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공주시 무령왕릉과 왕릉원,공산성,부여서동연꽃축제 (2024년7월6일)

백재은 2024. 8. 5. 20:17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 서동공원 궁남지 연꽃축제

7월6일~풍경있는 여행사에서 공주와 부여로 여행을 갔다. 차창가로 서초대로 고풍스러운 시계탑과 함께 유련한 통유리창 양식의 사랑의교회가 거리를 위용으로 휘감고 있었다.백제 제2 도읍지였던 공주시 백제유적지구인 무령왕릉과 왕릉원에 

도착했다.정지산이 비추는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전시관과 함께  무령왕릉과 왕릉원이 조성되었고 웅진백제역사관,정지산유적,국립공주박물관,공주 숭덕전이 둘레길에 공존하고 있었다.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

무령왕릉과 5.6호분을 실물과 동일한 크기 모형으로 재현한 곳이였다.  

(1)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백제고분~무덤의 역사는 인류가 탄생한 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처음에는 얕은 구덩이를 만들어 시신을 넣은 뒤 흙을 덮는 단순한 구조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무덤을 기념물로 여기게 되면서 시대와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무덤은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과 죽은이에 대한 엄격한 의례가 담겨 있어 그 시대 문화성을 엿 볼수 있는 매우 가치있는 문화유산이다. 백제시대 무덤은 한성-웅진-사비로 수도가 변화함에 따라 지역적 시기적으로 무덤의 특성이 다양하다. 한성시대돌무지무덤움무덤,돌방무덤등이 사용되었다. 계단식 돌무지무덤 돌방무덤이 지배계층 무덤으로 사용되었고 지방에서는 분구묘,독무덤,돌덧널무덤등 다양한 무덤이 사용되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이 조성된 웅진시대에는 한성시대 말기부터 이어진 돌방무덤이 주로 만들어졌고 백제 전 지역으로 확신되었다. 특히 굴식돌방무덤 4세기 중.후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보편적인 백제 무덤 양식이다. 경사면에 구덩이를 판 후 돌을 이용하여 널방과 널길,입구를 만드는 방식으로 시기에 따라 널방의 천장 형태 널길의 규모와 위치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사비시대에도 굴식돌방무덤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이 시기에 큰 판상석을 사용하여 천정을 만든 터널식에서 고임식 혹은 평천장으로 널방을 만들었다. 

(2)백제고분~한성기 대표적 무덤인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은 돌방무덤이고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초기 백제고분군은 돌무지무덤,돌무지널무덤,돌덧널무덤,움무덤등 다양한 무덤이였다. 돌무지무덤은 다듬어진 깬돌을 이용하여 계단씩으로 쌓아올린  고분으로 고구려 돌무지무덤에 기원을 두고 있다. 내부는 점토를 채우고 겉부분만 돌로 시설하여 고구려돌무지무덤과 차이가 있다. 웅진시기 무덤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호~5호분은 굴식돌방무덤이고 무령왕릉과 6호분은 벽돌무덤이다.사비기 익산 쌍릉은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쌍릉이라 부른다. 무덤의 구조는 백제후기 굴식돌방무덤으로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의 것을 대왕묘 남쪽의 작은 것을 소왕묘라고 부른다.부여 왕릉원 1호분(동하총)은 부여군에 위치한 백제 사비시기 왕실의 능묘군으로 보이는 부여 왕릉원 무덤 중 하나 로 깬돌을 쌓아 만든 웅진기 굴식돌방무덤과 달리 대형의 판석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만든 굴식돌방무덤이다. 널방의 4벽면은 판석 1개씩을 사용하여 수직벽을 세우고 천정1개의 거대한 판석을 덮어 완선하여 단면 육각형의 납작 천장식 돌방무덤으로 불린다.널방의 동서남북의 4벽면에는 사신도가 있고 천장에는 연꽃과 구름이 흐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3)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충남 공주시 금성동일대에 위치한 송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하는  백제웅진 도읍기 (475년~538년) 백제왕과 왕족의 무덤이다.17기 무덤이 있었지만 현재는 1~6호분과 무령왕릉만 복원되었다. 구릉 윗부분은 1~4호분이 자리하고  송산 구릉 남쪽사면에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자리한다. 고분의  구조는 크게 한성기 전통을 이어받은 돔형태 천장의 굴식돌방무덤(1~5호분)과 새로이 중국 남조로부터 수용한 벽돌무덤(6호분,무령왕릉)으로 구분된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5호분은 백제가 전통적으로 사용한 굴식돌방무덤으로 돌을 쌓아 무덤방(널방)을 만든 후 천장을 돔형태로 둥글게 마무리하였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터널형 무덤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이 있다.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도굴로 인하여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왕 무령왕과 왕비를 합장한 무덤이다.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으로 널방은 연꽃무늬를 새긴 벽돌을 쌓았다.벽면에 등잔을 올려 놓았던 등감과 창문시설을 설치하였다. 널길의 입구에서 지석은 무덤의 주인공과 무덤연대를 말해주었다. 금제관장식을 비롯하여 5200여점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문화 우수성을 인식할수 있다.  입구에  국보162호인 진묘수는 고대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로 중국 남북조 시기에는 무덤앞이나 안에 있었다.무덤안에 있는 진묘수는 죽은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우리나라 고분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처음 출토되었다.

