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8일~경복궁 돌담길 따라 국립현대미술관이 적벽돌벽체의 돌출된 벽으로 둥그런 양식과 회색띠를 두른 검은색창틀 창문으로 매우 귀중한 문화재 보고로 빛났다. 유리창 장식을 이룬 미술관 내부로 단풍에 에워싼 누각이 비추고 복도 통창으로 "ㄷ자형" 건축을 중심으로 광장이 펼쳐져 운치있었다.전시실1에서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으로 이건희 회장이 2021년4월 1488점 기증한것 중 이중섭 작품 80점과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는 10점을 모아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이중섭은(1916년~1956년)은 정직한 화공으로 일제시대 소를 그린 민중화가로 1940년대인 일본유학시기로 원산에 머무를 당시 연필화,엽서화와 1950년대인 제주도,통영,서울,대구에서 그린 전성기작품인 은지화,편지화등..으로 1940년대와 1950년대 나누어 소개하고 있었다.이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원산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하였고 1925년 더 스튜디오 같은 유명 미술서적 접하고 큰 자극 받았다. 1930년 15세때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 미술부에 가입하였고 1931년 미국 예일대에서 공부한 임용련 선생의 부임으로 임용련선생님께 미술교육을 받았다.1932년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동아일보사주최 중등부 "촌가"가 입선하였고 1933년 제4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동아일보사주최 중등부 "풍경"과 "원산시가" 입선하였고 1935년 제6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동아일보사주최 "내호"가 입선하였다.1936년 일본 도쿄 교외의 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 입학하였고 1937년 일본도쿄 문화학원에 입학하였다.1938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 일본미술협회 "소묘A","소묘B","소묘C","작품1","작품2"의 5점이 입선하였고 1939년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와 운명적 만남을 이루었다.1940년 제4회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 일본미술협회 "서있는 소","누워있는 여자", "소의 머리","작품1","작품2",5점이 입선하였다. 1940년10월 기원2600년 기념 미술창작가협회경성전 부인관에서 "소의머리","서있는 소","망월","산풍경" 4점을 출품하였고 1941년 "소묘"를 발표하였다. 1943년 태평양전쟁으로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귀국해 원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1943년 "망원"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는 1936년 일본 도쿄 교외의 제국 미술학교 입학하고 1941년 도쿄문화학원으로 옮겨 수학했던 시기로 1950년 월남하면서 대다수 작품들이 원산에 두고 온것으로 전해진다.도쿄문화학원에서 만난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37점,소,여인,소년을 그린 연필화 4점이 전시되었다.엽서화는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1940년부터 1943년까지 다수의 그림엽서를 보낸것으로 1979년에 열린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그녀가 소장한 엽서화가 처음으로 공개된 작품들이였다.엽서화는 천연계와 동화되는 인간의 모습을 안정된 구도로 대상의 핵심을 매우 간략하게 표현하여 율동감과 생동감 넘친 초현실주의와 추상파,야수파 경향을 이루고 있었다.자연과 동화하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희락과 화평을 지상낙원으로 표출하고 있었고 젊은 이중섭의 희망찬 꿈과 부요한 마음을 고스란이 담고 있었다. 