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경북 경산시 반곡지와 동의한방촌,삼성현역사문화공원,남매지(2023년11월19일)

백재은 2023. 12. 4. 12:18

 

반곡지
삼성현역사문화공원

 

11월19일~우리함께 걸어요 밴드모임에서 경북 경산시로 여행을 갔다.차창가로 벌거벗은 산의 능선들이 입체감으로 생동감이 넘쳤다.산봉우리에 둘러싸인 하천의 즐비한 가로수와 저수지로 따쓰한 봄 햇살의 생명이 움트는 생명감으로 다가왔다.반곡지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버스창가에 비추는 반곡지가 물과 왕버들이 만나는 가을 사색의 호수로 매우 아름답게 다가왔다.반곡지는 티비드라마와 영화 촬영지 명소로 2013년 안전행정부의 우리마을 향토지원 베스트30에 선정되었고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사진찍기 좋은 녹색명소로 선정된 곳이였다. 저수지 둑에 뿌리 내린 아름드리 왕버드나무 10여그루가 잔잔한 수면에 반영된 입구부터 서상달의 시가 붙어 있었다.반곡지 경치를  보고 느낀 감정을 노래한 흥겨운 시였다. 천년고목이 숲을 이룬  광경을 바라보며 테크길 지나 산언덕을 오르고 지나면 왕버들을 만나는 짧은 길이였다.왕버드나무 가지들이 천년의 고목처럼  수면위에 비추며 드리워져 매우 신비로웠다. 수백년된 왕버들 10여그루가 줄지어선 나무터널로  잔잔한 수면에 반영된 모습이 환상적인 데칼코마니를 이루며  매우 고혹적인 길을 이루었다.나무 가지들의 하나 하나가 매우 신비한 자태로 지금까지 본 나무 중 제일 신비로운 나무였다.반곡지 맞은편으로 미색벽체와 함께  금색 난간과  청색 띠를 장식한  DO NOT DISTURB  카페로 청초하게 빛났다. 버스정류장 천막가게에서.과일,농삼물,채소,묵등을 판매하고 있었다.아주머니가 직접 집에서 만든 묵을 시식하고 난생 처음보는 호랑이콩을 샀다.회원들이 한명씩 반곡지에서 내려와 버스 정류장에서 모였다. 한 회원이 간식으로 가져온 감을 주어 꿀맛 같았다.모자에 둘러싼 한 회원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내장산여행 기간중 저녁식사를 같이 했던 회원님이였다.바로 그 회원이 나를 알아보고 나로인해 고기를 많이 먹었다고 반기며 곶감을 2개 주어 너무 감사했다.반곡지에서 동의한방촌에 갔다.동의한방촌은 힐링한방체험장소로 전통역사문화향기가 어우러진 경산시 렌드마크이다. 약초정원,대오쌈지공원,연화지,자라지,산책코스를 갖추며  대구한의대에서 위탁 운영하는 한방에 대한 진료처방,화장품,티톡스체험,족욕,한방약차,건강운동교실로  전국 유일 원스톱 한방 융복합 검진 치료및 처방을 받을수 있는 관광문화지였다. 호수에 맑은 하늘빛이 물든 자라지로 시골의 정감으로 가득찼다. 동의한방촌 맞은편 삼성현의 고장 경산을 대표하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에 갔다.삼성현역사문화공원은 원효,설총,일연 세 성현의 역사적 문화적 업적과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로 26만 2천여 m2의 넓은 면적에 조성된 측백나무의 미로정원,소나무숲 둘레길,무궁화동산,삼성현문화역사관을 이룬 전통과 문화,쉼이 어우러진 복합문화공원이였다.전통문화관 같은 단청과 겹처마의 정문을 지나  한옥마을 정취의 민속그네로 우리 민속놀이 전통을 되새겨 보게 하였다. 박석이 깔린 황토빛 잔디와 함께 물레방아와 다리,정자로 이루어진 연못으로 무지개가 드리우며 청량감으로 가득했다.삼성현역사문화관은 원효,설총,일연의 생애와 업적이 전시된 삼성현역사문화관으로 솟을지붕과 함께 흰색벽체와 대리석 기둥으로 역사의 고적의 박물관처럼 길이길이 빛낼 수장고처럼 중앙에 우뚝  버티고 있었다.매우 수려한 삼성현역사문화관이 깨달음으로 가는 정원길로는 웅장한 날개짓을 하는 겹처마와 대리석 테라스 기둥으로 고고한 성현의 빛처럼 빛났고 공원 중앙에서는  박석이 깔린 황토빛 잔디와 함께 갈대가 손짓하는 물레방아의 연못과 매우 조화를 이루며 더욱 더 아름답게 빛낫다.즉 정면,옆면 어디에서나 잘 조화되는 건축으로 역사에 길이 빛낼만 한 건축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즉 공원에 역사관의 문화를 지향하는 삼성현 고장 경산을 자랑하는 대공원이였다. 

