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열린문화공간 후소(2022년3월22일)

백재은 2022. 3. 29. 10:12

열린문화공간 후소

팔달산 기슭아래 운치있는 1970년대 양식의 열린문화공간 후소에서  자비대령화원인 이인문(1745~1824이후)과 김득신(1754~1822이후) 옛 그림 전시회가 열렸다.정조는 도화서 화원 중 우수한 화원을 선발하여 규장각에서 자비대령화원제를 시행하였다. 우수한 화원은 정기적인 시험 녹취재를 통해 선발하였으며 이들의 업무는 주로 규장각에서 관장한 일로 어제 인찰과 규장각 간행도서의 인찰,도설작업,판화작업,세화,진상들로 도화서 화원과 함께 어진도사와 도감사역에 참여 하였다. 특히 정조시대는 판화 작업에 많이 참여하였고 규장각에서 어진의 제작과 봉안을 진행하면서 어진 제작이 자비대령화원의 기본적인 업무가 되었다. 이처럼 정조는 자비대령화원을 통해 많은 업적들을 시각화하였고 문예부흥을 실현하였다.이인문(1745~1824이후)과 김득신(1754~1822이후)은 정조시대 자비대령화원으로 궁중기록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1795년(정조19)을묘년 정조의 수원행차를 위해 정리소가 조직되었고 자비대령화원은 정조의 수원행차를 "화성행행도"와 "원행을묘정리의궤도"로 제작 하였다. 이인문과 김득신은 수원행차에 참여하여 8일간 주요 행사를 수원화성의 건축물,산수,인물들과 함께 그렸다. "화성행행도"는 수원화성의 실경으로 표현되었으며 행사에 참여한 인물들은 표정과 행동까지도 세밀하게 그려졌다.이인문과 김득신 등 자비대령화원은 궁중기록화에 실경산수화풍,풍속화풍등 자신들의 화풍을 표현하였으며 이전의 궁중기록화와는 다른 구도,색채,인물표현등이 나타났다. 이처럼 정조시대는 이인문과 김득신등 자비대령화원의 회화 기량을 발전시키면서 다양한 궁중기록화가 등장하였고 조선후기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1745~1824이후)은 1745년(영조21)생으로 김홍도와 같은 해 태어났다. 정조시대를 대표하는 화원으로서 자비대령화원 녹취재에 합격하여 여러 궁중회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녹취재에서 영모화를 그려 2등을 할 정도로 산수,영모,화훼등 모든 그림들에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주부와 첨사벼슬을 했으며 정3품 통정대부 품계를 받았는데 노년이 되어서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특히 이인문은 "고송유수관도인"이라는 그의 호처럼 소나무와 시원한 물줄기를 주제로 그렸으며 유교적 이상향을 묘사한 산수인물화 등 정형산수를 즐겨 그렸다. 대표 그림으로는 조선 최대 걸작의 하나로 일컬어 지는 "강상무진도"가 있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매우 긴 횡권(가로로 긴 두루마리 그림)으로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려졌다. "강산무진"을 주제로 끝없이 펼쳐지는 대자연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이상적인 풍경의 산수화이다. 그림의 준법은 산수화에서 도끼로 찍은 듯한 자국을 남겨 표현하는 부벽준,쌀알 모양의 점을 여러 개 찍어서 그리는 미점준,나무의 줄기를 그려 나가는 방법인 수지법등 다양한 준법이 횡권 전체를 통하여  펼쳐져 있다.그리고 소나무와 유수를 많이 그렸던 이인문답게 화폭에는 수백 그루의 소나무와 넓은 강이 그려져 있다.그림의 구성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며 처음부터 끝까지 구성전체를 통관하는 유기적인 흐름을 갖고 있다. 구성은 그림의 뼈대가 되는 것으로 화가의 마음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강산무진도"는 주제의 진행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림으로 감상행위에 있어 시간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가장 음악적인 회화형식이라 할수 있다. 