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1일~굿모닝여행사에서 속초로 여행을 갔다. 침묵의 그림자로 얼룩진 저수지를 지나 속초시에 도착하니 설악산 설산이 위엄으로 속초시립박물관까지 비추며 생동감이 넘쳤다. 속초시립박물관 야외에는 속초 실향민 문화촌을 이루고 있었다. 6.25전쟁으로 속초로 월북한 피난민들 삶의 터를 재현한 추억의 전시실 마당으로 슬래트지붕과 함께 맞배지붕의 속초 간이역,피난민집터로 근대 속초의 가슴 아픈 역사를 담고 있었다. 실향민들의 고향을 담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 가옥이 전시 되었다. 19세기 말 평안도 쌍채집은 안채와 바깥채가 서로 마주보는 구조로 북서풍 영향이 강한 평안도의 경우 대청없이 부엌에서 안방,웃방,맏웃방 등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부엌에서 모든 난방을 하였다. 부엌과 다른 방들이 일자형으로 배치되고 건물의 좌우 끝은 담으로 이어졌다.19세기말 함경도집은 정주간이 있는 서민주택으로 함경도 지방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철 추위가 심하므로 방한과 보온을 위해 용마루 아래 모든 방들을 배열한 겹집구조이었다. 특히 방들을 앞뒤로 배치하는 밭전자 형태를 취하였다. 정주간은 함경도집의 큰 특징인데 부엌과 방사이에 위치한 온돌방으로 벽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주간은 난방이 되기 때문에 겨울에는 침실로 평상시에는 식당이나 친구들 접대하는 공간의 다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외양간과 방앗간이 정주간과 부엌옆에 배치되어 추운 날씨에도 작업할수 있었다. 추억의 전시실을 중심으로 발해역사관과 박물관전시실이 있었다.회색벽체를 중심으로 돌들을 쌓아 올린 성벽의 발해역사관이 매우 귀중한 역사의 보고 같았다.
발해역사관
발해를 건국한 고왕~대조영은 발해를 건국한 건국 주로 시호는 고왕이며 고구려 멸망한 후 영주에 사민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부흥을 막기 위하여 왕 대신 세력사등 3만 8천호를 중원의 황무지에 강제 안치시키고 빈약자들만 안동에 남겨 두었다. 696년 기아에 허덕이던 거란인에 대한 영주도독 조해의 폭정으로 거란인 이진충과 손만영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영주를 출발하여 유주까지 점령하였다. 당나라는 돌궐 해의 도움으로 비로소 거란의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바로 이때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영주를 탈출하여 요하를 건너 요동에 이르렀다.
대조영 일행의 이동경로~영주를 탈출한 유민들을 인솔한 사람은 대조영과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으로 거란인 반란이 일어나고 얼마되지 않아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대조영의 아버지를 진국공,그를 돕던 말갈추장 걸사비우를 허국공으로 책봉하여 회유하는 한편 이해고를 보내 토벌케 하는 강온양면정책을 썼다.그러나 걸사바우는 그 명령 받아들이지 않다가 거란의 이해고에 토벌되고 걸걸중상은 병사하였다. 그 후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도망하니 이해고가 추격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병과 말갈병을 이끌고 천문령에서 이해고를 격파하고 비로소 동모산에 이르러 698년 발해를 건국하여 나라를 세웠다.
대조영의 발해건국과 주변국상황~대조영은 당나라의 토벌 막아내고 마침내 길림성 즉 동모산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건국초기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교류하고 대조영은 부여,옥저,변한,조선,해북제국 등 영토확장하였다.당나라가 대조영을 책봉한것은 국제적으로 독립된 국가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고구려 멸망 한 후 이를 계승한 발해를 세운 고왕은 718년까지 40여년간의 노력을 기울여 국가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군주였다.
고구려 계승국 발해~발해의 국가적 성격은 무왕과 문왕대 명확히 드러낸다. 무왕은 고구려의 옛 땅을 소유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하였다. 발해는 고려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758년 일본에 사신으로 떠난 양승경에 대해 일본에서는 고려사라고 불렀고 그가 지닌 국서에는 고려국왕 대흥무라고 말하였다.따라서 발해는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부여를 계승한 나라이다.
망국의 한~ 발해는 698년부터 926년까지 230년간 현재의 중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과 북한 러시아지역 기반으로 남쪽의 신라와 남북구을 이룬 나라이다. 고구려가 멸망이후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거나 강제로 이주되었다. 발해를 세운 고구려 장수 대조영도 당나라에 의해 현재의 요령성 조양인 영주지역으로 강제로 옮겨가 살았다.