삼성현문화역사관 1층 기획전시실 복도로  파리시립미술학교 서양화 전공하신  조규석의 고향을 그리다 주제로 작품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낭만적인 "강변",사색적인 "해변", 환상적이고 신비의 적막이 흐르는 "환성산'"작품으로 자연의 경치를 보고 느낀 감정을 회고하면서 그린 작품 같았다.그의 작품 중 제일 인상적인 작품은 "아코디언" 작품으로  바닷가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아름다운 자연과 호흡하며 애상적으로 그려냈다. 2013년대에 이르러 원숙미가 드러내고 있었는데 "유정천리"는 시간이나 거리가 아직도 미치지 못하고 멀었음을 이르는 말로 흰눈이 쌓인  산길을 남녀가  고뇌에 잠긴듯 걸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중년 노부부의 애로가 담겨 있는 모습으로 험난하고 외로운 인생길을 함께 같이 가련다는 황혼빛으로 가득했다.전시회 맞은편에는 여러개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나무에 새긴 마음 조선현판,신라 화가의 초대,영산동 고분군과 조우,제22호 고분 김천 모암동 유적등의 포스터로  디자인과 글귀들이 옛 향기를 머금은 위대한 유산의 비밀 보고처럼 빛났다. 현판의 글자에도 마음을 새겼던 조상의 덕을 알수 있도록 하는 글귀와 디자인등으로 전시회를 보고 싶은 유혹으로  끌어 당겼다. 안내소에 김기만이 그린 묘향산 작품을 기증한 동양화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안개낀 신비한 바위와 계곡,정자로  자연 정취를 무릉도원처럼 매우 수려하고 신비롭게 표현한  산수화 걸작품 같았다.상설전시실에는 원효실,설총실,일연실로 나누어 전시되었다.

원효실 ~동아시아 불교의 새벽을 밝힌 원효(617년~686년), 한국 유학의 시초가 된 설총(654년~660년) 지혜의 눈으로 민족을 바라 본 일연(1206년~1289년)세분의 동상이 전시실 입구를 장식하며 위대한 성현들의 업적을 안내하고 잇었다.  

삼성현 연대기)

삼성현 연대기가 도표화 되어 전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사진을 참고)

석가모니와 원효의 유사점) 

원효는 압량군 남쪽 불지촌(경산) 617년 사라수 아래에서 출생하였다고 삼국유사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원효의 탄생은 여러점에서  석가모니와 비슷한 모습을 띠는데 석가모니는 원효보다 1000여년전에 고대 인도(당시 네팔)의 왕자로 태어났다.  밤나무 밑을 지나가다 원효를 해산했는데  석가모니도 사라수아래에서 태어났다. 원효에 관한 주요 사료는 삼국유사,송고승진,고선사시당화상비등이 있다. 마음이 생겨나므로 온갖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동굴 (땅막)과 무덤이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며 신라 승려로 아사이 불교의 선구자이다.일심,무예,화쟁사상을 강조하며  불교를 신라속에 독자적인 문화로 재창조하여 고려시대 해동종의 시조가 되고 후대에게 석가모니처럼 신성시 되었다.원효가 출가한 나이는 10세미만으로 추정되며 출가후 살던 집을 기부하여 초개사라 부르고  사라수곁에는 사라사를 세웠다. 원효는 여러 스승 찾아 다니며 수행과 배움의 길을 가졌고  무덤에서 40세? 해골물을 마시고 일심의 깨달음을 얻었고 석가모니도 35세 고행끝에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원효의 스승)

낭자는 신라 승려로 법화경을 가르켰으며 신통력이 있었다. 원효는 반고사에 머물면서 낭자를 찾아갔는데 낭자는 원효에게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저술하도록 하였다.혜공은 신라 성덕여왕때 승려로  원효가 찾아가 경소를 지으며 물었다고 한다. 고구려 스승 화상에게 열반경과 유마경 배웠다.보덕은 고구려 승려로 651년 원효(35세)가 경복사에서 의상(27세)과 함께 열반경과 유마경 가름침을 배웠다. 대안은 신라승려로 궁궐에 들어가지 않고 저잣거리에서 금강삼매경을 편집하고 원효에게 금강삼매경 지으라하였다.

