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영양 죽피리자작나무숲,주실마을(2024년12월15일)

백재은 2024. 12. 27. 20:08

주실마을
주실마을~지훈문학관

12월15일~우리함께 걸어요 밴드모임에서 영양으로 여행을 갔다.아침부터 새벽에 눈온 경치로 상쾌했다.휴게소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정미현님과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둘도모밴드와 여행에 대한 담소를 나누면서 호흡이 잘 맞았다.김밥을 먹으면서 정미현님이 고기국밥을 조금 덜어 주었다.고기육수의 매우 감칠맛과 정겨운 맛의 깍두기와 잘 조화되는 맛이였다.  

죽피리자작나무숲으로 가는 차창가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강경치가 사색적인 수묵화를 그려 내고 있었다.수묵화같은 산세들로 사색적이였다.나뭇잎들이 모두 떨어진 산의 형세가 입체감있게 드러냈다.초겨울의 아름다운 산의 모습으로 여행의 설레임으로 다가왔다.산봉우리가 드리운 굽이치는 계곡길의 산고개길이 10분이상 펼쳐지고 봉화터널로 이어졌다.대티골,죽령고개길의  산고개길을 지나 계곡길로 이어졌다.계곡을 이루는 산고개길로 둘레길 명소 같았다.죽피리자작나무숲은 입구부터 20분이상 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숲이였다.자작나무가는 길이 계곡을 중심으로 공기좋은 산뜻한 숲길로 펼쳐졌다. 생명이 발돋움 한 봄에 매우 좋은 등산코스 같았다.천정이 뚫린 버스를 타며 등산길에 부는 칼바람으로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자작나무 숲만 쳐다 보았다.죽피리자작나무숲은 수령 30년생 국내 최대 자작나무 숲 군락지로 1010년이 넘는 금강소나무군락에 국가지정 국유림 명품 숲이였다.푸른 하늘에 은빛 물결로  하늘로 높이 치솟은 자작나무숲으로 정겨웠다.버스로 자작나무숲에서 원점회귀하여 칼바람을 이기지 못해 자작나무숲카페에 들어갔다.백목련차를 마셨는데 깔끔한 자연의 향기로 힐링되었다.정미현님이 찹쌀도너츠를 주어 먹었다.카페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원에서 만나자고 해 예전보다 더 친근해질 수 있었다.죽피리자작나무숲에서 흥림산 자연휴양림으로 단체사진을 찍으러 갔다.계곡이 흐르는 언덕길로 숲향기가 좋은 휴양림으로 무성한 숲길을 자랑하였다.주실마을로 가는 차창가로 매우 신비로운 기암괴석과 산이 웅장하게 펼쳐졌다.기암괴석이 수비하듯 창파천으로 드리우고 별장같은 한옥이 비추며 조선시대 별장 같았다.장군천의  산계곡으로  소나무숲이 정갈하게 펼쳐졌다.즉 죽피리자작나무숲에서  부터 차창가로 드라이브 코스 명소길 처럼 매우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졌다.영양군의 매혹적인 자연형세를 보게된 카타르시스가 넘친 길이였다. 주실마을의 주실교로 갈대가 금빛물결로 출렁거리며 사색적이였다.주실마을은  400년 역사를 간직한  수령 100년된 소나무와 250년된 느티나무가 울창한 시인의 숲으로 마을 주민들이 오랜 세월 정성으로 가꿔온 숲 이였다. 산기슭아래 하천을 바라보며 신교육의 요람지 서당과 종택들의 주실마을이 명실공이 사대부 전통과 역사의 숨결로 빛났다. 기와담장과 목채벽체로 "ㄱ억자로" 연결된 목재문인 문필연적으로 정겨웠다. 월록서당은 영조(49년)1773년에 한양조씨,야성정씨,함양오씨가 주축이 되어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한 서당이였다. 서당 양쪽 방사이 마루를 이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였다. 옥천종택은 17세기말 건립된것으로 추정된 종택이였다. 한양조씨 옥천  조덕린의 고택살림채인  정침과 글을 읽는 초당,가묘인 사당으로 구성된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였다. 노계고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광의의 11대손 노계 후용의 고택으로  "ㅁ자형" 반가로 조선후기에 건축되었다 옥천고택은 남향에 가까운  주실에서 가장 전망좋은 집에 속하였다.17세기 말 건립 된 반가로 조덕린의 고택    담장 밖에 이 집에서 사용하던 우물이 있는데 주실에서 단 하나뿐인 우물이였다. 만곡정사는 정조때 유학자 조술도(1729~1803)가 만년에 원당리의 선유굴 위에 강정 건립 하였던 것을 여러번 이건하다가 현재 위치로 이건하여 만곡정사라 하였다.정면3칸,측면1칸, 반규모의 팔작기와집으로  경북 문화재자료 제341호였다.조치훈생가 호은종택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청록파 시인,근대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치훈(1920~1968)이 태어난 곳이다.고풍의상,승무등의 민족적 전통이 담진 시작과 지조론 등 평론을 남겼다.이 집은 주실마을에 처음 들어온 조전의 2째아들 조정형이 조선중기 인조때  창건하였다. 6.25동란시 일부 소실되었다. "ㅁ자형" 집으로 정침과 대문채로 나누어진다. "ㅁ자형"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형식으로 서측 1칸에는  지훈선생 태실이 있다.이 태실에서는  한말 의병장 조승기,6.25때 자결한 지훈의 조부 인석등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많은 분들이 태어난바 있다.남인집안이라하여 이 집안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삼불차의 가훈을 철저히 지켜 내려왔다.유년시절 보낸 조지훈의 방우산장이 호은종택 언덕위로 자리 잡고 있었다.  조치훈생가  입구부터  황토 벽체와 창살과 함께  목재대문이 연결되며 정겨웠다. 양반집 종택가옥처럼  단아하면서 귀품있었다. 주실마을 광장에서 지훈뜨락과 조치훈 문학관이  있었다.문인의 고장 영양을 자랑하는 마을이였다.승무시를 읽어보니 승무하는 모습을 매우 세밀하게 민족사적으로 표현한  천재적인 감수성에 매우 감동했다.