(4)동아시아 교류사의 빛 무령왕릉~백제는 일찌기 바닷길을 통해 삼국 중에서도 비교적 활발한 대외교섭과 문물교류를 하였는데 웅진기 무령왕릉대에는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외교류를 추진하여 국제적 수준의 우수한 문화를 이루었다.중국 남조 양나라 지배계층의 무덤 형식인 벽돌무덤과 중국제 자기,진묘수,매지권 일본산 관 재료,정교하고 화려한 금속공예,수천점의 유리구슬등은 백제가 백제사회의 국제성과 개방성을 바탕으로 대외교류의 중심이고 고대 동아사아 문화 완성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5)무령왕릉~일본에서 온 금송으로 만든 나무관을 사용하였다. 금송은 일본 남부지방의 고지대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진 최고급 목재로 고대 일본에서도 지배계층이 사용했다.금송의 목재는 연한 황갈색이며 잘 썩지 않고 습기에도 강해 일본에서는 나무관을 제작하는데 최고 목재로 여긴다.금송은 일본 특산종으로 금송과 금송속의 단일종이다. 소나무과 수목들과는 별개의 종으로 일본인들은 고우야마끼라고 부른다.자생지는 일본 남부지방으로 와카야마현의 고야산이 유명하다.

정교하게 설계된 묘실전체는 벽돌로 만든 벽돌무덤이다.벽체는 연화무늬 벽돌을 4단은 뉘어쌓고 그위에 1단은 세워쌓는 방식으로 축조하고 천정은 사다리꼴 벽돌을 사용하여 아치형 천정을 구축하였다. 벽돌이라는 재료의 특성을 이해하고 무덤 밖에서 누르는 흙더미의 압력을 천장이 버틸수 있도록 벽돌모양을 달리하여 아치형 천장을 만든 것은 과학적 축조의 묘미이다. 중국남조무덤양식 널길과 널방에 부장되어 있던 4600여점 유물은 백제인의 정신과 수준 높은 문화적 역량을 보여준다.동아시아 및 삼국관계에서의 백제 위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 제공한다.백제 벽돌무덤은 무령왕릉과 6호분,교촌리3호분등 중심으로 웅진시기 공주지역에서만 한정적으로 나타난다.목관의 관재는 일본에서 가져온 금송으로350~600년의 수령을 가진 직경 130cm이상의 거목으로 최고의 공예기술로 제작되었다. 백제의 중흥과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그 위상을 드높인 왕의 위세를 보여주는 것들로 마련 되었다. 무덤안에는 왕과 왕비의 안식과 사후세계를 위한 물품 껴묻거리가 함께 넣어졌다. 

