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일~ 우리함께 걸어요 밴드모임에서 구미시로 여행을 갔다.휴게소에 도착하여 화장실을 간 다음 이해경언니를 찾아보니 없어 혼자 집에서 챙겨온 떡을 먹었다. 아침을 먹은 후 화장실로 가니 이해경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혼자 먹고 남은 만두를 나에게 주었다. 오래간만에 이해경언니와 같이 여행하게 되어 반가웠다.차창가로 산봉우리가 수려하게 둘러싸인 게곡의 경치가 펼쳐지는 금강휴게소를 지나 구미시에 이르니 금오산으로 가는 굽이치는 도로길로 산봉우리들이 펼쳐지고 게곡길 따라 하천과 단풍나무 가로수길로 매우 아름다운 금오산상 드라이브 명소길 같았다.금오산은 평지돌출형으로 산세가 가파르고 기암절벽과 수림이 잘 어울린 산이였다.대해폭포와 신라말 고승 도선이 수행했다는 천연동굴인 도선굴 등 자연경관이 뛰어난 영남팔경으로 꼽혀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그들이 남긴 암각이 다수 남아 있고 고려 말 충신 이은 길재선생을 기리는 채미정이 산 입구에 자리하여 빛을 더하고 금오산성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산성으로 외침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역사현장이였다.태양정기 밝은 산 충절이 스며든 호국의 산 조선인재,영남인재 반선 선산(현 구미시) 이란 말대로 수 많은 인재가 산아래 배출되었다. 금오산 기슭에서 태어난 조국 근대화를 이룬 박정희와 젊은 도시 구미로 우리나라 내륙 최대의 디지털 첨단산업 도시를 이룬 젊은이들의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 한국제일의 명산이다.입구부터 우뚝솟은 은행나무가로수가 매우 수려하게 펼쳐져 청정했다.정미현,이해경님과 함께 금오산 입구부터 동행하였다.금오산 초입부터 국가지정문화재명승인 채미정이 버티고 있었다. 채미정은 야은 길재(1353~1419)선생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영조(44년)1768년에 건립한 정자였다. 야은 선생은 고려시대 1386년 진사시급제 성균관박사를 거쳐 문하주서에 올라 종칠품벼슬을 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벼슬을 마다하고 선산에 머무르며 고려왕조에 대한 도리를 지켰다. 두 왕조를 섬기지 않고 금오산에 은거하였다. 채미라는 이름은 야은 선생이 고려 왕조 절의를 지킨 것을 중국의 충신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에 비유하여 지은 것 이였다. 채미정은 흥기문을 지나 우측에 정면3칸,측면3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이루었다. 뒤편에 야은선생의 충성스런 마음을 기린 숙종의 어필오언구가 있는 경모각과 야은선생을 기리는 비인 유허비각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채미정은 금오산의 맑은 계류와 수목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 경관미가 뛰어난 명승지였다.계곡이 흐르는 석교다리에서 부터 흥기문이 기와 담장과 함께 노랑 단풍에 드리우며 고혹적으로 다가왔다. 궁궐양식 같은 흥기문으로 가는 돌다리에서 채미정과 구안재가 비추며 매우 매혹적이였다.즉 석교다리에서 부터 매우 고혹적으로 다가오는 사당이였다.지금까지 봤던 사당중 제일 품격이 있었다. 매우 화사한 겹처마와 함께 중앙 1칸의 방을 중심으로 마루가 있는 채미정이 카리스마스 자태로 압도되었다. 채미정에서 흥기문과 경모각 관리사가 비추며 고즈녁했다.경모각의 돌계단에서 채미정과 구안재,흥기문이 더욱 화사하게 비추고 흥기문에 드리우는 단풍과 초목과 함께 채미정이 조화를 이루며 고풍스러웠다. 관리사로 가는 목재문과 담장으로 초목이 길재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드리운 경모각과 유허비로 충절의 향불로 타올랐다.돌담 정원으로 단풍나무와 대나무 숲을 이룬 구안재의 서까래와 창호,목재문이 강직한 길재를 드리우고 있었다.양반집 사랑채같은 구안재 마루에서 금오산 산봉우리가 비추며 은거의 안식처 같았다.채미정의 흥기문으로 가는 돌다리를 지나 계곡길로 내려오니 계곡과 산에 드리우는 사당이 자연의 별장 같았다.