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30일~이건희 컬렉션특별전인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감상하기 위해 국립현대미술관에 갔다. 매월 4번째 수요일은 문화의 날로 미술관에 전시회를 모두 무료로 감상할수 있는 특혜를 갖게 되었다. 전시국립현대미술관 내부는 세계적인 21세기 걸작인 백남준의 "다다익션"이 우뚝솟은 중앙홀을 중심으로 언덕을 이루며 전시실과 원형,옥상정원을 연결한 서양풍 정감의 고풍스러움으로 매우 매혹적인 실내공간을 이루고 있었다. 1층 어린이미술관에서는 유치원 공간을 설계한 작품들이 전시 되었다. 아동심리를 바탕으로 자연과 어우러지는 관찰 학습 공간 놀이로 창출하였다.2층 "원형정원"은 프로젝트 "달뿌리-느리고 빠른 대화" 주제로 자연과 조화하는 예술형식 정원을 소개하고 있었다.원형정원이 하늘의 달을 지탱하는 뿌리가 된다는 의미로 자연과 공생 가능성을 시사하며 끝없이 반복되는 자연의 무한한 시간성과 순간 변화하는 찰나를 체감하고 초목이 건네는 느리고 빠른 대화에 귀기울수 있는 공간이였다.원형정원을 통창으로 바라 볼수 있는 내부로 황토빛 바닥과 원목의자로 매우 안정감을 주는 힐링의 명상공간 같았다."옥상정원"은 2022년에 형성된 정원으로 미술관 전시를 감상한 후 다다르는 종착지였다.옥상정원 중심부는 원형정원이 한눈에 내다 보이는 탁트인 외곽부로 과천의 수려한 자연풍광이 펼쳐지는 근경의 원형정원과 원경의 청계산,저수지등 자연의 아우르는 정원이였다.산에 둘러싸인 푸른빛 강물같은 호수와 맞은편 옥상의 야외 조각공원이 펼쳐져 바다의 조각공원 같았다.옥상정원에 설치된 조호건축(이정훈)의 "시간정원"은 열린 캐노피 구조로 39m 직경 대형 설치작품이였다.일정 간격으로 늘어선 수많은 파이프 배열은 공간에 리듬감을 더하며 점점 높아지고 커지는 구조물의 공간감을 따라 가장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지는곳으로 이끌었다. 시각적 장치로 자연을 입체적으로 느낄수 있는 공감각적 경험을 할수 있도록 하고 계절과 날씨에 따라 작품에 투영되는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자연의 순환,순간의 영속성,시간의 흐름등으로 시각화하였다.3층 6전시실에서는 "다다익션-즐거운 협연" 전시회가 열렸다. 88올림픽 기념하기 위해 세계11국 위성으로 연결한 백남준 "세계와 손잡고"(1988년)방영된것 중 당일 완성된 "다다익선" 모습이 방송 되었다. 미디어가 개인을 통제하는 시대가 될거라는 암울한 전망을 유쾌하게 풀어 내었다. 전시장은 "세계와 손잡고" 영상을 한국측 생중계 프로젝트 담당했던 KBS PD 박윤행의 인터뷰로 구성되어 전시되었다."다다익션"은 백남준이 고국에 설치한 대규모 영상설치작품으로 거대한 크기로 압도감과 화려하게 돌아가는 1003대 모니터로 청중을 압도 하였다.동.서양의 소재,어우러지고 국경없는 스포츠,예술이 소통하며 추상화 되는 장면을 주로 이루며 미디어가 가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백남준은 폴 개린과 미국 스튜디오에서 "다다익션"위한 영상을 제작해 10여점을 한국에 보냈다. 움직이는 아카이브는 중성상자에 담겨 보존서고 깊숙한 곳에 놓인다.산소가 닿으면 기록들이 빛발래지고 원본을 퇴색된다. 그래서 기록물이 놓인 전시장은 언제나 조금 어둡고 엄숙하다. 이 고요함을 깨트리고 아카이브를 아카이브 아니게 할수 있을까?...고민하며 새로운 아카이브 영역을 창출했다.새로운 의미가 생산되고 쌓였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그런 아카이브 영역을 동시대 작가들과 협업으로 구성되었다. 장영규의 "휘이 댕 으르르르르 어헝"(2022년)은 백남준이 뇌졸중 투병할때 자신의 스튜디오에 온 친구위해 한손으로 연주해 주던 음악을 새롭게 해석한 사운드 설치 작품이였다. 강렬하면서 처연한 백남준의 연주를 죽음의 공간앞에 선 한국 고전설화 주인공 심청과 춘향의 절박한 심정에 대유해 리드미컬하게 풀어 냈다.2층 3,4전시실에서는 "모던 데자인:생활,산업,외교하는 미술로" 주제로 전시되었다.해방이후 한국전쟁 거치며 근대화 산업화 통한 국가 재건시기 활동했던 산업미술가의 아카이브 매게로 디자인 분야 성립과 전개과정에서 포착된 시대 단면을 살펴보기 위해 디자인 아카이브로 기증된 한홍택(1916~1994)과 이완석(1915~1969) 작품과 자료를 중심으로 개최하였다.