(6) 왕릉원1~4호분  ~조사 당시 5기의 무덤이 있었으나 현재는 4기만 복원되었다.굴식돌방무덤으로 무덤방(널방)은 정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서 만들었으며 네 벽은 위로 갈수록 안으로 좁아져 둥근 천장을 이루는데 가장 윗부분에 크고 평평한 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7)왕릉원1~4호분 돌방무덤조사현황~고분은 모두 구릉의 남쪽 경사면에 조성되어 벽돌모양의 깬돌로 널방과 널길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으로 돔 천장을 이루고 널길은 널방의 남벽 동쪽에 치우쳐 있다.무덤은 현재4기가 정비 되어 있고 모두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다.1~4호분은 1927년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공주공립 고등보통학교 교사 가루베지온에 의해 각각 조사되었다. 

(8)왕릉원 5호분 ~왕릉원 5호분은 산능선에 등고선 방향과 직각으로 구덩이를 파고 널방과 널길을 조성한  5~6세기 굴식돌방무덤의 전형을 갖고 있다.벽돌모양으로 다듬은 깬돌을 이용하여 널방과 널길을 만들었다.굴식돌방무덤 무덤방(널방)은 정사각형 돌을 수직으로 쌓아서 만들었으며 네 벽은 위로 갈수록 안으로 좁아져 둥근 천장을 이루는데 가장 윗부분에 크고 평평한 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즉 1.3m 높이까지는 벽면을 곧게 쌓고 그 위는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아 천장이 돔 형태를 이룬다. 천장은 1매의 큰 덮개돌을 덮었다. 널길은 동쪽에 치우쳐 마련하였다.굴식돌방무덤한성기 백제 왕실 묘제로 정착했던 것으로 보이며 웅진으로 천도하여 백제왕릉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벽면은 흰색의 회를 발랐는데 지금은 흔적 일부만 남아있다.바닥에는 벽돌로 만든 관 받침대 2개가 나란하게 있는데 목관을 올려놓았던 것으로 서쪽의 관 받침대가 조금 더 크다.무령왕릉과 가까이 있어 당시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9)왕릉원 6호분 ~ 6호분은 벽돌무덤으로 무덤방(널방)이 있고 무덤은 동전무늬가 새긴 벽돌로 쌓았다. 터널형 천장과 터널모양의 무덤방과 널길로 구성되었다. 벽면에 등잔을 올려놓은 등감을 설치하고 네 벽면에 회를 바르고 동방 7별자리를 상징하는 동쪽 청룡,서방 7별자리를 상징하는 서쪽 백호,남방 7별자리 상징하며 무덤을 지키는 존재인 남쪽 주작,북방7별자리 상징하는 북쪽 현무인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목관을 올려 놓았던 받침대가 하나인 것을 보아 한 사람의 무덤으로 보인다. 무덤입구를 막은 벽돌에서 양관와위사의라고 새긴 글자가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무덤에 사용된 벽돌이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벽돌무덤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 위진 남북조에 이르러 시기까지 주로 사용하던 무덤으로 6호분과 무령왕릉이 조성될당시에는 남조 양나라의 지배층이 사용하던 무덤 양식이다. 웅진시대 벽돌무덤이 등장한 이유는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던 백제 사회의 국제성 개방성과 관련된다.