횡권이 펼쳐져 가면서 나타나는 주요 경물의 높낮이 변화는 작가의 감정을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오른쪽 상단에서 왼쪽 하단으로 경물(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경치) 윤곽의 흐름은 나무와 언덕,강 등 경물의 진행에 따라 낮아지는 것으로 하강선이 되고 오른쪽 하단에서 왼쪽 상단으로 올라가는 흐름은 경물의 진행에 따라 점차 높아지는 것으로 상승선이 된다. 상승과 하강곡선은 그림에서 처음부터 시작되어 강,도르래,폭포,태극,배세의 주제 부분에 적절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그림에서 고송과 언덕이 있는 상승선 부분을 따라가면 강건너 원경의 흐릿한 부분으로 접어드는데 그곳은 울림을 갖고 하강선으로 접어든다. 이러한 그림의 상승선과 하강선 구성은 한편의 영화와 같다. 한 그루의 소나무와 작은 바위가 모여 산을 형성하고 한줄기 강물이 모여 큰강을 형성하는 자연의 조화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에 담겨있다. 즉  "강산무진도"는 끝없이 펼쳐지는 위대한 자연 즉 국토와 그 안에서 다양한 삶을 영위하는 평화로운 인간 곧 백성이 있다.  특별히 횡권의 모두에는 고송,그리고 말미에는 유수(두드러지는 물중)를 삽입하여 다루었다. 강산무진도의 양식상 큰 특징은 천변만화하는 산수의 형태와 이를 뒷받참하는 다양한 준법에 있다. 한 점의 횡권속에서 작품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모든 방식의 화법을 다양하고도 섬세하게 구사하고 있는 점에서 조선시대 회화사상 극히 유례가 드문 작품이다. 강산무진도는 18세기말~19세기 초 휘황한 문화의 힘이 빛을 발하고 있던 시기에 노년의 궁중화원에 의해 제작된 대작으로 서 조선왕조의 성리학 사상이 장대한 횡권의 전개속에 펼쳐진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인문 자신의 인생 황혼기에 처한 시점에서 평생의 신조로 간직해 온 세계관과 회화적 기량이 작품속에 총제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강산무진도중 여섯 주제 여행,강,도르래,폭포,태극,배세로 전시되었다."여행"의 주제는 두 여행자가 강과 산이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 속으로 여행을 떠난것으로 그림의 전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하였다. "강"의 주제는 자연속의 도시의 모습으로 넓은 강을 통해 수없이 많은 배가 항구로 들어오며 물자가 운송되고 사람들이 교류하며 도시로 형성된 모습을 그렸다. "도르래"의 주제는 마주 보고 솟아오른 두 절벽 그 사이로 설정된 탁 트인 공간 속 도르래가 있는데 도르래 아래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폭포"의 주제는 화면 전체 가득 채운 절벽인 괴석은 자연의 장엄함을 보여주며 절벽 사이로 쏟아지는 폭포는 경이로움을 자아냈다. 폭포 사이로 지나가는 여행자는 대자연의 위대함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태극"의 주제는 산의 큰 봉우리는 태극 모양을 이루고 절벽을 마주 본 구조로 시각적 운동감을 자아내면서 산의 에너지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람들이 태극 형태의 산을 뚫고 올라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배세"의 주제는 태극의 주제에 비하여 작지만 함축된 운동감을 시사하면서 산등성의 휘어진 운동 방향을 따라 속도감 위주로 묘사 되었다. 산은 휘어져 도시를 형성하고 사람들은 산과 강에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대자연에 동화되고 백성과 자연이 합일을 이루며 살아가는 경이로운 모습들이 실제적으로 펼쳐지듯 감상자가 여행자가 되는 기분이였다. 하늘이 내린 자연의 선물과 인간의 신성한 노동의 창조적인 걸작품으로 산수화의 이인문(1745~1824이후)의 작가를 영원히 뇌리에 새길수 있도록 조선시대 산수화중 매우 경이로운 신세계 그림으로 환상적으로 압도 된 작품이였다. 이인문(1745~1824이후)의

