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8일~덕수궁현대미술관 수묵별미 한.중 근현대회화전
덕수궁현대미술관에서 수묵별미 한.중 근현대회화전이 열렸다.인물화,산수화,화조화와 같은 전통 장르부터 현대적 구상과 추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세계 보여주는 전시를 통해 동아시아 미술의 정수로서의 수묵채색화가 시대를 넘나들며 보여주고 있는 미적 가치의 수준을 가늠해 볼수 있도록 전시되었다.양국 작가들이 같은 매체를 사용하면서도 각기 다른 역사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독창적인 미적 감각과 개성을 발전시켜 왔음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한국
(1) 제1장 근대의 여명과 창신~근대 이후 시. 지.각의 변화에 따라 전통회화의 재료와 기법, 화면의 크기 등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시각적인 사실성이 강조됐고 새로운 느낌의 그림을 접한 화가들은 각자의 고유한 작가의식을 토대로 그림을 그려나갔다.기존에 쓰이던 서화란 호칭에서 글씨와 그림이 분리되어 붓과 종이,먹으로 그린 그림을 동양화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 전통적인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양식을 모색하기 위하여 동연사가 결성됐다.이들은 원근법과 명암법 등 서양 미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나무나 산수 표현등에서는 전래의 준법을 따르는 절충적인 면모를 발전시킨다. 1930년대 이르면 점차 수묵은 산수를 채색은 인물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정착되는 양상을 띠는데 이로 인해 채색화는 왜색논란에 휩슬려 수묵과 채색의 극심한 갈등을 낳기도 하였다.1950년대에는 모더니즘이 미술계를 뜨겁게 달구며 동양화에도 큐비즘과 앵포르멜의 추상 양식이 차용되는 모습을 보였다. 1960~70년대에는 국가의 민족중흥 정책과 맞물려 한국적인 것의 재발견을 도모하였고 그 과정에서 생활 주변의 일상적 풍경을 사생한 실경산수화가 국민 그림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인물화에서는 주변 현장의 일꾼을 묘사하는 그림 등이 출현했다. 또한 지필묵을 쓰면서도 비구상 형태로 작품을 구현해 나갔던 묵림회가 출현해 지필묵의 다양한 변화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처럼 1970년대 이후에는 한국적인 소재와 현대 미술 양식의 조화를 이루며 동양화의 현대적 창신을 도모하였다.
(2) 제2장 경계를 넘어 확장을 향해~1960년대 앵포름멜과 기하학적 추상 1970년대 모노크롬 회화에 이어 1980년대 후반부터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대두됐다.이러한 한국 미술계의 흐름에 발맞춰 동양화단 내에서도 다양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전람회 외에도 민간 주도의 공모전이 개최됬고 지필묵으로 완성된 동양화를 한국화로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화란 용어는 해방 이후 김영기가 처음 제창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한국화란 용어가 정착해 나갔다. 이에 힘입어 수묵채색화단에서는 새로운 조형성을 추구하거나 기법의 전환을 통해 현대 미술 장르의 하나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을 가속화했다.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수묵 표현의 가능성과 동양의 정신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하는 수묵화 운동이 촉발됐다. 한편에서는 채색화가 급부상하여 한국적 색채를 강조하며 굵고 강인한 선과 두꺼운 원색 등을 배열하는 등 동서양의 경계를 허문 채색화의 새로운 좌표를 제시했다. 서정성이 깃든 자연과 산수 풍경화가 등장하고 새로운 도시 경관을 다양하게 재현한 도시풍경 등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1990년대 이후 현대 한국 화가들은 재료와 장을 넘나들며 수묵추상의 새로운 장을 펼쳤다. 지필묵의 숨은 잠재력을 이끌어내며 그 경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중국
(3)제1장 전통의 재발견~지난 100년 동안 중국은 거대한 변화를 겪으며 민족적 각성과 문화적 계모응 이루었다. 그 안에서 중국 미술가들은 고전을 바탕으로 현재를 열고 동 서양의 융합이라는 이념을 실천하며 민족성을 담은 수많은 걸작을 창조해 내엇다. 이 작품들은 사상이 갚고 주제가 분명하며 형식이 참신하고 내포된 의미가 풍부하다. 중국의 고전 수묵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무한한 매력을 발산하고 무한한 생동감을 드러내며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감을 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대대로 중국 예술의 대가들은 진정한 감정과 진실한 마음 ,진정한 예술로 역사와 시대를 표현하고 사회와 삶을 반영하였으며 인문학과 자연을 드런내는 여러 고전적인 미술 작품을 창작하여 시대의 정신과 예술미를 한껏 발산하였다. 중국식 미적 취향과 초월적인 민족적,지역적 문화 가치를 체감할수 있다.