(10)왕릉원 5.6호분과 백제인의 무덤~건국시기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무덤을 사용했다.중앙지역에서는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지방에서는 움무덤,돌덧널무덤,독무덤등에서 돌방무덤으로 변화하였다. 즉 백제의 무덤은 시기가 지나면서 중앙과 지방 모두 돌방무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돌방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추가장을 할수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돌방무덤은 널방을 만들고 사람이 출입할수 있도록 무덤의 한쪽에 진입로와 입구를 만든 개방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무령왕릉과 5.6호분 벽돌무덤 돌방무덤으로 그 재료는 다르지만 무덤의 구조는 널길이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의 주요 무덤을 차지하는 돌방무덤의 확산은 백제의 국가적 발전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돌방무덤 한성시대 처음 지배층의 무덤으로 수용된 후 지방을 장악해나가는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무렵에는 더 빠르게 지방으로 확산되었다.이 무렵부터 백제의 지방에서 보이는 무덤은 고유의 무덤양식이 쇠퇴하거나 사라지는 양상을 보여준다.굴식돌방무덤은 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방의 한쪽에 밖으로 통하는 길을 만든 뒤 흙을 덮어 씌운 무덤으로 횡혈식석분이라고도 한다.벽돌무덤은 구운 벽돌로 만든 무덤으로 전축분이라고도 한다.널길은 무덤 입구에서 무덤방(널방)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말한다. 

(11)동아시아 고대국가의 발달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은 지하에 묘광(무덤 구덩이)를 파고 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든 후 한쪽 측면에 출입구를 내어 여러차레 추가로 매장 할수 있는 구조를 갖춘 무덤이다. 삼국의 고대 묘제는 초창기 각각의 다양한 특징을 지니며 발달하였다가 점차 고대국가체제가 확립되는 단계에 이르러 굴식돌방무덤으로 통일되었다.백제 움무덤(토광묘)이나 돌무지무덤 (적석묘)를 축조하다가 4세기 전후하여 굴식돌방무덤을 수용하였으며  한강유역에 도읍하는 시기부터 축조되었다.고구려는 처음에 적석묘와 적석총을 축조하다가 4세기 전후하여 굴식돌방무덤으로 변화한다. 신라4~5세기에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관분)을 축조하다가 5세기말~6세기이후 점차 굴식돌방무덤으로 변화하였다.따라서 삼국의 굴식돌방무덤은 선진문화 수용과 소화하는 독자적인 단면을 보여줌과 함께 묘제의 변천을 통하여 정치,사회 변화상을 살펴볼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2)일본의 고분문화~3세기부터 7세기경에  비교적 오랜 세월동안 축조된 전방후원분이 있고 5세기 이후 긴키지역에서 주류가 되는 기나이형 굴식돌방무덤이 있다. 백제와 관련이 있는 일본의 큐슈지역에서 확인되는 5~7세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 있다. 이들 무덤은 고분의 구조가 백제 고분과 연관이 있거나 매장시설이나 주구에서 관련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히오사카부 다카이다야마 고분이 이나 후지노모리고분은 5세기 중후엽 백제 한성기 굴식돌방무덤의 계보를 잇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백제 굴식돌방무덤 6세기 이후 기나이형 굴식돌방무덤과 연관성을 보일 뿐만 아니라 전방후원분에도 채용된다. 7세기 이후에는 나라현 묘주인 니시고분과 오사카부 시시요츠카 고분 등에서 사비기의 판석조 석실묘와 유사한 형태가 확인되어 백제 도래인과 굴식돌방무덤의 관계를 살필 수 있다. 

(13)중국의 고분문화~중국은 선진시대까지 구덩식이 기본이었다. 서한중기 전통묘제인 구덩식(수혈식)묘장구조가 점차 사라지면서 이를 대체하는 묘제로 굴식묘제의 보급과 확산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입구가 갖추어진 속이 빈 벽돌을 사용한 굴식 벽돌무덤이 등장한 이후 한국의 돌방무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입구를 통하여 부부합장하는 추가장의 전통이 있다. 굴식방이라는 무덤의 출현은 건축 구조적으로 발전된 묘실의 내부공간이 확대됨으로써 묘실 내부에서 제의가 이루어지는 등 의례가 변화되는 모습을 살필수 있다. 굴식돌방무덤 삼국시대 돌방무덤의 기원으로 고대 동아시아 묘제 변천에 중요한 자료라고 볼수 있다. 