원효가 만난 세상)

고구려와 중국 수나라가 전쟁하고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는 시대였다. 신라는 주변 나라와 전투하며 결국 삼국통일 이루었지만 이 과정에서 경제적 몰락과 정신적 백성의 참상을 목격하여 골품제 한계를 느꼈다.신라는 출신 성분에 따라 엄격하게 구별하는 골품제 실시하였는데 서라벌 거주자 (천민제외)를 대상으로 하였음에도 정치 사회 생활 등 신라 전반을 가장 오래도록 지배하였다. 골품제는 진골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등급을 매겨 사회 진출과 혼인 ,가옥 규모등에서 제약을 다르게 두었고 진골아래 귀족은 관직 진출에 제약을 철저히 받았다.진골 출신 아닌 원효는 신분차별로 사회적 한계로 인해 사상과 학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중불교를 꽃피우다)

원효는 파계와 번뇌로 민중속으로 들어가 유학기레 깨달음을 얻고 저잣거리에서 백성들과 어울렸다.저잣거리에서 부르는 노래를 무열왕만 알아들어 태종무열왕이 요석공주와 맺어주어 결혼하여 설총을 낳았다. 춤추며 교화하여 가난하거나 글 모르는 사람들도 부처를 전하였다.저잣거리에서 바가지 들고 춤추는 광대 본뜬 무예를 통해 불교를 민중에게 전하였다.노래를 지으며 춤을 춘 무예는 고려때 무애무로 궁중무용의 하나가 되면서 조선말까지 무애희 또는 무악으로 전승되었다.요석공주와 결합계기로 무열왕과 인척관계 형성하며 김유신과 인척관계 형성되었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그린 암호문을 원효가 해독하여 신라군의 퇴각을 가능케하였다.원효의 기이한 행적으로 신라사람들이 중국에 원효 행적을 전하였다.송고승전을 찬술한 중국의 찬녕은 신이한 행적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배도나 보지와 원효를 비교하였다. 

원효핵심사상)

무예,화쟁,일심사상이다.일심은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수 있다. 마음이 더럽다거니 깨끗하다는 상대적인 구분을 벗어난 절대적인 어떤 것을 일심이라 부른다. 중생의 깨끗한 마음으로 무한한 덕성 갖추고 있는 위대한 것이다. 그의 저서 대승기신론소는 당시 화엄 사상가들도 동일한 입장이었던 일심사상을 체계적 전개하였다.화쟁사상은 다툼을 멈추고 한마음 돠는 것이다. 석가모니 가르침인 한마음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갈등 없이 화목할수 있다는 뜻이다.무예를 통해 불교를 민중에게 전하였다.

유학길에 깨달음 얻다)

7세기 동아시아 불교계는 여러사상이 서로 격렬히 경쟁하였다. 645년 당나라승려 현장?이 인도 유학을 통해 새로 가져온 경론을 번역하여 중국에 신역불교가 성립되었다.그리하여 당시 중국에서는 대승불교내에서 일송과 삼송,구역유식과 신역유식 갈등이 발생하였다.그리하여 신라 불교계에도 신역유식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떠나는 풍조가 생겼다.34세때 원효도 의상(26세)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 떠났다.의상은(625년~702년)신라 승려로 진골귀족이다.계급평등을 주장한 승려로 의상과 함께 유학가려는 중 원효는 40세때 해골물로 심한 갈증으로 해골물 마셨는데 달고 시원함을 느꼈다. 날이 밝아 보니 해골물로 매우 역해서 토할것  같았는데 그때 깨우침을 얻었다. 마음이 생김에 갖가지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멸함에 해골물이 아니다. 드디어 다시는 스승을 구하지 않고 그날 해동으로 돌아가 화엄경을 주석하여 원돈의 가르침을 두루 펼쳤다고 임간록과 종정록에 실려있다. 원효 깨달음이 10세기 당시 중국 불교에도 널리 알려졌다.

원효와 의상)

원효와 의상은 유학을 두번 시도하였다. 원효 창건한 사찰은 불국사 포함 8개이고  의상이 창건한 사찰은 부석사,해인사 대표적 인 곳 포함하여 8개이다.신라 불교 전성기를 연  원효는 환속이후 민중 속에서 생을 마감했고 의상은 승려 삶을 살았다. 원효는 대중에게 경전을 쉽게 풀어 전하는 저술에 집중하였고 의상은 제자 양성에 힘썼다. 서로에게 미친 영향은 원효는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은 토종 사상가였지만 중국에 출간되는 신간 서적들을 곧바로 구해 읽음으로 의상 도움이 컸을것 추정한다.의상은 661년 당나라 유학 재시도에 성공하여 10여년 지난 후 귀국하여 화엄학을 신라에 최초 들여왔다.원효는 의상과 교류하면서 의상의 화엄교학의 성과를 수용하였다.고려 숙종(6년)1101년 원효와 의상은 동방의 성인으로 원효대성을 화쟁국사,의상대성을 원교국사로 추증하였다고 고려사에 전해진다.분황사에 비석(차화쟁국사지비부)을 세워 덕을 기록하여 그것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가 되었다. 