(4)제2장 다양성과 번영~필묵은 시대를 따라야한다는 시대의 풍모를 드러내고 대중의 마음을 기르며 민족의 자신감을 고취하는 것은 언제나 새 시대 예술적 명제이다. 1990년대부터 새로운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기 예술가가 일군 창작의 성과를 보여준다. 일부는 전통을 고수하고 문맥을 이어받아 토양의 기반을 탄탄히 하였으며 다른 이들은 동서양을 결합하여 용감히 탐구하고 대담한 혁신을 이루어 냈다. 또 다른 일부는 민속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그 영양을 흡수하여 새로운 풍경을 창조하였다. 중국 현대 수묵예술가 시대 발전의 목격자이자 기록자로서 각자의 경험과 체험을 바탕으로 시대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시대의 미적 요구를 반영한 예술 창조의 정점을 발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들은 시대의 정신적 내포를 발굴하고 표현하며 조국의 웅장한 경관을 그려 내어 다양한 각도에서 조국의 찬란한 발전상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작품은 고양된 정서와 개척 정신으로 가득 차 있으며 고정관념을 깨고 혁신적인 기법으로 새로운 시대의 역동성과 찬란한 성취를 노래하였다. 시대와 보조를 맞추며 새로운 시대의 위대한 창조 속에서 창작 주제를 발견하고 혁신적인 영감을 불러일으켜 현대 중국 수묵 예술의 다양성과 번영을 드러내는 현대 중국의 수묵 예술가들 이들이 지금 중국식 현대 미술 발전의 새로운 장을 써 나가고 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하여 중국의 수묵화는 힘차고 거친선들과 함께 웅장한 자연을 표현하였다. 중국 전통문화와 사회주의를 반영한 조국의 찬란한 발전상을 보여 주었다. 우리나라 수묵화는 전통을 바탕으로 추상파,천경자의 채색화,이응노 문자도등 현대의 정신과 인문적 기질 필묵사이에 융합시키며 추상과 구상사이에서 부단히 수묵예술 가능성을 탐구하였다.민주주의 정치와 경제로 중국보다 더 앞서 현대적으로 다양한 재료와 기법의 혁신을 통하여 한국화 경계와 지평이 확장된것을 볼 수 있었다.중국과 우리나라는 자연,문화,역사적 환경이 다르지만 수묵예술이 옛것을 바탕으로 현대를 열고 중국과 서양의 융합을 통해 전통에서 현대까지로 진화하였음을 알수 있었다.
미술관을 관람하고 돈덕전으로 갔다.
돈덕전
르네쌍스와 고딕양식을 절충한 2층 구조의 유럽풍 건축으로 고 품격을 자랑하고 있었다.벽돌로 무늬를 장식한 벽체와 함께 녹색창문틀,고딕양식의 지붕이 이색적이였다. 파리를 모델로 한 양식으로 외부는 베란다와 다양한 크기의 튜렛이 설치되고 난간에는 이화문이 장식되었다.내부는 서양풍 등이 장식된 입구를 지나 전시실 복도로 금테두리 장식의 거울과 금으로 장식한 대리석 화장대,갖가지 쌍드리에로 유럽궁전을 모방한 근대문화 물결 같았다. 외국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돈덕전 실내 공간은 이것보다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고 전한다.금색 용조각이 있는 6개 큰 원기둥과 홍색과 황색으로 된 수로 장식한 커튼,높은 왕좌와 탁자등 금빛으로 찬란했다고 한다.대한제국 국격을 높이는 장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였다.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복도로 흰벽체와 함께 녹색 쌍여닫이 출입문을 이루고 투명한 유리 계단 난간으로 품격이 있었다. 둥그런 흰벽체를 이룬 2층 쉼터로 흰색창틀의 쌍여닫이문으로 근대서양풍 창문양식을 이루고 있었다.