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을 이룬 계곡의 맑은 물이 매우 청정한 향기로 가득했다.케이블카로 가는 길로 장대하게 우뚝솟은 소나무와 맥문동군락 물결을 이루고 은행나무 장대한 숲길로 매우 아름다웠다.채미정지나 야은역사체험관이 있었다.야은역사체험관은 8개 목재기둥을 이룬 거대한 대문과 목재양식을 지닌 수양각, 훈자실 영상실을 이룬 "ㄷ자형"구조를 이루고 있었다.고려말 성리학자 야은 길재선생의 사상과 학문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전통정원을 조성 한 곳이였다. 경관석 ,글귀새김이 있는 너럭바위,길재 선생 시설이 있는 곳이였다.야은 길재(1353~1419)는 조선 건국후 태상박사에 제수되자 불사이군 뜻을 밝히고 금오산아래 은거하였다.공자를 뵙고 사당을 배알하며 제자들과 경서 강론과 성리학의 종지에 부합하기에 힘썼다. 문집으로 야은선생행록,야은속집,야은선생언행습유등이 있다. 정몽주를 이은 야은 길재의 학문과 정신은 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등으로 이어져 조선 성리학의 원류로 평가 받으며 구미는 조선 성리학의 산실이 되었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삼은으로 불린다.개경에서 이색,정몽주,권근 등에게 성리학을 배워 8세에 석별가를 지었고 16세에 술지라는 시를 지어 뜻을 세웠다. 138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청주목 사록에 보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389년까지 성균학정 순유박사성균바가 문하주서등에서 제수되었다.전시실에는 고려 공민왕이 처음 만들어 즐기다가 길재에게 전해져 그가 간직한 거문고가 전시되었다. 케이블카로 가는 길까지 오르막길로 매우 울창한 단풍나무 숲길로 낭만적이였다. 케이블카부근에 이르니 금오산의 웅장한 산봉우리가 비추며 매우 아름다웠다.계곡위로 새를 잡고 있는 소녀상이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로 빛났다.20분이상 줄을 선 후 케이블카를 탐승하였다. 창가로 울창한 숲과 신비한 기암괴석의 계곡이 펼쳐져 환상적이였다. 병풍을 치듯 매우 웅장한 산봉우리가 드리운 중앙 계곡의 경치가 케이블카 창가로 펼쳐져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케이블카에 내리니 해운사 사찰길이 펼쳐졌다.숲이 드리운 사천왕문길과 돌담장 언덕위의 길들이 고즈녁했다.매우 아담한 목재계단을 이룬 전각의 앞 마당으로 정겨웠다.돌계단으로 가는 대웅전으로 매우 웅장한 기암괴석이 드리워져 매우 아담한 사찰이 아름답게 다가왔다.사찰에서 김진봉님이 익은 감을 주어 먹었는데 매우 달콤했다.사찰옆 아래로 계곡을 이룬 등산길이 펼쳐졌다.케이블카를 탐승하는 곳에서 이하랑공리님이 사과를 주어 감사했다.케이블카 창가로 케이블카가 지나는 중심으로 계곡길이 펼쳐지며 유려한 산봉우리들과 함께 구미시시 전경이 비추었다. 즉 케이블카를 타면서 펼쳐지는 계곡의 경치로 매우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약동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금오산에서 금오지 주변 금오산 올레길로 갔다. 모래가 드러나는 금오지로 흰육각정자가 비추었다.성리학역사관이 금오지 입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초석위에 겹처마와 함께 목재양식의 문으로 곱게 물든 단풍나무가 열정의 화신으로 드리우며 매우 아름다웠다.
성리학역사관은 인재업적을 기리기 위해 구미의 역사와 전통체험의 복합 문화의 장이였다.고려말에 수입된 성리학은 지금까지 700여 년동안 우리나라 정신문화 핵심이였다.그 산실이 바로 구미로 구미는 안향,이색, 정몽주의 학문을 이은 길재를 비롯해 성리학 정맥을 이어온 수많은 선현을 배출하여 인재의 반이 영남에 있었다. 구미는 낙동강중류에 자리한 지리적 특수성과 함께 영남대로의 중심이자 조선 성리학 산실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구미역사관~조선시대 경상도에서 서울로 가는 물자의 반이 낙동강 물길로 옮겨졌다.영남대로 땅의 길이 있어 구미는 인구증가,경제 발전,농업 발달을 통해 크게 성장할수 있게 되었다.
