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8일~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의궤 규환 10주년 기념 특별전인 "외규장각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 주제로 전시되었다.의궤는 의식의 궤범으로 조선시대 중요 국가행사 전체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으로 그중 외규장각의궤는 오직 왕만을 위해 만든 귀한 책이다.예법으로 왕조정통을 세우고 백성들을 아우르는 품격의 통치로 가는 길이 의궤속에 담겨있어 내용도 매우 귀한 것이다. 조선왕실 귀한 물건으로 가득차 있는 보물 창고,왕실의 상징인 금보와 옥책,선왕의 보배같은 글귀와 유구한 역사를 담은 왕실족보등 조선의 정체성이자 왕조역사 그 자체이다. 왕의 책 외규장각의궤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가 끝난후 그 전 과정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기록물이다. 의궤는 국가의례나 행사에서 바른 예법을 잘 따르는 모법적인 기준을 세우기 위해 만들었다. 모법적 의례는 의례에 맞는 예법을 규정한 것이다.국가의례는 5가지로 분류되는데 제사는 길례,국가및 왕실 경사는 가례,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빈례,군사와 관련된 군례, 왕실 장례에 관련된 흉례, 이것을 오례라고 하며 오례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한 책이 "국조오례의"다. "국조오례의" 같은 전례서 의궤는 그 예법을 실제로 적용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 경험을 모은 것이다. 국왕이 추구해야 할 바른정치도 예법을 따르는 데서 시작하였다. 효,충,신의 같은 사회적 덕목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예이다. 왕이 먼저 바른 예를 실천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따르게 하는것이 예로써 구현하는 바른 정치였다.나라의 근본이라는 의미를 말하는 국본은 조선시대 왕세자 정하는 책례 왕실로 이어가고 나라 안정적 경영위해 왕조정통을 세웠다.바른예법으로 나라 이끌기 위해 신하,백성들이 기꺼이 따를수 있는 권위가 필요하고 왕실위상 정립을 강화하기 위해 의례가 중요하였다.즉 왕조 정당한 후계자 공표하여 국왕에게 위엄과 왕실지위를 격상하기 위해 왕과 왕실위상 정통성의례가 중요하였다.질서를 잡아서 예법으로 위엄 갖춘 왕이 다음으로 할일은 신하와 백성을 돌아보는 것이였다.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 누리는것 그것이 바른 예를 실천함으로써 이루고자 한 바른정치 모습이였다.그것은 군신관계정립과 애민의 자세로 신하와 백성들이 받아 들일 때 비로소 얻었다.각자 역할에 맞는 예를 갖춤으로 전체 조화를 이루는 질서속의 조화로 의례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이상적인 사회모습이였다. 흥겨운 잔치에 음악연주가 포함된 왕실잔치를 통해 예로 만든 질서속에서 모두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사회모습으로 나라를 경영하는 지향점이였다.의례로 드러내는 효의 가치를 지닌 "기사진표지진찬의궤"는 기사년 1909년 순조가 혜경궁 위한 왕실 전례가 없던 관례인 진표지및 진찬개최로 친할머니를 최고로 예우하였다. 외규장각의궤는 한번에 5부에서 9부를 만들었는데 그중 1부는 왕이 읽도록 올리고 나머지는 관련 업무 맡은 관청이나 국가기록물을 보관하는 사고로 보냈다. 왕에게 올린것을 어람용,여러곳에 나누어 보관한것은 분상용이라고 한다, 몇권을 제외하여 대부분 어람용이다. 왕이 열람을 마친 후 어람용의궤는 왕실의 귀한 물건과 함께 규장각 또는 외규장각에 봉안하여 후대의 왕들이 예법에 맞는 행사 치를수 있도록 하였다. 외규장각의궤는 후세를 위한 모법적 선례이자 영구히 전해야 할 왕조의 정신적 문화 자산이였다.외규장각은 한강 끝나는 바다위 강화도에 있었는데 강화도는 외적침입으로 부터 국가왕실 안전을 지켜주는 보장지처였다.어람은 국격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급스러운 장황방법(본문과 표지가 있는)으로 썼다.다른 서책과 비교되는 다른 격조를 지닌 최상의 재료만 모아서 가장 뛰어난 솜씨의 장인의 손길로 조선만의 미의식으로 완성하였다.눈길 사로 잡지만 과하지 않은 화려함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우아함이 어람의 품격이였다. 은은하게 품위 베어나는 비단 표지,반짝 빛나는 놋쇠장식,깨끗하고 윤기나는 고급 종이에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쓴 글자,섬세한 그림솜씨를 보여 준다.어람용의궤 표지는 대부분 초록색 비단이지만 푸른색 비단이나 염색하지 않은 비단을 사용하였다.비단에 들어간 무늬 중 가장 쓰인 것은 구름무늬였다. 두둥실 뜬 뭉게 구름에 하늘 하늘한 꼬리를 드리운 모습,화려한 연꽃넝쿨 무늬의 표현,큼직한 연꽃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풍성한 잎사귀가 달린 넝쿨,구름이나 연꽃 사이 사이 반짝이는 보배무늬가 들어간 비단도 있었다.영조때 왕실이 앞장서서 검소함을 강조하여 별다른 무늬가 없는 비단사용으로 단아한 멋을 살렸다.