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청주시 초정행궁,청주국립박물관,진천 농다리(2024년2월27일)

백재은 2024. 2. 28. 11:57

초정행궁

 

국립청주박물관
진천 농다리

 

2월27일~우리함께 걸어요 밴드모임에서 미식여행을 갔다. 한 여자분이 버스에 올라 지나가고 있어 네가 옆에 앉으라 했다.청주로 향하는 중 나에게 먼저 대화를 걸어왔다. 이름은 박미주님으로 기독교,직업등...여러가지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여러가지로 잘 통했다. 며칠전부터  남자분이  버스에서 내옆에 앉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좋은 여자분을 만나게 해주셨다. 나에게 갑절의 은혜를 주신것 이였다. 앞에 앉은 이애영님이 나에게 명인이 만든 하루견과와 쵸코렛2개를 주어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항상 다른 사람들에게도 간식을 베푸는 인정어린 회원으로 우리모임이 한층 더 친숙한 분위기로 다가왔다. 아침을 청주 맛집인 초정불고기에서 돼지불고기를 먹었다.실내는 흰,하늘색 페인트칠의 벽체와 함께 주방의 화사한 색채의 가림막 커튼으로 매우 산뜻했다. 주인장의 깔끔한 성품을 엿 볼수 있어 모든 음식들을 믿고 먹을수 있는 신뢰를 갖게 해 주었다.식사 중 네가 안 먹는 고기를 주기 위해 이애영,유인선님이 앉으신 식탁에 앉아 주은영님을 불러 같이 아침식사를 하였다.그 분들은 나 덕분에 고기를 베불리 먹었다면서 항상 감사하고 있어 친근감이 넘쳤다.고추장 비법소스로 버무린 돼지불고기에 파가 듬뿍 들어가 육질의 담백함을 더하여 주었다. 멸치육수가 잘 우러나온  된장찌게로 매우 구수한 맛을 자랑하고 있었다.마늘쫑과 깻잎찜으로 어머니 깊은 손맛이 살아있는 맛이였다.시금치향이 가득한 시금치무침,고추가루의 깔깔한 맛과 무우의 씁쓰름한 맛이 조화된 깍두기로 본연의 재료 신선한 맛을 간직하고 있었다.추억의 도시락 반찬 맛을 간직한 오뎅복음으로 간이 잘되 매우 맛깔스러웠다.시지 않은 무절임은 건강한 식초사용으로 입맛을 돋구었다.새콤한 메론 소스의 무우 샐러드,맛살달걀지짐,브로컬리,유기농 알배기로 상큼했다.즉 정직하고 신선한 재료,청결한 음식을 추구하며  매우 정겨운 맛을 담고 있는 어머니의 깊은 손맛이 살아있는 일류 맛집이였다.아침을 아주 맛있게 먹고 초정행궁으로 향했다.버스안에서 박미주님이 아침에 식당에서 나랑 같이 먹을려고 자리를 잡았다고 하면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 감사했다.동국여지승람과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초정행궁은 세종대왕이 1444년 요양차 이곳에 행차하여 121일간 머물며 훈민정음 반포를 위한 마무리 작업과 더불어 안질환 치료를 위해 거처했던 행궁이다.초정행궁에 있는 초정약수는 살균및 소화작용이 뛰어나 치료수나 음용수로 이용된다.탄산농도가 강한 반면 해로운 첨가물이 거의 없는 단순 탄산천이다. 미네랄,탄소,칼슘,라듐 함량이 매우 높아 눈병,안질환, 피부질환에 효과가 있는 약수이다. 소나무 섬 연못앞 중심으로 "ㄱ억자형" 행궁 배치도를 이루며 세종대왕이 일궈낸 과학의 산물인 조각들이 배치되어 역사 유적지로 더욱 더 가치있게 빛났다.석탑과 한글창제의 장식과 함께 해시계,소간의,일성정시 조각등이 배치된 중앙광장 계단위로 초정영천 족욕으로 일본풍 정감으로 다가왔다.기와담장에 연결된 돌담벽의 정주간에 항아리 장식과 카페 앞 쌍여닫이문의 흰벽체에 장미조화 장식과 함께  반상과 마루 장식으로 고전미가 넘쳤다.팔작지붕과 기와 돌담의 목재 삼문이 왕의 품격으로  압도되었다.박미주와 같이 동행하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즐거운 시간이였다.초정행궁에서 국립청주박물관에 갔다. 국립청주박물관은 산아래  문화재 산책길 잔디언덕으로 맞배지붕과 벽체에 띠장식이 도드라지는 고전미와 현대식 절충을 이룬 건축가 김수근의 혼이 담겨져 있었다.건물과 건물사이 야외 정원으로  석상들을 장식하며 문화향기로 가득했다.박물관 내부는 박물관의 딱딱한 이미지를 벗어나 서점 같고 우리집 창가처럼 박물관에 숨과 쉼이 있도록 설계 되었다. 옛 사람 숨결이 담은 문화재에 숨이 있었고 박물관 수려한 풍경을 바라 보며 머무를수 있는 공간에 쉼이 있었다. 바로 나자신이 주인이 되도록 인테리어와 전시진열로 역사 길이 길이 빛나는 문화보고 창으로 더욱 더 고귀하게 빛났다. 국립청주박물관은 "금속공예"가 박물관의 대표 브랜드로 금속문화재와 어린이박물관,디지털대장간으로 이루어졌다.