원효 저서)

금강삼매경론으로 금강삼매경에 대한 원효의 주석서로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과 혜를 닦아야 보살의 길이다.대립과 갈등을 일심사상으로 화해시켰다. 논을 부친것은 불교 중심지 중국학자들로 경론을 인용하면서 논리의 정립과 학문의 조직도 집성하였다.십문화쟁론은 불교 여러 학파 종파로 분열된 사상을 10가지로 분류하여 정리한 화합을 이루고자 불교적 논리 집대성한 원효사상 총결산적인  저술이다. 부처가 지향한 이론이 무쟁의 세계임과 비교하여 원효가 지향하는 이론이 회통불교 즉 화쟁임을 증명하였다. 오늘날 한국불교사상 핵심이며 인도까지 전해져 산스크리트로 번역되기도 하였다.대승기신론소는 인도의 마명이 지은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의 주석서이다. 8번 썼는데 현재 두 종만 남아있다.참기 어려운데 참는것이 보살의 경지이고 말할수 있어도 말하지 않는것이 큰 사람의 마음이라는 뜻이 대승기신론소 서문에 적혀 있다. 만물의 근원을 한마음으로 보며 이를 중심으로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한다 설명한 책이다.불교의 사상적 대립을 초월하는 가르침을 추구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으로 일심사상을 분석하고 이론화하여 중국 불교계 큰 영향 주어  중국 및 우리나라 기신론 연구가들에게 중요한 저서가 되었다.기타  80부 150권쯤 저술량을 남겼는데 불교사상 양과 질에 있어 최고이다.   

대승을 회고하다)

일찍이 원효생애와 사상들이  한국,일본,중국에도 전해졌다.

설총실~

설총(654~661년)은 신라 중대 대학자,유학자로 경전과 역사에 뛰어났으며 후대 학자들이 유학의 종주로 받아들였다.이두를 집대성하여 그것을 구경을 읽을수 있게 하고 학생들을 가르켰다.신라 10현의 한 사람이며 신라 3문장으로 꼽힌다.문장가로 유불선을 통합하는 폭넓은 사상을 보여 준다. 설총의 이두가 조선시대 세종의 한글 창제하기 까지 쓰였으며 한국 사상과 문자생활에 끼친 영향력이 무척 크다.전해지는 문집은 계원필경,근체시,사산비명,오언칠언금체시,제왕연대력,우화적 단편산문인 화왕계등이 있다. 

유학의 도입과정) 

춘추전국시대( B.C770~ B.C 221년) 원시유학시작, 공자가 유가사상 창시하고 경전(육경)집필하였다.맹자가 유가사상 이어받아 발전시켰다.한나라때 유가경전을 복구하는 훈고학 발생,  삼국시대 57년 신라 법흥왕때 한당유학 토착화,신라 중대 설총이 이두로 유가경전을 풀이해 유학이 신라사회전반에 뿌리 내림,918년 고려 광종때 유학정착,송나라(960년~1279년) 경전을 철학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성리학과 주자학 발생,명나라(1368년~1644년)성리학에 반발하여 발생한 신유가철학인  양명학 발생,13세기말 안향이 성리학 도입,1392년 조선 성리학 토착화, 청나라(1616년~1912년) 실증적 연구학풍인 고증학 발생

신라 유학의 흐름)

신라사회 한학은 지배게층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수용되었다. 당시 유학을 중심으로 한 통치체제가 확립되면서 왕권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전개되었다. 왕의 권위와 국가발전 찬양하는 국사 편찬으로 나타나고 의학,역학,천문등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폭을 확장하였다. 통일신라시대는 국왕의 절대권럭과 연결되어 국가에 질서의 원리를 제공하는 한당유학이 발달 하였다.이 같은 유학적 기풍이 한창 고조되는 시기 신라시대 강수와 최치원이 유학자로 대학자가 배출되었다. 청방인문표를 지은 강수는 신분으로 유학자,문장가로 진출한 현존하는 기록상 최고의 본격적인 유학자이다. 최치원은 신라 하대 유학자이다.

통일신라배경)

당나라와 협력하여 통일한 신라는 국호,복식,관작명,지방제도등 중국식 정치제도와 문물을 수용하는 한화정책을 실시하여 당나라와 우호적 관계맺으려 하였다.신문왕 이후 한자가 세력을 얻어 생활 전반에 반영되었다.경덕왕(742년~765년 재위)왕권강화로 국기 시스템 전반을 중국식으로 바꾸었으나 귀족세력사이 심한 반발이 일어났다. 682년 신문왕2년 설총이 국학설립을 주도 하였다.국학은 유학을 공부하는 신라 최고 교육기관이고 관리 양성기관이였다. 통일후 국가 정치체체의 정비가 일단락되자 지배 체제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유학 주임의 정치 이념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로 유학교육을 전담하는 국학이 설치되었다. 경덕왕때 태학감이라 부르고 혜공왕때 국학이라 불렀다.교수과목은 논어,효경,예기,주역, 상서모시,춘추좌씨전,문선 등..충과 효를 강조하는  경학이 주가 되고 문학이 부가 되었고 유가의 윤리가 담긴 논어와 효경이 공동 필수과목이였다.

