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기도 용인시 은이성지(2022년6월12일)

백재은 2022. 6. 14. 12:17

 

은이성지

초행길의 두려움과 설래임으로 경기도 용인시 은이성지로 향했다. 용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남곡리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와우정사로 가는 길과는 다른 용인시 시내중심과 연결하는 넓은 도로길을 이루며 전원의 시골경치가  펼쳐졌다. 남곡리에 내리니 은이성지로 가는 길을 잘 몰라 같은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청년에게 물어 보니 자기도 은이성지로 간다고 하는 것이였다. 은이성지에서 내리는  84-1번 버스가 곧 도착하니 그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고 하여 버스를 기다렸다. 곧 이어 버스가 도착했지만 84번 버스로 타지 않았는데 달려가는 버스 뒤에는 84-1번으로 표기되며 오른쪽으로 돌려 가는 것이였다.그것을 보며 은이성지로 가는 길 일음을 확신하고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청년을 앞으로 대동하고 뒤따라 갔다. 공장과 전원주택이 잘 정비된 시골길로 김대건길 안내판이 붙어있어  길을 찾아가기 쉬었다. 수생식물들이 쏟구치는 은이천을 따라 20분정도 가다 보니 은이성지였다. 그레고리안성가부터 클래식 음악이 잔잔히 퍼지는 은이성지 동산으로 우리 어머니가 생전에 성당에서 전자오르간  반주했던 선율처럼 천국의 합창 같았다."김가항성당"과 "김대건신부기념관"을 마주보는 정원에서 집에서 사온 고구마와 안식일날 교회에서 받은 팥떡으로 점심을 먹었다.벌레와 개미들이 몰려드는 풀향기와 시원한 바람으로 "은이성지"를 바라보니 지상낙원 같았다.은이산에 둘러싸인 맞배지붕의 흰벽체와 아치형 창문양식인 "김가항성당"이 중앙 테라스를 중심으로 대칭양식을 이루며 거룩한 천사의 날개로 빛났다.성당 출입문으로 들어가는 잔디에 박석돌로 거룩한 예배당의 길 같았다.아치형 장식의 테라스로 저! 멀리 기도의 숲과 푸르름을 발산하는 동산마당이 비추며  하나님 사랑의 빛 광채로 번뜩거렸다. 성당내부는 목재처마와 목재기둥양식으로 한옥의 정감을 이루고 목재창가로 싱그러운 정원과 "김대건기념관"이 비추며 역사의 빛으로 발현된 정겨움으로 가득찼다.은이산 아래 "김가항성당"은 동산 중앙에 거대한 초목이 드리운 "ㄷ자형" 한옥기와집 양식인 "김대건기념관"과 한쌍을 이루며 김대건동상,정원과 매우 조화로운 거룩의 빛으로 역사에 길이 빛낼만한 성지로 빛났다."김대건기념관"은 한옥기와의 목재처마의 고풍스러운 내부로 조선의 첫사제의 숨결로 빛났다.기념관은 라틴어 성경책을 비롯해 거룩한 미사에 사용되는 제복,성스러운 도구등...이 전시되었다. 전시품중 거룩의 향기를 뿜어낸 라틴어성경책과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라"는 김대건의 신앙 슬로건과 1846년4월13일 김대건의 부활대축일 미사 마지막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을 알았는지 위급한 처지에 있다면서 마귀손길에도 증거할 힘을 주시고 다시 보지 못해도 천국에서 만나자며 어머니를 돌보아 달라는 부탁의 말씀으로 그는 몸소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던 사제였다.1836년부터 1846년까지 조선과 파리,중국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선교 횡로 개척으로 고난의 십자가 길을 행진했다.핍박가운데 목숨을 바쳐 선교하는 신앙을 실천하며  십자가 사랑의 승리를 이루어 낸 우리나라 최초 사제였다.앞으로 우리도 다가올 마지막 환란시대 목숨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을까? ...되새기는 시간이였다.은이성지 맞은 편은 천주교 수원교구 유지재단 소유인 산언덕에  예수성심상,성모상을 중심으로 십자가의 14처로 이룬 기도숲으로 예수님 십자가의 고통과 수난 진리를 묵상하는 십자가길 이었다.은이성지를 바라보는 예수성심상으로 하나님 은혜의 손길  같았다. 엉겅퀴가 청초한 빛을 뿜어내는 잔디중앙의 야외대제로 초목들이 드리우며 매우 싱그러웠다.은이산이 비추는 기도숲길 따라 십자가와 기도처로 말씀의 깊이를 한층 더 깨우칠수 있는 천연계의 안식처였다.기도숲을 지나 청년 김대건길이 조성 되었다. 칠봉산에 둘러싸인 골배마실 성지와 산덕고개,망덕고개,애덕고개,미리내 성지까지길로 이고개는 김대건신부가 생전에 넘나 들어 사목활동했던 행로이자 순교 후에도 그 유해가 옮겨진 경로였다.은이성지 주변 마을로 청년 김대건길의 산이 드리우며 피톤치드 샘물이 넘쳐 흘렀다.주황색 기와의 맞배지붕과 함께 흰벽체를 이룬 양옥으로 텃밭을 이루며 시골향기로 가득했고 적색과 흰색의 벽돌담장을 이룬 "양지파인빌"로 전원마을의 안식처를 이루었다.장미꽃이 미소짓는 길 따라 바위정원과 적벽돌 계단을 이룬 미색벽체의 "euniro211카페"의 진노랑색 인테리어로 따쓰한 온기로 가득했다.은이성지와 주변마을을 산책한 후 수원으로 가기위한 버스정보를 알아 보기 위해 기도숲 아래 관광안내소가 있어 들어갔다. 안내원이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와  버스 시간표를 알려주고 챙겨주었다. 버스 올 시간이 아직 멀어 은이성지 동산을 산책했다. 그런도중 예정된 시간이 아닌 버스가 왔다가 가는 것이였다. 그래서 다시 안내원에게 가서 물어 보니 은이성지 앞에 서있는 수녀님께 같이 동행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였다. 수녀님은 교우가 자가용으로 이곳까지 오기로 했다면서 같이 가자고 하였다.시간이 되자 버스가 예정대로 도착하여 버스에 올랐다. 버스 창가로 안내원과 수녀님께 서로 감사의 손을 흔들었다. 몸소 행동으로 타인을 섬기는 손길을 경험했던 시간으로 매우 감동했다. 

