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충남 공주시 계룡산 갑사,백제 무령왕릉,왕릉원(2023년10월24일)

백재은 2023. 10. 27. 21:10

계룡산 갑사

10월24일~"우리함께 걸어요" 밴드모임에서 공주시 계룡사 갑사로 여행을 갔다.차창가로 세종시에 이르니 신도시의 산뜻한 거리로 지방 신도시 위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테크길이 놓여진 저수지로 계룡산으로 가는 길을  재촉 하였다.계룡산은 옛 조상들이 나라에 제사를 올리던 신성한 산으로 우리나라에서 1968년에 2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다. 황매화, 벚꽃, 단풍등으로 유명한 계룡산은 춘마곡,추갑사라는 말처럼 가을날 공주 갑사 가는 길의 쏟아지는 붉은 단풍은 명성이 높은데 아직 물들지 않는 단풍들로 아쉬운 발걸음을 딛었다.갑사로 가는 즐비한 맛집의 하천옆으로 시들이 전시 되었다. 강은희의 "그런 것 처럼"은 휘어지며 나를 견디며 산다는 것을 나무 밑둥과 강물에 비유하여 표현했고 박정란의 "여행"은 출발과 부터 오랫동안 달려도 끝나지 않는 언쟁과  충돌을  부부가 천천히 함께 가야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었다. 김태순의 "갑사의 봄"은 갑사의 봄 경치에 가슴 활짝 열어지는 자연 애찬의 시였고 강수정의 "사월"은  사월의 경치를 피어나는 봄꽃으로 연등사이 무지개를 해탈의 문으로 비유하였다.유계자의 "접시꽃 급식소"는 나비와 벌,접시꽃의 신비로운 자연질서를 노래하였다. 리드미컬한 운율로 벌과 나비들이 접시꽃에 입맞춤하는 광경이 그려지는 생동감 있는 시였다.이종옥의 "지심도"는 황혼녁 같은 자신의 내면을 노래하였다.지심도를 보고 황혼을 달래지만  허전함이 여전히 존재하는 감정을 표현하였다.단풍나무 한그루가 정열을 발하는 갑사 탐방소에서 일주문과 사천왕문으로 가는 길로 봄과 여름에 싱그러움을 발산하는 은행나무,느티나무,회화나무,단풍나무 고목들의 우거진 숲길을 이루었다. 시냇물이 콸콸 흐르는 연꽃모양 화강석 다리 옆 정교한 석탑같은 조각으로 옛 고을길 정취로 가득했다. 입구에서 20분정도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범종루의 화사한 전각이 고개를 내밀고 하천이 흐르는 초목 사이로 대적전이 비추며 조선후기 지어진 단아한 보살같은 공우탑으로 이어졌다.갑사는 삼국시대 초기 백제 구이신왕(원년) 420년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갑사는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서 가장 으뜸간다 뜻으로 첫째가는 절이다. 조선 세종때 사원 통페합에서 제외될 만큼 일찍이 이름 났던 절으로  세조때 오히려 왕실의 비호를 받아 월인석보를 판각하기도 하였다.화사한 범종각과  단아한 누각동종의 마당으로 초석으로 세워진 강당옆 돌계단과 연결된 기와 황토 담장의 돌계단 아치형 문으로 매우 유서깊은 사찰의 정취를 담고 있었다.거북이 조각상 있는 아치형 장식의 돌계단으로 단풍나무가 드리우며 사색의 정감을 자아냈다.선조(17년)1584년에 만들어진 보물 제478호인 동종은 겹처마의 사각지붕을 이룬 누각에 보존되고 있었다. 동종누각과  2층 누각의 범종각이 버티고 있는 마당으로  등산길과 절을 오가며 편안하게 안식하고 사색할수 있는 사찰배치로 인상적이였다. 마당에서 금곡사탄주 스님이 천연재료로 만든 실크 스카프를 판매하고 있었다. 소목,오리나무열매,치자,먹물,연잎 단풍나무잎,감쪽등 천연재료로 독창적인 칼라를 이루고 있어 가을 분위기와 잘 맞는 실크스카프를 만원에 구입했다.갑사에서  둥그런 의자와 식탁이 놓여진 정자의  자연관찰로와 일주문으로 향하는 가로수길 따라 내려 오니 공주의 유명한 알밤들을  판매하는 상점들로 가득찼다.구수한 단맛의 알밤 시식으로 힐링이 넘쳤다.맛집과 상점들 옆 하천을 건너니 민가를 이루고 있었다.유려하고 장대하게 솟은 나무가 버티고 있는 민가로   감나무가 주렁 중렁 매달리며 노란 시멘트벽체의 기와집을 드리우고  루그만시아(엔젤트럼펫)의 향긋한 내음으로 동심으로 가득찼다. 모이는 시간이 되어 버스에 올라탔다. 배가 고파 배고프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는데 그 소리를 듣던 회원이 나에게 집에서 만들어 온 팬케이크 2조각을 주어 너무 감사하게 먹었다.점심을 먹으러 계룡산과 멀지 않는 물레방이 식당으로 갔다. 산채비비밥과 버섯전을 먹었다. 참나물,콩나물,무우짠지,취나물,당근 들어간  흑미 돌솥 산채비비밥으로 저절로 힐링되는 맛이였고 버섯전은 표고버섯향과 계란의 고소함이 조화를 이루며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이 매우 좋은 전이였다. 기름에 볶은 뽕앞향이 가득한 뽕잎나물,참나물향이 살아있는 참나물무침,고추가루 맛과 달자지근한 맛이 조화로운 방풍나물무침,달자지근하고 감칠맛 나게 푹 익은 열무김치,된장의 구수한맛과 시래기향이 조화로운 시래기된장국으로 입맛 돋구는 아주 맛깔스러운 맛을 자랑하고 있었다.특히 입안에서 시래기가 아주 부드럽게 씹히는 매우 정성들인 손질로 감탄이 나왔다.