표지와 책자를 묶을 때 쓰는 금속인 변철은 처음에 문양이 없는 놋쇠판을 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에 다양한 문양을 새겼다.가장 많은 것은 덩쿨무늬였다.유연하게 휘어진 줄기와 잎사귀 활짝 핀 연꽃을 가득 새기고 여백에는 작은 점을 채우기도 하였다.영조때는 꽃송이 사이에 마름모꼴의 보배무늬를 넣어서 영화로움을 더한 변철도 있다.변철위에 박은 못은 국화동 장식,빗금으로 꽃술을 표현하고 그 주위에 8장의 꽃잎이 둘러싼 모양,꽃잎을 2겹 만들어서 화사함을 더한 모양등 다양했다.작은못까지 아름답게 장식한 세심함을 더하였다.1897년10월12일 고종은 대한제국선포하여 왕이 통치했던 조선은 황제나라로 변모하였다.국가체제가 바뀌었지만 의궤제작은 계속되었다. 황제 상징인 황색 비단표지를 사용하고 황태자에게 올리는 의궤는 붉은 비단으로 표지하였다.분상용의궤는 행사 진행을 담당하는 관원 참고하도록 만들었다.중요한 국가행사기록으로 튼튼한 삼베 표지로 화려한 장식을 생략하여 실용성을 높였다.의궤는 한번에 3부~9부 만들었지만 지금 단 한부만 남아있는 의궤를 유일본이라 한다.유일본의궤는 29책포함되어 있다.의소세자 장례에 관한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과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가 유일본 중 하나이다. 하나하나 상세하게 기록한 외규장각의궤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왕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어진이라고 하며 위엄을 더하였다. 왕의 모습을 직접 보면서 그린것을 도사,이전의 어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을 모사라 하여 도사도감과 모사도감을 설치하였다.어진 완성되면 대신들이 모여 살펴보는 봉심의례를 행하였는데 이때 실제 왕을 대하는것 같은 예를 갖추었다. 문무백관이 예복을 입고 어진을 모신 건물앞에서 4번 절을 하는 사배례를 올린것이다. 어진에 대한 의례의 격을 최고 수준으로 높임으로써 어진 주인공인 국왕의 위상을 강화하였다.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호칭을 정해 올렸는데 이 호칭을 존호라고 한다. 존숭의례는 왕실에 경사가 있거나 왕의 특별한 업적이 있을때 돌아가신 왕의 업적을 기릴때도 존호를 올려 왕실위상을 높이고 위엄을 더하였다.귀한 의미의 호칭을 덧붙이는 것은 큰 공덕이 있음을 세상에 인정한다는 것이다. 돌아가신 왕을 존숭하는 것은 선왕의 직위를 더욱 존엄하게 함으로써 그 후손인 현재의 왕을 높이고 왕계승 확고히 하는 역할을 했다.영건의궤는 궁궐,종묘,왕실,사당 새로 짓거나 수리한 일을 기록한 궁궐건축 모든것을 말하고 의궤 그림 중 특정한 행사 장면이나 건물구조,행사때 사용한 물건 형태등을 그린것을 도설이라고 한다.왕릉이전 논의,중전혼례,왕비책봉,익종황제추존,시호올린, 경희궁대화재로 재건축 내용,장례도감등를 그렸다.행렬구성을 보여주는것을 반차도라 한다. 외규장각의궤 297책중 반차도가 수록된 의궤는 6책에 불과 하다.조선시대 왕실행렬의 생생한 현장을 엿볼수 있다.의궤에서 조선시대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그림을 그린 전문가들의 화원 이름이 여럿 보이나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상)" 중 "발인차도"는 그린 사람 이름의 표기가 없다. 다만 반차도 제작 담당부서의 화원 김덕성(1729~1797)한사람 이름 만 기록되었다.그는 반차도에서 역동적이고 힘찬표현을 보여 주는데 일정한 형식과 구성으로 그린 그림인 반차도에서 화원 개인 실력과 개성이 묻어난다.의례나 예법도 백성의 삶이 편안할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왕들은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 기르기 위해 직접 농사짓는 시법을 보인 의례를 "친경"이라한다. 친경의궤는 백성 고락을 같이 한다는 의미이다."국종오례의"는 농사의 신에게 올리는 제사인 "선농제"에 대한 내용도 수록되었다.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에게 공신의 칭호와 다양한 특혜를 내렸는데 이것을 공신녹훈이라한다. 큰 공을 세운사람 정공신으로 작은 공 세운사람은 원종공신으로 삼고 일반백성이나 노비도 포함되었다. 공신녹훈이 끝나면 국왕과 역대 공신및 그 적장자손들이 모여 신의와 충성 맹세하는 제례인 희맹제를 열었다.천지신명께 제사 올리고 서로 의리와 나라에 충성맹세의식을 하였다. 공신녹훈과 희맹제는 군신이 하나되는 의례인 동시에 왕과 사대부 백성들까지 모두 나라를 지키고 왕조 이어간다는 인식을 확인하는 의례이다.조선시대 가정의례근거는 "주자가례"였다. 중국 송나라때 성리학자 주희가 일상생활 예법 정리한 책으로 혼례에 관해 혼인을 의논하는 의혼,신랑집에서 신부집에서 혼인하는 납페,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는 친영으로 그중 가장 중요한 단계가 친영이다. 조선왕실은 백성들에게 주자가례 근거한 혼인의례를 권장하였다.성리학적 사회질서로 유교적 혼인의례인 친영례를 실천하여 격조있는 왕실의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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