이두)

한문에 토를 달것을 이두라고 한다.우리나라는 한자를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한자로 우리말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두는 한자의 음(쇨)와 훈(뜻의 새김) 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것이다. 한자를 한국어의 문장구성말에 따라 고치고 여기에 토(조사)를 붙였다.이두는 조선후기 1910년까지 공사 문서전반에 걸쳐 관직의 높고 낮음에 무관하게 꾸준히 쓰이며 명백을 유지 했다. 한글이 창제한 이후에도 사용했는데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 중 하나는 국어를 표기하기에 불완전한 이두를 정음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리하여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문 이두 정음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두는 한글이 완전히 보편화된 근대 초기 와서 사라졌다.

후대의 영향)

설총은 가전체 문학의 선구자로 고려 중기에 나타나는 가전체 문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가전체소설은 인간이 아닌 사물을 의인화하여 그 일대기를 전기의 형식에 따라 허구적으로 그린 작품을 말한다.조선중기 임제가 지은 의인체 한문소설인 화사와 조선후기 이이순이 지은 화왕전의 선국적 형태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사절요와 고려사에  현종(13년) 설총을 홍유후로 추증하고 문묘 배향의 기록이 전해진다.후대 문묘에서 그를 성현으로 모셨는데 경주 서악서원과 전주 남악서원에 제향되었다. 두곳 모두 김유신,최치원,설총을 배향하여  오늘날까지 제향의식을 행하고 있다.

우리나라 문묘 설치)

714년 성덕왕(13년) 문선왕(공자)과 10철72제자의 화상을 가지고 와서 왕명에 의해 국학에 두면서부터 이다. 

일연실~

빛이 깃든 아이로 일연 어머니는 배에 밝은 해가 비추는 꿈을 꾸고 일연을 낳았다.일련은 어머니를 봉양한 중국 승려 목주 진존숙 사모하여 스스로 호를 목암이라 지을  정도로 효심 깊었다. 승려 최고 위치였던 국존자리에서 물러나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삼국유사에 효선편을 묶어 따로 묶어 소개할 만큼 효를 중시하였다. 보각국사 일연은 고종때 대선사 출렬왕때 국존이 되었다.저서로 삼국유사와  중편조동오위가 있다.

일연의 발자취)

행적과 역사관-100여권 저서를 남겼으나 2편만 남아있다. 삼국유사 저술하는 행로 속에서 민중의 삶에 직접 동참하여 불교문화사적 시각으로 당대인의 삶과 역사를 바라 보았다.그리하여 삼국유사에 일연의 불교적 주체적,자주적,민족적,역사관이 표현되어 있다.삼국유사는 고려 충열왕때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의 중요한 사건을 모아 지은 역사서이며 5권2책으로 구성된다.고려시대 목판 인쇄본은 발전되지 않았고 조선 초기 인쇄한 듯한 탁본이 전하며 완본으로는 1512년 조선 중종(7년) 이제복에 의해 제 간행된 임신본이 있다.김부식의 삼국사기와 함께 현존하는한국 고대 역사서의 쌍벽으로 여져진다. 자료 수집은 청년시절부터 였고 집필은 70대 후반부터 입적하기까지 주로 만년에 이어졌다.일련의 행적은 51세 1256년 고종(43년) 증편조동오위 편찬,73세 1278년 충렬왕(4 년) 삼국유사와 왕력,찬술의 기초인 역대연표 간행, 84세 1289년 충렬왕(15년)낙향해 모친을 봉양하였다.

국란속에서 정립된 일연의 역사관)

(1)배경~무신정권의 성립은 13세기 고려사회를 규정짓는 가장 중대한 사건이였다. 1170년 의종24부터 1270년 원종11까지 100년간 무신이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중부 반란이후 최충헌,최우,최항,최의 4대 걸쳐 집권한 약 60년을 본격적인 무신정권기라고 본다.고려전기 문신에 비해 차별받는 무신과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하급 군인의 불만이 높아졌다.그리하여 무신정변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왕위에 얹혀 정권을 수립함  뿐만 아니라 무신정권 기간 동안 몽골은 여러 차례 고려를 짐입하였고 이를 막아내고자 하였던 고려인들의 항쟁은 계속 되었다.무신정권의 시대 국가의 무능력과 고통 받는 백성의 실상을 바라본 일연은 새로운 역사관의 정립을 통해 민족의 자주성 회복하고자 하였다.

