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일~우리함께 걸어요 밴드모임에서 미식여행을 갔다. 차창가로 눈내린 마을들이 펼쳐지며 상쾌했다. 따쓰한 햇살로 녹아 내리고 있는 초정행궁의 눈길로 봄의 여명을 알리고 있었다.연못이 있는 정원으로 세종대왕의 과학업적들인 여러가지 천문기기들이 복원되어 있었다.일성정시의는 낮과 밤의 시간을 측정할수 있도록 만든 천문관이였고 소간의는 간의 보다 작고 이동이 간편한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고 시간을 측정할수 있는 천문기기였다.혼천의(혼천시계)는 해와 달,5행성(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등을 관측하는 천문관측기기로 천문관청과 교육기관에서 천문관측 천문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1433년 장영실등이 최초 만든것으로 선기옥형 이라고도 부른다.천평일구는 시간을 측정하는 관측기기였고 세종(16년)1434년에 최초로 제작된 반구형 오목해시계 앙부일구는 24절기를 13개 위선으로 나타내고 시각선 (1시간 간격의 시간선과 15분 간격의 분선)을 수직으로 그어 놓았다. 북극을 향한 영침의 그림자에 따라 시간과 계절을 동시에 알 수 있으며 해 뜨는 시간과 해 지는 시간을 알수 있는 과학적인 기기이다. 그 구조는 시각선,계절선,수영면,영침,자평면으로 구성되었다. 수표는 청계천의 물의 높이를 측정하기 위해 만든 수위계이다.세종때 측우기를 만들어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법을 확립하고 청계천과 한강 두고에 수표를 설치하여 수위를 재도록 한 것이다.풍기대는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는데 사용했던 조선시대 기상관측기기이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와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로 측우기는 조선시대 세종대부터 조선말기까지 비의 양을 측정하는 기구이다. 세종(24년)1442년 발명된 측우기는 서양보다 약 200년 앞서 발명된 세계 최초 과학적 강우 측정기이다 .본격적으로 강수량을 정략적으로 측정 가능케 한 발명품이라는 점에서 세계과학사적인 의미가 매우 큰 것이였다.광장 중앙으로 곽원준의 "나랏말 ㅆ 미" 화강석 조각으로 세종의 업적을 드높이 찬양하고 있었다.글자를 나열하며 조각된 중앙으로 서체가 매우 돋보였다. 과학적인 글자로 세계적인 글자문화를 이룩한 우리나라 위상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질서 정연한 집현전,편전,독서당,수라간등..으로 세종의 애민과 과학정신을 담고 있었다.초정행궁에서 아침을 먹으러 로얄생고기집에 갔다.금색 간판을 이룬 빨간색 장식의 인테리어로 이색적인 맛의 풍미를 지닌 맛집으로 다가왔다. 파와 녹두나물이 듬뿍 들어간 돼지불고기로 참기름이 뿌려진 김가루와 부추와 함께 먹는 메뉴였다. 돼지고기를 중심으로 계란찜,치즈,옥수수가 담겨진 술 안주의 음식이였다. 서양소스를 접목시킨 돼지불고기로 입안에서 매우 부드럽게 씹히는 계란찜,치즈,옥수수,고소한 김가루,신선한 부추와 함께 입맛을 돋구었다.제육볶음을 서양소스로 풍미를 더해 맛집을 실현한 식당이였다.양은냄비에 차려진 대파가 들어간 오뎅국으로 시각적으로 정겨움으로 다가왔다.구수함을 지닌 오뎅국물로 깔끔한 맛을 담고 있었다.매우 향긋한 깻잎,상추,고추의 쌈채소로 기름진 고기를 달래주고 맑은 오뎅국으로 더욱 더 담백하게 해 주었다.시원한 맛이 감도는 백김치와 달고 짜지 않는 깻잎절임으로 매우 인상적인 맛이였다.매우 질좋은 식초와 함께 비법절임 소스로 고급진 풍미를 갖고 있었다. 즉 음식 하나 하나 신선한 재료와 함께 비법소스로 심혈을 기울여 맛을 창출한 일류 맛집이였다.아침을 아주 맛있게 먹고 고인쇄박물관으로 향했다.고인쇄박물관으로 가기전 차창가로 흥덕성당이 비추었다. 돔형태의 지붕과 함께 둥근 장식과 아치형 출입문으로 서양 고전미가 물씬 풍겼다. 성모마리아 상이 우뚝 서 있는 중앙을 중심으로 양쪽 성벽과 같은 디딤돌위 적벽돌벽체로 위풍당당한 성당의 위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청주고인쇄박물관에 도착하여 단체 사진을 찍고 박물관을 관람하였다.둥그런 지붕과 함께 한자로 수 놓은 적벽돌 양식의 청주고인쇄박물관으로 고풍스러웠다. 