모덴 디자인 제목은 1958년 제2회 한홍택 "모던 데자인전"에서 발췌한 것으로 디자인 용어가 일반화되기 이전 도안,산업미술,생활미술,응용미술,장식미술과 번역된 어휘가 뒤섞여 사용되었던 1950~1960년대 시대적 조건을 환기한다. 산업미술은 국민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국가나 사회를 상징하는 산업의 동맥적 역할을 하는 생활하는 미술이자 산업하는 미술이며 나아가서는 외교하는 미술이기도 한것이다.1945년 해방이후 사회전반 분야 새로운 움직임 촉발하는 기점이였다. 광복이후 수많은 문화예술단체가 설립하기 시작하였다.1945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디자인 단체인 조선산업미술가협회로 권영휴,엄도만, 유윤상, 이병현,이완석,조능식,조병덕,홍남극,홍순문,한홍택등이 창립회원이였다.한홍택 초기작업과 아카이브를 통해 일본유학시기 교육과정 비롯해 발견된 이 시기를 소개하고 이완석이 천일제약 도안 담당근무했던 시기 해방이전 디자인이 고안되고 개발되던 과정을 볼수 있도록 전시하였다.해방후 한홍택등 초창기 산업미술가들이 활동했던 1950~60년대 디자인의 사회적 기능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직능의 출현과 역할은 근대화 흐름속에서 요청되었던 시대적 과업이였다.디자인에 대한 다양한 차원이 사회적 논의가 촉발되던 거대한 계몽의 시기였다. 최초 산업미술가인 임숙재(1899~1937년)는 앞선 시기 국내 최초 1928년 도쿄미술학교 도안 전공졸업하고 귀국후 1928년 동아일보에 "공예와 도안" 글을 연재하였다. 도안제작 목적은 용도의 적합성,미관의 색채표출,실물제작하기가 용이하고 간단할것을 설명하였다. 합목적성,심미성,실용성 같은 여러목적을 충족시켜야 하는 오늘날 디자인 개념과 유사하였다.이완석은 1930년대 중반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서양화 전공후 귀국하여 해방전 천일제약 도안담당 광고와 제품 패키지 개발 디자인 담당을 하였다.천일백화점 사장역임하고 천일화랑설립하여 화랑에서 전시기획과 미술단체활동,작품활동을 이어갔다.1964년 천일화랑을 한국민예품연구소로 개소하여 장인들과 민예품을 수집하여 한국미술,공예,디자인계 후원자로 전방위적 역할을 맡았다.1958년 한홍택은 우리생활 주변에도 일상미술하는 데자이너가 필요하다. 우리가 쓰고 아끼고 하는 물건들이 데자이너 손에 거쳐 제품화 된다. 좋은 옷무늬 옷감을 본다든가 좋은 도안의 찻잔을 보고 우리주변에 생활하는 미술이 있다는 것을 느껴 볼만한 정서를 가져야 한다고 "문화와 생활의 미화" 주제로 서울신문에 기재하였다.그 당시 미술분야로 유학을 갈수 있는 곳은 일본이 가장 합당하였다.임숙재,이순석,한홍택등 일본에서 도안 전공해서 돌아와 활동했던 이들을 통해 새로운 분야의 개념과 기법,조형언어 도입되었고 미술대학내 도안 혹은 응용미술학과 같은 초기 디자인 교육제도가 정착되기 시작하였다.일제시대 민족말살정책으로 대부분 아이들 한글 읽을수 없는 상황에 놓였는데 해방후 한글출판 자유 얻게 된 출판사들은 한글학습과 관련된 다양한 서적 펴내는데 앞장섰다.아동잡지 간행,동시,동화,동요등 아동문학서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이밖에 다양한 장르의 잡지와 단행본이 다수 발행되었다.표지와 각종 삽화에 한홍택을 비롯 이병헌,조병덕,조능식등..산업미술가 참여하여 문학과 미술이 긴밀히 조우하며 개성있는 표현을 담은 일상의 미술을 하였다.전쟁후 파괴된 한국사회 복귀와 민생안정을 위해 미국의 원조물자는 낯설고도 풍요로운 서구식 물질과 문화를 전하며 현대적 삶을 지향하는 대중적 욕망을 이끌어 냈다. 이런 욕망이 투사된 사물과 이미지,일상풍경을 담고 있었다. 도안이라는 용어가 1950년대 데자인 또는 디자인과 같은 용어로 대체된 것은 본격적인 산업화 영향 받은 1960년대 사회전반의 변화를 예고 한것이였다. 산업적 토대가 부재한 시기 산업미술가들의 작업 양산으로 이어질 기회는 매우 희박하였다.스스로 존재를 정의하고 증명하기 위해 작품제작과 전시를 하며 이어갔던 시기 이들이 남긴 디자인 작업 대부분은 일종의 제안과 실험이었다. 