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8일~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 주제로 전시회를 하였다. 중세부터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왕가는 합스부르크로 1273년 신성로마제국황제로 선출된 루돌프1세 시작으로 1918년 제1차세계대전 황제에서 물러난 카를1세 이르기까지 600년 유럽 정치,경제,예술 한 가운데 있었다. 합스부르크는 서양미술 대표하는 루벤스,벨라스케스,반 다아크등..예술가 후원자였다. 빈미술사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걸작 96점을 전시하였다. 아울러 1892년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를 기념하여 19세기말 조선과 오스트리아 마음의 증표로 고종이 프란츠 요제프1세에게 준 선물도 130년만에 우리에게 찾아와 전시하였다.합스부르크가문은 10세기 스위스 북부지역 백작가문이였으며 합스부르크가문인 1278년 루돌프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동쪽영역이라 불리는 오스트리아지역으로 진출하여 오스트리아가 전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신성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 잇는 후예로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다는 것은 로마황제 권력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합스부르크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정착 후 점점 세력을 넓혀 마침내 16세기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부분 지역과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루었다.150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한 막시밀리안1세는 마리와 결혼하여 부르군트공국 얻으며 영토를 확장하고 동맹맺어 제후들이 무시할수 없는 황제권위를 세웠다. 아들과 딸은 스페인 왕실 공주로 스페인 왕국 자체와 식민지 영토까지 얻었고 손자와 손녀는 보헤미아 왕실공주로 동유럽을 손에 넣었다.막시밀리안1세때 유럽 패권을 질수 있는 기초를 다졌고 합스부르크왕가에서 처음으로 예술후원이 시작했다.카를5세는 고대 신화속 헤라클레스 용맹함을 빗대어 절대적 황제 통치력 드러내고 싶었다.16세기 종교개혁으로 출발된 구교와 신교의 대립속에 합스부르크는 구교 수호자로 반종교개혁을 고수하였다.막시밀리안2세는 종교에 대해 개방적으로 이를 불신한 아버지 페르디난트1세는 구교신봉 각서를 받고 황제자리를 물려주었다.막시밀리안2세 아들 루돌프2세는 스페인 왕이자 오촌인 펠리페2세에게 엄격한 후계자 교육을 받았다. 내성적이고 우울한 루돌프2세는 정치적으로 무능하였으나 예술품 수집가로 큰 발자취를 남겼다. 프라하로 수도를 옮기고 수많은 예술가들을 불러 들여 후원하고 예술의 방에 전시하였다. 루돌프2세는 지식적 욕구 위해 수많은 분야 일생동안 학문을 탐독하고 우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고자 열정을 가졌다.종교와 정치보다 예술과 과학에 관심을 갖고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화가를 프라하 왕실로 불러 들였다.엄격한 카톨릭 교리에서 성장한 루돌프2세는 인체의 비율을 비틀어 표현하는 메너리즘의 화법이 매력적으로 다가와 메너리즘 대표하는 화가 요제프 하인츠1세 ,한스 폰 아헨등... 궁정화가로 삼았다. 그리스,로마신화속 사랑 나누는 장면같은 에로틱한 주제의 그림을 선호하였다.꽃 정물화와 풍경화로 유명했던 룰란트 사베리 궁정화가는 황제 명으로 티롤지역을 방문해 다양한 풍경을 관찰했고 그를 토대로 뛰어난 풍경화를 남겼다.루돌프2세 수집품으로 진열된 그의 취향 닮은 예술의 방은 최초 박물관으로 빈미술사박물관 모태가 되었다.티롤은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로 진입하여 15세기 막시밀리안1세는 티롤을 정치,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였고 16세기에 이르러 페르디난트2세는 무너진 성을 르네쌍스 양식으로 개조하여 암브라스 성으로 건축한 후 대공 가족들이 거주하였다.페르디난트2세 대공은 대표 수집가로 아버지 페르디난트1세가 오스트리아 세습 영지를 세아들에게 나누어 상속할때 오스트리아 서쪽지역인 티롤지역을 물려 받아 1564년부터 1595년까지 통치하였다. 갑옷, 무기,회화,이국적인 소재의 고예품등 폭넓은 범위 예술품을 수집했고 암브라스 성내에 수집품 전시하는 특별한 공간을 마련하였다.페르디난트2세 대공이 직접 진열장 설계하고 전시위해 진열품들을 지정했던 티롤의 암브라스 성은 오스트리아 최초 박물관으로 현재까지도 16세기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16세기 티롤은 대대로 합스부르크 대공들이 다스린 지역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연결하는 곳에 있으면서 이탈리아와도 접하고 있어 로마제국시대부터 천박척 요충지였다.