대륙의 꿈 상경성~ 외성을 축조한 상경성에 절터 9곳이 발견 되었다.석응은 조형이 매우 아름답고 조각이 정교하여 발해유물 중 진품이다. 궁성은 주로 현무암을 다듬어 쌓았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유지는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에 있다.
해양문화와 대외교류~발해는 신라,당,일본과 육상과 해상을 통해 활발히 교류하였다. 발해와 당과 교류는 주로 책봉,하정,숙위,유학등으로 대별되나 일본과의 교류는 대부분 경제적 교류였다. 일본의 첫번째 교류는 727년 발해 무왕 인안8년 영원장군 고인과 덕주,사나루,고제덕 등 24명을 파견 한 일이다. 발해가 일본에 수출한 것은 담비가죽,호랑이가죽,인삼,꿀 등 토산물이였고 일본으로 부터 견,면,릉등 비단제품과 황금,수은,염주등 수입했다. 발해 5경인 동경용원부에서 천정군까지 39역이 설치된 신라도가 있다. 발해와 신라는 주로 이 길을 이용하였다.
천도과정~ 발해는 742년 무렵에 건국의 터전인 구구에서 중경으로 756년 중경에서 상경으로 785년 상경에서 동경으로 794년 동경에서 상경으로 4번 수도를 옮겼다. 4번의 천도 가운데 5대 성왕(재위기간 794년)에 동경에서 상경으로 환도한것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모두 3대 문왕대 (737년~793년)에 이루어졌다. 바로 천도가 국가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토팽창~발해는 사방 5천리의 광대한 영토 확보하고 편호가 10만 승병이 수만에 이르는 거대한 나라이다. 발해의 기록 전하고 있는 구당서와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영토확장은 고왕,무왕,선왕 3대에 집중되었는데 건국이후 고왕 대조영은 끓임없이 영토확장하여 부여,옥저,변한,조선,해북제부를 개척했다.이에 당나라로 부터 705년 시어사 장행급,713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홀한주도독으로 책봉되었다. 무왕시기에는 더욱 말갈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며 동북지방 오랑캐인 말갈을 복속시키고 당나라의 기미주가 되어 발해를 공격하려던 북방의 흑수말갈을 정벌하고 심지어 당의 등주를 공격하기도 했다. 10대 선왕 때에 이르러서는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해북제국을 처벌한 후 마침내 해동성국으로 불리었다.
발해강역~구당서에는 말갈과 고구려 남은 무리들이 귀부하여 왔으며 남쪽으로 신라와 경계 삼았고 서쪽으로는 월희,말갈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과 국경을 마주하였다. 부여,옥저,변한,조선,해북제국을 모두 얻었다. 이후 2대 무왕은 동북지역에 위치한 민족들에게 대한 정복활동을 지속하여 말갈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던 요동지역과 압록강지역 확보하였다. 흑수주 설치문제로 비화된 당나라 등주공격의 발판으로 삼기도 하였다.하슬라주의 장정을 모아 북쪽에 장성을 쌓고 발해의 등주공경에 대항하여 당이 신라로서 발해의 국경을 공격하게 한 기록을 통해서 대동강과 원산만지역으로도 세력을 확장하였음을 알수 있다.발해의 최대 강역은 3대 문왕대 천도와 5경15부62주의 행정구역의 설치를 통해서 확인된다. 상경설치는 흑수말갈 복속의 결과이고 남경설치는 신라로의 세력확장을 통해 국경을 확정시킨 결과이다. 6대 강왕의 국서 내용에서 영토가 처음과 같이 되었다처럼 강역범위의 축소와 회복을 알수 있지만 10대 선왕이 즉위하여 해북제부를 복속시키고 신라와의 국경을 확정함으로써 다시 발해영토를 크게 회복하였고 드디어 해동성국으로 불리었다.
중앙관제~문왕대에 중앙관제를 비롯한 군사제도가 정비되었다. 외국사절을 접대하는 사빈시 등 7시를 만들고 국가의 동량을 양성하는 주자감을 세웠다. 문서를 관리하는 문적원 만들어 해동성국 기틀 마련하였다.
군사제도~ 신당서와 속일본기 등 발해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사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발해의 철기 농기구~ 발해는 건국이후 야철업이 점차 발달하여 철기 사용 보편화되었다.우경이 실시되고 수리관계사업도 발전되었다. 노주는 벼의 생산으로 유명하다.