(14)일본에 남은 백제 고분문화~백제의 고분문화는 백제인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하거나 교류를 통해서 일본 열도에 전파되었다. 4세기 이후 벡제와 왜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굴식돌방무덤돌덧널무덤 등은 백제계통의 도왜인 혹은 일본인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에 백제와 친연성을 보이는 무덤은 큐슈를 비롯한 긴키 ,간토,주고쿠 지방등 일본 각지에 남아 있다. 

(15)금동관과 은제관식 출토 백제무덤~백제는 고대국가로 발전하며 영역을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흡수 통합한 지방의 유력자들에세 복속의 대가로 다양한 위세품을 내려 충성심을 유지하였다. 때문에 이를 통헤 백제의 영역범위와 지방지배 방식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고대사회에서 관은 사회적 지위와 신분 권력을 상징하고 위계질서를 알려주는 의미를 갖는다. 백제 금동관은 한성시기인 4~5세기 백제의 지방 주요 거점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는데 고깔모양의 관과 날개형의 세움장식,반구형장식이 달린 대롱의 기본적 구성은 공통되나 세부모양 등 일부에서 차이를 보인다. 움무덤,분구묘등 지방사회의 다양한 무덤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백제가 지방의 유력자를 지배층에 편입시켜 그들을 매개로 지방 지배를 실현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금동관은 6세기 이 후 사라지고 은제관식이 등장하는데 은제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고이왕(27년)때 관등제  정비기사와 함께 2월 영을 내려 6품이상은 자색을 입고 은화로써 관을 장식했다는 기록에 보이는 관장식으로 사비시기 이 후 관등제가 정비되면서 관위를 구별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사비시기 돌방무덤에서 확인된다. 은제관식은 백제가 웅진천도 이후 국가체제를 정비해나가는 과정에서 보다 직접적인 지방통치체제를 확립하면서 지방의 유력세력들은 독자성을 잃고 백제의 지베체제 속으로 편입되었음을 보여준다.

(16)백제역사유적지구~1500년전 모습대로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을 알수 있어 가치가 매우 높다. 금관꾸미개,둥근고리큰칼,중국제 도자기,유리수글, 일본산 금송으로 제작된 목관등 다양한 껴묻거리들은 중국은 물론 일본과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다양한 지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산물이다. 따라서 무령왕릉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동북아시아 무덤연구에서 유적과 유물의 연대,고분 피장자의 신분추정에 결정적인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대인들의 무덤은 죽은 사람의 집의 공간이다. 무덤에는 당대의 기술력과 문화가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당시 백제의 우수한 기술과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문화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 백제역사유적지구 8개중 공주시에 공산성과 무령왕릉와 왕릉원이 속한다.

 

전시관에 전시된 둥근고리큰칼은 백제지역 최고 걸작품으로 무령왕의 권위를 보여주고 있었고 왕과 왕비의 금제관장식과 장신구들은 백제 금속세공술의 정수를 이루고 있었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볼수 있었다.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 문을 따라 나가니 왕릉원 길이 펼쳐졌다. 무령왕릉,1~ 6호분이 릉성 언덕으로 초목에 드리우며 매우 아름다웠다.정지산이 보이는 언덕아래로 굽이치는 산봉우리가 드리우며 백제의 얼이  찬란하게 비추었다. 왕릉원을 드리우는 초목들로 나무 한그루마다 정연하게 비추었다. 장엄하게 드러나는 6호분을 지나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밟은 곳 마다 신비롭게 비추고 소나무가로수가 잔디로 드리우는 것 조차 신라의 얼로 빛났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공산성으로 향했다. 맞배지붕의 정자가 길게 늘어진 제민천을 지나 3거리로 무령왕릉의 금동상이 위용으로 거리를 감싸며 웅진기의 백제 얼을 기리고 있었다. 공산성과 마주보며 백미마을인 음식문화거리로  신한옥을 이루며 활기찼다.