산업미술가로 이름 남긴 소수 인물외에 많은 익명의 도안과 디자이너가 공존했는데 이들은 기업의 상품의 광고와 포장위해 창작된 이미지는 대중의 일상,기호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950년대 등장한 수많은 여성잡지는 새로운 문화 받아들이는데 개방적인 주체로서 여대생,취업여성,중산층 주부 교양을 위한 대중지 표방하여 여성문화를 선도하였다.소비의 주체 소비대상을 여성에 두고 여성지들은 경쟁적으로 미국영화 비롯한 다양한 서구문화 소개,영화 주요 장면이나 여배우 패션,미용등을 선보였다. 현대적 서구적,미국적인것 인식 바탕으로 미국식 생활방식 소개,서구적 패션 모방하고 자유연애지향하고 소비의 주체로 거듭난 이들은 보수적 한국사회에서 경제력 갖추고 주체적 선택을 추구하는 새로운 여성의 탄생을 촉발하였다. 광고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과 삽화들은 해당시기 긍정적 유형의 인물상 보여주었다.여성 이미지가 등장하는 광고유형은 화장품, 세안용품, 의약품,패션 다양하지만 여성의 미와 건강 내세우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시기 한국사회 구성원이 선망하던 여성 이미지는 서구적 세련미와 앞선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존재였다. 1962년 언제나 건강해 보이는 몸과 윤택하고도 매력있는 피부를 언제나 완전유지해야 한다며 식사와 미용을 강조하고 여성의 멋은 유행을 말하지 않을수 없는데 유행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모방에 치우치는 새로운 시대적 감각을 적절히 유효하게 하자는 것이였다. 새로운 문화와 소비를 향한 욕망이 급격히 확산되는 속도에 비해 이를 충족시킬만한 산업의 발달과 그 수준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 1950-60년대는 주로 의약품,화장품, 식품등 생필품을 취급하는 국내기업들이 생겨났다. 의식주와 연결된 소비재산업이 활성화 시작하였다. 디자이너 직능은 광고나 상품의 포장등을 필요로 하는 분야인 제약,제과,화장품,식품등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도안실,의장실등 디자이너로 활동할수 있는 소규모 조직이 일부 생겨나거나 소수의 개인이 고용되는 정도였다. 당시 소비성향과 시대상 살피는데 유용한 자료가 되는 화장품류 미용,세제,가정용품,음료,제과류 상품은 전후 한국인의 생활 대중의 일상 기호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었다.부가적으로 한영수의 도시 일상을 기록한 서울풍경(1956~1963)과 더 도슨트의 한국전쟁부터 1960년초반 사진을 "골목안의 풍경" 제목을 부쳐 비디오로 제작하여 전시하였다.한영수는 1958년 한국최초 리얼리즘 사진연구 단체 신선회 통해 사진활동을 하였고 1966년 한영수사진연구소설립하여 상업사진작가로 활동하며 한국광고와 패션사진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전시실에 걸려진 그 당시 산업미술과 연관되며 더욱 더 이해도를 높일수 있었다.1층 1,2전시실과 중앙홀에는 "백남준효과"가 전시 되었다.기획전 백남준효과는 백남준의 "비디오때:비디오땅#1992년","휘트니 비엔날레 서울(1993)"의 주요 주제들을 통하여 1990년대 한국미술상황을 새롭게 살펴보는 전시회였다.그는 1984년 30년만에 귀국하여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한국과 세계를 잇는 문화 기획자이자 문화번역자로 전파적인 행보를 펼쳤다. 특히 그는 1986년제10회아시아게임과 1988년서울올림픽 1993년 대전엑스포가 열렸던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이용하여 전세계를 넘나드는 전방위 활동을 펼쳤다.전시와 행사 상업광고를 기획하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연결해 1995년 광주 비엔날레 출범및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설립이라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며 그는 미술계를 넘어선 전 국민 스타로 떠오랐다.