 

지훈 문학관

조지훈문학관은 중앙 작은 마당을 이룬 "ㅁ자형" 단층목조기와집 양식으로 아늑했다. 

조지훈(1920~1968)은 수필가,시인,한국학연구가,한글학회 국어 교본 편찬원,시집은 청록집,여운, 시론집은 시의 원리,시와 인생, 저서로는  한국운동사, 한국 문화사서설,지조론,번역시집은 당시선등이 있다. 

(1)주실마을~정암 조광조를 배출한 한양  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 조승기는 유학자 19세기말 을미사변 항거하여 영양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유공자이다.조지훈은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 호은종택에서 태어났다. 주실마을은 한양 조씨들이 대를 이어 살았으며 호은종택이 중심을 이루었다. 지훈은 실학을 중시하는 안동문화권내에서도 가장 진취적이며 일찍 개화된 가문 영향으로 당시 접하기 어려웠던  피터 팬,파랑새와 같은 동화를 읽으면서 서구 문화를 접하였다. 9살때부터 동화를 창작하기도 하였고 영양보통학교 몇 년 다닌것을 제외하고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다. 한학자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제 교육을 반대하고 가학을 이어 가문을 지키길 바랐던것을 따라 마을의 월록서당에서 한학, 조선어,역사  등 과목을 형과 함께 공부하였다.

(2)시인의 스승이자 벗 형 세림~세림,지훈형제가 만든 소년회는  거센 항일의식 나타내  일제의헤 강제 해산되었다.시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형 세림에게 문학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3)조지훈의 생애시기

습작기(1936~1939)

동양적 사상에다 서구적 자의식,탐미주의 세계관을 접목시켰다.서구 심미주의 영향을 받았다.

추천시기(1939~1940)

 문장지 추천시 응모하여 제1회 고풍의상이 당선되었다. 1939년 19살때 그해 승무 그 다음해 봉황수가 추천되었다.

자아확립기(1940~1942)

무기교주의와 자연과의 교감으로 바뀌어지기 시작하였다.마을,달밤,고사,산방 작품이 나왔다.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을 돕다가 조선어학회 회원전원이 검거되어 시골로 피신하였다. 일본이 식민정책을 강화하고 문장지를 폐간하여  스스로 붓을 꺽다가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 외전강사로 취임하였다.암울한 시대 통곡한다 암혈의 노래,비혈기를 지었다. 

자아갈등(1942~1943)

조선어학회가 검거되어  고문당했다.방랑시편이 나왔다.