내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직지를 장식하며 세계 최초 인쇄문화를 이룩한 우리나라의 위상을 드러냈다.매우 귀중한 직지를 우리나라에게 알리는데 가장 큰 위대한 업적을 한 사람은 민제 박병선 박사였다. 박병선 박사는 1923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사범대 역사학과 졸업,1955년 프랑스로 유학 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7년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동양서고에 보관 중이던 직지를 연구하였으며 국내로 사진 자료를 가져와 직지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외규장각 의궤 297권을 찾아내어 목록과 내용을 정리하는 등 2011년 국내 반환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공 인정받아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201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유네스코 직지상은 직지의 세계기록유산등재를 기념하고 세계의 기억사업을 촉진하기 위해 2004년 유네스코가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정한 상이다. 2년마다 기록유산의 보존 활용에 공헌한 개인 단체에 시상한다. 시상식은 2년마다 9월4일 청주 직지의 날에 개최하며 2005년 체코 국립도서관을 제1회 수상자로 선정한 이후 2022년까지 총 9개 기관이 직지상을 수상하였다.
1층 전시실
고려시대
1.선활자~1958년 북한 개성 만월대 부근에서 북한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고려시대 금속활자이다. 가로 세로 1cm 크기로 먼저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알수 없다.
2.복활자~북한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고려시대 금속활자이다. 가로 세로 1.2~0.9cm 크기에 뒷면에 홈이 파여 있다.
3.금속활자를 발명한 고려~고려는 각종 불경과 대장경 간행 등의 거대한 국가사업을 뛰어난 목판인쇄술로 이루어냈다. 당시 고려의 우수한 종이와 각종 서적이 중국으로 전해졌으며 쇠와 불을 다루는 기술과 인쇄에 필용한 먹의 제조기술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였다.13세기 혼란스러운 정세 속의 고려는 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지식 정보와 확산과 공유가 필요했다. 금속활자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성숙한 문화 흐름속에서 자연스럽게 탄생되었다. 동국이상국집에서 고려는 이미 13세기 초에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금속활자 인쇄를 실용화한 것으로 보인다. 직지가 탄생한 1377년 보다 훨씬 시기에 고려는 이미 세계 최고의 인쇄문화를 꽃피운 문화강국이였다.
4.활자로 태어난 직지~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백운화상의 문하생인 (비구니 남자스님)석찬과 (비구니 여자스님) 달잠이 묘덕의 시주를 받아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현재 국내에는 전하지 않고 프랑스국립도서관에 하권 1책 소장되어 있다. 금속활자로 간행된 후 1년 뒤인 1378년에는 여주 취암사에서 목판본으로 한 번 더 간행되었다. 직지는 한국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써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되었다.
5.흥덕사지 발견~1985년 청주 운천동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흥덕사가 새겨진 청동금구와 청동발우가 발견됨으로써 직지를 인쇄하였던 흥더사의 위치가 확인 되었다. 흥덕사는 849년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사찰로 1377년 직지를 간행하고 얼마 되지 않아 화재로 페사한것으로 추정한다.
