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포항 환호공원,호미곶,연오랑 세오녀공원,경주 대릉원,첨성대,동굴과 월지(2025년6월21)

백재은 2025. 6. 25. 10:03

환호공원
호미곶
연오랑세오녀공원
첨성대
동궁과 월지

 

6월21일~파랑새여행사에서 포항국제불빛축제 지원상품으로 여행을 갔다. 차창가로 포항시에 도착하니 포항을 상징하는 장미가 광장을 형성하며 영일대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졌다. 포항시는 옛날에 대나무가 많았던 죽도와 송도를 연결해 만든 도시로 북구와 남구로 나뉘어진다. 안동 낙동강은 남해로 흘러가지만 포항 형상강은 남구 영일만 바다와 북구 호미곶 끝에서 동해로 흘러간다.포항은 해와 달의 설화의 도시며 철이 많이 생산되고 남구는 적산가옥의 거리인 구룡포가 자리잡고 있었다.대게빵과 과메기가 유명한 도시였다.영일만 바다를 지나 도심 중심지를 이룬 남구의 환호공원에 갔다. 산채길,조각공원, 포항시립미술관,바다 전망대,스페이스워크로 서울 도심공원에 못지 않은 예술공원이였다.푸른 창문양식의 미술관으로 드리운 조각분수로 병들고 나역한 인간을 묘사한 조각이 드리우며 드높은 예술 문화공간으로 비추었다. 미술관 앞 드넓은 잔디에 추상주의 조각작품들이 인간 생명의 근원과 문명의 탄생을 조명한 작품처럼 비추었다. 포항시립미술관 산책길로 조각작품들이 진열되었다.인간과 자연과의 관계,현대사회속에 인간,현대사회를 풍자한 조각의 3가지 주제로 진열되었다. 문병두의 "나무 꿈을 꾸었어"는  사슴이 살아있는 듯한 생명선 같은 자연의 순환이 인간과 자연이 조화되게  작은 우주로 표현하였다.이점원의 "환생"은 끝없이 생성돠고 소멸되는 자연계의 현상에 대한 생명력 원형의 상징으로 새로 태어나는 모습을 축약된 조형 언어로 표현하였다. 추상주의 대표적인 작가 문신은 직선과  곡선 그선들로 연결돤 타원,반원으로 이루어진 않은 뎃생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주의 생명과 운율을 파악하고 간결하면서도 풍만한 부피감의 변주로 대칭과 비대칭의 점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대표적인 작품 "개미"는 이러한 선과 원의 만남을 통해 생명의 탄생과 조화와 균형,소멸과 환원의 원리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였다. 최만린의 " 0.10-21-01 ,Works 0.10-21-01"은 인간생명 근원으로서 태반을 연상시키는 생명력을 충만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구형안에 숨겨져 있는 폭발하는 에너지를 표현함으로써 영원히 성장을 계속하는 유기적인 생명체의 순간을 조형화 하였다. 박은생의 "pebble-Echo"는 작은 삼각형의 형태가 모여 큰 덩어리를 이루면서 형태의 무한확장을 표현하고 있다. 형태에서 투과된 면은 공간의 확장이며 소리의 울림 또한 공간의 확장이다. 공간의 확장은 소리의 울림으로 표현한다. 거대함에 대한 자연의 이치를 변화하는 다양한 이미지로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이상길의 "내마음의 전파 망원경"의  원투형 내부는 모든 물체의 빛을 흡수하는 블랙홀처럼 마음을 투과하는 창 같았다. 신옥주의 "Door of Wisdom"은 현대문명 상징인  제철소 배경으로 자연과 문명의 관계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며 나무 흙 쇠물의 순환 속에서 너에게로 나아가려는 소망을 표현한 작품이였다. 박충흠의 "무제"는 자연에 순응하는 인간존재를 그렸다.박종배의 "못과 사랑"은 원의 유기성과 면은 서로 놓치 않으려는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이 고조된 팽배감은 하나의 내적 세계를 이끌어 간다.류민의 조각은 지각하는 인간의 존재를 그린것 같았고 전국광의 "화합을 위한"은 실존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보여주는 작품이였다.이원석의 "오늘도"는 인간세상의 사회심리학적  풍경이라 할 수 있는 인간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표현한 작품이다. 