역도" 등이 있다. "특수도"는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지도로 "해도","군사지도","기후도"가 포함된다. 우리나라 600년사 지도 제작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건국으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1402년)를 제작하였고 1443년 훈민정음 창제를 한후 양성지와 정척의 "동국지도"(1463년),신숙주의 "해동제국기"(1471년),"화동고지도"((1526년~34년),"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관상감"(1557년),"조선방역지도"(1557년),1592년 임진왜란 후 이광정이 1603년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를 수입했고 1630년 정두원이 "자명종","천리경","직방외기","만국전도"를 수입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1640년~51년 "조선본 천하여지도"를 제작하였고 1645년 소현세자가 "한역서학서"를 수입했다.1653년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한 후 1666년 김수홍의 "천하고금대총편람도",1673년 김수홍의 "조선팔도고금총람도',1678년 허목의 "목장지도',1684년~94년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를 제작하였다. 1696년 안용복이 독도에서 왜인들을 축출한 후 1706년 이이명의 "요계관방지도",1708년 최석정의 "회입곤여만국전도"를 제작하고 1709년 "탐라지도병서"를 간행했다.1712년 백두산정계비건립 후 1740년 정상기의 "동국지도",1750년 "해동지도",1755년 홍문관과 정상기의 ""동국대전도",와 "팔도분도",1757년 "동국대지도',1770년 신경준의 "동국여지도"를 제작하였다.1776년 규장각 설치 후 1776년~1787년 "청구관해방총도",1785년~1800년 "도성도"를 제작 하였다.1816년 영국군함 한반도 서해안 측량사건 이후 1834년 김정호의 "청구도"완성,1850년 최한기의 "지구전후도"와 김정호의 "동여도" 제작,1857년 최한기의 "지구전요"를 저술,1860년 "곤여전도" 목판본 제작,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신유본 완성,1864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갑자본 완성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후 1872년 전국 지방군현지도 459매 완성하였다. 1876년 개항과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1898년 "양지아문"을 설치하였고 1899년 학부편집국에서 "대한전도" 간행하였고 남대문 측량인 현대측량을 시작하였다.1905년 을사늑약체결과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후 1910년~15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전역 토지조사 및 측량을 실시하여 1914년~18년 "조선전역 1/5만 지형도 722도엽"을 완성하였고 1936년 육지측량부에서 한반도 재측량을 시작하였다. 1945년 광복이후 1945년~48년 미군,서울,평양,부산,서남해안 등 항공사진 촬영 및 지도제작,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남한에서 1948년부터~1949년까지  토목국(내무부),측지과(국방부),측지과(육군공병감실),측지과(육군본부),측지감실(육군본부),측지부(공병감실)에서 지도제작업무 수행하였다. 1950년 6.25전쟁후 1958년 국방부 지리연구소 창설,1961년 내무부 국립건설연구소로 개편하였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발표 후 1962년 건설부 국립건설연구소로 이관하고 "독도 지형도" 제작,1963년 대한민국수준원점 설치.1966년 한.화협동 항공사진측량협정체결 및 "1/25000지형도" 제작착수 하였다. 1972년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 발표 후 1974년 건설부 국립지리원 창립과 "1/2만5천","1/5만 지형도" 제작을 완료하였다.1975년 "1/5천 지형도" 제작 착수,1980년 "독도 항공사진 촬영 및 지형도" 제작하였다.1988년 88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1989년 대한민국경위도 원점 설치,1990년 "1/1만 지형도" 제작 착수하였다. 1991년 남북한 유엔 가입 후 1993년 "1/5천 수치지형도" 제작을 착수하였다.1992년 우리별 1호 위성 발사 후 1994년 건설교통부 국립지리원으로 개편하고 1995년 "1/1천 수치지형도" 제작 착수,1996년 "1/2만5천 수치지형도" 제작 착수,1998년 "수치지형도" 민간공급을 시작하였다. 2002년 한일월드컵개최 후 2003년 건설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2004년 지도박물관을 개관,2007년~09년까지 "북한지도 1/2만5천 수치지형도" 제작 완료,2008년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2009년 남극지역 측량 및 "1/1천","1/5천","1/2만5천 지도"제작 착수하였다. 