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30일~이건희 컬렉션특별전으로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마르크 샤갈,카미유 피사로, 살바도르 달리,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모네,폴 고갱,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호안 미로 회화7점과 파블로 피카소 도자 90점을 소개하며 이들은 파리에서 스승과 제자, 선.후배,동료로 만나 서로 성장을 응원해 주고 20세기 서양 현대미술사 흐름을 함께 만들어 간 거장 8명 거장들이 파리에서 맺었던 다양한 관계에 초점 맞추어 구성하고 피카소의 도자와 다른 거장 회화가 어떻게 연관 되는지 초점을 맞추어 구성하고 있었다.전시장 내부는 서양풍 정감의 원형전시실로 명화를 비추기 위해 독일제 명품 1억원 상당의 조명을 비추어 럭셔리 했다.1900년대 초반 파리의 가로등 모양 조명이 은은하게 전시장을 비추고 안쪽에는 그 당시 파리의 노천카페 있을 법한 탁자와 의자들이 배치하여 당시 파리의 분위기를 느낄수 있도록 꾸며 매우 이색적인 클래식 카페 같았다.
(1)스승과 제자로 만난 피사로와 고갱)~에펠탑,센강변 다리,철골과 유리를 사용한 건물,가로등 전기조명으로 빛을 밝힌 도로,공원,유원지 여가시설등... 오늘날 같은 파리 현대화 사업은 19세기중엽에 이루어 졌다. 젊은 미술가들도 파리의 현대적 모습을 새로운 예술의 주제로 인식하기 시작하여 캔버스위에 포착해 낸 파리의 모습에서 인상주의가 시작되었다.카미유 피사로(1830년~1903년)는 파리 근교 통투아즈에 체류하며 그곳의 전원 풍경과 대도시 파리 모습을 즐겨 그린 인상주의 거장이였다. "퐁투아즈 곡물시장"(1893년)작품 처럼 다양한 계층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장풍경을 선호하며 주제를 삼고 젊은 작가 발굴에도 적극적 지원하였다. 폴 고갱(1848년~1903년)도 그의 제자로 증권중개인 일하던 고갱은 피사로가 참여했던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미술전 접한 뒤 화가로 전업을 꿈을 꿨다. 피사로는 고갱이 그린 "센강변의 크레인"(1875년)을 포함한 초기작을 보고 그의 꿈을 응원하고 자신을 따라 풍투아즈로 이주한 고갱이 인상주의 풍경화를 완벽하게 그릴수 있도록 지도하고 인상주의미술전 참여할수 있도록 해주었다.즉 현대거장으로 성장하는 출발점이 되게 해 주었다.고갱의 "센강변의 크레인" 은 초기작으로 인상주의 풍 야외풍경이다. 파리 근교의 전원풍경과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그리는데 더 관심을 가졌는데 이러한 그의 성향은 발전하는 서구 문명과 대비되는 다른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결국 1891년 파리를 떠나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이주해 이국적인 자연과 인물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며 1903년 그 지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센강변의 크레인"은 제방아래 크레인과 배의 구조와 명암처리등이 고전기법을 수용하며 인상주의 색채를 가미하고 있었다. 피사로는 클로드 모네(1840년~1926년),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년~1919년)와 더불어 가장 적극적으로 인상주의 미술운동 참여하였고 1886년 즈음부터 4년간 인상주의 영향을 받은 젊은작가들이 이끌었던 신인상주의 미술운동에 가담하였다.신인상주의 그룹의 작가들은 점을 찍듯이 채색해 그리는 점묘기법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퐁투아즈 곡물시장"은 신인상주의 점묘기법의 대표작이다. 피사로는 신인상주의 미술운동 참여 뿐만 아니라 앙리 마티스(1869년~1954년),폴 세잔(1839년~1906년)과 같은 미래의 거장들이 화가로 성장할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스승으로 인상주의와 그 이후 세대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했던 화가였다.