금속문화재

금속문화재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금속 문화재가 전시 되었다. 

1전시실과 2전시실은 "고고"금속으로 변화된 삶 주제로 전시되었다.

1전시실은  흰색벽체의 밝은 조명과 함께 투명한 유리벽면에 구석기 도기등이 전시되어 맑고 청정했다.구석기 인류 문화가 신선하게 자극하도록 유도한 인테리어와 전시진열로 매우 놀라웠다.

1.금속이 출현하기 까지~아프리카를 떠난 인류는 유라시아를 건너 한반도 중심의 충북에 도착한다.위험한 환경에서 사람들은 도구를 만들고 서로 힘을 모아 살아 간다.인류는 주먹도끼로 가죽을 벗기거나 고기를 자르는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 그리고 이런 도구를 더 쉽게 잘 만들기 위해 돌날 기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돌날은 점점 더 작아져 휴대할수 있게  뼈나 나무 사이에 끼워 넣을 수 있는 도구로 발전하였다.1만 20000년 전 기후가 온난해지면서 사람들은 식물자원과 바다자원에 눈을 돌리고 이때부터 신석기시대가 열렸다.토기를 만들고 계절에 따라 이동생활을 하였다.조,피,수수같은 작물을 키우는 초보적인 농경을 시작했다.수확량은 많지 않았다.바닷가에서 조개류를 주로 먹고 지내 조개무지가 만들어 졌다. 충북 지역에서도 조개껍데기가 나오는 것을 보아 당시 사람들이 멀리 이동하고 폭넓게 물건을 교환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기원전 15세기경 벼농사를 중심으로 농경생활을 시작했다.이전에 수렵 채집 경제에 맞춘 이동생활이 일 년 동안의 먹거리를 한 번에 얻은 농경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한곳에 정착하고 수확한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를 만들고 먹거리를 지키려고 전쟁도 하게 되었다.이 과정에서 중재자가 나오고 권력이 등장하였다.그리고 권력자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청동기같은 것들을 만들고 소유하였다. 

2. 도구의 등장과 발전 ...기술~인간은 도구를 이용하면서 신체의 기능이 향상되었고 이를 토대로 진화할수 있었다. 도구를 만들려면 재료가 중요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다양한 재료를 이용했는데 자주 이동하며 생활했으며 의사소통 체계가 광범위 했기 때문이였다.이들은 좋은 도구를 위해  재료의 물리적 속성을 먼저 파악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효율성과 표준화,아름다움 등에 중점을 두고 도구를 만들었다. 이렇게 제작된 도구는 인류의 동반자가 되어 함께 발전하였다. 개인에게 맞춰  제작한 도구들이 나오고 개선된 도구는 모방과 재생산을 거듭하였다. 최종 지향점은 인간의 신체 기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도구가 발전함으로써 일의 효율성이 높아져 경제적 이익이 늘어나고 건강이 개선 되었다. 