 

(1)은이성지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성소 요람지이다. 한국최초 사제이며 순교자인 김대건(1821년~1846년) 안드레아 신부가 1836년 모방신부에게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첫번째로 사제 성소의 열매를 맺은 자리이다.1845년 조선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활동은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곳에서 순교전 공식적인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였다.즉 은이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성장(산 너머 골배마실),세례성사,신학생선발,사제서품후 사목활동의 직접적인 장소로서 한국 천주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1837년 샤스팅 신부를 맞아 함께 새공소를 세우고 조선어로 성사를 주는 등 교우에게 필요한 지침들을 만들었다. 1837년 말 앵베르 주교가 입국하자 한국교회의 교세 확장을 위해 한국교회 조직화에 함께 힘섰다.1839년 기해박해때 앵베르트 주교와 샤스탕 신부가 군문효수형이 인도되어 9월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페레옹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이 되었고 1845년 김대건 신부 안내를 받아 조선에 입국하였다.박해 이후 페허가 된 조선교회 일으키기기 위해 주력하였지만 신자수가 8년뒤 두배가 되었지만 1846년 9월16일 병오박해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김대건 신부를 잃는 아픔을 겪으며 거듭된 박해와 과중한 업무 때문에 점차 건강이 쇠약해져 1853년2월3일 병으로 선종하였다.그의 유해는 안성 미리내성지에 김대건 성인 묘소옆에 묻혔다.은이는 숨겨진 동네,숨어 있는 마을을 의미하는 데 이곳에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던 천주교 신자들의 은신처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 되었다.이후 은이는 지역 신앙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유서 깊은 신앙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2)은이성지 안에 김가항 성당은 중국 상해 명말 서광계등 지식층에 의해 천주교 수용하여 숭정년간(1628년~164년4)에 김씨  성을 가진 교우들이 횡포강을 건너 중국 상해의 김가항에 동남지역 첫 성당인 작은 성당을 민가 건축을 개조해 세웠다. 한국의 최초 사제인 김대건신부가 1845년8월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서품을 받은 상태의 성당을 복원한 건출물이다.은이성지 일대는 1890년대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다. 소년 김대건 일가도 골배마실터를 잡고 살면서 신앙활동을 하였고 김대건은 선교를 위해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났고 신학과정을 마친 후 부제품을 받았다.이후 1845년8월 김가항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 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조선인 최초 사제로서 이곳 은이공소에 도착한 1845년11월부터 선교사 입국로 개척을 위해 다시 떠난 1846년5월까지 은이를 중심으로 서울과 용인일대 사목활동을 하였다.1841년에는 남경교구의 중심이었으나 2000년7월 상해정부 포동 개발정책에 따라 철거계획 통토 받아 2001년 상해 정부의 도시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되어 수원교구는 철거직전 성당에 대한 실측을 실시하고 기둥과 대들보등 일부 부재를 가져와 2016년9월24일 이곳에 성당복원 및 김대건신부 기념관 축성 봉헌을 하였다.김가항성당은 한국 최초의 사제이며 순교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았던 중국 상해의 김가항 성당을 건축한 것이였다.