(2)우정과 조경으로 서로를 빛낸 거장들 모네,르누아르,피카소)~클로드모네(1840년~1926년),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년~1919년)는 파리근교에서 함께 야외풍경을 그리는 일이 많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의 색채와 형태가 빛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관찰하게 된 이들은 그 순간을 포착해 그리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모네는 물과 안개,눈과 바람등 유동적 변화가 많은 자연풍경을 반복적 그리는것을 애호하였다. 1891년 파리근교 지베르니에 정착한 이후 주로 정원과 연못을 주제로 한 수련 연작을 제작하는데 몰두하였다.르누아르는 풍경보다는 카페,유원지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 포착하는데 흥미를 가졌다.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 미술에 매료된 이후로는 대상을 사실적 그리는 고전적 회화를 주로 그렸는데 "노란모자에 빨간치마를 입은 앙드레 독서"(1917년~1918년)는 고전적 회화를 이룬다.이 작품이 제작되던 해인 1917년 파블로 피카소(1881~1973)도 이탈리아에서 고전주의 맛을 재발견하면서 르누아르 작품까지도 그 관심이 이어지게 되었다. 1904년 고향인 스페인을 떠나 파리 정착한 피카소는 불과 10년만에 청색시대,장미빛시대,입체주의시대 거치며 젊은 거장 반열에 오른 상태였지만 르누아르 작품은 그에게 새로운 탐구 대상이 되었다.여성을 작품의 주요한 주제로 삼았던 점도 피카소가 르누아르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중의 하나로 여성을 재현하는 두 거장의 특유방식은 르누아르회화와 피카소 도자를 통해 볼수 있었는데 피카소 도자의 여성은 덕스러운 이국적인 자태의 스페인 정서가 담고 있었다.1919년 르누아르가 타계하면서 피카소는 "르누아르초상화"를 그렸는데 거장 르누아르에게 바치는 존경의 마음 자체였다.그리고 피카소는 입체주의 화풍을 고안할때 고갱의 이국적인 화풍을 참고했다.인상주의 명칭이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년)작품에서 유래됬을 만큼 인상주의 대표작가인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7년~1920년)은 특정한 대상의 형태와 색채가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관찰해 다양한 연작을 제작하였다. 수련연작은 그 중 하나로 수련이 있는 연못을 포함해 250여점 이뤄진 연작은 백내장 시력을 상실해 가는 과정에서 그린것으로 하늘과 연못 구름과 수련이 뒤섞여 하나의 흐릿한 평면처럼 보인다. 모네는 인상주의 미술을 통해 대상을 평면적으로 그리는 평면성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갔던 작가로 20세기초 현대미술은 인물이나 풍겨을 입체적으로 그리는 대신 평면적 그리면서 대상을 추상화해 나가려는 시도로 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런 이유로 모네의 수련연작은 현대회화 특히 추상미술의 출발점이였다.르누아르는 13세기 도자기 공방 견습생으로 시작해 20대 초반 파리에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모네와 피사로 동료작가들과 인상주의 미술운동에 참여하였다.사람들의 옷 위에 어른거리는 햇빛의 묘사를 통해 눈부시게 밝은 야외 분위기 묘사하기를 즐겼고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것 가장 행복한 순간 찰라를 포착해 그린 화가로 여인을 그리면서 미의 도취됬다. 르누아르의 "노란모자에 빨간치마를 입은 앙드레 독서"(1918년)는 여성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는 고전적인 기법을 따르면서 대상을 빠르게 포착해 그린듯 느껴지는 자유분방한 필치를 통해 인상주의 영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화사한 색채로 따쓰한 온기와 독서를 통해 평안과 안식을 갖는 소녀의 모습이 귀족적이다. 앙드레는 1915년부터 르누아르가 작고한 해 1919년까지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했던 모델이였다.
(3)파리의 스페인 화가들과 에콜 드 파리 피카소,미로,달리)~스페인 출신 화가인 호안 미로(1893~1983),살바도르 달리(1904~1989)는 당시 슈퍼스타로 선배인 피카소를 존경했다.이들이 서로 만남의 장소는 파리였다. 피카소를 만나기 위해 1920년 미로는 파리를 방문하였다.피카소는 가난한 미로의 작품을 사주는 등 미로가 파리에서 계속 활동할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이 만남의 계기로 두사람은 평생에 걸쳐 친구이자 동료로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다. 6년뒤 1926년 달리도 피카소를 만나기 위해 처음 파리를 찾았다. 이때 달리에게 피카소를 소개해 주고 2년후에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만남을 주선해 주며 미래의 초현실주의 거장 달리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이가 바로 미로였다.즉 달리는 미로로 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들을 소개 받으며 초현실주의에 눈을 떴다. 외국인 미술가들의 파리유입이 급증하면서 에콜 드 파리 명칭이 생길정도로 국제적 미술 중심지였던 그 당시 파리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각자 고유한 문화적전통과 파리에서 접한 새로운 미술경향을 결합한 외국인 미술가들의 에콜 드 파리 스타일도 등장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필두로 현대미술을 주도한 작가였지만 스페인의 전통 기예인 투우를 작품의 주제로 다양하게 활용하는 늘 고국의 문화적전통을 잊지 않았다. 피카소,달리,미로는 각자 에콜 드 파리 스타일을 만들어 냈지만 이번 전시회에서 세사람의 작품에서 몇가지 공통점 찾을수 있었다. 달리의 "켄타우로스가족"1940년 처럼 피카소의 도자에서도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 발견할수 있었다. 