 

공산성

공산성은 사적 제12호로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후 웅진도성안에 있었던 왕성이다.공산성은 공산 능선을 따라 구축된 포곡식 산성으로 포곡식 산성은 내부에 넓은 평탄지와 계곡을 포함하고 있어 사람들이 성안에 장기간 거주할수 있는 산성이다.동서남북으로 배치한 공산성 깃발은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다.사신도는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 송산리 6호분 벽화의 사신도는 당시 왕성했던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국제 교류를 보여준다. 깃발의 바탕색은 황색으로 이것은 백제의 나라색이며 백제시대 사람들은 황색을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하며 중히 여겼다.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금서루,백제건물지,쌍수정, 쌍수정사적비,추정 왕궁지,연못 성곽길을 걸었다.서쪽 문루인  금서루에서  용처럼 굽이치는 성벽길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공주시와 성벽아래 숲길이 펼쳐지고  저! 멀리 공산정이 비추며 매우 아름다웠다. 서문에서 바라본 공주 시가지로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의 순교지인 황새바위와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이 위치한다. 우측 강가 언덕에는 백제시대 제사유적인 정지산유적이 있고 그 주변의 금강변에 공주의 옛 이름인 고마의 유래가 담기고 배가 닿았던 고마나루가 있다.유적지가 비추는 공주시 전경이였다.서문앞 광장은 음식점과 상점들이 가득 메우고 있지만 본래 공주 특산물이었던 미나리를 재배하는 미나리꽝  지대였다.성벽길 따라 가다가 왼쪽으로 평지에  백제 목곽고로 식품이나 물품 등을 보관하기 위해 백제시대 나무로 만든 지하 저장시설이 있었다.이윽고 백제 왕궁지와  백제 건물지의  평지가  펼쳐졌다. 공산성 왕궁터 서북쪽에 위치하며 아래로 내려 갈수록 좁아지는 모습으로  이러한 형태는 백제 사비시기의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도 확인된다.백제 건물지와 마주보며 유형문화유적인 쌍수정 사적비옆으로 쌍수정이 버티고 있었다.쌍수정은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이 1734년 영조(10년) 인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제16대 왕 인조(재위 1623~1649)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서 6일간 머물렀는데 당시 인조는 두 그루 나무아래에서 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 나무가 있던 자리에 삼가정을 세웠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쌍수정옆 숲길사이로 산에 둘러싸인 공주시가 비추며 공주시를 수비하는 백제의 산성임을 드러내고 있었다.바로 그곳에서 다시 금서루로 내려와 김밥을 먹었는데  누각에서  매우 아름답게 비추는 숲길과 성곽길로 꿀맛 같은 맛이였다.공산성 입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비석아래 1968년 공산성의 혈투 촬영장소 비석으로 문화재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었다. 음식마을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니 금서루 아래 기와집 관광안내소가 질서 정연하게  문화재 얼을 찬란하게 비추었다.공산성과 관광안내소가 조화를 이루며  과학적인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로 3거리의 무령왕릉 동상과  무령왕릉 벽돌무덤을 재현한  아치형 장식이 거리를 휘감으며 웅진의 문화강국 백제를 위시하고 있었다.아치형 장식을 지나  정자가 있는 제민천으로 제민천은 공주와 또 다르 역사의 흔적이자 삶의 터전이였다. 금강의 물줄기 따라 공주로 깊이 흘러 들어온  제민천은 백성들과 함께한 하천이었다. 1817년 순조(17년) 제민천이 범람하여 다리가 떠 내려가 비축해둔 군량미와 고을 사람들이 모은 기부금으로 제민천교를 다시 만들었다. 공산성 서문 앞에 제민천교 영세비에 당시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한옥양식을 이룬  밤떡명가와 공주 수제 밤파이와 쌀밤빵의 사이로 작은 마당을 이루어 매우 정겨웠다. 공주 수제 밤파이와 쌀밤빵에서 쌀밤빵을 사가지고 와 관광안내소에 갔다. "ㄷ자형" 한옥의 마루양식으로 중앙에 작은 마당을 이루며 평안한 안식처 같았다.창가로 금서루가 매우 고풍스럽게 비추는 관광안내소 내부는 나태주의 공산성의 시가 붙어 있었다.기와집위에 옛날속에 그리움의 연속이라는 사라져간 백제문화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하고 있었다. 쌍수정의 벚꽃 야경의 사진작품으로  문화유산을  더 가치있게 빛내 주었다. 도표화한 공산성의 역사와 공산성 구조와 축조에 대한 액자로  공산성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백제때 공산성 모습을 3D로 복원한 디오라관으로 대형 디오라마와 함께 영상으로 재현한 공간이였다. 공주 수제 밤파이와 쌀밤빵에서 사온  쌀밤빵을 먹었다. 입안에서 살살 부드럽게 씹히는 반죽과 함께 단맛과 밤맛,시원한 맛이 더해진 다른 지역에서 맛 볼수 없는 맛을 지녔다.