힐링을 목표로 음식에 매우 정성과 시골인심으로 가득채운 계룡산이 자랑하는 일류 맛집이였다.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 회원이 가져온 감을 먹었다.아주 단 감으로 가을 향기로 가득했다.무령왕릉원과 왕릉을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차창가로 초등학교 교정이 매우 인상적으로 눈에 들어왔다.일본식 건축을 바탕으로 리모델링한 초등학교로 일본풍 정감으로 가득찼다.공주시 시내에 이르니 큰정자가 내다 보이는 하천으로 풍류소리가 가득하고  연꽃모양 도로난간으로 정자와 기와집 마을이 보이며 옛 정취의 그림자를 담고 있었다.이윽고 백제릉이 펼쳐지는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 도착했다.웅진백제역사관 길 따라 언덕의 공주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고분군모형관,송산리1~6호,송산리 빙단계단형 적석유구,부여 정림사지연못을 재현한 백제연못,왕릉공원으로 이루어진 릉이였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나가는곳  길로 숭덕전,공주한옥마을,국립공주박물관,백제오감체험관이 연결된 공주시 역사 문화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다.백제역사유적지구는 대한민국 중서부에 있는 백제 왕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유적으로 주변국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백제후기(475년~660년)을 대표하는 유산이다. 백제는 기원전18년부터 기원후660년까지 700년간 이어진 고대 왕국 중 하나이다. 웅진시기 공주왕도와 관련된 유적인 공산성,무령왕릉과 왕릉원,사비시기 부여왕도와 관련된 유적인 관북리유적 부소산성,정림사지,능산리고분군,나성/사비시기의 수도인 부여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금마저(익산)에 조성된 복도와 관련된 유적인 왕궁리유적 미륵사지로 구성되어 있다.이 유적들은 백제가 중국으로 부터 도시계획,건축기술,예술, 종교등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킨 뒤 일본과 동아시아에 전해주었음을 증명하는 유산이다.공산성은 웅진시기475~538년 백제왕궁이 있었던 산성으로 금강이라는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왕궁지 왕궁부속시설지 백제시대 토성등이 확인되었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웅진시기 백제왕릉군으로 7기의 고분이 정비되어 있다.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아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어 왕릉의 주인공과 지어진 시기 525년이 확인 되 이는 매우 드문사례이다.관북리유적부소산성은 사비 시기(538~660년) 백제 왕궁과 관련된 유적으로 발굴조사 결과 대형 건물지 등의 왕궁의 주요 시설들과 정교하게 판축된 토성이 확인되었다.정림사지는 사비 도성이 있던 곳의 도심에 남아있는 사찰터로 정림사는 도심에 세워진 사찰 가운데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터 중 하나이다. 목탑의 한계를 극복한 석탑이 남아 있고 발굴조사 결과 금당지,강당지,승방지 등이 확인되어 불교의 3보인 불,법,승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수있다.이를 통해 정림사는 백제 고유의 사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 주었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능산리고분군은 나성박에 위치한 것으로 왕실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도시 한복판에 조성하여 이전 시기의 왕릉군들과는 다른 입지 선택을 보여준다.고분군의 서쪽 사찰터(능산리사지)에서는 위덕왕(13년)567년에 만들어진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과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나성은 백제 후기 수도였던 사비의 서쪽과 남쪽 부분은 금강이 둘러싸이면서 자연적으로 해지역할을 하여 북쪽과 동쪽부분에 인공적인 방어 시설인 나성을 설치하였다. 나성은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나타난 도시 외곽 성의 가장 이른 예중 하나로 도시방어와 도시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적 경계 역할하였다.왕궁리유적은 사비 시기 수도 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조성된 복도의 왕궁이다.