(2)몽골의 침입과정~

1차침입-고려의 몽골 화친정책,

2차침입-고려 강화천도,팔공산 부인사 초조대장경소실

3차침입-황룡사9층석탑소실,제조대장경(팔만대장경)조성시작

4차침입-침략의 장기화

5차침입-몽골군의 남진저지

6차침입-무신정권몰락

7차침입-삼별초반란과 항복,몽골의 간섭시작

(3)민족의 자주성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일연~40여 년 간 치러진 몽골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고려인들은 황룡사 장육존상과  9층탑,팔공산 부인사의 고려 초조대장경 등 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나타내 주었던 많은 문화재를 잃었다.고려인들의 항전의지를 꺾고 사기를 저하시키고자 나라의 보배로 여기는 문화재를 불태웠다.일연은 삼국유사의 탑상편에 황룡사 장육과 황룡사 구층탑 조에 사찰의 내력과 의미를 상세히 밝혀 놓음으로써 황룡사가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빛났던 옛 모습과 찬란한 영광을 기록하여 우리 역사 문화의 진정한 가치를 드높이고자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삼국시대 대표적 역사책이다. 두 역사서는 고려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 판이부사에 오른 김부식(1075~1151)과 승려 최고 직위인 국사에 오른 일연(1206~1289)이 각각 저술하였다. 출신과 삶의 행적이 달랐던 두 역사가는 역사인식에서 부터 역사서의 저술목적과 서술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삼국사기는 1145년 인종(23년)왕명에 의해 편찬된 관찬역사서로 이상적인 유교정치구현으로 국가의식이 강조되었다. 묘청의 난 이후 변화된 국내외의 정세 속에서 고려의 역사적 정체성을 재정립할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전체 형식으로 본기28권 연표3권 잡지9권 열전10권으로 전체50권으로 구성되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인용 자료의 근거를 명확히 밝히는등 객관적인 서술방식을 유지하였다.

삼국유사는 대몽항쟁 이후 원 간섭기에 고려의 자주성을 재확립하고자 1281년경에 편찬되었다.특히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의 시조를 단군으로 삼은 최초의 기록이다. 일연은 신이한 이야기들을 실어 우리 민족의 고귀함을 강조 하고 중국과 대등하게 역사가 발전해왔다는 점을 밝히고자 하였다.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효선 5권2책이며 독창적인 체제로구성되어 있다. 일연의 답사를 토대로 사료와 자신의 견해를 구별하여 기록하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삼국사기에 전하지 않는 역사,불교,신화,설화,향가 등 광범위한  내용은 오늘날 한국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삼국유사)

(1)삼국유사 서술배경~일연이 살았던 고려는 몽골의 침략,무신정변,농민봉기등의 대대적 혼란 이 혼재하였다.환란의 시절에 삼국유사 집필함으로써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기이한 설화를 기록하여 심신이 파괴된 민중에게 역사의식과 자긍심 고취시켰다.

(2)삼국의 건국~ 고구려-이 나라 풍속에 활 잘 쏘는 자를 주몽이라 하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다.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하여 열명의 신하를 보필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하였다. 때가 중국 한나라 기원전18년이었다.온조의 형인 비류는 미추홀에 따로 나라를 세웠는데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하게 살수 없었다 그런데 위례성에 가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고 있으니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며 죽으니 비류의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백성이 올 때까지 기뻐하였다고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신라-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며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리다라고 삼국의 건국을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와 신라는 알에서 태어나는 신기한 현상들의  믿기 어려운 신화같은 이야기 서술하였다.노래로 되살아나는 고대인의 삶을 서술하였다.

(3)삼국유사의 의의~삼국사기와 함께 한국 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로 평가된다.삼국사기가 체제나 문장이 정제된 데 비해 삼국유사는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이며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것을 표현하였다.전해지지 않은 역사,불교,설화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각종고문적에 이르는 많은 문헌에 인용되어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4)삼국유사 구성과 내용~ 삼국유사는 불교 중심의 역사서로 기이한 일화와 설화등이 주를 이룬다.진책5권2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시 9편으로 나눌수 있다. 삼국의 왕대와 연대,고조선을 비롯한 여러 고대 국가의 흥망,신화,전설,신앙,역사,불교에 관한 기록을 하였고 고승들에 대한 설화,효행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등이 수록되었다.

권1 왕력 제1은 중궁의 연대를 기준으로 삼국시대부터 후삼국의 연표,역대 왕의 출생 즉위 치세를 비롯하여 기타 주요한 역사적 사실등을 기록하였다.권1 기이 제1은 고조선 이하 삼한,부여, 고구려와 통일 이전의 신라 등 고대 국가의 흥망 및 신화,전설,신앙등에 관한 유사 36편을 기록하였다. 권2 기이 제2은 통일신라시대 문무왕부터 경순왕까지의 신라 왕조 기사와 백제,후백제 및 가락국에 관한 약간의 유사 등 25편을 기록하였다. 권3 흥법 제3은 불교전래의 유래와 고승들에 관한 행적 등 7편을 기록하였다. 권3 탑상 제4은사기와 탑,불상 등에 얽힌 승전 및 사탑의 유래에 관한 30편을 기록하였다.권4 의해 제5은 신라 때 고승들의 행적을 담은 설화14편 기록하였다.권5 신주 제6은 신라 밀교계통 고승들의 기이한 행적을 통헤 불교와 무속의 융합,호국 불교의 모습을 다룬 전기 3편을 기록하였다.권5 감통 제7은 부처와의 영적 감응을 이룬 일반 신도들의 영검이나 영이 등을 다룬 설화 10편을 기록하였다.권5 피은 제8은  구도 과정에서 세상을 들지고 홀로 불법을 닦은 승려들의 행적 10편을 기록하였다. 권5 효선 제9은 뛰어난 효행 및 선행에 대한 미담5편을 기록하였다.