2010년 G-20 정상회담 개최 후 2010년 "전국 연속 수치지형도" 제작 착수,2012년 우주측지관측센터 준공하였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수립 후 2013년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온맵"제작을 완성하였다.이와같이 세계지도 유형과 서양 고지도의 흐름과 함께 우리나라 지도 발자취 들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토에 대한 인식으로 동해와 독도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들이 전시 되었다. 우리나라 동해의 명칭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시조 동명성왕 1년(서기전 59년)기사나 "광개토대왕릉비 비문"(414년)에서 동해 명칭이 호칭되었는데 1602년 "마테리오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에 세계 최초로 동해를 일본해라고 명칭한 표기가 등장하고 1802년 일본인 야마무라 사이수케가 제작한 "정정증역채람이언(1802년)"의 부도에 일본해 명칭이 등장한다. 그러나 "카츠라가와 호슈"가 만든 "북차문략"(1794년)의 부도에 있는 "아세아전도"를 보면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했고 "다카하시 가게야스"의 "일본변계약도"(1809년)와 "신정만국전도"(1810년)세계지도와 "본방서북변경수륙략도"(1850년)지도에서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하였고 그후 19세기 후반 까지도 일본 고지도에서 조선해로 표기하여 동해가 우리나라 땅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본방서북변경수륙략도"(1850년),"조선전도"(1860년),"강호대절용해내장지도"(1863년),"조선국전도"(1894년),"조선여지도"(1894년),"신찬조선여지도"(1885년)의 일본 고지도에서 독도가 우리나라 땅임을 증명하고 있다.서양의 고지도에서 프랑스의 1679년"일본제도지도",서양 최초로 그려진 한반도 전도인 1737년 "한국왕국전도"와 서양의 1750년경 "관동 또는 요동지도와 카올리 또는 한국왕국"1760년경 "일본제국도",1780년경 "세계지도"와 영국의 1750년경 "새 중국지도",1750년경 "일본 제국도" 에서 동해가 우리나라 땅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서양 최초 조선전도인 프랑스의 "조선왕국전도",1732년 "중국령 타타르의 일반지도",서양 최초로 그려진 한반도 전도인 1737년 "한국왕국전도",1751년 "중국제국도"와 영국의 1720년경 "중국제국과 섬나라 일본",1750년경 "관동 또는 요동지도와 카올리 또는 한국왕국",1794년 "일본제국도"에서 독도가 우리나라 땅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와같이 동해와 독도는 우리나라 땅임을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밝히면서 2011년 독도에 대한 지질,지구물리,기후,해양,생태계,해양생물자원,경제활동,지명,개발정책과 미래를 주제로 "독도지리지"와 "영문판 독도 지리지"를 제작하여 세계속의 독도를 알리는데 기여하고 있었다. 즉 독도가 우리나라 땅임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기록과 함께 세계속에 독도로 향하는 아이들의 교육현장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공간이였다. 편리한 정보를 활용하는 여러가지 아이들의 체험관과 함께 전 세계가 코로나부터 해방하는 지구를 그린 아이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세계각국에서 수집된 지구본 160점이 전시되 었는데 이 지구본은 과거 영국,독일,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 등 신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를 개척했던 나라들이 사용했던 것이였고 현재 우리나라 측량 및 지도제작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임을 증명하는 세계 각국과 정보 교환 및 협력사업 등의 여러 기념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관을 나오니 세계평화지도를 그린 최초 서예작가인 한한국이 국토,애국애족,남북평화통일,화합,등 우리나라 시인 중 약 40편의 시 기록을 우리나라 지도에 평화체로 쓴 "국토사랑" 작품이 1cm 대역작으로 걸려 있었다. 뼈를 깍는 고통을 감내하고 살을 잘라내는 고통을 감내하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인의 혼과 정신을 예술로 승화시켜 이루어 낸 21세기 기적의 지도인 꿈의 지도인 세계적인 지도 작품이였다. 

수준 원점 등록문화재 제247호
지도박물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1402년),동국지도(1846년) 최한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1402년)~권근,김사형,이무,이회
조선전도
김정호 "대동여지도"
조선시대~도별도

 

조선시대~도별도
조선시대~군현지도
조선시대~특수지도(1886년) "순천송광사지도" 
관방지도
일본 고지도에 표현된 우리 국토
서양 고지도에 표현된 우리 국토
지구의
대동여지도 장식
아이들 작품
한한국~"국토사랑" 서예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