3.도구의 등장과 발전-무기~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누를 만큼 강한 존재가 아니었다. 주변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고 인간을 먹잇감으로 노리는 큰 육식동물도 종종 마주쳤다. 이탈리아 과타리동굴에서는 하이에나가 사냥한 네안데르탈인의 시신이 발견 되었다. 이런 위험한 환경에서 인간은 생존 전략을 세워야만 했다. 그 전략에 맞추어 슴베찌르개나 화살촉과 같은 다양한 사냥도구, 무기 등이 만들어 졌다. 청동시시대 들어서 사람과 짐승이 아닌 사람과 사람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좋은 무기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가장 발전된 기술로 무기를 만들었다. 또한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를 병사들과 구별하기 위해 간돌검이나 청동검과 같은 칼이 등장하였다. 칼의 등장은 군사력의 상징이었지만 점차 실용적인 무기로 변해갔다. 

4.도구의 등장과 발전-공구.비실용적 도구~ 먹거리는 항상 인류의 숙제였다.맛있고 좋은 먹거리를 얻기 위해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았다. 사냥을 잘하기 위해 더 날카로운 도구를 만들고 채집에서 농경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면서 더욱 다양한 도구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도구들은 다양한 재질로 간편하게 사용할수 있도록 만들었다. 땅을 파는 괭이는 무디게 만들지만 나무를 베는 도끼는 더 날카롭게 제작하였다. 재료의 발전은 더 많은 수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실용성이 중요한 공구나 농구는 청동기와 같은 귀한 재료로 만들기 쉽지 않아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반면에 신분인 재력을 나타내는 꾸미개 등은 귀한 옥이나 청동으로 만드는 차이가 있다. 결국 형태와 재질  쓰임새로 도구가 가진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5.금속 이전과 이후의 삶~세상은 금속을 만들기 전과 후로 나뉜다. 금속을 만들기 전은 석기시대로 사람들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하며 살았다.계절에 따라 먹거리를 찾아 이동했고 혈연을 바탕으로 한 적은 수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농경으로 한 곳에 정착하였고 큰 강을  낀 비옥한 땅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재자가 나타나고 권력이 등장하였다.권력자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청동기 등을 만들고 소유하였다. 전문적인 장인들이 금속을 만들고 반짝이는 광택과 청명한 소리를 가진 금속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그리고 금속은  점차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도구로 대체하였다.금속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면서 세상은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도구의 발전으로 생산력은 높아지고  무기가 발전하여 큰 전쟁이 벌어졌다. 높은 기술력과 금속을 가진 사람들이 더 강력해졌다. 석기시대의 가족 중심사회는 마을단위의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통합되어 갔다. 그리고 철기를 사용하는 마한,진한,변한과 같은 정치제로 발전하여 종국에는 백제,고구려,신라등을 거쳐 통일산라로 통합 되었다.  

6.금속으로 변화된 삶~금속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삶과 세상은 크게 바뀌었다.금속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청동기시대이다.청동의 주 원료인 주석은 한반도에서 나지 않은 귀한 재료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가 흔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철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농기구나 공구는 석기에서 철기로 바뀌게 되었다.그 결과 농업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고 사회의 갈등과 통합도 빠르게 속도를 내게 되었다. 철기가 등장할 무렵 충북에는 삼한의 하나인 마한이라는 정치체가 자리 잡았다. 청주 송절동,오송 등지에서 철이 생산되었고 점차 백제로 성장하였다.이후 철갑옷과 쇠칼 등으로 무장한 삼국이 중원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리하여 4세기에는 백제,5세기에는 고구려,6세기에는 신라의 순으로 충북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이는 이 지역 지배자의 무덤에서 발견된 백제,고구려,신라의 금,은 등으로 만든 장신구를 통해 확인할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금속의 등장 이후 사회가 고도화되는 세상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2전시실은 책장의 도서관 분위기로 인테리어한 2전시실은  더욱 발전되어 가는 철기시대 금속의 아름다움을 지적인 문화유산으로 다가가도록 하게 해 주었다.

1.철기제작 기술의 발전과 삶의 변화~철기 제작 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철로 만든 농기구를 사용 하면서 농업 생산력이 크게 늘었고 의식주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철은 실용적인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권력자의 힘을 보여 주는 상징물이나 전쟁터에서 사람들을 해치는 무기로도 이용되었다. 충북 지역에서는 당시 철을 만들었던 백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고고학 자료가 발견되었다. 이 자료는 그 곳에 매우 뛰어난 기술자가 있었음을 알려 준다. 삼국은 이 지역에서 철 생산을 두고 경쟁하였다. 인류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고 위협이 되기도 하는 철의 양면성은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철의 역사는 바로 철을 이용한 인류의 역사 그 자체였다. 

