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서울시 아트조선스페이스 전시관 박래현 전시회(2021년3월18일)

백재은 2022. 3. 20. 11:49

프리뮬러
개양귀비(우미인초)
수국
루핀

서울시청부근 신한은행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아트조선스페이스 전시관으로 향했다. 즐비한 빌딩들 사이로 검정색,회색,밤색계열의 벽돌의 벽체와 함께 등장식을 한 약국으로 정감어린 향수로 덕수궁으로 가는 길을 비추었다.각색들의  프리뮬러,개양귀비(우미인초)가 화사하게 나붓거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의 골목길로 가니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매혹적으로 다가 왔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1891년 설립된 한옥성당 자리에 1922년 당시 조선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의 선교계획과 영국 건축가 아서 딕슨의 설계로 착공되었다. 1926년 부분만 완공한채로 축성하여 70년 동안 사용하였다가 1996년 발견된 원 설계도에 따라 현재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곳곳에 한국 전통의 건축요소와 장식을 적용한 동양에서 손꼽히는 로마레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1978년 "서울시 유형  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기와지붕과 적벽돌벽체의 한국식 양식을 가미하여 점,선,면들의 집합체인 원형,사각형등...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맞배지붕과 아치형 장식으로 사방으로 매우 운치있는 동양적인 로마레스크 양식의 걸작을 이루며 매우 고즈녁한 골목 길을 이루었다. 장엄하고 평화로운 종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는 문화재의 보고로 카타르시스가 넘쳤다. 바로 그 길 따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옆 전통한옥 양식인 기와지붕 목재대문과 창문의 출입문을 중심으로 적벽돌벽체에 에워싼 성가수녀원인 "성공회 성가수도회"의 본원이 버티고 있었다. 성가수녀원은 1892년부터 영국인 수녀들이 병원,교육선교를 진행하였고 1925년 조선인 수녀 이비비 입회로 독립적인 한국의 수도회가 시작되었다. 수녀원에는 여학생 기숙사가 있었으며 기도생활과 함께 사목활동과 사회복지활동을 펼쳐왔다. 1990년 건축가 김원의 설계로 원래 한옥 건물이었던 것을 원내의 두건물 사이에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며 성당,피정센터의 서양식 건축과 어우러지는 모습으로 갖추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함께 성과 같은 요새로 기도의 향연이 거룩의 숨결로 타올랐다. 골목길의 매우 아름다운 성과 같은 성가수녀원과 마주 보며 "아트조선 스페이스전시관"으로 개관전 시리즈인 김기창화가의 부인 박래현(1920~1976)의 사색의 세계인 생동하다. 피어나다라는 주제 중 1부 "생동하다" 주제로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생존의 권리를 위해 수많은 장벽과 가혹한 시련 앞에 몸부림치며 이겨내고 우리강산의 아름답게 채색된 사색세계에 몰입하여 일궈낸 박래현의 초기 대작부터 대표적인 추상 연작,미공개 작품까지 전시되었다. 박래현은 김기창의 아내이자 네 아이의 어머니라는 여성의 굴레 안에서 작업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전통적 관념을 뛰어 넘고자 숫한 봄을 치열하게 견뎌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찬란하게 피어났던 고뇌와 시대를 향한 다양한 감정을 볼수 있는 그녀의 "사색세계"로 1959년 4월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제3회 현대작가 초대 미술전 출품하며 조선일보에 자신의 에세이 "봄이면 생각나는 일,삶과 마주 섰던 계절"을 기고했다.생명의 소생을 기다리는 봄은 박래현에게  8.15해방이전 수개월간 되풀이되는 혼란의 계절로 지난 몇 년간 봄을 상기하며 식민국가의 운명 속에서 마음의 어두운 흔적과 불안한 감정을 더듬어보며 고국의 봄은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 한국적이면서 현대적인 동양회화의 확장을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추상화,태피스트리, 판화를 연구하며 재료와 기법의 한계를 뛰어 넘고자 쉼 없이 연구했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전통회화의 현대화를 모색했던 초기 채색화와 드로잉을 통해 생동하는 시대의 면면을 표현한 독창적인 화풍을 추구하였다.