발해의 종교생활~ 불교는 고구려시대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발해도 불교를 계승하여 다양한 형태의 불상을 제작하였다.
속초와 발해의 연관성~조선전기 속초포라 기록되어 있는 속초는 신라때 수성군으로 불렀고 고구려시기 수성군, 발해시기에 그 영토가 되었다. 신당서에서 발해는 건국이후 사방천리에 달하는 강역을 확보하여 나하를 경계로 신라와 국경을 마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삼국사기에는 성덕왕이 강릉장정들을 동원하여 북쪽 변경에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발해와 신라의 국경으로 언급된 나하는 지금의 강릉지역으로 비정되는 곳으로서 발해의 영향력이 강원도 강릉선까지 미쳤음을 알수 있다. 발해와 신라의 교류는 동경용원부와 남경해부를 거쳐 속초를 경유하는 발해신라도가 이용되었다. 속초는 발해와 일본과의 국서문제로 일본의 대외창구가 태재부로 단일되면서 주목된 동해연안항로의 경유지였다. 속초는 발해와 신라 발해와 일본의 교류의 중추지역으로서 남북국시대 대외교류의 창구였다.
북한지역 발해유적~허천평성(신창토성,하호토성,북청토성)은 함경남도 북청군 하호리 남대천 좌안에 위치하여 8세기초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흙으로 축조하였고 일부 구간에는 가단부분에 돌이 사용되었다.부거성은 함경북도 청진시 부거리의 부거천 좌안에 평지에 있는 성이다.
발해사연구~고 방학봉선생은 연변대학 교수이자 발해사연구소 소장이였다.발해에 대한 주요논문과 저서를 출판하며 평생 발해사 연구에 매진하였다. 오늘날 발해사 연구 독보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박물관 전시실
선사시대부터 현재 이른 속초 삶과 문화,한국전쟁이후 정착한 실향민 삶과 문화를 엿볼수 잇는 곳이였다.
전시실 복도에는 월하 박춘근작의 벽산유곡 작품이 걸려 있었다. 날렵한 선의 입체감과 여백의 미를 잘 살린 산과 신비한 바위의 강줄기로 명상적인 작품이였다.김태주 선생님이 평생 수집한 화페와 수석등이 전시 되었다. 속초고무상회 하시면서 수집한 것을 속초시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이였다.수석의 종류인 산수경석은 자연의 수려한 온갖 풍경의 요소가 작은 돌에 축소되 나타난것이고 물형석은 사람,짐승,초가,옛유물등 정감 넘치는 어떤 형상을 닮은 돌이다. 문양석은 온갖 자연만상의 모양이 무늬로 새겨진 돌이고 색채석은 빚깔이 화려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주로 감상하는 돌이다. 추상석은 무엇과도 닮은 것이 아니라 형태 그 자체가 기묘하고 감동적인 것이고 전래석은 옛 선인들이 애완하여 오랜 세월을 걸쳐 전래 되어온 돌이다.화폐 연대표와 함께 화페들이 전시되었는데 화폐 디자인들이 고귀한 예술작품 같았다.
속초 유적지~청호동유적은 후기 구석기 시대 뗀석기 돌도구와 석기제작소가 있는 곳이다.철기시대 마을유적이 확인된 복합 유적으로 청초호는 아름다운 자연석호와 동해바다 드넓은 백사장,산지와 울창한 산림이 한데 어우러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풍요로운 삶의 보금자리였다.타날문토기 (두드림무늬토기),경질무문토기(경질민무늬토기)가 대표적인 철기시대 토기이다. 외옹치유적은 신석기시대 유적이고 장사동 유적은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 교동고분이 출토 되었다.
속초 발전사 선사시대~양양지역에서 구석기 신석기유적 발견되었다.기원전1000년 무렵부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농사짓고 무늬가 없는 토기를 사용하였다.속초는 부족국가시대 동예에 속했고 당시는 군장이 통치하던 연맹왕국이었다. 동예국은 춘천일대의 맥국과 더불어 강원의 고대사에 예맥국시대 열었다.
고대시대~속초는 양양에 속하였다.양양은 고구려에 속해 있다가 신라의 북상에 따라 신라에 속하면서 화랑도는 강원도 동해안에서 심신수련을 하였다. 고승들이 불법 수행하는 기도처로 많이 찾아 찬란한 불교문화 꽃피웠다.신라 진덕여왕(6년) 652년 신흥사 전신인 향성사가 창건되었고 그 후 원각사 ,화엄사, 낙산사등...사찰이 건립되었다.