2.금속으로 만든 아름다움~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진다. 예전에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이 지금은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아름다움에는 갖가지 요소가 투영되고 이러한 요소들은 서로 영향을 미친다.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은 과연 인류 보편의 가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논쟁의 여지가 많다. 이름다움의 보편성은 인류가 대칭 화음 등을 대체로 아름답게 느끼는 점을 말하고 아름다움의 다양성은 인류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외모가 시간이 흐르면서 끓임없이 변했다는 점을 제시한다. 국립 청주박물관에서는 과거 우리 삶에 녹아들었던 금속유물의 미를 조망하고 금속으로 생긴 삶의 변화를 살펴보도록 전시 되었다. 전시된 여러가지 금속 유물들을 직접 보면서 옛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꼈던 감정을 공유하고 오늘날 관람객의 시선으로 미의 가치를 감상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2전시실을 모두 감상하고 3전시실로 가는 흰 벽체와 함께 목재 선반을 이룬 검은색 창틀의 통유리창으로  띠장식 시멘트 기둥과 돌담을 두른 소나무숲이 펼쳐져 너무 상쾌했다.맞배지붕의 띠장식 벽체건물과 야외 정원이 펼쳐지는 통유리창의 복도로 매우 청정했다. 문화의 얼이 살아 숨쉬는 숨의 공간을 지나 쉼의 인테리어로 매우 인상적이였다.

 

3전시실과 4전시실은 "미술"주제의 꽃피운 금속문화로 전시되었다. 어두운 조명을 이룬 전시실로 속세에서 자유하는 분위기와 함께 꽃피운 금속문화를 매우 정교하게 빛나도록 전시되었다.

3전시실 1.금속으로 삶과 불교를 꽃피우다~인간의 삶은 금속을 사용하면서 다양하게 변화하고 발전했다. 금속은 고대에는 지배층의 권위를 세우는데 이용되었고 중세와 근세에는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담아 내는 금속공예의 주재료로 널리 쓰였다. 충북에서도 지방 문화 발전과 더불어 불교공예와 생활공예 영역에서 금속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왕실과  호족이 후원하여 이 일대에 여러 절이 세워졌고 절의 위세가 확장되면서 부처 공양에 쓰이는 금속공양구가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특히 청주 사뇌사,흥덕사,용두사,충주 승선사와 같은 절의 승려들은 수행을 하거나 불교 의례를 진행하는데 쓰는 갖가지 모양의 금속 공양구를 만들어 종교적 의미를 담았다. 충북 생활유적과 무덤에서 나온 생활 도구와 장신구 등은 이 지역의 생활상을 잘 보여 준다. 수저와 자물쇠  화려한 문양의 꾸미개,삶의 흔적이 깃든 거울등을 보면 옛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고 무덤까지 가지고 간 소중한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전시 되었다.

2.금속,바람을 담다~불교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어려운 현실을 이겨 내도록 도와주고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데 이바지 했다. 집단의 바람은 종교적 염원으로 발전하고 개인의 바람은 발원으로 이어졌다. 불교에서 부처에게 공양하고 불사에 참여 하는 것을 발원이라고 하는데 발원자는 청동 종,청동 금고 ,청동 향완과 같은 금속공양구에 자신의 바람 새겨 절에 시주했다. 특히 고려시대(918년~1392년)에는 법회가 자주 열리면서 불교 외례에 쓰이는 공양구를 찾는 사림이 늘어 났다. 조선시대(1392년~1910년)에는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억불숭유정책에 따라 이전 시대만큼 공양구를 활발하게 제작하지 않았지만 왕실과 부녀자의 후원으로 공양구는 꾸준히 만들어졌다.이는 발원으로 쌓은 공덕 그 공덕의 영원함 때문이였다. 

3.속세를 정화하는 향기~ 에로부터 향료를 몸에 바르거나 향을 태워 옷이나 실내공기를 정화하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이 불교에서 부처를 공양하는 방법이 되면서 부처에게 가르침을 청하기 전에 향을 피우거나 향료를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불교에서 향은 악취를 없애는 청정을 뜻하고 생사의 번뇌와 때를 없애 준다고 한다. 불법에서 뛰어난 공덕에 있으면 이를 향에 비유하여 계향,혜향,해탈향이라고 하고 부처를 모신 집인 불전을 높일때도 향을 사용하여 향전이라고 부른다. 