일연의 중편조동오위)

어록 2권,계송잡저3권,중편조동오위2권,조파도2권,제승법수7권,대장수지록3권,선문염송사원 30권,조정사원30권 등 100여권이 있다고 한다. 이중 중편조동오위는 1256년 고종(43년) 고려 후기 일연이 중국 선종의 분파 중  하나인 조동종의 오위설애 대하여 주를 보완하여 엮은 책이다. 경남 남해 길상암에서 간행되었으나 책명만 전하던 책이였는데 1974년 학자 민영규(1915년~2005년)가 일본 쿄토대학에 소장된 1680년 간행본의 일연 저술임을 밝혀 세상에 알려졌다.이를 통헤 일연이 폭넓은 사상과 학문적 기초를 조금이나마 알수 있게 되었다.

나라의스승이 된 일연)

일연은 충렬왕 부름을 받아 고려국사가 되었다. 도와 덕이 높고 성대하여 우러르는 바이다라고 충렬왕이 말하였다.국사는 민중을 도덕으로 교화할수 있는 승려가 오를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로 일반 백성까지 도덕적으로 여겼다. 일연을 기억하는 유적과 유물인 보각국사비와 비첩이 있다.

후대 학자들에게 영향) 

서거정(1420년~1488년)노사신 강희맹,동국여지승람제6권 출판하였다. 최남선(1890년~1957년)에게 20세기 재평가되고 빛을 보았다.17세기 중엽 실학사상이 나타나면서 경학의 종속이 아닌 역사학의 독립성에 대한 인식 시작하였는데 실학자 안정복(1712년~1791년)은 삼국유,삼국사기,고려사등 43종과 사기,한서를 비롯한 중국서적 17종 등 광범위한 자료를 참고  비교 검토하는 고증학적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동사강목을 저술하였다. 최남선(1890년~1957년)에게 20세기 재평가되고 빛을 보았다. 

일연실에는 황룡사9층목탑 모형이 전시되었다. 황룡사9층목탑은 신라 삼보의 하나로 삼국유사에는 이 탑이 643년 선덕여왕(12년)자장의 요청에 의해 건립 되었다고 한다. 698년 효소왕(7년)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여러차례 중수되었으며 872년 경문왕(12년)에 탑을 중수하면서 창건 당시 봉안유를 등에 관해 기록한 신라황룡사찰주본기가 현재까지 남아있다.1238년 고려 고종(25년)몽골의 병화로 전체 불타버린후로 중수되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초까지 실시된 현장조사를 통해 현재 목탑터에는 64개의 초석이 남아있다. 황룡사9층목탑 모형이 전시 되었다. 황룡사9층목탑은 정치,사회,문화에 의지했던 민족 불교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고려문화를 대표하는 목탑이였다.모형이였지만 처음 보는 순간 장엄하고 웅장하게 다가 왔다.삼국시대부터 전해져 온 찬란한 문화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숨결이 느껴지며 가슴이 뭉클했다.일연실으로 나오면서 "홍익인간"표어가 붙어 있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고조선 건국이념인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뜻으로 초등학교시절 들었던 문구엿다. 고대부터 인권을 제일 중요시 했던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면서 홍익인간과 오늘날 민주주의 인간론 주제가 비교 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같이 삼성현역사문화관은 원효,일연,설총의 주요한 내용을  집약적으로 간략하게 제시한 문화관이였다. 매우 꼼꼼하게 자료와 글들 완벽하게 정리해 놓은 위대한 학자들이 탐구한 전시실 같았다. 박물관 못지 않은 내용들과 전시들로 가슴 벅차오르는 매우 감동적인 문화관이였다. 우리나라 역사 성현같은 위대한 스승을 알고 역사를 돠돌아 보게 되는 매우 유익하고 뜻깊은 카타르시스가 넘치는 시간이였다.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야외에 있는 원효대사 깨달음장에 갔다.원효는 우리나라 밖을 나간적 없는데 학문과 사상은 일본 중국 인도까지 전해지며 동아시아 불교발전에 영향 끼쳤다.어머니가 서당 (원효대사)을 가졌을때 별똥별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밤나무아래에서 출생하였는데 이때 훌륭한 인물 탄생 축하하듯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고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은 서당은 출가하기로 결심하였다.위대한 스님 이름을 부처의 태양이 처음으로 빛나다와  근원을 이루는 새벽이라는 법명으로 원효라 지었다. 당나라 현장이 17년간 인도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오고 그가 새롭게 번역한 불교경전이 유행하다는 것을 듣고 원효와 의상은 당나라 유학가기로 하였다. 도를 닥았던 친구 의상대사와 당나라 첫번째 유학길에서 고구려 맞닿는 국경근처에서 고구려군에게 체포되었다. 염탐꾼으로 오해받았으나 신라로 결국 돌아오게 되었다. 그후 첫번째 당나라 유학길이 실패로 돌아간지 11년째 되던  661년 태종무열왕(3 년) 다시 둘이서 두번째 당나라 유학길을 갔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땅을 통해 안전하게 당나라 갈수 있었기 때문에 바닷길로 가기로 게획을 세웠는데  당항성근처에 이르러  당항성 인근에서 폭우를 만났다. 그로 인해 고분에 들어가 휴식하였는데 그곳에서 해골물을 먹고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똑같은 것이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깨달음으로 원효대사 깨달음 일화는 종경교록,송고승전,임간록,지월록 등 중국 옛 문헌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신라최고 원효대사 에피소드  와 마음화합,화쟁사상으로 구성되었다.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다같이 모이기로 약속한  동의한방촌으로 갔다.