이 지역도 10세기 종교분쟁으로 페르디난트2세 대공은 다른 합스부르크 사람들과는 달리 종교에 온건한 태도를 보여 그 결과 여러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화적 르네상스를 꽃피웠다.신의 은총으로 선출된 신성로마제국의 영원한 황제 카를5세는 해가지지 않는 나라 명칭을 얻을 정도로 광활한 영토를 다스렸다. 그는 모든 영토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황제 권력 강해진것을 견제하였다.결국 카를5세는 아들 펠리페2세에게 스페인 영토를 동생 페르디난트1세에게 오스트리아 영토를 물려주었다.즉 스페인 다스리는 계열과 오스트리아 다스리는 계열로 나뉘었다.스페인 합스부르크왕가는 1700년까지 5대에 걸쳐 약200년간 이어졌다. 무적함대 스페인의 전성기를 누린 펠리페2세에 이어 펠리페4세 시대는 정치적 쇠퇴했지만 문화적으로 번성하여 예술부흥기를 이루었다.17세기 역동적이고 극적인 표현이 특징인 바로크미술 양식이 발달하였다. 이탈리아,스페인,플랑드르지역에서 크게 유행했는데 특히 상업 중심지로 거듭난 플랑드르지역에서 부요함을 과시하기 위해 집안을 장식하는 다양한 장르의 회화가 발달하였다.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브뤼셀이 부임했고 레오폴드 빌헬름 대공은 17세기에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역의 수준 높은 회화를 수집하여 말년에 수집품과 함께 빈으로 귀환했다. 카를5세 시작으로 약 500년간 이어진 스페인 합스부르크왕가에서 수집한 예술품도 카를6세에 의해 18세기초 빈으로 옮겨졌다.이렇게 유럽을 빛낸 거장 명화들은 수도 빈으로 모여 현재 빈미술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즉 매혹의 명작들이 모여진 예술의 도시 빈이 되었다.바로크거장인 루벤스는 강렬한 명암대조와 역동적인 구도로 작품에 생동감 부여한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대가이다. 그는 1609년 스페인령 네덜란드총독으로 임명된 알브레히트7세 대공의 궁정화가로 일하며 합스부르크왕가 초상화를 그렸다. 어떤 주제라도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생생한 작품을 만드는 루벤스 특유의 화풍은 유럽전역 많은 사랑을 받았다.그는 공방을 운영하며 효율적인 분업체계 만들었고 이로써 전 유럽에 쇄도하는 주문량을 감당할수 있었다.외교사절역할도 겸했던 루벤스는 유럽을 통틀어 독보적인 화가로 명성을 얻었고 후대 많은 화가에 영향을 끼쳤다.레오폴드 빌헬름 대공은 빈미술사박물관 회화관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린 합스부르크왕가 대표 수집가이다. 그는 1647~1656년까지 9년간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있으면서 브뤼셀에서 활발한 수집 활동하였다. 예술조예를 갖고 안목이 뛰어난 대공은 궁정화가 동료 수집가와 함께 평생 1400여점 넘는 회화를 수집하여 레오폴드 빌헬름의 화랑을 이룰 정도였다.그는 특히 이탈리아 베네치아 화파에 관심 많았고 그가 머물던 플랑드르지역에서 장르별로 17세기 최고 명화를 모았다. 당대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명화가 다수 포함되어 합스부르크 왕가 수집품의 명성을 높였다.18세기 카를6세 황제의 시대 내정을 불안하게 하는 주요한 원인은 아들이 없는 것이었다. 카를6세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 계승할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빈으로 유학온 프랑스 로트링겐가문의 9살 연상 프란츠 슈테판과 사랑에 빠졌다. 아버지 카를6세 허락하에 1736년 결혼하여 부부 금슬이 좋아 16명 자녀를 두었다.마리아 테레지아는 오랜 기간 왕위계승전쟁을 치른 후 그 지위를 인정 받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근대화 추진하며 내적으로 근검절약하는 검소한 왕이 되고자 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머물던 선브룬궁전도 수수한 양식으로 개조하였다.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 카를6세가 사망 뒤 1740년 오스트리아 왕에 올랐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될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프란츠1세로 황제에 오르게 하였다.그러나 남편은 정치에 뜻이 없었고 사실상 부인이 모든 국정운영 실권을 가졌다. 1765년 아들 레오폴드의 결혼식 참석한 뒤 갑작스런 프란츠1세 죽음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죽을때 까지 검은 옷을 입어 사랑했던 남편 죽음을 애도하였다.그리고 아들 요제프2세가 황제지위 계승하였다. 이로써 마리아 테레지아왕과 요제프2세 독특한 공동 통치를 시작하였다. 이 둘은 모두 오스트리아 근대화 필용성에 동의 했지만 추구하는 방식이 달라 불화가 연속되었다. 