1층 기획전시실
2024년 덕수궁 특별전 "모던 라이트,대한제국 황실 조명" 주제로 전시되었다.개항이후 조선은 세계각국과 조약을 맺고 해외조사단을 파견하였다.1883년 미국에 다녀온 보빙사는 당시 첨단 과학기술인 전기를 경험하고 조선 정부에 국내 전기 도입을 제안하였다. 고종은 국가 발전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1887년 미국 에디슨 전등회사와 계약으로 경복궁 건천궁에 우리나나 최초로 전등에 불이 밝혀졌다. 이후 각 궁궐에 최신 전기 설비가 도입되었다. 1898년 근대 전시기사업을 위한 황실 출자기업인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되어 궁궐내 전등이 본격화됨 이로써 대한제국의 1879년 근대적 개혁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던 전기도입을 통해 빛의 세계로 들어선 계기를 마련하였다.우리나라 최초의 전기와 전등 설비는 1879년 에디슨이 탄소 필라멘트를 개발하여 백열전구를 상용화한 지 8년 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동양에서 처음으로 에디슨 전등회사의 발전 시스템을 설치된 것이였다.정교하고 화려한 디자인 전구를 꽃의 수술과 같이 보이도록 만들어진 식물 문양 샹들리에는 바로크 로코코 양식에 영향을 받아 더욱 화려하고 복잡한 디자인으로 발전했다.식물 문양 조명기구는 주로 유럽 궁전이나 고급 사교장에서 사용되었다.에디슨 조명회사는 베르그만 회사와 함께 유럽식 식물 디자인에 실용성을 결합한 제품을 제작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근대 외교공간인 돈덕전의 샹들리에는 유럽식 식물문양을 기본으로 하였고 대한제국의 국가와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오양꽃 문양) 이 장식되어 특별히 주문 제작 하였다. 궁정 연회 격을 높인 센터피스용 촛대를 올려 외교사절과 소통창구를 여는데 목표를 두었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선포 후 새로운 정전으로 지어진 건물로 영국의 하딩이 설계하고 실내장식은 영국인 로벨이 디자인하여 1910년 완공되었다.석조전 1층은 공식적인 행사를 위한 접견공간으로 중앙홀과 접견실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오니아식 장식기둥과 이화문 장식 등 고전적인 문양을 활용하여 화려한 쌍들리에와 햇불형 조명이 배치되어 공간 위상을 높였다. 서양식 예법에 맞는 음식,식기,각종 집기도 그에 맞추어 준비하였다. 센터피스 초받침은 궁정 연회의 격을 높이는 수단이였다.
전시를 보면서 등자체가 진귀한 예술품으로 다가왔다.19세기말 조선은 등불이 근대문화의 개혁이였던 것을 깨달을수 있었다.