6.직지~직지는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 선불교 최고의 교과서로 인정되었다. 고승들의 가르침과 참선에 대하여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7.세상을 변화시킨 금속활자~금속활자의 발명은 정보의 기록과 확산에 획기적인 변화의 전기를 마련하여 인류 역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중세 소수의 귀족층만이 누렸던 지식 정보들은 더 이상 그들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정보의 대중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로부터 유럽은 근대문명이 싹트기 시작하여 종교개혁,시민혁명 등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활자로 다양한 책을 신속하게 인쇄하여 국가의 운영과 발전 통합된 사상으로 국민이 이끄는 역할 그리고 정보와 지식의 보편화에 기여하였다.
8.금속활자 주조법~금속활자는 밀랍주조법과 주물사주조법 2가지로 만들어 졌다.
9.금속활자 제작과정~글자본 정하기 밀랍글자 만들기(밀랍막대 만들기,밀랍막대에 글자본 붙이기,밀랍글자 새기기 및 글자 단위로 자르기)-밀랍가지 만들기(낱개 밀랍가지에 밀랍글자 붙이기,밀랍봉에 밀랍가지 붙이기)-주형틀만들기(밀랍가지를 넣은 대나무 거푸집에 반죽한 흙 채우기)-그늘에서 15~20일 가량 건조하기-대나무 거푸집을 떼어 낸 후 가마에서 밀랍가지 녹이기-활자만들기(1200~1400도로 녹인 쇳물 주입하기,주형틀을 캐고 흙을 제거하여 활자가지쇠 완성,가지쇠에서 활자를 하나씩 떼어내기,활자의 자면을 고운 숫돌에 갈고 다른 면도 다듬어 활자를 완성)-활자 조판하기(준비된 조판대에 원고대로 활자를 배열하기,끓인 밀랍을 부어 단단히 고정하기)-인쇄하기(완성된 인판에 먹을 바르기)-제본하기
10.고려대장경과 교장~대장경은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책으로 불교의 교리가 기록된 경전이다.고려시대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은 1011년~1087년까지 7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초조대장경에 이어 두번째로 만들어진 제조대장경은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불린다. 1236년~1251년까지 16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그 경판은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교장은 승려 의천이 대장경을 해석한 장소를 수집하여 목록을 정리한 불교 주석서로 송,거란,일본에 있는 장소를 수집하여 11세기말에 간행하였다.
11.목판인쇄~우리나라 목판인쇄는 통일신라 이전에 시작되어 고려시대 초조.재조대장경을 간행하면서 찬란하게 꽃피었다. 목판 제작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는 단점이 있었으나 대량 인쇄가 가능하고 또 언제든지 다시 인쇄할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었다.13세기 금속활자의 발명 후에도 목판인쇄는 더욱 발전하였으며 조선후기까지 금속활자인쇄와 함께 주요한 서책 인쇄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12.구결~우리말과 어순이 다른 한문을 우리말로 쉽게 풀어 읽을 수 있도록 한자를 이용하여 조사나 어미 등을 끼워 넣은 것을 구결이라 한다. 구결은 한자를 음으로 읽으면서 중간에 우리말 조사나 어미만 넣어서 읽는 음독구결과 한자의 뜻에 맞춰 우리말로 풀어 읽는 석독구결로 나뉜다. 고려시대 구결은 한글 창제 이전 우리 선조들의 언어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3.목판의 제작순서~나무 선정-바닷물에 일정한 기간 담그거나 소금물에 쪄서 잘 건조- 적당한 크기와 두께로 잘라 판면을 고르게 한다- 준비된 원고를 목판에 뒤집어 붙이고 판각과 교정을 반복한다- 판각이 마무리 되면 마지막으로 목판 양쪽 끝에 마구리를 끼워서 목판을 완성한다.
14.다양한 형태의 목판인쇄~나무를 가공하여 글자나 그림을 새겨 만든 인쇄용 목판은 다양하다. 서책을 찍기 위해 만든 책판이라 한다.