그녀의 대표작인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1943년 "단장",대한 미협 대통령상 수상작 1956년경"이른 아침",시대와 역사 속 감정을 회화로 풀어내며 추상회화의 단초가 된 1963년"잊혀진 역사 중에서"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들은 일본 전통의상을 입은 서구적인 미모의 여인이 전통 경대에서 단장하는 1943년"단장"작품으로 여인의 모습을 부각시킨 안정된 구도의 현대화풍을 그려 내었고 1956년경"이른아침" 작품은 이른 아침 아이를 등에 업고 손을 잡으며 봇짐을 머리에 이고가는 우리나라 1950년대 고된 삶을 표현하였다. 1959년"기도" 작품은 돌부처을 중심으로 한복입은 아낙네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향토적인 향기로 표출했다. 즉 위 3작품들은 일제식민지시대와 6.25전쟁후 극심한 곤궁의 우리나라 일상을 멋과 흥이 감도는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승화시켜 동남아풍 이국적인 향기로 발한 그녀의 걸작품 같았다. 매우 아름다운 한국적인 모습을 현대화풍으로 동양회화 확장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그녀의 모습을 엿볼수 있었다. 이집트 여인들의 민속춤 같은 정취의 1960년대 초 '향연"작품은 극도로 열정적인 춤과 흥이 느껴진 동남아풍 벽화 같았다. 1959년 이전 "초하"와 함께 금붕어의 생명체가 살아 숨쉬는 생동감의 면들의 조합인 1960년 경"금붕어"작품과 부엉이 눈빛이 살아 숨쉬는 "부엉이" 작품은 구상과 추상주의 절충으로 모색해 가는 추상주의 실험적인 단계작품 같았다. 추상주의 작품들인 1963년 "작품"과 1960년대 중반 "작품",1968년 "작품21"은 우리 전통 의미를 새긴 흔적들을 엿볼수 있었다. 1960년대 초 "작품"은 실타래 같은 선과 얼룩의 면들로 추상주의 실험을 하였고  과학적인 생명의 흐름과 같은 선들의 연결인 1971년 "뿌리는 살아있다" 작품에서 추상주의 대표 걸작으로 승화된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추상주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의 어두운 역사와 아름다운 자연을 표현하고자 심혈을 기울인 것을 엿 볼수 있었다. 즉 1960년대부터 피말리는 고통을 견디며 역사의 자긍심을 갖고 우리의 얼과 강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끓임없이 구상과 추상의 실험을 고군분투 했던 그녀의 열정을 볼수 있었다. 종이에 펜 크레파스로 그린 "여행스케치"로 자연을 통해 실험을 모색하는 그녀의 열정이 느껴졌다. 이와같이 박래현의 사색의 세계 1부 "생동하다"는 식민국가와 6.25전쟁의 처절한 역사를 통해 가혹한 시련과 곤궁한 생활의 어두움을 깨고 아름답게 채색된 우리강산처럼 생동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림작품들을 감상한 후 골목길의 매우 고즈녁한 "성가수녀원"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원성당"길 따라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유리난간 옥상으로 세계와 화합하는 위상에 걸 맞는 유려한 곡선미의 유리창 장식인 서울시청과 고풍스러운 옛 시청건축이 조화를 이루며 감싸고 있어 문화산책길을 위용으로 빛내주고 있었다. 골목길을 나오니 저! 멀리 장엄한 산봉우리들의 수려한 산세를 뽐내는 인왕산 아래 청화대와 경복궁이 도로 중심을 버티고 있었다. 즉 인왕산 줄기 자락으로 청화대,경복궁 도로길 따라 서울시청으로 서울시 역사 중심거리를 이루고 있었다. 황갈색의 드넓은 잔디광장의 우뚝솟은 소나무에 드리우며 보석처럼 빛나는 유리물결의 "서울시청"으로 화강석의 구양식과 조화를 이루며  광화문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길이 길이 역사에 간직할 만한 건축 보고의 문화재 건축 같았다. 봄의 화사로운 물결을 이룬 수국,루핀,개양귀비들로 장식한 화단의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환구단 같은 삼문이 마주 보고 있어 호기심에 도로를 건너 황궁우의 정문인 삼문을 향해 올라가니 조선호텔옆 "환구단"이였다. 