허망함과 씁쓸한 느낌이 자아내는 세상살이 긴장감을 표현 하였다.류훈의 "공존의 표상"은 곡선,수직과 수평등의 요소들이 융합되어 절제되고 잘 다듬어진 이러한 결합은 공존을 위해 나아가는 융합을 나타내고 있다. 오의석의 "사랑으로"는 현대문명의 흐름 속에서 사랑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기칠의 "거주"는 양 측면이 열린 형태는 내부공간의 중심을 통해서 외부공간이 보이도록 제작하여 외부세계에 대한 방향설정과 지향의 축을 드러낸다. 실제적인 거주지라는 장소의 외연적인 확장을 통해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방법과 예술의 방법론을 일치시켜가는 과정을 보여준다.이웅배의 "사회"는 개인적인 체험방식인 촉각  즉 관람자가 작품을 만지고 유희하는 과정 통해 개인적이며 사사로운 감상을 만들어내기를 기대하고 있다. 양태근의 "짜식들"은  사회의 권력 지향적 태도를 조롱하였고 성동훈의 "돈키호테" 우리시대 우스꽝스럽고 모순된 현실을  풍자하였다. 강대영의" 자화상"은 모기 삶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집단 이기주의 공격성을 지적하였다.즉  추상주의 작품들로 과학적인 원리와 방법으로 조형언어를 구축한 작품 같았다.생명잉태,소멸,우주 탄생, 자연으로 회귀,자연과 인간관계,현대사회와 인간이 예술가들의 주제 핵심 같았다.스페이스워크로 가는 길로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졌다.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을 받은 스페이스워크는 포스코가 기획 제작하고 설치하여 시민에게 기부한 작품이였다. 주 재료는 탄소강과 스테인리스강이며 독일의 세계적인 부부작가 하이케 무터와 울리의 겐츠가 디자인한 예술 작품이였다.룰러코스터를 연상하는 디자인이지만 계단이 있어 올라갈 수 있게 설계되었다. 트랙을 따라 걷다 보면 예술 위 구름 위를 걸으며 마치 공간과 우주를 유영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였지만 우비로 인해 막아놓아 올라 가지 못했다. 사방으로 봐도 생명력이 넘치는 우주의 신비로운 환영 같았다.생명의  환희,생성 같은 거대한 예술작품 같았다.즉 산책길에 진열된  조각과 함께 스페이스위크가 우주로 약동치는 생명의 환희 같았다.포항시립미술관 내부는  회색벽체와 함께 목재장식을 이루며 2층까지 뚫린 천정으로 사유의 공간 같았다. 철을 이용한 조형물 전시로 더욱 더 고혹적으로 다가왔다.복도창가로 적벽체와 회색벽체가 마주보는 중앙으로 잔디와 초목이 비추며 미술관을 맑게 환기시켜 주었다.1,3,4전시실에서  스틸아트뮤지엄으로서 정체성을 강화하고 금속 조형 언어의  동시대적확장을 모색하는 일환으로 조각가 최옥영(1959~) 의  "물성 감각하는 철"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었다.철의 도시 포항에서 철은 산업의 상징을 넘어 지역 정체성과 물질문명의 은유적 매체로 작동해왔다. 이번 전시는 기능을 다한 철이 감각과 생명을 품은 조형적 매체로 바라보고 있었다. 철,탄소,수소와 같은 우주 기원의 원소들이 인간 존재와 예술을 구성하는 물질이 라는 점에 주목하여  조각이라는 행위를 통해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우주의 순환을 형상해왔다.철이라는 물질이 지닌 존재론적 깊이와 우주적 기원에 대해 질문을 제기한다. 작가의 조형적 사유를 바탕으로 철이라는 물질의 전환과정을 공간적으로 재구성하였다. 생명과 우주의 순환을 모티프로 한 네 개의 공간을 탄생,응축,소멸,환원의 구조로 배치하였다. 1전시실은 탄생으로 철이 직립하며 생명을 얻는 공간이고 로비는 형태 이전의 덩어리  즉 생명 탄생 직전의 응축과 혼돈을 시각화하였다. 4전시실은 소멸로 철이 바닥에 누운채 침참하는 공간으로 존재의 무게가 감각 속에 남아 있는 장소다. 3전시실은 환원의 공간으로 이둠 속 철 덩어리들이 무덤처럼 군집을 이루며 또 다른 시작을 예감하게 한다. 조선소에서 기능을 다한 철은 이곳에 이르러 새로운 질서를 준비하는 잠재적 몸으로 이행되었다.이는 소멸 이후의 생명성을 암시하고 있었다.작품을 대하면서 철로 구축된 거대한  덩어리들이 우주적 장면 같았다. 