감동으로 다가왔던 작품들은 황토색 종이에 연필로 그린 "소와여인","여인","세사람","소년" 작품으로 우리민족의 향토적인 정겨운 그림으로 민족정서가 매우 짙게 흐르고 있었다.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를 모델로 한 "여인"은 폴 고개의 타히티 시절을 연상케 하고 "소와 여인"은 인격화한 소와 여인의 사랑을 초현실적으로 풀어낸 서구 미술 영향을 보여 주었다. "세사람"은 일제 강점기 말미의 암울한 현실을 반영한 리얼리즘 시각을 담고 있었다.1950년대는 6.25전쟁이 일어나 가족을 데리고 남하하여 부산,제주도에서 피란생활 중 생활고와 장인의 죽음으로 1952년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와 두아들을 일본으로 떠나 보냈다.이후 1956년 사망까지 통영,대구,서울등지로 옮겨 작업을 지속하였는데 특히 공예가 유강열 초청을 받아 옮겨간 통영에서 1953년 11월부터 6월까지 머물며 소연작들 대표작을 제작하였다. 1955년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이중섭 작품전은 매일 작품을 그린 열성적 화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리워 하는 가족을 만나지 못해 영양실조와 간경화등으로 결국 무연고자로 사망하였다.가족,아이들,새와 닭,소를 그린 주요 회화작품들과 은지화,편지화,출판미술등 나누어 소개하고 있었다. 그의 회화 소재인 가족은 1950년12월 피란생활 중 어머니와 이별하고 1952년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와 두아들 일본으로 떠나 보낸 후 그의 작품에서 가족이 자주 등장하였다.이별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은 네사람이 손잡고 춤을 추는 모습등...온 가족이 한데 모여있는 모습을 통해 매우 아름답게 표현하였다.배를 타고 가족을 만나러 가는 자신,원산에 두고 온 어머니 등을 그리며 가족과 재회하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감동으로 다가왔던 작품들인 "부부"는 우주같은 사랑을 표출한 바탕색과 함께 한쌍의 원왕 같은 학같은 형상으로 매우 고귀하고 매혹적인 향기로 가득했다. 바탕 화면 색감처리와 서로 마주보는 한쌍의 모습이 지금까지 감상했던 부부에 관한 작품중 제일 감동적이 작품이였다."손과 새들"은 새들도 한 가족으로 표현한 추상적인 작품으로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사랑스러운 가족들을 미래 재회하겠다는 투철한 의지의 소망을 담고 있었고 "꽃과 손"은 천사같은 아내를 가슴 사무치듯 그리워 하며 아내와 미래의 약속을 담고 있었다. "가족","현해탄" "가족과 첫눈","춤추는 가족","다섯명의 아이들","다섯아이와 끈","아버지와 아들"은 전쟁후 제주도에서 매우 궁핍하게 가난했던 피난민 생활을 회상하며 다시 재회 한다는 소망을 잃지 않는 가족에 대한 끈끈한 사랑을 서로 몸을 부대끼고 끈을 이어가며 표현하고 있었다.그 당시 가난과 한.일관계로 인한 가족과 이별,잠시 재회의 피맺힌 한과 몸부림 치는 절규로 울부짖는 야수파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눈씨울이 뜨거울 정도로 그리운 가족애가 하늘에 사무쳤다.그의 회화 소재인 아이들은 1946년 원산의 한 고아원 미술교사 일 잠시 했을때 아이를 그리기 시작하여 그리고 같은 해 첫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디프테리아로 사망이후이다.아이들은 서로 몸을 맞대고 있거나 끈을 통해 이어져 있는것이 특징이고 아이들 사이 게와 물고기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1951년 제주도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던 시절을 회상하여 그린 것이다.감동으로 다가왔던 작품인 "물고기와 게와 아이들"과 "물놀이하는 아이들"은 추상적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제주도에서 아이들이 물놀이 하며 물고기와 게를 잡고 천연계와 동화되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매우 가난했던 피난민 생활의 제주도의 추억이 하늘이 내린 매우 소중한 지상천국였음을 시사해 주고 있었다.