4.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빛 ,등불~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자 깨달음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불교에서는 번뇌가 가득해 진리를 보지 못하는 마음 상태를 컴컴한 어둠에 비유해 무명이라고 한다. 부처의 가르침은 이 무명을 밝게 해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진리를 보게  도와주는 등불에 비유한다.이 때문에 불법을 법등,법광,법거라고 부르고 승려가 불법을 널리 전파하고 계승하는 것을 전등이라고 한다. 

5.깊고 오묘한 깨달음의 맛,법미~초기 불교에서 승려들은 신도들이 공양하는 음식을 발우라는 공양 그릇에 받아서 먹었다. 승려에게는 소유욕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수행방법이였고 신도에게는 선행을 베풀면서 복덕을 쌓는 방법이었다. 음식은 가장 기본적인 공양물이 되었고 특히 고려시대에는 승려들을 한곳에 모아 음식을 나누어 주는 반승을 자주 열었다. 불단에 올리는 음식은 부처가 주는 깊은 가르침을 상징한다. 불법을 맛 좋은 음식에 비유하여 법미,불범미,법지미라고 부른다. 

6.염원을 새긴 불비상~불비상은 돌의 네면에 부처,보살 등을 조각하고 발원자의 소원을 새긴 상이다. 불비상은 비상,불감비,조상비라고도 하며 배처럼 생긴 광배모양과 비석처럼 생긴 석비모양으로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불비상이 남북조시대(420년~589년)부터 당나라(618년~907년)까지 활발하게 제작 되었다. 특히 불비상을 만든 사연이나 유래가 기록된 조상기는 불교조각 편년의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전하는 불비상은 7구로  모두 흑회색 납석계통의 돌을 사용했고 조각 솜씨와 형상도 거의 비슷하다. 옛 충남 연기군 일대에서만 발견되어 흔히 연기파 불비상이라고 한다. 

7.스며들다~금속은 흙 나무와는 달리 단단하고 쉽게 닳지 않는다. 또 다양한 기법으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내고 무늬를 새겨 화려하게 장식할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고유의 성질을 가진 금속으로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충북에서도 금속으로 만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생활용품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는 청동으로 만든 생활용품이 많은데  주로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거울,숟가락,그릇이 많고 동전과 상투에 꽂은 동곳,꾸미개 같은 장신구도 있다. 특히 고려경이라는 말이 따로 있을 정도로 많은 거울이 발견 됐다. 거울에는 사후 세계를 밝혀 인도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그래서 살아 있을 때 사용했던 거울을 함께 무덤에 묻은 것으로 보인다. 또 청동수저와 같은 식기류도 많이 발견되어 옛 사람들의 실제 삶을 상상해 볼수 있다.이렇게 죽은 사람이 사용했던 거울, 수저같은 금속 생활용품을 무덤에 묻는 풍습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되었다. 이런 풍습은 죽은 이후에도 삶이 계속 이어 진다고 여기거나 그런 바람을 담은 것이다. 

8.같은 형태,다른 재료~사람들은 개인의 취향이나 신분,사회상황등을 고려해 토기,목기,도자기 등 다양한 재질의 생활 용기를 만들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모양이나 문양이 같은 금속기와 도자기를 볼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잔,병,주전자 등이 있다. 당시 공예분야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했음을 보여 준다. 

9.거울에 깃든 흔적~금속거울은 주로 동으로 제작되어서 동정 즉 청동거울이라고 부른다. 거울은 청동기시대부터 만들어져 고려시대에는 실용품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확장하는 문화가 크게 유행하면서 기능성과 장식성을 갖춘 거울이 많이 만들어졌다. 거울의 형태와 크기가 다양해졌고 뒷면에는 꽃과 새,용과 문자 등을 문양으로 새겨 넣어 장식성을 높였다.거울에는 당시 사람들이 꿈꾸던 이상향과 생활모습도 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10.법종과 범음구~온 세계에 울려 퍼지는 부처의 음성을 나타낸다. 부처를 공양할때 법종,쇠북,바라와 같이 맑은 소리를 내는 범음구를 다양하게 사용했다. 범음구에서 나는 소리는 부처에게 기대고 구원을 청하려는 마음이 들게 하고 중생을 괴로움에서 구한다.