발굴조사 결과 직사각형의 궁장안에는 왕궁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음을 확인 되었다.남쪽에는 의례나 정치와 관련된 건물이 북쪽에는 후원이 배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미륵사지는 고대 동아시아 최대 사찰터 중 하나이다. 미륵사는 미륵이 세상에 내려와 3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원하는 모습을 가람으로 구체화한 백제문화의 탁월한  독창성 보여준다. 탑과 금당을 3곳에 배치한 독특한 가람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중 하나인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사적13호로 공주시 금성동과 웅진동 경계에 있는  곳으로 옛 지명은 공주읍 송산리 송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 하고 있는 웅진시대(47년5~538년)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다. 원래 17기의 무덤이 조사되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1~6호분까지 7기만 복원되어 있다.이들 무덤은 만들어진 형태에 따라 굴식돌방무덤과 벽돌무덤의 두종류로 구분된다. 1~5호분은 백제가 전통적으로 사용한 굴식돌방무덤으로 돌로 널방을 만든 후 천장을 돔형태로 둥글게 마무리하였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의 남조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터널형의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도굴로 인하여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웅진시대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활발했던 대외교류 확인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다.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는  고분군모형관이 전시 되었다.5호분과 6호분,무령왕릉 내부 모형으로 그대로 만들어 고분특징과 형태를 잘 이해할수 있게 전시되었다.무령왕릉은  중국 남조 귀족층 무덤양식 받아들여 벽면은 구운 벽돌을 쌓았는데  바닥에  국보급 문화재와 유물들을 포함하여 총 5200여점 깔렸었다.길이가 긴 직사각형 형태  바닥면은 벽돌을 삿자리 모양으로 깔았고 벽면은 4단으로 뉘어 쌓은 다음 1단을 세워 쌓는 4평1수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벽돌에는 연화문 등 다양한 무늬가 새겨졌고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았던 등감과 창문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왕과 왕비의 관이 일본의 금송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백제의 건축 기술과 주변 국가와의 교류를 파악할수 있다. 입구에 출토된 지석은 무덤의 주인공과 시기를 말해 동아시아 문물 연구의 기준이 되고 있는 한국 고대의 유일한 왕릉이다.  6호분은 중국 양나라 벽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라고 새겨진 명문이 있다. 중국묘제 영향을 받아 벽돌로 쌓았고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목관을 올려 놓았던 관대가 남아 있었던 무덤이였다.5호분은 돌방무덤 횡혈식설식분으로 백제 대표적인 무덤양식을 이루었다.무덤양식 중 적석유구는 능선의 가장 위에 위치한 것으로 위로 올라 갈수록 폭이 줄어들어 네모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위와같은 무덤양식이 신라와 일본에 전해졌다.백제 금속 세공술 정수인 왕과 왕비 금장식들이 전시 되었는데  화려하고 세련된 미의식과 창의성 수준  높은 공예수준을 알수 있었다. 고분군모형관을 지나 고분들을 이룬 길로 신같은 인간존재 의식과 영혼을 갈구하는 인간의 끝없는 덧없는 욕망으로 드리우고 있었다.무령왕릉과 왕릉원 옆 둥그런 유리창 양식의 웅진백제역사관으로 국제적으로 발돋움 하며 강국으로 향했던 백제왕국의 소우주처럼 빛났다. 웅진백제역사관에는 천혜의 요새이자 왕실을 지지할 굳건한 세력이 존재하던 웅진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문주왕,어린 나이였지만 귀족세력을 억누려 노력한 삼근왕,서남부로 영토를 넓히고 국경 방어를 강화한 동성왕,사회를 안정시키고 중국 왕조와 다시 교류하며 강국임을 선언한 무령왕,영토확장과영을 꿈꾸며 보다 넓은 사비로 천도한 성왕까지,웅진도읍기 백제 기틀을 다지고 부강한 나라로 재탄생시킨 다섯왕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시되었다.즉 새로운 웅진에서 사비천도까지의 백제의 역사 발자취를 요약해 놓았다.