일찍이 볼수 없었던 글로벌 활동영역을 바탕으로 비디오라는 새로운 형식 및 장르를 도입하고 세계속의 한국을 강조하며 한국적인 정체성을 국내외적으로 새롭게 발굴하고자 하였던 그의 노력은 세계화,근대화,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식민주의의 바람을 타던 1990년대 한국 미술계 전체를 관통하여 동시대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비디오때:비디오땅#1992년","휘트니 비엔날레 서울(1993)"현대미술 전시로 국내 최초로 십만명이 넘는 관람객을 불러 모았다. 두 전시 모두 동시대 미술의 주요 키워드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특히 정체성 논의와 매체의 확장성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1990년대 한국 시각문화의 정체성은 빠른 경제성장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국제사회 진입하며 중진국 발돋움하던 한국의 국제화,세계화 바람과 맞물려 있었다. 정치,경제,문화를 국제사회기준과 나란히 간주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넘어서서 바깥 세상을 보고자 하는 범국가적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 더불어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보통신혁명이 불러온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문화가 미술계의 새로운 경향으로 이어질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디오와 컴퓨터,키내틱한 기계들,복사기술등 과학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예술매체의 확장은 기존 매체가 실험하던 영역을 넘어서서 새로운 길 모색할수 있는 제3의 공간을 만들었다."휘트니 비엔날레 뉴욕(1993)" 작품에 영감을 주었던 이론가 바바가 발전시킨 개념으로 정체성은 항상변화 하는 혼중의 과정을 겪고 있고 둘이상의 정체성이 섞여서 혼성이 일어날때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제3의 새로운 영역이 생겨날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다.1990년대 한국미술에서 제3공간은 세계와 한국이 만나며 새롭게 생겨난 대안적 정체성의 영역이자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의 중간지대 혼합매체와 설치의 공간으로 작동하였다. 회화,조각,판화등 서로 다른 장르는 각각의 매체적 특성을 확장하여 혼합매체의 영역을 탐험하였다.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국제적인 규모와 이벤트를 연달아 개최하며 국제사회에서 입지를 넓혀 나갔다. 1993년 등장한 문민정부는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종합적인 국가개혁 방향으로 국제화및 세계화 전면에 내세웠고 세계속의 한국이 새로운 국가 정체성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백남준은 귀국후 동아시아의 역사와 전통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비디오 조각 작업들을 대거 작업함으로써 한국적 정체성에 관련한 논의에 자연스럽게 합류하였다. 전지구적인 네트워크를 가동하여 베니스,리용,이스탄불비에날레와 같은 다양한 국제행사에 참여하고 베니스비엔날레 감독을 초청하여 국제적인 학술행사를 개최하는 등 한국 미술계를 국제화하는데 힘을 쏟았다.한국미술계는 빠르게 진행되는 세계화에 대하여 기대와 불안감 가지고 다양한 비판적인 실험을 진행하였다.1960년대부터 진행된 한국의 눈부신 경제개발을 견인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과학기술이었다. 