(3)김가항 성당과 나란히 "ㄷ자형" 한옥 기와집양식을 이룬  김대건기념관으로 김대건신부는 1821년 충청도에서 출생,증조부 김운조가 1784년 입교한 이후 대대로 천주교 신앙을 이어가며 여러 명 순교자를 배출한 가문이였다.증김대건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드릴 당시 솔뫼에 터를 잡았던 김대건 이라는 증조부가 1814년 순교하고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해 서울 청파로 이주하였다가 용인의 한덕동으로 이주 얼마 후 골배마실(양지면 남곡리)에 정착하면서 은이공소와 인연을 맺었다.모방신부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1836년4월 은이공소에서 모방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간택되었다.12월 모방신부는 최양업,최방제와 함께 김대건을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 대표부 신학교에 유학을 보냈다.1836년 12월2일 모방신부가 바라보는 가운데 김대건,최양업,최방제는 순명과 복종서약을 하고  변문으로 출발하였다.1836년12월3일 김대건 일행은 마카오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출발 만주,요동,중국을 도보로 횡단하여 1837년6월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서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시작하였다. 초대 교장 칼레리 신부에게 신학과 라틴어를 배우고 전교회 책임자 신부들 배려로 그곳에서 중등과정 교육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과정을 이수하였다. 1842년 12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 입국로를 탐색하기 위해 프랑스 함대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였다. 1842년 의주 변문을 통해 조선입국 시도하고 1843년1월6일 다시 압록강을 건너 책문을 통해 백가점에 도착하였다. 1843년3월 책문으로 조선교회 밀사와 접촉한 뒤 백가점으로 귀환하였고 1843년9월 책문으로 나가 조선교회 밀사와 접촉한 뒤 소팔가자로 귀환하였다.1844년2월5일 페레올 신부 지시로 동북방 입국로인 훈춘에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원으로 들어오는 길의 이용 가능성을 살피고 1844년3월8일 훈춘을 거쳐 조선입국을 시도하였고 1844년12월10일 페레올 주교로 부터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고 단신으로 의주 변문을 통해 육로로 조선에 밀입국하였다.1845년1월1일 봉황성 책문을 통해 조선으로 귀국,1845년3~4월현석문등의 도움으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김대건 부제는 제3대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상해에 있는 선교사 영입을 위해 작은 배한척 준비하고 1845년4월30일 상해에 있는 선교사 영입을 위해 11명 조선인 교우들과 함께 배를 타고 제물포를 출발하여 1845년6월4일 상해에 도착하였다.이후 페레올 주교 결정에 따라 김대건 부제는 1845년8월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진하에 사제서품을 받음으로써 한국최초 사제가 되었다.1845년8월3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배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1845년9월28일 제주도에 표착하고 1845년10월12일 충남 강경 황산에 상륙하여1845년 11월~12월까지 서울과 용인 은이공소 사목 시작하였다.1846년4월13일 페레올 주교 지시대로 서해 통한 선교사 입국로 개척하기 위해 은이공소에서 마지막 미사 봉헌후 서울로 출발하여 1846년5월4일 교우들과 마포를 출발하여 1846년5월29일 백령도에서 중국어선과 접촉하였고1846년 6월5일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1846년6월21일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되었고1846년9월15일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아 1846년9월16일 새로남터에서 군문효수령으로 순교하였다. 사후 1925년7월25일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1949년 11월15일 로마 교황청에서 김대건신부 축일로 제정하였다.1984년5월6일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에서 시성되었다.

 

김가항성당)

 

 

김가항성당
김가항성당과 김대건기념관
김대건기념관
김대건동상
세레터조형물
성모동산
은이성지

김대건기념관)

주교요지
김대건 신부의 친필서한
사제각모
김대건 신부의 유해
성합(치보리움,1930년대)
기해일기
성광
성체현시용 촛대
제병 굽는 기구(1830년대)
제의(1930년대)
감실보(1930년대)
김대건기념관

기도의 숲)

엉겅퀴

은이성지 주변 마을)

은이성지 동네
양지파인빌
euniro211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