급직적이였던 요제프2세 개혁정책은 결국 주변 반대 부딪혀 결실을 보지 못했다.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왕가 수집품을 벨베데레 궁전으로 옮겨 전시하고자 했고 아들 요제프2세때 벨베데레궁전을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하여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궁전을 박물관으로 대중에게 선보였다.1792년 프란츠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했는데 유럽전역은 프랑스대혁명 1789년 영향으로 요동쳤다. 이후 숙적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그의 치세는 전쟁으로 얼룩진 시대가 되었다.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 전쟁은 무려 7차까지 이어지고 오스트리아는 연이은 패배로 많은 영토를 프랑스에 빼앗겼고 딸마저 나폴레옹1세와 결혼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1804년 스스로 황제등극하고 라인지방 국가들을 통합하여 라인동맹을 결성하자 그는 위기감을 느끼고 오스트리아 연방을 결집해 오스트리아제국으로 선포한 후 프란츠1세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자리에 올랐다. 이후 1806년 스스로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여 시대 암흑을 맞이했다.바이에른에서 자유롭게 성장한 엘리자베트는 원래 그녀의 언니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1세 황제와 약혼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황제는 엘리자베트에게 첫눈에 반해 1854년4월24일 빈의 아우구스티너교회에서 성대한 결혼식과 함께 예정이 없던 황후가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황실예법은 숨쉴뜸 없이 엄격했다. 황제는 황후를 사랑했지만 어머니인 조비 대공비와 갈등 막기는 역부족했다.자녀 양육권까지 대공비에게 넘겨야 했던 엘리자베트는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점점 고립되었다. 끝내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적응하지 못한 비극이 이미 예정된것 처럼 1898년9월 그녀는 스위스 제네바 여행하고 있을 때 황후가 여행중이라고 스위스신문에 알려졌고 이 기사를 읽은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 무이지 무케니(1873~1919)는 그녀를 암살했다.그녀는 옷안에 받쳐 입은 코르셋 때문에 한참동안 그 사실 인식못하고 스위스 떠나는 배에 타고 코르셋 풀자마자 심한 출혈이 시작하여 무슨일이 일어난거야?.. 한마디만 남긴채 사망했다. 어렸을때부터 철저한 후계자 교육받으며 성장한 프란츠 요제프1세는 1848년부터 68년간 오스트리아 제국을 다스렸고 합스부르크왕가를 통틀어 가장 오랬동안 황제자리를 지켰다.그는 민족주의가 급부상하자 오스트리아제국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이중 제국시대 열어 대외적 안정을 도모했다.빈은 외부로 부터 수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성벽으로 둘러 싸였는데 1857년 프란츠 요제프1세 명령으로 성벽이 철거되고 30년간 도시 빈을 현대화 했다. 성벽자리에 반지모양의 도로 링슈트라세가 들어서 도로를 따라 빈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시청,대학,국회의사당, 국립극장, 오페라극장, 빈자연사박물관,빈미술사박물관 건축이 들어서 수도 빈은 프란츠 요제프1세 도시확장정책으로 현재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이자 유럽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그중 대표적인 건물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장품을 전시하기 위해 지은 빈미술사박물관이 이 당시 지어져 걸작을 집대성하였다.프란츠 요제프1세는 68년동안 오스트리아제국 다스릴 만큼 건강했고 황태자 루돌프가 있어 든든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지나친 후계자 교육으로 루돌프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1889년 자살하였다.황태자를 잃은 황제는 조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차기 후계자로 지목했지만 그는 강경한 개혁정책을 내세워 민족주의자들의 반감을 샀다. 페르디난트부부는 세르비아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하고 이것은 제1차세계대전 도화선이 되었다.결국 황제는 또 다시 후계자를 잃고 다른 조카 아들인 카를1세를 황태자로 지목했지만 그는 2년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제1차세계대전의 패전과 함께 왕정은 끝났다.