1993년 세계박람회 대전 엑스포가 상징하는 국내 과학기술의 빠른 발전은 선진국으로 가는 엔진이자 꿈꾸던 미래로 갈수 있는 상상력의 발판이였다. 작가들은 이러한 분위기속에 새로운 기술이 만드는 신세계의 가능성에 대하여 창조적인 상상을 펼쳐 나갔다. 공상과학적인주제들이 미술작품속에 흘러 들어오고 현재 문명에 날카로운 반성과 비판담고 막연히 다가올 미래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을 바탕으로 한 작업들을 생산하였다.1990년대 말 본격적인 정보화가 도래하기 직전 한국 미술계가 상상하였던 미래적이면서도 복고적인 판타지였다.1900년대초 한국에서는 성공적 시사를 자신과 동일시 하는 중산층이 사회를 이끄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문화의 향유를 한국사회의 주요 아젠다로 끌어 올렸다.미국 강력한 영향받은 음악 만들기 시작하고 미국유학을 다녀오고 고가의 서구 브랜드를 소비하는 오랜지족이 등장하였다.미술계 또한 새로운 과제가 부여되어 1980년대 말부터 진행되던 신세대 미술의 움직임과 과학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기술매체의 사용영역흐름이 맞물려 폭발적으로 다양한 미술형태적 시각예술이 등장하였다.믹스미디어로 불리는 혼합매체 실험은 회화 조각같은 전통적인 매체 뿐만 아니라 비디오 설치와 같은 새로운 매체까지 조합하여 새로운 예술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고자 하였다.대중음악,패션,라이프스타일과 같이 기존예술에 포함되지 않았던 다양한 문화생산물이 시각예술의 제3의 영역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가운데 1990년대 초반 신세대는 이전에 볼수 없엇던 방식으로 자기 표현시도하고 개인욕망을 발현하며 당대문화 중요한 이슈로 끌어냈다. 욕망하는 주체인 개인과 그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끌어냈다. 1993년 백남준은 "휘트니 비엔날레" 작품에서 서울은 다문화주의와 다원주의 담론으로 소개하였다.동성애와 여성,인종문제같이 소수적 정체성을 표현한 시각이미지가 전시 전면에 등장하였다.전시주제와 이미지는 신세대 흐름에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90년대 젊은 작가들은 작가적 정체성과 소수,주변인으로 정체성과 고민담음 작업을 생산하였다. 백남준이 1990년대 제작한 아시아적 역사와 전통을 담은 비디오 설치 조각 또한 국가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미국의 소수 이민자로써 그의 정체성 상징하는 작업이였다. 1990년대 한국사회에서 정체성의 고민이 여러 복잡한 층위에서 진행됬음을 엿볼수 있다.그의 작품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나의 파우스트" 작품으로 고풍스러운 고딕성당 모형 같았다.전체 13점 연작으로 환경,농업,경제학, 인구,민족주의,건강,에술,교육,교통,통신,연구와 개발,자서전 주제를 가지고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관을 통합적으로 제시하였다.백남준은 생전에 인터뷰에서 참다운 민주주의는 드러내지 않는데 있으며 그 생명 갖기위해 더욱 더 활발한 해외교류 있어야 한다.국수주의가 횡행하는 곳에는 문화와 삶 다양성 없고 진취적 지식인들을 살인하게 된다. 비디오 아트는 텔레비젼을 단순히 오락적 기능에 국한시키지 않고 형이상학 수준으로 끌어올린 예술이다. 20세기 인류가 자연을 정복하는 시대라 한다면 21세기는 자연과 인류가 전자매체를 매개로 공생하는 세기가 될것이다고 명언을 남겼다.그의 말대로 그는 세계화와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1990년대 한국 에술계 전체를 관통하며 동시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비디오 아트 선구자였다.
모던 데자인:생활,산업,외교하는 미술로)
백남준 효과)
어린이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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