2층 상설전시실
(1)조선,대한제국의 외교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최초 근대 국제법적 조약을 체결 이후 1882년 미국부터 1902년 덴마크까지 12개의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조선은 독립을 유지하고 근대국가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외교를 선택하고 실행하였다. 상호존중과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열수 있다고 믿었다.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세계 여러나라에 외교관을 파견하고 국제행사에 참석하여 독립국가임을 알렸다.다른 나라에서도 외교관,선교사 등이 우리나라에 방문하여 외교,의료,교육 등 다양한 활동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하였다.1875년 운요호사건 계기로 체결한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로 조선에 불평등조약이였다. 조선 자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1876년 일본 제1차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김기수 일행은 도쿄에 머물며 일본 국왕을 만나고 근대적 제도 문물을 살펴본 후 귀국하였다.1876년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하였다. 제너랄셔먼호사건 이후 미국은 조선에 관심을 두었다. 미국은 조선이 자주독립군임을 인정하였다.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신식군대별기군과 차별에 구식 군인들이 개화집권세력에 저항하였다.사태 수습위해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으나 곧 청으로 납치되었고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이 커졌다.1882년 조선과 일본의 제물포조약을 맺었다. 임오군란 계기로 일본과 체결한 조약으로 일본에 손해배상금과 군사주도권, 일본에 사죄하는 사절 파견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공사관 수비구실로 서울에 일본 군대가 파견되었다.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 임오군란 후 청과 체결한 통상규정으로 조선이 청에 속해왔던 나라임을 적어 넣었다. 이로써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이 강화되었다. 1883년 각국과의 통상조약비준교환에 대한 전권위임장을 하였다.1883년 푸트 미국공사가 조선에 부임하였다. 푸트공사는 한국 역사상 최초 서양 열강 공사였다. 푸트미국공사 부임 답례로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하였다. 서양 근대문물 조사와 양국 우호증진, 개화 정책추진을 하기위해 갔다.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체결하였다. 영국과는 조일수호조규체결 이후 여러차례 교섭이 있었으나 1883년 이르러 영국정부는 청의 중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조선과 협상하여 체결하였다.1883년 조독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882년 일본과 조약을 맺은 이후 주청독일공사였던 막스 폰 브란트가 청에 알선을 요청하여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이후 독일 총영사가 서울에 부임되었다.1884년 조이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이탈리아는 조선과 조약하기위해 조선에 전권대신을 파견하였다.1884년 조로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1882년 조미조약이 체결되자 러시아는 청에 주선을 요청하여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러 협상과정에서 육로무역에 관한 문제로 갈등하였으나 독일과 영국과 같은 내용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다.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영국 해군은 러시아 남하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점령하였다.영국은 조러 수교를 러시아 남하로 판단하고 조선 영토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를 사이를 두고 영국과 러시아 대립이 시작되었다.1885년 청과 일본의 텐진조약이 체결되었다.1884년 갑신정변의 결과로 일본군의 주둔을 허용(한성조약)하면서 청,일 양국간의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다. 두나라는 군사적 충돌을 걱정하여 텐진조약을 맺고 즉각적인 군대 철수와 조선에 군사고문을 파견하지 않기로 하였다.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천주교 선교 문제의 포함 여부 때문에 비교적 조약 체결이 늦어졌다. 조선은 갑신정변이후 청의 종속관계가 심해지자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여 상황을 바꾸고자 하였다.프랑스는 이 조약을 통해 선교 자유를 얻었다. 조선이 독립국가임을 세게에 알리기 위해 1887년 박정양을 초대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하였다. 1888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은 워싱턴 도착하였다. 청이 공사파견의 조건으로 요구했던 영악삼단을 무시한 채 국서를 직접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여 자주 국가임을 알리고자 하였다. 1892년 조선,오스트리아,헝가리와 같이 조오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1882년 조미수호체결 이래 조선은 처음으로 청에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은 일본 도쿄에서 체결되었다.1893년 미국 시카고 콜롬비아 만국박람회 참여하였다. 참가국 자격으로 세계박람회에 참여하여 대조선국 깃발을 내걸었고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였다.