11.청주 사뇌사-1993년 청주시 서원구 사직동 무심천 제방 공사장 구덩이에서 금속공예품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이들은 대부분 절에서 사용하던 물품들로 절 사람들이 어떤 절발한 사태를  맞아 사용하던 물건들을 한데 모아 급히 묻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공양구나 그릇등에는 청주 사내사 또는 사뇌사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금속공예품이 400여점이나 나온 것을 보면 당시 사뇌사는 매우 규모가 큰 절이었을 것을 추정한다. 

 

3전시실을 모두 감상하고 이어지는 휴식공간에서 언덕길로 내려가니 제4전시실로 이어졌다.

 

4전시실은 어두운 조명의 인테리어로 자비를 외치는 불상이 신비로운 적막과 함께 공양의 대상이 되도록 하였다. 엄숙한 분위기와 함께 평온과 자비로 인도하는 불길로  유도하였다. 미니 석탑은 매우 섬세한 세공의 정교한 석탑으로 매우 놀라웠다. 감로를 베풀어 아귀를 구함의 대형 벽화 복제품은 지옥에서 구원하는 중생들의 외침이였다. 

1.인간을 닮은 공양의 대상,부처~불교에서 부처,불법,승단은 가장 중요한 공양의 대상이다. 부처를 공양하는 것을 불공양,법을 공양하는 것을 법공양,승단을 공양하는 것을 승공양이라고 한다. 이 세가지를 모두 공양하면 무한한 공덕을 얻는다고 한다. 이 중 부처는 가장 중요한 존숭의 대상으로서 승려와 신도들은 법당에 인간을 닮은 불상과 불화를 두고 밤낮으로 예불을 드렸다. 이들은 부처의 형상을 바라보거나 경전 구절을 외우며 자신들의 정성과 바람이 함께 전해지기를 염원했다. 

 

불상실에서 언덕으로 내려가니 통유리창으로 띠장식 시맨트벽사이  불상이 장식된 작은 야외정원이 펼쳐지는 쉼터였다.  충북 유적지  명승지가 대형 화면으로  펼쳐져 매우 수려한 자연풍경을 갖춘 충북의 위상을 드러냈다. 다시 새롭게 다가가는 충북의 자연이였다.복도 쉼터를 통해 금관실로 이어졌다.

5전시실 "금관" 주제로 금속에 깃든 품격이 전시되었다.금관과 금띠의  화려함과 웅장함으로 압도 되었다.하늘이 내린  왕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1.기록 ,기억을 공유하다~청주 흥덕사는 세계에서 가장오래된 금속 활자 인쇄보인 "직지심체요절"(1377년)을 만든 곳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간 절의 위치는 전해지지 않았다.그러던 중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일대 택지개발 공사에 앞서 인근의 연당리 절터 발굴 조사가 1985년에 진행되었다. 이때 흥덕사가 새겨진 쇠북조각과  그릇을 발견했고 이로써 이 곳이 흥덕사의 옛터임을 밝혀졌다. 본당과 화랑등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금속공예품과 기와 자기 등 다수의 유물이 발굴되었다.기록은 기억을 공유하고 우리는 그 기록 덕분에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디지털대장간

디지털대장간은 우리 기억 속 장인의 모습과 그들이 만들어낸 창작품을 다양한 패널과 영상을 통해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였다. 

1.한국의 종,영혼을 울리다~ 성덕대왕 신종에 맑은 종소리는 북방의 산봉우리까지 울려 퍼져 듣고 보는 이 모두 믿음을 일으켜 꽃다운 인연을 진실로 심었구나! 글귀를 담았다. 성덕대왕 신종은  통일신라(771년)국보 제29호로 무게 18.9톤이르고  천흥사종은 고려(1010년)국보 제280호로 무게1.2톤에 이른다. 두 종을 눌러  소리를 들어보는 장치가 있어 들었다. 천흥사종의 무게가 성덕대왕신종보다 덜 나가 더 맑은 소리를 냈고 성덕대왕 신종은 소리가 더 웅장했다.종의 무게따라 달라지는 소리로 매우 신비로웠다. 

2.금속공예의 변천사~도표화하여 전시 되었다.(아래 사진 참조) 

금속공예품들의  사진화면을 눌러 극대화하여 금속공예품 감상할수 있도록 전시되었다. 