그밖의 체험공간이 있었다. 3D벽면의 활자가 책 속에 인쇄되는 듯한 효과로 직지를 생동감 있게 표현 한 직지 홀로그램이 전시 되었다. 빛을 통해 만들어진 직지로 형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활자의 의미를 마음속에 새기도록 활자의 자취를 인식하도록 하였다.영원히 빛날 직지를 클릭하여 화면으로 내용 볼수 있게 하였고 금속활자인쇄면,목활자인쇄면,목판인쇄면을 손으로 만질수 있게 전시되었다.
조선시대
1.조선시대 세종실록~영락 경자년 1420년 겨울 11월 전하께서 공조참판 이천에게 새로이 활자를 만들게 하였으니 그 글자 모양이 정교하고 치밀하였다. 찍어내지 못하는 책이 없고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니 문교의 진흥이 날로 더하고 세도의 융성이 갈수록 번성해질 것이다고 기록하였다.
2.조선시대 금속활자,다양한 책을 찍어 소통하다~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제왕의 상징이자 소통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였다. 국가를 중심으로 운영된 금속활자 인쇄술은 출판 정책을 통한 체제의 안정과 정보의 대중화로 사회발전을 이끌었다. 다양한 책을 빠르게 인쇄할 수 있는 금속활자 인쇄술은 끓임없이 개량되어 목판인쇄와 상호 단점을 보완하면서 조선시대 주요한 인쇄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3.한글과 함께 한 인쇄술~훈민정음 창제 이후 많은 문헌이 한글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세종은 1447년 처음으로 한글 금속활자를 만들어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인쇄하였으며 세조 때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의 언해 사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후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불경,의서,병서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한글로 간행되었다. 조선후기에는 한글 식자층이 확대되면서 한글 문헌의 간행은 더욱 활발해졌다.
4.간경도감~ 간경도감은 조선 세조때 불경의 국역과 간행을 위해 설립한 기관이다.1461년~1471년까지 11년간 존속하면서 고려시대 의천의 교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불경을 언해하며 간행하였다.
5.인쇄술,일상을 기록하다~조선후기 지방에서도 인쇄활동이 활발하였다. 지방의 관서를 비롯하여 사찰,서원,향교,문종,개인에 이르기까지 간행 주제에 따라 성격과 목적이 다른 다양한 책이 간행되어 유통되었다. 유교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개인 문집과 족보등의 간행이 활발하였으며 특히 한글 보급의 확대와 독자층의 증가로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게 활용할수 있는 의서, 지리서,사전 등의 서적과 사회 풍자를 통한 재미와 감도을 주는 소설류의 책들도 간행되어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는 인쇄술이 일상의 모습을 기록하고 또 일상에 도움을 주는 형태로 자리 잡았다.
6.목활자와 민간의 인쇄~목활자인쇄는 나무로 만든 활자로 판을 짜서 책을 인쇄하는 방식이다. 목판인쇄와 함께 민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인쇄 방법이었다.특히 목판인쇄에 비해 간편하고 비용이 저렴하여 조상의 문집이나 족보를 간행하는데 많이 사용하였다.
7.금속활자 주조법~전통의 금속활자 제작 방법은 주물사주조법,밀랍주조법,도토주조법 3가지자 알려져 있다. 이 주물기법들은 활자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의 금속기물을 제작하는데 일반적으로 사용된 방식이였다. 다만 금속활자의 용도를 고려하여 인쇄에 효율적인 형태로 주조기술을 발전 시켰다. 주물사를 이용한 활자 제작방식은 관청에서 주로 사용하였으며 그 방법은 조선시대 성현의 용재총화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8.책의 교정~교정은 간행된 책의 내용상의 오류와 인쇄 상태를 바로 잡는 모든 행위다.단계에 따라 원고교정과 인쇄교정으로 구분할수 있으며 간행이 진행되는 모든 공정에서 함께 이루어진다. 특히 국가에서 간행하는 서적은 지방에 배포되어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교정의 중요함을 더욱 강조되었다. 이에 제도적 규정을 마련해 두어 간행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9.옛 책의 표지문양~우리나라 옛 책에는 중국,일본과 달리 표지에 다양한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표지에 문양을 내기 위해 만든 목판을 능화판이라 부르며 능화판에 여러 장의 한지를 압착하여 목판의 무늬가 표지에 은은하게 도드라지게 하였다.능화 문양으로는 꽃,사람,새,물고기,곤충 등의 동식물을 비롯하여 칠보,팔보등 다양한 소재가 사용되었다.능화문양의 표지는 옛책의 미각적인 효과와 아울러 공기층을 형성하여 책의 본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다.