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조선을 사이에 두고 청과 일본 대립이 심화되었는데 일본 승리로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였다.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조선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일본은 조선의 친러 정책 배후가 명성황후라고 판단하여 일본 공사 미우라는 경복궁을 기습하여 민비를 시해하였다. 고종은 경복궁에 갇히게 되었고 일본은 조선의 정부를 장악하였다.1896년 아관파천을 하였다.을미사변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쳐를 옮겼다. 고종은 1년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조선의 친일 정부는 무너졌고 러시아 영향이 크게 강화되었다.1896년 고종의 특사 민영환을 러시아로 파견하였다.아관파천으로 정권을 회복한 고종은 러시아 관계를 강화하고자 했다.새로 즉위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조선에 대관식 축하 사절 파견을 요청하였고 고종은 민영환을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하여 대관식에 파견하였다. 민영환은 대관식에 참석한 이후 경제적,군사적 도움을 요청하는 고종의 친서를 황제에게 전달하였다.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에 올랐다. 고종은 경운궁 환궁 8개월 만인 10월12일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올렸다.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토지측량,서울도시정비,산업의 발전,군사력강화, 대한국구제반포 등 부강한 국가를 만드는 근대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1899년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대한제국은 종주권을 주장하던 청과 대등한 관계의 근대적 조약을 체결하였다.이로써 대한제국은 수백년간 지속되어온 중국 중심의 외교관계를 청산하였다.그러나 청의 외면으로 주청대한제국 공사의 파견은 조약 체결 후 3년이 지나서야 실현되었다. 1901년 대한제국과 벨기에의 한백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다른 국가와 조약과 달리 분쟁이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중재 재판에 회부하여 해결할 것을 규정하였다. 대한제국은 이 조약을 통해 열강의 침투와 러일간의 대립 속에서 독립을 보존할 수 있는 중립국화 방법을 찾으러 했다. 1902년 대한제국과 덴마크의 한정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대한제국과 덴마크, 벨기에 조약과 같은 내용이였다.1902년 최초의 청국 주재 대한제국 공사 박제순 청 황제에게 신임장을 제출하였다. 한청통상조약 이후 청에 공사를 파견 대한제국은 북경에 있던 주청미국공사관을 구입하여 공관을 마련하고 1902년 박재순을 파견하였다. 1904년 공사의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였다.1904~1905년 러일전쟁 중 1905년 포츠머스조약으로 러시아는 사할린섬 양여를 받았고 일본에게 대한제국 우선권을 인정했다.제2차 영일동맹으로 영국은 일본에 원조하여 전투에 가담한다는 내용과 영국이 일본의 조선지배 인정하였다.영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러시아를 적으로 지정하고 동아시아 이권을 나누기 위함이였다. 가쓰라 태프트밀약으로 필리핀문제는 전적으로 미국에 맡기고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이 주도하여 맺은 불법 협정이였다. 통감부설치와 외교권을 일본에 양도하는 것으로 고종이 끝까지 체결을 거부하였다. 박제순의 도장이 찍힌 고종 위임장 받지 못한 불법적인 협정이였다.을사늑약 무효화를 위한 노력으로 고종은 무효를 주장하기 위하여 미국인 헐버트를 대한제국 특사로 임명하였다. 열강은 외면하였다.헤이그 특사3인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파견하였다. 대한제국은 네덜란드로부터 1906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 초청장을 받았다. 고종은 이를 국권 회복의 기회라 생각하고 1907년 특사를 파견하여 탄원서로 한국 독립을 호소하고자 했다. 열강은 이를 외면하고 특사들은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거부당했다. 일본은 을사늑약 위반했다고 1907년 고종을 퇴위하였다.이로써 대한제국 외교가 종결되었다.일본이 해외공관 폐쇄로 국제사회에 직접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단절되었다.1919년 고종이 승하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났다.
(2)격동의 시대 그리고 외교관~1897년 대한제국 선포된 이후 1904년 러일 전쟁까지 자주적인 근대화의 상과를 거두었다. 서양 열강과 대등한 입장에서 독립을 지키기 위해 외교를 중시하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는 냉혹했다. 근대 국제법이 지배하는 국제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고자 하였다. 1897년 만국우편연합 제5차 워싱턴총회에 주미공사 이범진과 통신원총판 민상호를 전권대표로 파견하여 가입을 위한 조약에 서명하였다.그리하여 1900년 가입이 정식 승인되었다. 만국우편연합은 대한제국이 최초로 가입한 국제기구이다. 프랑스 측의 공식적인 초청으로 1900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 프랑스 주재 특사및 전권 공사로 민영찬이 임명되었다. 경복궁 근정전을 본뜬 전시관이 설계되었다. 대한제국관의 전시를 본 외국인들은 신발,모자,공예품에 관심을 보였고 파리는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홍보하는 장소가 되었다. 대한제국이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국가임을 널리 알리는 중요성을 가졌다.고종의 망육순 51세 즉위 40주년 국제행사로 열강으로부터 자주 독립한 근대 국가로 인정 받는 기회를 삼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돈덕전 건립하였다.그러나 전염병의 유행과 러일전쟁으로 국제행사는 실현되지 못했다.