3.금~금은 태양을 상징하는 금속으로 고대부터 권위의 상징이나 화폐로 사용했다. 잘 펴지고 늘어나 돋을새김,낱알기법등의 정교한 세공이 가능하여 화려한 장신구의 재료가 되었다. 은은 금보다 단단하여 실용적이며 항균효과가 있다. 금속 표면을 새김과 돋을새김기법으로 장식하거니 은실을 넣어 무늬를 표현하는 은입사 공예품이 유행하였다. 동은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금속이다. 단단하면서 다른 금속과도 잘 융합하여 주석을 섞으면  청동,아연을 섞으면 황동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기원전 12세기 무렵에 청동기가 등장하였고 작은 장신구부터 대형 종까지 폭넓게 사용하였다. 철은 단단하고 유연한 금속으로 무기와 농기구 등을 만드는데 사용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사찰이나 민간의 일상용품으로 철제 공예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4.우리나라의 금속공예~우리나라의 금속공예는 기원전 12세기 무렵 청동 꾸미개에서 시작하여 점차 무기,종교및 생활용품 등으로 범위가 확대되었다. 금속공예가 본격적으로 발달한 때는 삼국시대로 금과 은을 사용하여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관과 허리띠,귀걸이  등을 제작하였다. 또한 불교의 융성과 함께 범종,사리장엄구등의 불교 공예품도 만들었다. 통일신라는 실용적인 금속공예품을 많이 만들었고 당,일본 등과의 국제교류를 통해 다양하고 세련된 기형과 문양을 완성하였다. 고려시대는 화려한 은제 공예품을 많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청동그릇을 사용하였을 정도로 금속공예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특히 입사기법을 적용한 불교공예품은 종교적 상징성과 아름다움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것으로 손꼽힌다. 조선시대에는 철이 공예품의 재료로 새롭게 등장하였다. 철에 은과 구리를 입사하여 만든 화로와 촛대,담배합 등은 실용성을 바탕으로  한 금속공예의 새로운 미의식을 보여 준다. 

5.대장간~ 대장간은 쇠를 불에 달군 후 메로 두들겨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곳이다. 대략 25m2 정도의 크기로 그 안에는 화덕과 풀무,모루,집게,메 (망치),물통,숫돌을 갖추고 있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중 "대장간" 은 18세기 조선시대 대장간의 모습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6.사인검~사인검은 십이지 중 화랑이를 뜻하는 인이 4번 겹치는 인년,인월, 인일 ,인시에 만든 칼이다. 조선시대 왕들은 호랑이의 힘을 빌려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왕실과 궁중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이 칼을 만들었다. 인이 4번 겹치는 날은 12년마다 돌아왔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흉년에는  제작하지 않았다. 사인검의 한쪽에는 북두칠성과 28수 별자리를 다른 한쪽에는 하늘은 정을 내리시고 땅은 영을 도우시니 해와 달이 모양을 갖추고 산천이 형태를 이루며 번개가 몰아치는 도다 현좌를 움직여 산천의 악한 것을 물리치고  현묘한 도리로서 베어 바르게 한다라는 글자를 새겼다.

7.쇠부리~쇠부리는 토철,사철,철광석등을 녹이고 가공하여 각종 철기를 만드는 작업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위나라애서는 고대부터 원통 모양의 쇠부리 가마를 사용하였으며 이후에는 달걀 모양 또는 사각뿔  모양 가마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구조의 쇠부리가마가 등장하는데 울산 쇠부리가마와 북한 자강도 풍청리의 일건 쇠부리 가마가 대표적이다. 

8.근대 철제품~수정궁은1851년 조셉 팩스턴 설계한 세계 최초 철골 건축물로 런던 제1회 만국 박람회를 위한  세운 건물이다.수정궁이 철골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녹슬지 않는 철강인 스테인리스 스틸은 철과 크롬을 일정 비율로 합금하며 녹이 슬지 않는다. 1912년 영국 브라운 퍼스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해리 브리얼리가 연구 거듭하여 상업화 성공하였다.그후 피아노 줄과 지퍼가 탄생하였다. 

 

디지털대장간을 돌아본 후 어린이박물관에 갔다. 어린이를 동반해야 입장할수 있는 곳으로  다시 금속문화를 감상하기 위해 박물관 전시실을 처음부터 같이 동행했던 박미주와 함께 금속문화재실로 갔다. 금속공예를 둘러 본 후 5전시실로 가기전 쉼터에서 충북 유적지  명승지가 펼쳐지는 대형화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충북은 대청호 큰 호수와 경관이 수려하여 청풍명월 고장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사진찍어주기로 자처하며 열성을 다하는 진심에 너무 감동했다.  