10.한국의 금속활자 연표~증도가자13세기,흥덕사자14세기,복활자14세기,계미자1403년,경자자1420년,갑인자1434년.병진자1436년,석보상절 한글활자1447년,경오자1450년,을해자1455년,을해자한글활자와 경축자1457년
3D로 책 표지문양이 전시되며 감상할수 있도록 하였다.
2층 전시실
2층전시실에는 전 구텐베르크박물관장 하네부츠 밴츠 기증도서가 전시되어 감회가 매우 뜻 깊었다.기증 기탁사 명예의 전당 이름이 년도별도 푯말로 문화재의 소중함을 널리 전달하고자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1.옛 청주~청주는 삼한시대에 마한 땅이었으며 백제시대에 이르러 상당현이라 칭하였다. 군사적 요충지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5소경 중의 하나인 서원경으로 승격하여 지방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청주로 지명을 개칭하였으며 조선시대 들어 수운이 발달한 충주가 교통의 요지로 부상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발전이 정체되었으나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과 함께 발전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08년 관찰사가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되었고 1920년 충북선 개통은 지역 발전을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2.신라민정문서~신라민정문서는 1933년 일본 도오다이지의 화엄경론질의 포심에 배첩되어 있었던 촌락문서로 통일신라시대 청주의 경제생활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합을 마무리 한 후 넓혀진 영토를 9주5소경 체제로 정비하였다. 5소경 가운데 서원경은 청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라의 작은 서울이었다.이 문서는 755년경 서원경 인근 네개 마을에 대한 인구,토지,마전,과실나무의 수,가축의 수 등 촌주가 3년마다 촌의 노동력 징발과 조세,공납 징수를 잘 하가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3.구텐베르크의 인쇄술~책을 찍어내기 위해 고민하던 구텐베르크는 양조장의 와인 압착기에서 착안하여 활판을 쐐기에 세게 눌러서 종이에 찍는 원리를 발견하였다. 활판에 유성 잉크를 바른 후 그 위에 종이를 올리고 눌러서 찍어냈다. 이러한 방법으로 1455년경 42행 성서를 비롯한 다양한 책을 인쇄하여 판매하였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효율성을 높이고 경제적 측면에서도 탁월하였다.
4.서양의 인쇄문화~서양의 문화는 기독신학과 그리스,로마 철학에 기반을 두었고 7세기 경부터 필사본은 서적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14세기 들어오면서 유럽은 아랍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중국의 종이생산 기술과 목판 인쇄술이 전해져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15세기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의 등장은 유럽의 활자 인쇄술은 물론 사회 전반에 획기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책을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유럽의 문화운동(르네상스)으로 고조된 대중들의 고전에 대한 관심과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책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갔다.
5.동양의 인쇄문화~중국의 채륜에 의해 종이가 개량되고 보급되면서 기존의 탑본 기술등을 응용한 목판인쇄가 시작되었다.특히 불교문화의 발전으로 불경 간행을 위한 목판인쇄는 더욱 성행하여 주변국으로 전파되었다. 또한 11세기 중국에서는 필승이 흙으로 활자를 만들어 인쇄를 시도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 통일신라 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고려때는 목판 인쇄술의 바탕 위에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책을 인쇄하였다. 일본에서도 770년에 이미 목판으로 백만탑다라니를 인쇄하는 등 중국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목판 인쇄술은 동양 각국의 여건에 맞게 발전시켜 나갔다.