웅진천도의 길)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는 남쪽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성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이 숨지면서 고구려는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국력을 키운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의 58개 성을 함락시키고 아신왕에게 신하의 맹세를 받아내며 백제를 압박하기 시작 했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와위에 오른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 백제는 성을 쌓고 중국 북위에 구원 요청하는 등 고구려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승려 도림을 첩자로 보내 백제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475년9월 고구려는 한강을 건너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 개로왕을 죽였다. 혼란한 상황에서 왕위를 이어 받게 된 문주왕은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중심이 될 새로운 수도를 찾아야 했다.문주왕(원년)475년10월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과 지방제도)

강화에서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갑작스런 천도로 백제의 지배세력이 교체되면서 정치에 새 바람이 불었다.백제는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여 다시 강국으로 발돋움하려 했다.웅진 주변에서 힘을 키워온 사씨와 백씨등 을 관리로 등용하고 왕실을 지지하였다. 또한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 탐라(제주)까지 영향력 미쳤고 가야의 영역이던 섬진강 유역으로도 진출하였다. 이렇게 넓힌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지방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새로운 바닷길 개척)

백제는 475년 한강 유역을 빼앗기면서 새로운 바닷길을 형성해 나갔다. 중국으로 가는 서해 북부의 연안 항로를 사용하기 어려워져 이에 금강 하구를 출발하여 태안반도와 백령도를 거쳐 산둥반도로 향하는 서해 횡단항로를 개척했다. 반면 일본으로 향하는 뱃길은 안정되었다. 백제는 꾸준히 한반도 서남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나갔고 남해안 연안항로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이를 통해 아스카(지금의 나라)에 있던 일본의 야마토 정부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국방력 강화)

고구려의 침략으로 수도를 잃었던 백제는 웅진 천도 이후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노력했다.동성왕은 여러 개의 성을 쌓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수도 웅진과 지방의 요충지를 지킬수 있도록 대비하였고 군사훈련도 강화하였다. 이렇게 강해진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남 해안 지방까지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 탐라(제주)를 다시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무령왕 때에는 먼저 고구려를 공격하고 성을 빼앗는 등 과거의 군사력을 되찾았다. 

백성의 생활안정)

무령왕은 정치와 국방이 안정되자 백성들을 위해 구제 정책을 펼쳤다. 또한 제방을 수리하고 떠돌아 다니는 백성들을 다시 농사짓게 장려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높여 나라의 재정을 풍요롭게 하였다. 백제의 제방 축조기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어서 6세기 이후 일본의 수리시설 건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독창적인 불교문화)

384년 중국 진나라에서 온 승려 마라난타로 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으나 이 당시 불교문화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다.지금까지 알려진 백제의 가장 사찰은 웅진에 있었다.일련이 쓴 삼국유사에는 6세기 웅진에 대통사가  전해진다. 이후 백제는 왕흥사와 미륵사 등 많은 사찰들을 세우고 불교문화를 꽃 피웠다.그리고  대통사 위치는 아직 확실하지 않는데 대통사와 관련된 유물들이  발굴되어 꾸준히 조사 이어지고 있다. 