중국풍의 건축과 제사모형과 같은 사진속 1907년 환구단은 사라진채 일제 잔혹한 역사의 그림자로 드리우고 있었다.1897년 고종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인 황단,원구단,원단인 청나라 영향으로 장식된 "환구단"은 "사적 제157호"로 이 자리에는 조선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이 있었는데 고종이 1897년 황제에 즉위하며 제국의 예법에 맞춰 환구단을 건설하였다.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로서 당시 고종 황제가 머물던 덕수궁과 마주 보는 자리에 지어졌다. 당시 왕실 최고의 도편수였던 심의석(1854~1924)의 설계로 환구단을 제사를 지내는 3층의 "원형 제단"과 하늘신의 위페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 "황궁우",돌로 만든 "북"과 "문"등으로 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조선총독부가 황궁우,돌로 만든 북,삼문,협문등을 제외한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환구단에서 3층 팔각 "황궁우"로 연결되는 석조 "삼문"으로 계단에 황제 전위를 상징하는 쌍룡과 법,정의를 뜻하는 해치 설치로 하늘이 내린 황제의 위용으로 빛났다. 황제를 상징하는 용문이 문의 천정에 새기고 삼문의 지붕을 낮게하여 황궁우를 향해 겸손을 표명하였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제를 지낸 환구단의 역사적 실체인 난간석 석물 유적이 남겨져 있었는데 천지에 고유제를 지낸 후 1897년 황제로 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을 구성했던 3개 층의 원형 난간석 중 한 부분이였다. 이 석재는 1913년~1914년  조선 경성철도호텔을 지으면서 환구단을 헐어서 남게 된 석물이였다. 석고는 1902년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 기념하여 세운 조형물이였다. 3개의 돌북은 하늘에 제사 드릴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조각으로 이 용무늬는 조선조 말기의 조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로 당시의 최고의 조각 중 하나였다. 전통문양의 협문에 둘러싸인 팔각 3층 "황궁우"를 대표하는 "환구단"이 조선호텔과 마주 보며 대한제국이 자주 국가임을 하늘에게 비는 고종황제의 피끓는 염원이 담겨진 불꽃으로 활활 타올랐다. 이와같이 서울시 광화문은 조선후기 대한제국의 덕수궁과 환구단 역사의 발자취 따라 세계속의 경제대국으로 거듭난 부강한 민주주의 국가로 세계로 화합하는 서울시청의 대한민국의 저력으로 빛났다.세계에 뒤지지 않는 명석한 두뇌의 유전자와 부지런한 근면성,인내로 200년이 걸린 산업혁명을 불과 몇십년만에 일궈낸 승리 쾌거로 대한민국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매우 자랑스러운 길이였다.  조국의 해방도 보지 못한 채 일제에 한을 토해내며 흙으로 돌아간 고종황제의 삶을 되새기고 만약 고종이 살아서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을 봤으면 얼마나 감격했을까?...상상하며 덕수궁 돌담길의 향기따라 걷고 싶은 정동길을 뒤로 하고 수원으로 가기위해 버스를 탔다. 버스 창가로 문화재 건축같은 20세기초 근대적인 서양양식인 서울역,대리석 원형기둥의 질서 정연한 창문양식인 서소문로 건축의 옛 고전양식과 함께 쌍둥이 빌딩의 우체국,화사한 색채들의 만화같은 그림 벽화로 장식한 상가들의 서울의 중심으로 매우 활기찼다.

약국
대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서울시 유형 문화재 제35호"
성공회 성가수도회
1943년 단장
1956년경 이른 아침
1959년 기도
1960년대 초 향연
1959년 이전 초하
1960년 경 금붕어
? 부엉이
1960년대 초 작품
1960년 정물C
1960년대 중반 작품
1960년대 중반 작품
1960년대 후반 작품
1961년 생
1962년 불안
1962년 해벽
1963년경 작품
1963년 잊혀진 역사 중에서
1964년 이전 작품
1965년 작품4
1965년 작품7
1968년 작품21
1968년 작품5
1971년 뿌리는 살아있다
1968년 작품5
아트조선스페이스, 박래현 사색의세계~1960년대 여행스케치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서울시청
황궁우
협문
삼문
환구단 "사적 제157호"~석고
서울역
서소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