6.중국의 인쇄문화~중국의 활자제작은 송나라 심괄의 몽계필담에 11세기 필승이 진흙으로 활자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내구성 등의 문제로 상용화되지는 못하였다.목활자의 제작과 사용은 원나라 왕정의 농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목판 인쇄술과 관련해서 중국 돈황에서 발견된 목판 자료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중 868년에 간행된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7.일본의 인쇄문화~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은 770년경에 백만개의 작은 목재 탑 속의 봉안을 위해 인쇄한 백만탑다라니이다. 일본의 활자인쇄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유입된 동활자를 이용하여 고문효경등을 간행한 기록이 있고 이후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스루가 성에 은거하면서 조선의 금속활자를 토대로 동활자를 만들어 대장일람집과 군서치요등을 인쇄하였다.
전시실을 모두 관람하고 나가는 곳으로 활자미디어아트로 만나는 체험공간이 있었다. 손으로 기록하다,몸으로 기록하다, 마음으로 기록하다 주제를 이룬 공간이였다.
고인쇄박물관 출입문 옆 길로 흥덕사가 버티고 있었다. 9세기 통일신라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흥덕사의 옛 터에 복원하였다.바로 이곳에서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백운화상의 문하생인 석찬과 달잠이 묘덕의 시주를 받아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를 간행한 곳이다. 직지는 백운화상이 고려 공민왕(21년)1372년 에 부처와 고승들의 법어 대화 편지 등에서 중요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으로 우왕(3년)1377년 흥덕사에서 인쇄하였다.이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간행보다 78년 앞선 것으로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맞은편에는 근현대인쇄전시관과 청주시 금속활자 전수 교육관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에서 한국의 인쇄 문화와 금속활자 제작 기술의 발전사를 한눈에 살펴 볼수 있도록 배치되어 매우 의미가 깊었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인류 문명 발전의 원동력인 지식 정보의 공유와 확산을 가능하게 한 획기적인 발명이자 우리 조상들의 문화적 위상을 확인 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드높이는 공간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청주시 고인쇄박물관에서 태학산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버스로 1시간5분쯤 가다 보니 천안시 태학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따쓰한 봄햇살이 감도는 청주시와는 달리 찬바람이 불어오는 천안시의 날씨로 상쾌했다.태학산 자연휴양림은 학의 형태를 닮은 태학산 아래 작은 계곡과 울창한 소나무 숲을 품은 아늑한 곳으로 숲속과 치유의 숲을 담고 있었다. 어린이 놀이시설에서 소나무 가로수길따라 올라 가니 시냇가의 계곡으로 휴양림의 안식처 같았다.이렇게 입구에서 23분 쯤 올라가니 태학사와 금강동굴 기도처를 이룬 법왕사가 버티고 있었다.법왕사에서 웅장한 삼태리마애여래입상이 있는 길로 이어졌다. 태학산 중턱에 보물 제407호인 천안삼태리마애여래입상은 고려후기 조성된 높이 7.1m의 마애불이다.큰 암반 중앙에 조각한 거대한 입상으로 상체는 돋을새김을 하고 하체로 내려 갈수록 선으로 표현한 고려시대 전형적인 조각양식을 지닌 마애불이였다. 태악산 기슭 바위에 둘러싸인 가람들의 배치로 평온한 기도처 같았다.법왕사의 약수터로 약수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고 추억을 남길수 있어 너무 좋았다. 무색 무취로 건강한 물이였다.바위사이에 세워진 법당으로 신비하고 영험한 기분이 감돌았다. 태학산 약수터가 자리 잡고 있는 법왕사옆 태학사로 바위에 전각들이 배치되어 정겨웠다. 