백제인의 장례문화)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에는 백제의 풍습에 관한 여러 기록이 전해진다. 그 중 백제의 장례문화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1971년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묘지석에도 무령왕 부부의 장례가 27개월동안 진행되었다는 내용이 새겨져있다.이와 관련하여 독특한 형태의 건물지와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의 흔적 등이 발견된 정지산 유적은 백제왕실의 장레식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문화강국 백제의 찬란한 문화예술)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면서 중국과 오가던 항로를 잃게 되었다.그러나 521년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한 것은 백제가 중국과의 교통로를 회복하고 동아시아에서 중심 국가로 부상했던 것을 보여준다. 이 시기 백제는 주로 중국 남조의 여러 나라와 교류했다. 불교 도교와 함께 도자기 기와 등의 제작기법도 받아들였다. 백제는 이러한 새로운 문물을 양분으로 삼아 자신만의 문화를 꽃피웠고 그것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 백제문화는 일본 문화의 원류가 되어 그 문화 수준을 끌어 올렸다. 검소하면서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 사치스럽지 않았다고 삼국사기 은조왕(13년) BC 4년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갱위강국 왕도 웅진)

백제는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강화했고 성을 축조하여 국경을 방어했다.고구려 때문에 북쪽으로 진출하기 어려워지자 남쪽의 영산강과 섬진강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백성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안정되었고 문화도 발전하였다. 여러차례 고구려를 깨트리고 비로소 중국과 통호하였으니 다시 강국이 되었다.중국 남조와의 교류가 재개되면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백제만의 고유문화로 재탄생시켰다. 수도가 빼앗기는 아픔을 겪었으나 웅진에서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포하였다.갱위강국 왕도 웅진에서 되살아 난 것이였다. 

백제건국과 도읍 형성)

한성도읍기 시기 (백제건국 위례성 천도 BC18 ~AD475년)

온조왕~ BC18백제건국, BC6 위례성 천도

고이왕~ AD260 관복과 관등제 정비

근초고왕~ AD369 마한병합,AD372 중국동진과 수교

침류왕 ~ AD384동진 마라난타의 불교 전례

비류왕~ AD433 신라와 동맹

개로왕~ AD475 한성함락

웅진도읍기시기(475~538년)

문주왕(475~477년)~ 475년 문주왕 웅진 공주 천도,대두산성수리,한강이북의 백성 이주

삼근왕(477~479년)~477년 즉위,478년 해구의 반란 진압

동성왕(479~501년)~484년 중국으로 사신파견,486년 궁궐수리와 우두성 축조,493년 신라의 이찬 비지의 딸과 혼인,494년 신라에 구원병 파견,498년 탐라제주도차지,500년 임류각건설,501년 가림성축조

무령왕(501~523년)~502년 백가의 반란 진압,502년 고구려 수곡성 공격,512년 고구려 공격 격퇴,521년 중국으로 사신 파견 갱위강국 선언,한반도 서남부 진출

성왕(523~554년)~ 523년 성왕즉위, 534년 대통사 건립,534년 중국에 사신 파견,538년 사비부여천도

사비 도읍기(538~660년)

성왕(523~554년)~538년 사비부여천도,541년 일본에 불교 전파,중국에서 불교경전 기술자파견,한강유역회복

위덕왕~577년 왕흥사건립

무왕~639년 미륵사건립

의자왕~642년 신라 대야성 공격,600년 황산벌전투,백제부흥운동

역사무대)

공산성~삼근왕, 문주왕

무령왕릉~무령왕,나제동맹,겸익,백가,성왕,웅진천도,탐라복속, 520년,양직공도,다리,동성왕,임류각

대통사~대중교류,가야진출,수촌리,한성함락 

정지산~갱위강국 

이와같이 백제 두번째 수도가 된 웅진은 정치경제문화 중심지로서 성장하였다. 문주왕,삼근왕,동성왕대를 거쳐 왕권이 안정되고 국방력이 강해지면서 무령왕대에 이르러 강국으로 부상할수 있었다.서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국경의 방어를 튼튼히 하였으며 제방과 저수지등을 정비하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사회적 안정을 바탕으로 백제는 예술,건축,공예등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던것을 알수 있었다.

백제역사관을 관람하고 버스에 올랐다. 차창가로 웅진시기 공주를 방어 하기 위해 축성된 공산성으로 전쟁의 황무지위에 국제적인 외교와 외래문물의 수용으로 강국으로 향했던 백제인의 지혜와 위상으로 드리웠다.이윽고 드넓은 금강이 펼쳐지며 백제의 삶의 젓줄로 문화와 문명 발상지처럼 빛났다.

갑사안내소 가는 길
일주문
사천왕문
범종루
강당
범종루
공우탑
대적전
입구 민가
계룡산 갑사가는 길~브루그만시아(엔젤트럼펫)
물레방아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
공산성
금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