 

공산성에서 부여로 향했다.부여시에 도착하니 차창가로 부여부소산성,정림사지,부여관북리유적,부여왕릉원으로 가는 푯말이 비추었다.사비시기 부여의 백제유적지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찼다. 부여의 백제역사유적지구를 등지고  왼쪽으로 서동공원이 버티고 있었다.

 

궁남지

서동공원은 궁남지로 부여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별궁 연못이다.무왕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궁궐의 남쪽에 연못을 팠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궁남지라 부른다.주위에 버드나무심었고 연못 가운데 방장선산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고 뱃놀이 했다는 기록이 있다. 못의 중앙부에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어 섬이 있었음을 알수 있었다.고대 중국사람들은 동해바다 한가운데 일종의 이상향인 신선이 사는 3개의 섬으로 삼신산이 있다고 생각하여 정원의  연못 안에 삼신산을  꾸미고 불로장수를 희망 했다고 한다. 궁남지는 이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신선정원이라 불린다.연못 동쪽에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남아있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있고 연못 안에는 정자와 목조다리를 만들어 놓은 곳이였다. 궁남지의 포룡정으로 자주빛과 장식문양을 한 목재다리가 연결되며 서동과 선화의 사랑 그림자로 가득찼다. 다도체험행사를 하는 궁남지 포룡정을 중심으로 시골정취의 연꽃길마다 행사장으로 매우 활기찼다.부여 서동공원은 열대수련,홍연,어리연,왜개연,가시연,백련,수련,빅토리아,홍연,백연천판연(묘연) ,임프레스,미니홍련,삼명애련,황연,메그니피센트,향백련,노랑 어리연 등 숙구의 종류들이 많은 곳이였다. 10프로 정도밖에 개화하지 않았지만 매우 탐스러운 연꽃으로 맑고 청초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지금까지 본 연꽃축제 중 제일 덕스러운  맑은 기운을 뿜어내는 거룩의 꽃이였다.

 

서울로 가는 버스안 옆사람이 건망고와 참외,방울 토마토를 주어 너무 감사했다.처음보는 사람과 나누는 정으로 휴게소에서 비닐봉지에 가득찬 옆사람 휴지를 대신 버려주었다.휴게소 화장실 복도로 보자기상자 그림이 장식되었다. 뎃생의 교과서를 보여주고 있어 보고 또 보았다.

 

즉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느낄수 있었던 매우 알찬 여행이였다.

묘지석
무령왕릉과 왕릉원~진묘수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시관
금서루
쌍수정 사적비
공산성~쌍수정
공산성 관광안내소에서
공산성앞 거리



쌀밤빵
궁남지와 서동공원
휴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