사림이 성장하여 정치기반을 장악하다)사림은 조선 건국을 협력하지 않고 지방으로 물러나 학문 연구에 함쓴 사대부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중소 지주출신으로 정몽주,길재의 학통계승,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추구하고 향촌지지를 강조하였다.15세기에는 세조 즉위 공을 세운 훈구세력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이에 성종은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의 사림을 대거 등용 3사의 언관직에 임명하였다.이러한 성종 노력으로 훈구와 사림은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이들은 국가적 편찬사업과 문물정비에 협력하였다.그러나 김종직을 비롯한 중앙 정계 진출한 사림들이 훈구의 비리를 비판하자 두 세력 갈등은 더욱 커졌다. 연산군은 훈구와 사림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특히 언론활동으로 왕권을 견제하는 사림세력을 탄압하였다. 그 과정에서 훈구세력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세조가 단종 죽인것 유교적 명분에 어긋난다글을 씀)을 문제 삼아 사림들을 축출했다.이것이 무오사화이다.그 후 연산군 생모 윤씨 폐위된 것 이유로 이와 관련된 훈구세력과 사림들이 제거 된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두차례 사화 이후 연산군 폭정이 계속되자 훈구 세력은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세운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성리학전시관~화강석 벽체와 함께 통유리창의 창살무늬를 한 성리학전시관이 대나무에 드리우며 동남아풍 정감을 자아냈다.성리학실에는 야은 길재 연보,선산부사 김종직이 선산지리도에 1477년 선산의 열가지 자랑거리를 찬양한 시인 선산10절 전시,조선 성리학 태동 길재의 강학으로 조선 성리학 학맥도,구미 성리학 계보,야은학파계보,계유정난에 대해 전시되었다. 계유정난의 선산 절의파로 사육신,생육신,금성대군 사건등에는 길재제자와 선산출신들이 다수 포함되었다.그들의 스승의 남긴 정신적 교훈 때문에 길재 고향 선산은 절개와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절의파의 고향으로 알려졌다. 조선인재 절반은 영남에 있었고 영남인재 벌반은 구미 선산에 있었다. 한국의 성리학, 일본의 성리학,중국의 성리학, 중국의 우주관이 전시되었다.
4대사화와 선산사람들)1498년 무오사화부터 1545년 을사사화 60년동안 훈구와 사림의 정치적 갈등의 연속이였다.무오사화 김종직은 평생 성리학 세계 완성을 위해 노력한 관료이다.1504년 갑자사화에서 사형당한 김굉필은 김종직 제자로 조선 도학을 창시한 성리학자로 스승따라 선산에 공부하였다.1519년 기묘사화 주된 공격대상였던 조광조는 김굉필제자이다.을사사화는 중종의 후계를 둘러싸고 인종과 명종의 외척상에 벌어진 정치투쟁이자 송당학파 제거위한 훈구세력의 사상 공세였다 이 때문에 박영의 제자 송당학파가 큰 피해 입었다.
사림) 고려중기부터 조선시대 걸쳐 유교 지배층을 이르던 말이다.선비들의 무리라는 뜻으로 조선 건국이후 훈구세력에 맞서 기호 영남지방 중심으로 서원등을 기반으로 성장하면서 사림파가 형성하였다. 점차 사림파 내부 분열이 일어나고 나아가 대표적인 스승 혹은 영수를 중심으로 당파가 형성되면서 당쟁을 유발하였다.훈구파 대립속에 무오(1498),갑자(1504),기묘(1519),을사(1545)사화가 사림파가 입은 대표적인 4대사화이다.
헌학파결성)헌학파를 결성한 정현광(1554년 출생)이 18세 우주요괄을 지어 자신의 목표가 우주사업에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황과 이이의 이기설을 지양하고 독창적인 이기경위설을 주창하였다.경위설에는 기의 운동을 통해 이뤄지는 현실의 끓임없는 변화과정을 리의 자기성취 과정으로 평가하였다. 정현광은 주리론과 주기론,지역과 당색에 종속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선배 성리학자들과 중국 정주의 학설들을 모두 뛰어 넘으려는 웅혼한 기상을 가진 성리학자였다.그리하여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요순과 공맹에 바로 도달하여 인간의 도덕적 본질을 밝히고 유학의 정당성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장현광의 우주론은 이기론이 핵심으로 성리학 핵심은 우주속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우주의 원리인 리와 우주를 이루는 기로 구성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임진왜란 전후 영남전역 각처에서 제자들 모여들었다.
임진왜란 이후 구미에 끼친 영향 ) 구미는 일본군 점령시가 빠르고 철군시기가 늦은 지역이였다.1592년 겨울부터 2년동안 계갑 대기근으로 인해 전체 주민 60프로 사망으로 주목할 만한 정치세력이 없어졌다.