피카소의 신화로 주제로 한 도자작품인 "켄타우로스"는 말을 탄 늠름한 모습의 투우사로 스페인 정서를 담고 있었다.사람,새,별이 있는 밤의 풍경을 추상화한 미로의 "회화"(1953년)는 사람과 새를 주제로 한 피카소 도자작품과 비교해 볼수 있었는데 사람을 주제로한 피카소의 도자기는 표현주의 양식을 띠고 있었고 새는 아름답고 귀여운 새를 표현하고 있었다. 러시아 출신 마르크 샤갈(1887~1985)도 피카소를 존경한 화가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결혼 꽃다발"(1917~1978)이 같은 주제 "꽃과 정물"의 피카소 도자기 작품과 함께 놓여 있었다. 피카소 도자의 꽃은 1910년부터 풍경과 함께 주로 사용한 주제로 도자에 어울리는 소재로 인식하며 입체감 있는 생기로 꽃의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년)은 그리스신화에서 등장하는 반인반마종족 켄타우로스와 아들의 몸에 있는 육아낭에서 아기들이 빠져 나오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으로 초현실주의 미술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였다.달리는 어린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혀 온 강박증과 성적환상에 대한 해답을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찾아냈다.그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분리되는 순간 인간이 최초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된다는 정신분석학 이론에 심취되어 이 때문에 자궁과 유사하면서도 언제든지 그 안으로 다시 들어 갈수 있는 육아낭을 가진 켄타우로스 종족을 부러워 했다. 꿈과 무의식,정신착란의 상태에서 본 기이한 풍경들을 마치 실제하는 것 처럼 사실적으로 그린것이 달리 그림의 특징이다. 미로는 1920년초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미술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달리가 대상을 고전적으로 그리는 방식의 초현실주의와 달리 미로는 무의식이나 환각상태에서 대상을 즉흥적으로 그려내는 자신만의 초현실주의 미술을 만들어 냈다. 우연성과 즉흥성에 기반해 작품을 제작하는것을 중시했던 만큼 미로는 대상을 기호처럼 단순화해 그리거나 즉흥적으로 그린 드로잉처럼 보이는것이 특징이다."회화"(1953년)는 여성,새,별,밤등 인물과 동물, 자연과 우주의 시공간이 공존하는 풍경을 보여주는 대표작품이였다.
(4)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 낸 거장들 피카소와 샤갈)~마르크 샤갈(1887~1985)은 고향 러시아를 떠나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에 작은 작업실을 마련했다. 여전히 고향의 풍경과 사람들을 그리면서 샤갈은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입체주의 미술의 영향을 받아들여 화면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분활하는 구성법을 시도했다. 입체주의 영향력이 절정을 구가하던 시기에 파리에서 활동을 시작한 만큼 샤갈역시 그 운동을 주도했던 피카소를 직접 만나고 싶어 했지만 이들의 만남은 쉽게 성사되지 못했다.제1차세계대전의 발발과 뒤이은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샤갈은 10여 년간 고향에 머무르게 되는데 피카소를 만나지 못한채 파리를 떠나게 된 아쉬움을 달래고자 1914년 에는 "피카소를 생각하며"라는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유태인이였던 샤갈은 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체류하는데 이 시기에 피카소에게 보낸 편지 덕에 두 사람은 전쟁 종료후인 1940년대 말 드디어 조우하게 된다. 이들이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는 피카소가 도자기를 제작하던 남프랑스의 발로리스였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도자기 제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갈이 직접 발로리스를 방문했고 두사람은 마두라 공방에서 함께 도자기를 만들면서 오랜 기다림 끝에 성사된 만남의 순간을 맞이 했다. 샤갈의 회화에는 염소나 물고기 같은 동물들,꽃과 정물,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풍경들이 가득하다.샤갈의 작품에서 볼수 있는 이러한 주제들을 피카소의 도자에서도 찾아낼수 있었다. 피카소의 도자에서 염소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완동물로 표현하였고 물고기는 생명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었다.춤추는 모습은 추상주의 경향을 띠며 악기연주는 음악을 들으며 안식하는 기사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표현하였다. 인간,동물,자연이 함께하는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이야 말로 피카소와 샤갈이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보여 주고자 했던 가치 같았다.샤갈은 그의 작품에서 꿈과 환상의 세계를 다루지만 그의 인생은 그다지 평탄치 않았다.제1차세계대전과 뒤이은 러시아혁명뒤 1923년 파리로 돌아왔지만 10년뒤 1939년 다시 제2차세계대전 반발하면서 나치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샤갈작품에 자주 등장했던 부인 뮤즈 밸리마저 사망한다. 전쟁이 끝난 후 파리로 돌아온 샤갈은 과거 세계전쟁과 러시아혁명, 밸라죽음등 과거의 수많은 고난을 뒤로한 채 다시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삶의 순간을 노래하는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샤갈의 "결혼 꽃다발"(1977년~1978년)은 그가 말년에 되찾은 새로운 사랑과 행복의 순간을 담아낸 샤갈의 대표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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