그의 회화 소재인 새와 닭은 1940년 기원2600년 기념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에 출품한 "망월에 사는 새"를 등장시킨 이래 1950년대까지 새와 닭을 즐겨 그렸다.1943년 일본에서 돌아와 원산에 지내는 동안 닭을 직접 기르면서 관찰하고 그리기에 열중하였고 두마리 닭을 부부로 의인화하였다.새와 인간을 동등한 크기로 두어 가족 구성원으로 엮었고 때로는 화면의 대각선으로 닭을 배치해 역동적인 형세를 표현하였다. 감동으로 다가왔던 작품인 "닭과 병아리"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담고 있었고 "투계"는 정신적인 불안과 좌절을 겪는 수난시기를 상징하듯 과격한 동작과 극도의 긴장감으로 비정한 투정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두 작품들은 간략한 동물의 윤곽선만 그린 추상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그의 회화 소재인 소는 일제시대 한국인들에게 인내와 끈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소를 가장 많이 그렸다. 1940년 초반 자유미술가협회에 출품한 작품에서도 소의 도상이 등장하였고 1940년대 후반 원산에서 하루종일 소를 관찰하여 연필소묘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유채로 그린 대표작은 1953년 ~1954년까지 통영과 진주에서 다수 그린것이다.황토색 바탕에 연필로 그린 소로 향토향기로 가득했다.생동감 있는 소의 모습으로 수난시대를 헤쳐가는 민중의 모습 같았다.그의 마지막 풍경인 회화는 1954년 진주,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대구에서 개인전을 하며 대구 개인전 이후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와 1955년12월 서울 정릉으로 옮겨와 그림을 계속 그렸다.마지막 풍경은 따뜻한 생의 마지막을 반영하듯 쓸쓸한 그림자로 얼룩지고 있었다.감동적이였던 작품들인 "호박"은 생명샘이 넘쳐 흐르는 자연의 감사가 묻어 나오고 "나무와 까치가 있는 풍경"은 가족을 그리워하며 가족이 살던 곳을 회상하며 그린것 처럼 고요한 낙원 같았다. 밤색 바탕색과 함께 황토색 계열의 색감으로 향토적인 향수가 묻어 나는 경치였다. "정릉풍경"은 소나무 향기가 가득한 정릉경치로 나무와 집형태가 뚜렷 하였다.악화되는 투병속에 사색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쓸쓸한 이미지를 담고 있었다."사계"는 이중섭 작품 중 가장 추상적인 색깔이 짙은 작품 같았다. 은지화는 물감과 붓과 캔버스와 스케치북 없어도 담뱃갑 은지에다 그린것으로 잘곳과 먹을 것 없어도 슬퍼도 외로워도 그리고 부산,제주도,통영,진주,대구등 표랑전전하면서 그린 참혹속에 그림이였다.1952년 장인이 죽자 6월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 보낸 후 시작해 1955년 열린 이중섭작품전 (미도파백화점화랑 1월18일~1월27일까지) 제작한것으로 추정한다. 알루미늄 속지에 철핀이나 송곳,못등으로 윤곽선 눌러 그린 다음 검정또는 흑갈색 물감이나 먹물을 솜과 헝겊 따위로 문질러 선이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하여 그 결과 은박지 종이의 광택과 음각선에 묻혀 들어간 짙은 선이 상감기법을 연상시킨다. 송곳으로 선을 그린 송곳 자국의 선은 색깔을 내고 여백은 금속성 은색위에 이끼긴듯 평화로운 정감의 가장 창의적인 독보적 마티에르 기법이였다. 떠나 보낸 가족들의 그리움을 달래며 온 종일 가족들과 제주도생활 추억을 회상하며 희망을 놓지 않는 이중섭의 마음을 적나라 하게 드러내고 있었다.편지화는 1952년 일본으로 건너간 가족과 헤어진 후 1955년 말까지 그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두아들 학교생활,1955년 개인전 준비과정,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한 노력등..이 기술되었다.1955년4월11일~4월16일까지 열린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이중섭작품전 이후 급격히 쇠약해져 편지는 점차 줄어 들고 가족에게 오는 편지도 읽어 보지 않았다.1945년이후 한일 국교단절로 1953년7월 도쿄에서 이중섭과 기적적인 가족재회로 일주일 지낸것 마지막으로 영영 이별하게 된 것이였다.부인 야마모토 마사코는 일본에서 양재,생명보험회사근무,기독교 용품점에서 일을 하며 태현과 태성 두아들을 키웠다.1979년 그녀가 소장한 엽서화 88점과 함께 은지화68점을 처음으로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공개하였다.