광복 새로운 시대에 나아가다

조선어학회 중등국어교본 편찬원에  위촉받아 국사교본편찬원이 되었다.신탁통치반대운동과 민중 문화운동등 적극적안 사회활동에 참여하였다.경기여고 교사,서울 여의대  교수를 거쳐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청록파 조지훈은 문장을 통하여 박두진,박목월과 1946년에 합동 시집 청록집을 냈다.이들 계기로 청록파라 부르게 되었다.자연을 노래한 시로  당시 유행하던 도시적 서정이나 정치적 목적성과는 달리 자연으로 돌아가는 고전 정신의 부활과 순수 서정시 세계였다. 지훈은 자연에 대한 친화와 사랑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읊었고 고전미와 선비적이였다. 목월은 향토적 서정으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을 민요풍으로 노래하였다.  광복후 조선문학가동맹을 중심으로 좌파 문인들이 문단을 주도하자 청록파는 이에 맞서 우익계 전국문필가협회 참여 순수문학 옹호하였다.

새로운 비극 한국전쟁의 발발

문총구국대에 몸담고 있으면서 휴머니즘과 반공의식,자유와 정의에 대한 투철한 의지를 갖었다.부원에서 작품이 나왔다

미의 사제에서 시대의 지식인으로 변모

한국전쟁은 가족사에 큰 상처를 남겼다. 할아버지는 마을이 공산화되자 자결하였고  어머니는 전쟁때 병으로 죽고 아버지와 매부는 남북되고  남동생은 익사하여  지훈의 정신세계는 시, 창작보다는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자유당 독재정권을 논설과 참여시로 질타하는 일에 앞장섰다. 

지조있는 삶

황현에게  난세에 지식인 노릇하기 어려움을 배우고  지사의 몸가짐과 처신을 한용운에게 배웠다. 왜경의 감시도 아랑곳하지 않은  한용운의 모습을 보고 17세때부터 지사의 뜻을 세웠다.자신이 깊이 생각하고 옳다고 확신이 선 것에 대해 주장을 폈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어느 정권아래에서 불의와 부정에 맞서  사회현실을 매섭게 비판하였다.시대의 지성으로 많은 정치비평을 남겼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지성인의 책무를 실현하기 위해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하였다.1950년대 말기 부정부패,자유당의 반민주주의적 모습과 친일파  모습을 보고  지조론을 통해 이러한 사태를 냉정한 지성으로 비판한 지조론을 펼쳤다.

(3)조지훈의 문학시기

전기

정지용에 의해 1939 문장지 4월호에 고풍의상,12월 승무,1930년 12월 봉황수를 추천받으면서  광복후 1946년 박두진,박목월과 함께 청록집과 1952년 6.25전쟁 중 출판한 첫 단독시집 풀잎단장,조지훈 시선까지 전기에 헤당된다.대표작품으로 추천시 3편과 완화삼,파초우,낙화,고사,마을,산방,달밤,풀잎단장,지옥기,손,방,창등이 있다.시의 본질은 한국의 고전적 미의식 줄기인 신의 경지가 아름다운 시어와 유연한 가락에 얹혀 은근하게 표현하였다.그의 두드러진 시풍과 시적경향은  사변적,철학적,감각적 관능적인 것을 띄고 있으며 이 두가지 경향은 전후기 막론하고 그의 시 전반에 드러나고 있다. 

중후기

한국전쟁으로  가족사의 비극을 체험하여 시적 창작의욕이 꺽여졌다.1959년 역사앞에서 발간하면서 이전과 다른 시의 세계로 전환하였다.일제시대 숨어 살면서  써놓은 막막한 시대의 노래들,광복 후 좌우 극심한 갈등과 분열상을 안타까워 하며 읊은 시편들, 6.25참상을 묘사한  작품을 모아 묶은 이 시집은 우리 민족이 격은 민족사적 비극을 증언한 현실 참여 대표적인  화집이다.1950년6월25일 서울이 함락되기까지 과정을 읊은 장편의 시인 다부원에서와 패강무정,마지막 시집인 1964년 여운을 간행하였다. 여운시집은 조지훈 시선이후 창작한 서정시 계열의 몇 편과 4월혁명과 관련된 시들을 모아 간행된 시집이다. 병마에 시달리며 지은 병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린 시인의 놀라운 사생관을 보여주는  후기 시의 명편 중  하나로 평가된다.