중세~속초는 고려전기에는 약령현이였고 후기에는 양주라하였다. 고려시대 외적 침입 잦았는데 이를 방어하여 국토를 지켰다.고려 고종(8년)1221년 이 지역을 침입한 거란병을 방어하여 양주방어사로 현령의 직위가 승격되었다. 그 후 고종(40년) 1253년 강원도까지 세력이 미친 몽고의 5차 침입의 경우 낙산사기에 의하면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서 수어했다는 기록이 있다.그 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말하는데 권금성으로 추정한다.고려 말에는 왜구가 전국의 해안과 내륙에 까지 침입하고 약탈하였다. 우왕(9년)1383년 속초 인근 고성 지역인 동산현을 침법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왕(6년)1380년 강릉도 상원수가 되어 왜구를 격퇴한 조인벽을 모시는 동명서원이 양양 조산리에 세워진 것을 보면 이 부근에서 왜구를 격파했음을 알수 있다.
근세~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이 지역은 태조 이성계 외향이라는 명분으로 태조(6년)1397년 부로 승격되었다.당시 지방의 관립학교로 고을마다 향교가 세워졌고 사립학교가 있었다.육군경비전투기지 격인 관방과 해군경비기지 격인 해방이 있었다. 군사상의 목적으로 대포동 외옹치에 덕산봉수가 설치되었다.
근대~조선후기 전국적으로 반봉건 반외세 민족운동전개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 운동은 의병항병으로 이어졌다. 1910년 영양군의 3.1운동으로 대중운동이 전개 되었다.
현대~ 1945년 8.15해방으로 38이북에 위치한 속초지역은 공산정권에 속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수복되었다. 국토 분단 시기에 월남하여 속초에 거주한 함경도 사람들은 아바이마을 청호동 이라는 집단촌을 형성하였다. 1963년 시로 승격하여 비약적 발전하였다. 1999년 강원국제관광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강원관광 위상을 빛냈다. 2000년 4월 속초항에서 러시아 자르비노항을 경유하여 중국 백두산으로 항해 하는 카페리 직항로가 개설됨으로 인해 북방 관광 교역의 전진기지 역할 담당하게 되었다.동해 설악산 금강산을 연계한 관광 교두보로서 국제 관광과 교역 중심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설악산은 민족의 영산으로 삼국을 통일한후 민족 통합을 이룩한 신라 이래 영산이었다.설악동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51호이다.
속초 역사 인물~박지의(1799년~1859년)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으로 충효를 겸비하여 헌종이 승하하자 쌍천변 학무정옆에 제단 마련하고 삼시곡배하여 충신 박지의라고 칭송하였다.이석범(1859년~1932년)은 전통적인 유학자로 도둑떼 평정하여 신흥사 파산을 복구하였고 대포항 개설 등에 크게 공헌하였다.일제시대 양양과 도문에 학교를 설립하여 항일독립운동을 고취하였다. 이 지역 3.1운동 중추역할을 하다 투옥되었다.1926년 이상재선생 등과 신간회 조직하고 강원도 지부장으로 활약하였다. 매곡 오윤환(1872년~1946년)은 속초의 유학자,교육자,항일운동가로 율곡 이이사상을 연구하며 후학을 교육에 앞장섰다. 19세부터 74세 돌아가시기 전날인 1946년까지 5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 개인의 사상사와 향토문화사를 접할수 있다. 매곡일기,속수일기,학정건축일기,매율등 다수 저서를 남겼다. 유정충(1946년~1990년)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월남하여 속초에서 선원과 선장으로 활동하였다.1990년 어선이 침몰하자 동료21명을 구하려 끝까지 구명정 승선을 포기한 채 어선에 남아 구조 신호를 타전하다가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현재 청호동 아바이마을에 선생 희생정신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박물관전시실을 모두 감상하고 영랑호수윗길로 향했다.