따쓰한 햇살이 비추며 봄의 생동감으로 넘치는 길따라 리더를 만났다. 남은 사과를 나에게 주어 꿀맛 같았다. 버스에 오르기 전  한 화원이 과자를 주어 다른 회원에게 주었다. 처음 보는 회원끼리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서로 간식을 나눠 먹는 친절이 일상화된 밴드모임으로 좋은 추억의 경험이 아닐수 없다. 시간이 되어 동의한방촌에서 남매지에 갔다.남매지는 도심 중앙 저수지의 최대 연꽃단지였다.수련군락,연꽃식물원, 관찰학습원의 수생식물원을 이룬 지방 소도시 호수공원이였다.계단씩으로 쌓아 올린 바위들의 제방위로 초목이 드리우고 맑은햇살에 비춘 연청색 호수의 중앙 테크길로 생태공원을 이루며 시골향기로 가득찼다.정원에 조각 생태 작품이 버티고 있었다.씨앗에서 삼투하여 꽃봉오리로 맺어지는 형상으로 생태계의 순환,자연의 이치 및 생명의 근본질서를 표현한 작품이였다.남매지에서 저녁을 먹으러 도모리 식당에 갔다.골목길에 빈틈없이 아주 야무진 표어가 붙은 식당으로 입구부터 신뢰로 다가왔다. 애호박 돼지찌게 밥을 먹었다. 애호박 돼지찌게는 매우 잘게썬 애호박,당근,고추,양파가 매우 듬뿍 들어간  소고기 육계장 겪으로 돼지고기로 국을 만든 찌게였다. 비린내 나지 않는 육수와 고추장 비법 소스가 결합된 요리사의 인고의 실험으로 탄생한  일품맛이였다. 버섯향기가 가득한 양송이버섯볶음,싱싱한 김치,고추가루의 깔깔함이 더해진 깻잎절잎,달지않는 콩자반으로 힐링이 가득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서양소스의 조합인 소스와  조미료맛의 국물,파슬리가 들어간 샐러드,김치,검은깨의 고명인 밥이 곁들여 나온 돈까스로  주문할때 생 돼지고기를 바로 튀겨 나왔다. 바삭하고 부드러운 맛을 간직하고자 하는 정직한 맛과 매우 도톱한 살고기로 아낌없이 주는 요리사의 마음으로 매우 인상적이였다.저녁을 아주 맛있게 먹고 서울로 향했다.차창가로 해가 붉게 저물고 입장휴게소에는 초승달이 반기며 쌓인 피로를 달래 주었다.

반곡지
반곡지앞 DO NOT DISTURB카페
입구
민속그네
삼성현역사문화관
중앙광장부근
삼성현역사문화관 1층 복도

삼성현역사문화관 기획전시실)

아코디언
환성산(2013년)
강변(2003년)
해변(2008년)
조규석 "고향을 그리다"~유정천리(2013년)
기획전시실~포스터

 

삼성현역사문화관 상설전시실 원효실)

원효영정(19세기)
의상영정(19세기)
원효실

 

설총실)

남악서원 현판,설총영정(1919년)
설총 신도비와 도동재
설총실

 

일연실)

역대년표 13세기 해인사
역대년표
9층 황룡사지석탑 모형
삼성현역사문화관~일연실
삼성현역사문화공원~원효대사 깨달음 체험장
남매지~생태
모도리식당
입장휴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