(4)조지훈의 학문시기

학문연구제1기

일제강점기시대 국학에 대한 관심은 이른 시기에 싹텄다. 나의역정 글을 보면  13~14세 때 이미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했던 사실을 회상하고 있다. 조선어학회 드나들면서 민족문화애 관한 학술서적까지 탐독하여 학문적 소양이 이른시기에 갖추어졌다.941년 동국대졸업 월정사 불교강원의 외전강사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원으로 일하면서 본격적인 학문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때 된소리에 대한 일고찰1938년,어원소고1939년,신라의 윈의와 사뇌가에 대하여1940년,산유화와 서리리탄 기타 1942년를 발표하였다.이때 나온 논문은 국어학을 중심으로 일제 식민지정책에 의해 소멸되가는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학문연구제2기

해방이후부터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부임직전까지 시기이다.광복후 혼란한 시기 자신의 학문을 더욱 심화시켯다. 한글지 속간호 편집에 자진 참여하였다.조선어학회의 중등국어교본 편찬과 진단학회의 국사교본 편찬에 참여하였다.광복이후  민족문학 대 계급문학, 순수문학 대 좌익문학, 민족자주사관 대 유물사관의 대립적 투쟁이 더욱 격화됨을 보고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자신의 사상체계를 세울 필요성을 느끼고 좌익학자들의 잔통 부정에 대항하여 한국문화의 주체성 확립과 학문적인 체게화를 이룩하는 데 주안을 두었다.민족문화의 당면과제 1947년,민족성 개조의 방향1948년, 한국예술의 원형1948년 등이 이때 쓴 글이다.그의 뛰어난 학문적 역량으로 고려대교수로 부임되었다.

학문연구 제3기

고려대교수부임부터 임종까지시기이다. 학문은 민족문화에 대한 것으로 1964년 고려대 부설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부임하여 민족문화연구 창간호에 민속학 관련 자료를 정리한 한국민속학 문헌목록을 수록하여 민속학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국문학 연구의 명편인 신라가요 연구논고로  향가연구를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일에 기여하였다.신라국호연구논고도 뛰어난 연구물로 인정받고 있었다.전통문화에 대한 전반을 심도있게 고찰한 명저인 한국문화사 서설1964년을 냈다.한국문화사대계의 첫째권에 수록된 한국민족운동사는 갑신정변에서 광복에 이르기까지 근대 민족운동사를 정리한 것이다.이 시기는 국학의 저변확대와 그 바탕을 공고히 한 때이다. 

(5)역사의식이 담긴 시

1956년  발표했던 시 일부를 모아 조지훈 시선을 발간하였다.  이 시집에는 동양적인 정신과 한국의 정서를 노래한 작품들이 담겨졌다.1959년 역사 앞에서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절실한 감회를 그대로 읊은 소박한 시편들로 이전의  순수시와 차별화되었다. 순수문학을 지향하였던 그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역사의 증언자나 저항시인이 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식이 여운에서도 계속 되었다. 스스로 정리하는 뜻에서 그동안 누락되었던 시편을 간추려 출판한 시집 여운은 그의 마지막 시집이되었다.

(6)산문

에세이 창에 기대어 1958년,시와 인생1959년,돌의 미학1964년, 논설집 지조론1962년은 문장의 교본이 될만한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오늘날 산문으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를 두루 구비한 한국의 품격 높은 문장으로 정평난다.적절한 어휘구가 맛깔스러운 수사와 탄탄한 구조를 바탕으로 처사접물의 소감과 주장을 종횡무진으로 드러내는 특징을 지닌다. 막힘없는 서술이 독자 가슴을 후련하게 씻어주고 치렁치렁한 멋진가락,해학과 유머,핵심을 뚫는 촌철살인의 문장기법은 한 시대를  휘어잡던 깊고 넓은 학식이  문장 곳곳에 용해된다. 고사의 원용과 현대인의 감각에 부합되는 표현이 도처에 산견된다. 