(3)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세력 경쟁~ 한반도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경쟁이 치열해 지자 대한제국은 여러나라에 국서를 전달하고 독립을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그러나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막기 위해 영국과 일본이 영일 동맹을 맺으면서 국제정세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러시아 일본은 한반도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차례 협상하였다. 러시아는 한반도 분할 점령을 주장하였으나 한반도를 독점하려는 일본의 강경한 태도로 협상은 결렬되었다. 한반도에 전쟁 분위기가 감돌자 대한제국은 전쟁을 막기 위해 여러 열강에 도움을 요청하고 전시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결국 1904년 러일 전쟁 발발하였고 대한제국은 어둠속에 빠져들었다.
(4)대한제국 근대화 노력과 러일전쟁~정치 외교문화 등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정책 추진으로 1898년 국가 주도로 한성전기회사 설립,1899년 전차가 운행, 1900년 종로에 가로등이 등장하였다. 황제 직속의 통신원,철도원,서북철도국등 근대 사업 추진할 부속기구를 마련하였다. 세계박람회 참여와 국제 협약기관 가입 등 국제 사회 일원으로 폭넓게 참여하였다.일본 침략이 본격화되고 러일전쟁 기운이 감돌자 고종은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열강에 공사를 파견 전쟁 반발시 대한제국 중립 지킬것이며 이를 지지해주기를 요청하였다. 근대 자주국가로 이루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러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도 종결되었다.미국,영국,러시아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일본은 외교권을 빼앗고 외국에 설치된 공관들 철수하여 세계로부터 대한제국을 고립시켰다. 외교관들은 항거하다 자결하고 결국 제국은 종말되고 대한민국이 되었다.
(5)열강의 한반도 이권 차지~1896년 아관파천으로 한반도 주도권을 잡은 러시아는 군사,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는 댓가로 조선 국왕으로부터 삼림 채벌권과 광산 채굴권등 이권을 얻었다. 이에 다른 열강도 이권을 나누어 갖기를 주장하였다.서양 열강 국가의 대부분은 철도,삼림,광산 등 여러 산업의 중요한 이권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권 획득을 위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기도 하였다. 이는 결국 한국의 경제 성장 지연과 국제저 지위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6)고종 시대 외교관 활동~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우호관계 구축,근대제도와문화도입 등 다양한 외교에 힘썼다. 조약을 체결한 각국은 자국의 이권을 확보하면서 교류하였고 고종은 이들을 우호세력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내용을 집약적으로 간략하게 기록한 외교활동 전시로 매우 놀라웠다. 근대외교공간인 돈덕전에서 전시된 조선,대한제국의 외교공간이 고종의 새로운 문명의 시대와 자주 국가를 위한 외침으로 우주를 요동치는것 같았다.매우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전시물은 공식문서에 사용한 자주독립군을 나타내는 "국새 대군주보"로 은에 도금한 것이였다.1882년에 제작되어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던 조선의 국새였다.국가의 주권을 표시하는 용도로 자주독립국을 나타내는 국새로 사용되었다.국권을 상징하고 국가의 공식문서에 사용하던 인장인 "국새 황제지보"로 용모양의 손잡이를 사용하여 조선이 중국과 대등하는 대한제국이 되었음을 분명히 하였다."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세"로 각국 원수들에게 보낸 친서와 특사들에게 발급한 위임장 등에 사용하였다.격변하는 당시 국제 정세에 대한 조선의 대응방식을 상징하는 유물로 자주독립국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었다.돈덕전을 지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드리운 소나무 가지들이 대한제국의 넋을 기리듯 빛났다. 근대건축의 석조전이 고종의 온 우주를 향한 피끓는 자주독립국가의 절규로 얼룩졌다.
제1장 중국~전통의 재발견)
제2장 중국~다양성과 번영)
제1장 한국~근대의 여명과 창신)
제2장 한국~경계를 넘어,확장을 향해)
1층 전시실)
2층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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