태학산자연휴양림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만복이 파김치 감자탕집에서 감자탕을 먹었다.소고기 장조림처럼 매우 부드러운 돼지 살고기로 묵은 파김치가 깊이 베어 맛이 깔끔했다. 깻잎과 파,팽이버섯으로 향긋한 국물 맛을 더한 감자탕이였다.깍두기,김치,채소절임으로 집밥과 같은 맛이였다. 감자탕에 심혈을 기울여 승부를 건 맛집이였다. 고기를 먹지 않는 내 좌석에 임영은님과 리더님이 맛있고 배불리 먹어 즐거웠다. 감자탕을 모두 먹은 후 리더님 배려로 감자탕 소스에 비벼먹는 볶음밥을 먹었다.누룽지처럼 익힌 볶음밥으로 매우 고소했다.참외와 오렌지가 후식으로 니왔다.불경기에 비싼 과일대접의 감동으로 더욱 더 달콤했다.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 천안흥타령관에 갔다. 모두 단체사진을 찍고 전시관을 돌아 보았다.천안흥타령관 1층은 천안삼거리역사, 2층은 전통주관,명주관,흥타령문화실로 구성되었다.천안삼거리는 교통의 요지로 전국에서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선비와 나그네가 머물렀던 곳이다. 천안의 전통주 역사와 춤과 음악의 역사를 한눈에 볼수 있게 전시물을 꾸며 놓았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유물을 모아 놓아 당시 생활상 들여다 볼수 있게 진열 되었다.우리나라는 지리적 특성상 산이 많아 주로 뱃길과 바닷길을 이용해 도로의 발달이 늦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중앙집권체제가 공고히 되었고 수레의 등장으로 군대파병과 왕의 행차등으로 도로건설을 활발히 하였다. 도로발달은 한반도 중심에 위치한 천안을 더욱 발전 시켰다.천안은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으로 예로부터 살기좋은 땅이였다.서울에서 전라도,경상도로 내려가는 중간지점으로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길과 사람, 물자가 드나드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근대는 철도,고속도로로 교통요지가 되었다.전통주는 우리나라 문화의 결정체이다. 고조선시대 곡물을 발효시켜 고대사회 종교적,의례,제사,축제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는 전통주가 더욱 발달하였다. 왕실에서 즐기는 고급술과 서민사이 널리 퍼진 전통주로 다양한 종류의 전통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술 양조기술이 크게 발전하였다.조선시대는 한국 전통주 빚는 기술과 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였다. 경양록,주방문,임원경제지 문헌에 의하면 다양한 전통주 제조방식과 그 문화적 의미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궁중에서 고유 양조방식으로 만든 술이 중요한 의례에 사용되었다. 일제시대 전통주 제조와 소비가 크게 위축되며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악흥을 즐겼다. 삼국지에 의하면 농사를 지으며 절기에 맞춰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밤낮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기록하고 있다.제천의식에서 음악,노래,춤은 중요한 요소를 차지했다. 우리나라 역사속에 음악이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보여주고 있다.조선후기 실학자 홍대용은 천안에 고향을 두고 서울을 오가며 생활했다. 안암 박지원과 친구로 당대 이름난 학자들이 남산기슭에 소박한 집을 짓고 사는 그의 인상을 주제로 시를 지었다.홍대용 서울집은 풍류가 넘치는 공간으로 작은 누대에서 서책과 악기를 갖추고 차를 마시며 우유자적 했다고 전한다. 홍대용은 가야금,거문고,양금을 연주하며 음악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장군도 평소에 악기와 음악을 즐겼다고 전하고 있었다.이와같이 세종대왕 과학의 업적과 세계 제1의 한글,측우기,고려시대 금속활자 직지로 우리나라 문화의 위대함을 발견할수 있었던 매우 뜻 깊은 역사길이였다.신비한 동굴처와 고려시대 마애불이 있는 절의 휴양림을 산책하고 지방의 맛집을 탐방했던 미식여행으로 카타르시스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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