빈미술사박물관 공예관에는 독일 출신 화가 율리우드 빅토르 베르거가 1892년 그린 거대한 천장그림 있다. 이그림에는 예술 후원자였던 왕가사람들과 당대 교류한 예술가,학자등 총44명 인물이 등장한다. 예술에 관한 관심과 애정으로 탄생한 문화유산은 빈미술사박물관에 남겨지게 되었다.이와같이 중세에서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600년간 긴기간 동안 합스부르크는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루기도 했지만 역사는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예술품 수집에 열정 쏟았고 뛰어난 수집가이자 후원자로 그들은 예술이 힘이자 지식이고 권력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합스부르크의 위대한 유산은 물리적 힘보다 문화와 예술 역량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전시된 작품중 가장 의미 깊었던 작품들은 알브레히트 폰 호른의 "성 세바스티안"으로 나무에 묶여 화살 맞는 세바스티안으로 화살이 꽂혔지만 평안한 표정의 모습으로 천사의 함성 같았다.로마황제 근위대장이였던 세바스티안은 자신의 신앙 숨기고 박해 받는 기독교인들 몰래 도왔다.이를 알게 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활을 쏘아 죽일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지 않았음을 알게 된 기독교인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건강 회복한 세바스티안은 스스로 황제 앞에 나아가 황제가 기독교 박해하는것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세바스티안은 황제의 두번째 명령으로 순교하였다. 화살맞고 살아남은 세바스티안은 수호성인의 상징이 되었다.라파엘로 산치오의 "기적의 물고기 잡이"로 프란츠2세가 매입하여 소장했던 작품이다.레오10세 교황은 1515년 이탈리아 르네상스 대가 라파엘로에게 성경의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 베드로와 사도바울의 삷과 기적의 장면 담은 10점 그림을 그려 달라고 의뢰하였다. 라파엘로가 디자인한 그림 밑바탕으로 브뤼셀의 직조공 피터르판 앨스트가 태피스트리 만들었다.완성된 태피스트리는 높이 5미터로 모두 합치면 총길이가 42미터일 정도로 장대했다. 교황은 앨스트를 바티칸 궁전의 태피스트리 직조공으로 임명하고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그중 7점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성당 태피스트리 연작으로 시스티나예배당에 설치됬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 중 하나로 주목 받게 되었다.브뤼헐1세의 "꽃다발을 꽂은 파란꽃병"으로 플랑드르 출신인 피터르 브뤼헐1세는 소작농의 전원의 삶 그린 풍경화로 브뤼헐화가 가문을 이끌었다.그의 둘째 아들인 브뤼헐2세는 아버지 명성을 이어간 화가로 평가 받았다.그는 특히 정물화를 잘 그린 화가였다.그중에서도 꽃다발정물이 가장 유명해 "꽃의 브뤼헐"이라고 불렀다.17세기 플랑드르에서 독립적인 장르로 발달한 꽃정물화는 하나의 꽃병에 각기 다른 계절에 피는 꽃을 모아 실제로는 존재할수 없는 꽃다발을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며 꽃병아래 떨어진 시든 꽃잎과 곤충들은 시간이 지나면 시드는 생명의 유한함을 상징하였다.요하네스 레이만의 "사냥도구"로 사실적 세부묘사와 명암처리로 도구가 손에 잡힐것 처럼 실제모습 같았다.부유층 전유물인 사냥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고급 취미로 귀족들과 더불어 신흥 부르주아계층도 즐겼다.자신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사냥그림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대부분 집을 장식하기 위해 구입했다.사슴사냥은 귀족이상의 신분에게 만 주어 졌다. 새사냥주제로 한 작품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계층이 주문한 것이다.고종이 프란츠 요제프1세에게 선물한 "갑옷과 투구"로 네조각으로 구성된 투구 앞면에는 발톱이 다섯개인 용이 있고 뒤에는 봉황무늬,양면과 뒤에는 얼굴을 보호하는 가리개로 덮었다.갑옷은 허벅지까지 감쌀수 있는 것으로 그 당시 가장 수준 높은 갑옷과 투구를 자랑하고 있었다.1892년12월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보호 순양함이 극동항해를 준비했는데 이 순양함은 1893년10월 우호 통상항해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조선을 방문했다.고종이 프란츠 요제프1세에게 선물한 조선의 갑옷과 투구는 이 순양함에 실려 오스트리아로 갔고 1894년 2월10일 황제 수집품으로 등록된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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