차창가로 주황색 장식을 한 무채색 아파트인 e편한세상이 고 품격으로 빛났다. 어업도시 피난민촌에서 상업과 관광도시로 급 부상한 속초의 발전된 위상을 보여주는 거리였다. 영랑호수윗길로 가는 언덕 아래길로 벚꽃나무 가로수를 이루며 매우 상쾌했다. 영랑호수윗길은 신라시대 화랑이 즐겨 찾았던 속초의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는 곳이다. 장대하게 솟은 범바위가 드리운 초록물결치는 영랑호의 바다같은 호수윗길로 청량감으로 가득찼다.호수 전망대로 울산바위부터 대청봉까지 설악산 줄기가 펼쳐졌다. 설악산 울산바위를 중심으로 설산이 서양의 명산에 온듯한 위대한 자연의 신비로움으로 압도 되었다.보고 또 봐도 경이로움으로 감탄되는 설악산 주 능선과 울산바위를 이룬 최고의 설악산 전망대였다.호수윗길을 지나 영랑호를 중심으로 산책길이 이어졌다.용맹한 표범처럼 드리운 범바위를 지나 갈대가 나붓거리는 호수로 설악산의 설산이 비추어 매우 평화로웠다.서양의 명산 호수에 온것 처럼 자연의 경이로움에 압도 되었다.영랑호수윗길을 산책하고 점심을 먹으러 속초 중앙어시장 미도파횟집에 갔다. 그날 잡히는 싱싱한 생선을 대접하는 횟집으로 광어,밀치,우럭,멍게등 여러가지 회들과 함께 한상차림이 차려졌다. 입안에서 쫀득하게 씹히며 비린내 나지 않는 회와 함께 겨자의 향긋한 향기의 겨자간장,초고추장,마늘의 향긋함으로 매우 고소한 마늘 쌈장으로 맛의 풍미를 더하였다. 여러가지 생선뼈가 진하게 우러나온 국물과 함께 향긋한 미나리와 깔깔한 고추가루가 조화를 이룬 매운탕으로 매우 감칠맛 있었다.지금까지 먹어 본 매운탕 중 제일 맛있었다.찰진 흑미밥과 함께 옥수수와 당근이 들어간 마카로니 샐러드,싱싱한 강낭콩, 매우 고소한 견과 콩조림,새콤한 미역무침,파인애플 통조림,비법 소스로 고급진 맛의 생강과 마늘,오이절임,추억의 번데기조림,마늘,고추,상추의 싱싱한 채소로 회정식과 조화를 이룬 한상이였다.회 맛과 조화를 이루며 힐링을 추구하는 주인장의 열정의 혼이 담겨진 일류 횟집이였다.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 외옹치해변에 갔다. 외옹치해변은 6.25전쟁 후 출입이 통제되어 2018년 민간에게 개방된 해변이다. 외옹치 바다향기로 구간은 속초해수욕장에서 외옹치항까지 이어지는 1.74km 길이였다. 바다길따라 조성된 나무테크 산책길로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매우 청정한 내음으로 가득했다.해변길 따라 안보체험길 구간으로 바다로 바라 보며 철조망이 남아 있었다. 1970년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해안선 경계 철책으로 설치된 것이였다. 철조망으로 흥남철수,피난민 애환을 담은 갯배,함경도에서 피난온 사람들의 거주처인 아바이마을의 표어가 붙어 있었다. 흥남철수는 한국전쟁중 원산이 적중에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 해상으로 철수할수 밖에 없어 흥남주변에 몰려든 북한 주민들도 함께 월남하였다. 녹슨 철책과 푸른 바다로 속초의 역사애환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바다길 산책로 따라 안보체험길까지 걸은 후 외옹치해변으로 갔다. 속초해수욕장과 연결된 외옹치해변은 베이지빛 고운 모래사장과 함께 각기 다른 바위들이 바다를 수 놓고 있었다. 바위에 파도치는 흰 포멀의 장관이 매우 신비로웠다.해변을 20분이상 바라 보며 모든 속세와 단절된 기분으로 카타르시스가 넘쳤다.외옹치해변에서 건어물가게에 갔다.바다가 펼쳐지는 도로길 따라 골목으로 건어물가게가 즐비했다. 경기수원건어물가게에서 아귀채구이,오징어버터구이등을 시식하며 휴식하였다.경기수원건어물가게에서 서울로 향했다. 차창가로 광활한 바다,적색기와 지붕과 함께 미색벽체를 이룬 전원마을, 눈쌓인 들녁으로 매우 정겨웠다.속초를 지나 강원도를 벗어 날때 까지 설산이 약 20분정도 매우 장엄하게 펼져졌다. 산 중턱에 온 기분 처럼 힐링이 넘쳤다. 이와같이 잊어버린 발해역사를 알게되고 속초의 발전사를 볼수 있었던 박물관 여행과 함께 역사적 화랑도 숨결이 깃든 호수와 상흔이 서린 해변길의 속초 역사를 인식할수 있었던 매우 뜻 깊은 여행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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