공자사상)공자(기원전 551~기원전479년)는 춘추시대 이전의 예악제도와 도덕사상을 집대성하여 유학으로 발전시키고 그 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였다.공자 사상과 학문은 제자들을 통해 전승되고 전국시대에 맹자를 거쳐 1000여 년 뒤 송대에 이르러 성리학이 형성되는 토대가 되었다.유교는 공자의 가르침을 기초로 형성된 사상이고 유교를 학문화한것은 유학이다.인간의 인격형성과 이상적인 세상건설목표인 유학은 중국 고대 하은주 시대의 신앙과 사상제도를 회복하기 위해 형성되었다. 춘추시대 접어들어 예의를 중시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사회질서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따랐는데 그 중심에 공자가 있었다. 그 기본사상이 바로 효제를 근본으로 하는 인이다. 이후 유학은 당대의 훈고학, 송.명대의 성리학,청대의 고증학등 특정 시대의 유학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변화 발전하였다. 우리나라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태학설립(372), 백제 고이왕때 (285년)왕인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사실,신라 문무왕때 국학 설립(682년)을 보아 최소한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유학이 도입되어 성행했음을 알수 있다.
성리학) 중국 송나라때 발현하여 남송의 주희(주자)에 의해 집대성한것을 주자학이라 부른다.당나라 말기 획일화 된 훈고학의 문제의식을 가졌다.당시 사회적 페단인 불교와 도교의 문제점을 인식한 유학자들이 불교와 도교에 비해 우위를 갖는 학문만들고자하였다. 송나라때 주돈,소옹,장자,정호,정이 북송5헌등으로 대표되는 유학자들이 구체화하고 주희가 집대성
하였다.성리학은 인성과 천리의 관계를 밝히는 학문이자 철학사상이다.공자에 의해 집대성된 유학의 근원적 개념은 사람의,사람에 의한,사람을 위한 일상 진리의 학문이다.바른사람이 되는 실천 방법을 제시하면서 예를 회복해가는 도덕 윤리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 많은 변화를 거쳐 천리와 인성의 형이상학적 체계와 상호 유기적 관계를 현실적,실천적으로 구현하는 학문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그렇게 성리.의리.이기등의 철학적 사유를 탐색하여 수양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성리학이라는 체계가 성립되었다. 남송시대 주자에 의해 다시 집대성되어 주자학으로 완성 되었고 정주학 .이학.도학 등으로 불리면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한 성리학은 동양 철학의 정수가 되었다.특히 고려말 주자학 즉 성리학을 수입한 우리나라는 원나라 간 안향,백이정,이제헌 등에 의해 고려에 유입되었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국가 통치이념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였다.구미는 길재,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 학맥의 발원지이자 산실이었다.이후 16세기부터 약 100년사이에 퇴계 이황, 남명 조식, 고봉 기대승,율곡 이이등과 성리학자를 배출하였다. 뒤이어 수많은 선현에 의해 유학과 성리학의 원류인 중국을 뛰어넘어 동양 철학의 독자적인 선진 유교문화를 꽃피울수 있었다.
성리학전시관을 나오니 언덕길로 야은관,예절관,청렴관,경파정의 신한옥들로 즐비했다. 진분홍빛 연꽃이 수련하는 연못의 소나무섬으로 팔각정자가 드리우고 팔각정자앞 바위정원과 연못으로 언덕 꼭대기로 부터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었다. 한옥과 마주보며 화강석 벽체의 야은관으로 창살장식 문이 인상적이였다.이해경언니와 정미현님을 정자에서 만나 계곡길로 내려왔다. 초목이 드리운 계곡으로 징검다리를 건너니 매우 상쾌했다.식당으로 가는 차창가로 금오천 주변 도로길에단풍나무가로수길과 정원이 함께 단풍으로 수를 놓아 매우 사색적이였다. 구미시에서 잘 정비한 길로 매우 인상적이였다.식당으로 가는 시장길로 회색벽체와 함께 맞배지붕의 서양풍 조각 장식을 이룬 애플게임랜드 건축으로 인상적이였다. 조방낙지에서 점심을 낙지볶음을 먹었다.참기름 들어간 밥에 낙지볶음을 비벼먹도록 먹는 메뉴였다. 표고버섯,당면,마늘,파가 들어간 비법양념의 낙지볶음으로 매우 감칠맛 있었다.낙지볶음을 다 먹은 후 양념에 밥을 비벼먹으니 더욱 고소했다.고급진 식초 맛의 미역냉국,싱싱한 맛이 가득한 김치,김가루무침,오이 치커리 상추의 쌈채소,된장,쌈장,양파고추간장무침,생미역으로 자연의 맛을 살리는데 노력한 반찬들로 힐링되었다.달큰한 땅콩간장조림으로 입맛을 돋구었다.서울로 가는 차창가로 잘 정비된 도로옆 공원같은 정원사이의 단풍나무가로수가 인상적이였다.구미시의 중심지인 금리단길로 아기자기한 건축들이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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