회화나 은지화에서 즐겨 그렸던 새와 닭,물고기와 게,아이들 가족을 그리는 화가의 도상은 편지화에도 쉽게 찾아 볼수 있었다.감동적이였던 작품들인 "비둘기와 손"은 야스카타군에게 아빠 중섭의 글씨가 씌여진 것으로 비둘기는 가족들을 상징하고 손은 가족들과 재회를 약속하며 끝없이 변함없는 사랑을나타내고 있었다."나비와 비둘기"는 아주 잘 그렸어요 또 잘그려 보내 달라는 편지화로 볼수 없는 헤어진 가족들을 생각하며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움에 사무친 마음을 희망과 평화를 찾으며 안도하는 이중섭의 마음을 읽을수 있어 가슴이 아려왔다.1954년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별과 달,해를 상단에 그리고 부처같은 아내와 두아들, 그림을 그리는 화가 이중섭을 그리면서 4가족이 재회하는 미래의 소망을 놓지 않는 그림을 그려 보낸 편지로 문구들이 매우 감명 깊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끝없이 훌륭하고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만세 만세!하며 사랑과 힘을 실어주며 우리가족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 위해 진실로 새롭고 위대한 필경을 계속한다는 문귀로 맑은 영혼과 매우 정직한 화가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며 위안과 안도를 갖는 이중섭의 심정을 엿 볼수 있었다.이중섭은 생계를 위해 작품활동과 함께 잡지의 표지나 삽화같은 출판미술을 제작하였다. 첫 출판미술은 1946년 원산문학가 동맹 기관지 "응향"의 표지화를 그렸다고 알려지고 있다.1947년 오창환의 두번째 시집 "나사는 곳" 속표지를 설화에 빗대어 그렸고 1952년 구상의 저서 "민주고발"에서 표지화 밑그림을 제작 이후 "자유예술"과 "문학예술"등에 다수의 삽화를 남겼다."꿈에 본 병사"는 문중섭 대령의 전투수기 "저격능선(1954년)"표지와 관련된 작품이고 "새"는 1957년 9월호 "자유문학"표지로 쓰였다.삽화는 야수파,추상주의를 이루며 사색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애를 담고 있었다.생활고의 괴로움과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그림으로 달래며 생을 보낸 이중섭화가는 영양실조와 간경화등 병고에 시달리다 가족들과 재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였던 비운한 시대의 화가였다.그가 작고한 후에 비로소 한일수교단절이 화해되었고 다행이도 이중섭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1986년 이중섭기념사업회에서 이중섭미술상 제정을 추진하였고 1989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였다.1995년 서귀포시 화가 이중섭 표석을 제막하였고 1996년 이중섭기념관을 개관하고 이중섭거리를 지정하였다.1997년4월 서귀포시 서귀동 512-1번지 이중섭 고택을 매입하여 초가집 복원을 개시하고 거주지 복원 기념식을 하였다.2002년11월 이중섭 전시관을 신축 개관하였고 2003년이중섭전시관을 이중섭미술관으로 변경하였다.이와같이 이중섭화가는 6.25전쟁으로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피난민 생활의 생활고와 장인의 죽음으로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 보내야 했던 한일수교단절의 비운의 시대로 가족들을 재회하지 못하는 극심한 사무침의 그리움을 안정된 구조와 힘찬 필력으로 야수파 절정을 이루며 추상파,초현실주 화풍을 이루었다.수난시대의 민족적인 정서와 향토적인 향기로 자연의 낙원을 보여주며 참된 숨결이 철철 넘치기를 애원하였던 정직한 화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외롭고 서글프고 그립고 그 가운데 가슴 훤히 헤치며 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과 가족에 대한 매우 소중함과 사랑의 교훈을 주고 있었다.
1940년대)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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