(7)한국 민속학 연구

일제강점기 한국적인것이 억압된 시기 민족문화의 주체적 인식과 향토문화에 대한 애착이 학문적 중심이 되었다.넓게는 국학 전반이고 좁게는 전통문화연구에 바탕을 둔 한국 민속학이였다. 주된 연구 분야는 신화,민요,원시종교,민간신앙,무속등으로 1940~1950년대 민속학의 침제기에 그의 민속학은 광복 전후 연결하는  그리고 동란기의 공백을 회복하는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민속자료 집성, 전국적 민속조사계획,민속학사전 편찬,한국 민속학개론 저술 그리고 민족문화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 민속학 학술사업 계획등의 한국 민속학 연구를 위한 기초적이고 포괄적인 사업들은 그의 죽음으로 후학들이 그 학맥을 이어갔다. 

주실마을 

(1)지리적 환경~영양군 경북에서 해발이 가장 높은 곳이다. 태백산맥과 백암산줄기가 길게 뻗어 전체적으로 분지형태를 이룬다.산줄기따라 크고 작은 하천이 흐르고  하천 언저리에 편편한 평야지대기 자그마하게 자리하는 주실은 영양에서 7km떨어진 곳에 위치한다.일월산의 갈래인 흥림산이 뻗어 내려 마을의 입구를 막고 있다.   

(2)주실마을의 풍수 문필봉과 연적봉~ 마을 서쪽에 독산(고산)이 마을 중앙부애 자리한 호은 종택 정면에는 문필봉과 연적봉이 있다. 마을 뒤를 감싸듯이 자리한 산은 매방산이고  호은종택 오른편에는 현재 많이 훼손된 청석이라 불리는 조산이 있다. 

(3)주실마을 역사~주실 조씨는 원래 한양에 살았는데 1519년 중종(14년)기묘사화를 만나 일문이 팔도호로 흩어질때 조광조의 3종숙 현감공 조종이 영주로 피신하여 영남에 살게 되었다.이후 조종의 손자인 조원이 1533년 함양 오씨의 딸과 결혼하여 처가가 있는 영양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한양 조씨가 정착한것은 1629년 인조(7년)조전과 그의 아들 정형에 의해 서였다.영양에 거주한 시작한 이래로 한양 조씨들은 양산서당의 건립과 영산서당의 영산서원 개창과정,영양을 독립된 현으로 승격시키기 위한 복현 운동에 적극적 참여하며 영양에서의 지위를 다졌다.광복무렵 70호~350명 정도 살았던 마을로 조선시대 문집과 유고를 남긴 학자가 무려 63명인 학자마을이다. 구한말 의병의 고향이자 계몽운동의 선봉이 되었던 대표적인 마을이다. 

(4)주실마을의 종택

(5)주실마을이 선택한 근대의 길~1900년 단발시행,1910년 과부의 개가허용,1911년 노비해방조치가 내려져 주실마을로 개화바람이 일어났다.조병희가 독립협회 활동할 무렵 도쿄,베이징,서울로 유학하였다. 개화운동 중심지는 월록서당 조인석은 주실마을 개화운동에 앞장서 영진학교를 세우고  허례의 페단을 쇄신하였다.국한문혼용 농촌요람을 썼다.마을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져 유교적 전통 바탕으로 문명개화를 이루어냈다.

(6)저항과 혁신을 추구한 마을~1895년 을미사변후 조승기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19세기 후반 영양의 의병항쟁 중심적인 활동을 담당하였다.주실마을이 의병자원 공급지였다.조병희는 1899년 실학자와 교류로 실학에 바탕을 둔 개화론을 수용할수 있는 사상적 개방의 기회를 제공하고  신식교육을 받아들일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였다.

(7)주실마을 야학~인재교육,신교육에 집중적인 노력하여 1920년대 이후 영진의숙,배영학당,동진학교등 야학을 열어 인재 길러냈다.

 

주실마을에서 점심을 먹으러 새봄식당에 갔다. 직접 농사지은 채소들로 차려진 27첩 부폐상차림이였다. 집밥과 같은 맛으로 짜고 맵지않은 알맞는 간으로 힐링되었다. 어머니의 깊은 손맛과 정성으로 푸짐하게 베푸는 인정 넘치는 부폐식당이였다.서울로가는 차창가로 한탄강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게 펼쳐졌다.휴게소로 정미현님이 귤을 주어 너무 감사했다.휴게소지나니 하늘에 달이  10분이상 펼쳐져 신비로웠다.

죽피리 자작나무숲
죽피리 자작나무숲
주실마을로 가는 차창가
호은종택
방우산장
만곡정사
옥천종택
문필연적



 

주실마을~지훈 문학관
새봄식당
서울로 가는 차창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