청주국립박물관에서 진천 농다리로 향했다. 옆에 앉은 박미주님과 미술,역사,건강이야기를 나누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청주국립박물관에서  35분쯤 지나니 진천 농다리에 도착했다. 진천 농다리는 고려시대 자연석으로 길이 93.6m 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미호강에 놓인 독특한 모양의 돌다리이다. 농다리는 작은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린 후 지네모양을 본떠 길게 늘여 만들어 졌으며 별자리 28수에 따라 총 28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각의 모양과 축조방식은 돌의 뿌리가 물고기비늘처럼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채우는 석회물의 보충없이 자연석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한폭이 1m도 채 되지 않는 다리임에도 장마 등에 의해 떠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버티고 있는 튼튼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다리이다. 상산지와 조선환여승람에 의하면 고려시대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여년 세월 버텨온 돌다리로 과학적 공법의 우수함을 짐작할 만큼 특이한 양식으로 짜여진 전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동양에서 가장 긴다리인 소중한 문화재이다.미호천의 진천 농다리의 물줄기가 콸콸 소리를 내며 봄의 내음으로 가득찼다.끓임없이 쏟아치는 하천의 물줄기가  자연의 운율로 너무 아름답게  들렸다. 미호천의 징검다리로 물줄기가 피어 오르고 생거진천 폭포옆 메세타콰이어가 금빛날개로 물결을 쳐 매우 상쾌했다.즉 하천의 물소리와 함께 물줄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시간이였다.미호천을 거니는 중 강미전님을 만나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네가 찍어준 사진을 보고 나에게 사진 찍는 법을 가르켜 주었다. 징검다리로 물결치는 곡선에 따라 배경을 맞추고  쭉 뻗어간 농다리에 드리우는 산봉우리의 중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거라고 가르켜 주었다. 그동안 나는 인물에 중심을 두어 반듯하게만 찍었는데 배경을 중심으로 한 사진 찍는법을 배울 수 있어 처음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 헷 갈렸지만 너무 좋았다.나에게 아름다운 경치를 살린 길이 길이 남길 만한 사진을 찍어 주어 너무 감사했다.진천 농다리에서 점심을 먹으러 향했다. 저수지를 지나니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보련골로 설경을 이룬 매우 한적한 마을이 펼쳐졌다. 언덕마을에 연꽃습지를 이루며 비좁은 언덕길을 지나니 연꽃마을 체험장 연꽃가든(산양산삼)이였다. 연꽃가든에서  연잎밥정식을 먹었다. 튼튼하고 건강한 닭들을 직접 키워 대접하는 닭백숙과 오리백숙 식당이였다.무려 22첩 밥상의 임금님 수라상이 펼쳐졌다.매우 곱게 연잎으로 쌓은 연입밥이 바구니에 담아 정성껏 장식되어 시각으로 미각을 자극했다. 호박,대추,콩,찹쌀,흑미가 들어간 연잎밥으로 입안에서 매우 부드럽게 씹히며 힐링이 저절로 솟구쳤다.매우 구수한 된장찌게,담백한 조기구이,부추 오징어전,새콤한도라지 무침,도라지 향이 가득한 도라지볶음,냉이향이 가득한 냉이된장무침,파래무침, 연근조림,새우마늘쫑볶음,들깨의 고소함이 가득한 궁채볶음,호박찜,싱싱한 맛의 열무김치,묵무침,고사리볶음,두부양념구이,멸치고추볶음, 숙주나물무침,미삼무침,고구마순볶음,시금치무침,마른나물볶음,참나물무침으로 봄기운이 가득한 나물밥상으로 눈으로 보기만 해도 입맛을 돋구며 가슴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반찬 하나 하나 어머니의 깊은 손맛이 깃든 정겨운 맛을 담고 있었다. 반찬의 달인경지에 이른 매우 맛깔스러운 궁중요리 맛 같았다.후식으로 연잎이 달여진 연잎차로 개운하게 해 주었다.매우 감동적인 평생 잊지 못할 일류 맛집이였다.이와같이 귀중한 문화재를 알게 되는 역사 주제의 여행과 함께 잊지 못할 맛을 간직한 미식여행으로 카타르시스가 넘쳤다. 

초정불고기
초정행궁
금속문화재
국립청주박물관~디지털대장간
진천 농다리
진천 초평호
연꽃마을 체험장 연꽃가든
철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