그밖의 작품으로 1820년 "누각아집도",19세기 초 "송계한담도 선면",19세기 초 "송계한담도"가 전시되었다. 1820년 "누각아집도"는 시인묵객들이 경치 좋은 곳에 모여 풍류를 즐겼는데 4명의 인물들이 숲속 누각 안에서 모임을 갖고 있는 장면을 그린것으로 신비로운 바위 절벽들의 표현이 특색을 이루며 바위 절벽으로 폭포수가 흐르는 깊은 산속의 청량감으로 압도 되었다. 19세기 초 "송계한담도 선면"은 계곡물이 흐르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서 세 벗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선면(부채)에 그린것으로 폭포수처럼 흐르는 계곡과 울창한 소나무들의 율동감 있는 붓의 터치로 피톤치드 향기가 화면에 가득 퍼졌다. 19세기 초 "송계한담도"는 이인문의 노년작으로 자연 속 석벽 앞 평평한 냇가에 세 벗이 모여 한가롭게  여담을 즐기는 장면을 그린것으로 그림은 우측 상단에서 좌측 하단으로 흐르는 대각선 구도로 그려졌다. 즉 이인문그림의 특징은 율동감 있는 선들로 경이로운 자연의 신비로움에 매료되고 속세를 떠나 자연과 풍류를 즐기는 흥의 정취로 가득했다. 그리고 긍재 김득신(1754~1822이후)은 1754년(영조30년)에 태어났으며 4대에 걸쳐 20명의 화원을 배출한 바 있는 화원집안 출신으로 첨사를 지냈다. 김홍도,신유복등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풍속화로 불린다. 그는 풍속화가로 유명하지만 도석인물,산수,영모,등 다양한 장르의 그림을 잘 그렸다. 김득신의 회화는 백부인 김응환,문인화가 조영석,궁중화원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다. 후기로 갈수록 산수,풍속,영모화는 김홍도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긍재풍속도첩","백악산도"에서 보이는 인물과 경물의 묘사,산수화풍,구도 등은 김홍도의 화풍을 영향을 받아 두 화가 사이의 회화적 교류를 보여 주고 있다. 정조시대 화가들의 영향속에서 자신만의 회화적 기량과 화풍을 발전시켜 자비대령화원으로 서 최고 궁중기록화를 남겼다.그의 작품으로 18세기 말~19세기 초 "추계유금도" 2작품과 "야장단련","취선도","백악산도","금계도"가 전시되었다.18세기 말~19세기 초 "추계유금도"는 붉은 나뭇잎으로 물든 가을 바위에 수컷 꿩과 암컷 꿩이 정답게 앉자있고 폭포수 옆에는 토끼 두 마리로 동물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신비한 바위와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의 표현이 특징을 이루며 정다운 동물들의 모습으로 약동치는 천연계의 질서를 보여 주고 있었다. 2폭의 "추계유금도"중 새그림으로 하늘에서 새가 무리 지어 날아가고 나무에는 새들이 모여 지저귀며 강에는 가마우지와 오리가 먹이를 찾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산수와 새가 어우러진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야장단련"은 긍재풍속도첩 중 한 장면으로 조선시대 대장간의 근로 장면으로 대장간에서 노동하는 장면들의 하나 하나가 생동감으로 육체노동의 신성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취선도"는 소나무 아래 세 명의 신선이 술을 마시고 그 옆에는 시중드는 아이를 함께 그린 작품이였다. 노송에 기댄 신선은 전설적인 농사의 창시자인 적송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백악산도"는 서울 경복궁 북쪽에 위치한 백악산의 모습과 능선으로 이어지는 삼각산을 그린 작품이였다. 백악산의 흙과 나무를 먹을 찍어 표현한 미점 산수화로 간결하고 명료한 산의 형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금계도"는 김득신의 작품 중 매우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인상적인 작품으로 금계 한 쌍이 바위에 앉아있고 그 아래 피어난 도라지꽃을 그린 작품이였다. 청초한 도라지꽃의 향기와 함께 머리와 허리에 황금색 털이 있는 화려한 꿩의 종류인 금계의 섬세한 표현으로 가정의 부귀와 안녕을 주는 듯한 매우 고풍스러운 민화 같았다. 즉 김득신 은 영모화에 뛰어난 화가로 자연과 동화하며 살아가는 생동감있는 동물들의 표현으로 약동치는 천연계의 질서를 표현했다. 그리고 정조의 수원행차에 참여하여 8일간 주요 행사를 그린 자비대령화원들의 작품인 "환어행렬도"와  "서장대야조도"가 전시 되었다. "환어행렬도"는 수원에서 행사가 끝난 후 한양으로 돌아가다 하루 쉬어 가기 위해 시흥행궁으로 들어가는 행렬을 그린 장면이었다. 6천명의 인원과 1천4백여 필의 말이 동원되었던 장관을  갈지구도로 배치하여 장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서장대야조도"는 1795년 정조의 8일간 수원행차를 그린 "화성행행도" 중 하나이다. 서장대에 정조를 상징하는 어좌가 그려져 있고 주변에는 대신들과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수원화성인 팔달산 서장대에서 야간 군사 훈련하는 모습으로 수원 전경을 한눈에 볼수 있는 그림이었다. 위대한 제2신도시인 수원화성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즉 정조때 평화로운 정치 경제의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운 조선후기의 위대한 저력을 볼수있는 매우 감동적인 작품들이였다.

1820년 누각아집도
19세기 초 송계한담도 선면
19세기 초 송계한담도
강산무진도 중 여행의 주제
강산무진도 중 강의 주제
강산무진도 중 도르래의 주제
강산무진도 중 폭포의 주제
강산무진도 중 태극의 주제
이인문(1745~1824이후)~강산무진도 중 배세의 주제
18세기 말~19세기 초 추계유금도
18세기 말~19세기 초 추계유금도
18세기 말~19세기 초 야장단련
18세기 말~19세기 초 취선도
18세기 말~19세기 초 금계도
김득신(1754~1822이후)~18세기 말~19세기 초 백악산도
19세기 초 환어행렬도
자비대령화원~19세기 초 서장대야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