인간존재와 우주가 맺고 있는 근원적 관계를  철이라는 물질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새로운 우주탄생을 예감하는 신세계 같은 조형물로 우주적 기원에 접근하는 조형물 같았다.2전시실은 장두건미술상 수상작가인 이정의 "왕거미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어!" 주제로 전시 되었다.장두건미술상은 포항 미술문화이 초석을 다지고 구성회화의 뚜렷한 성과를 남긴 초헌 장두건(1918~2015) 화백 업적을 기리며 차세대 미술가의 등용문으로 지역 미술발전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것이였다.이정(1977~)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상과 그것들의 유기적인 관계를 탐구하였다. 그는 공허하고 꽉 찬 사물,넓게 왜곡된 풍경,그리고 나란하게 일어나는 경관의 이동과 시선을 연속적으로 재조합한 이미지를 구성하여 오직 출발과 도착,입장과 퇴장만이 있는 장소 사이,그가 경험했던 "공허한 괄호"의 모습을 선보였다. 작가가 경험한 공허한 괄호는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1935~2023)가 고안한 개념인 "비장소"와 닮아있다. 비장소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 스쳐 지나치는 공간을 말한다.작가 이정은 이동하는 주체와 멀어지는 풍경이라는 움직이는 시공간 속에서 결코 점점이 없을 것 같은 평행한 관계 속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시 공간을 넘나들며 스스로 경험한 극단적인 단절과 연속적인 이어짐,그로 인해 그곳의 숨은 에너지와 다른 차원의 역동성을 감지하였다.그는 무심하게 지나치는 이 세계가 사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비장소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연결된 물질이자 공간이였다.그러나 작가는 우리의 감각으로 볼 수 없는 것을 펼쳐 놓았다. 또한 내부자인 작가 자신이 오히려 외부자인 거미에게 주시당하고 있다는 상상으로부터 시작하며 작가 자신과 거미의 시선을 교차한 그의 엉뚱한 상상을 펼쳐 놓았다. 전시회장을 들어 오자 마자 작품을 대하는 순간 마치 상상의 세계와 우주의 신비한 덩어리처럼  그의 비법한 상상력과 신의 영감이 매우 놀라웠다.2층 초헌 장두건에서 투계 (끝없는 완성)의 주제로  장두건 소장품전이 전시되었다. 초헌 장두건(1918~2015)는 포항 출생으로 포항의 대표이자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대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20세 나이로 일본을 유학하여 태평양미술학교를 다니는 중 집안의 반대로 명치대학 법학을 전공하였다. 하지만 틈틈히 야간에 미술연구소를 다니며 미술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1945년 귀국 후 서울 사범대학 부속중하교 미술교사룰 발령받아 교사생활르 시작했다. 1957년 40세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1959년 "르 쌀롱"에 작품 3점을 출품하여 "식탄 위"는 특선을 받고 "뤽상부르그의 봄"과 "뤽상부르그의 가을"은 입선한다. 1960년 구국한 뒤 그는 수도여자사범대학교 미술학과장, 성신여대 예술대학장,동아대학교 예술대학 초대학장등을 역임하면서 30여 년간 미술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으며 제자 양성에 힘썼다. 장두건의 조형성의 특징은 윤곽선의 사용이다. 그는 형태를 뚜렷하게 구분하기 위해 검은색 윤곽선을 활용했는데 이러한 윤곽선은 화면의 입체감을 줄이고 오히려 평면적인 느낌을 강조하며 장두건 특유의 회화적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그는 길게 늘어진 목과 다리 등 인체나 동물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변형함으로써 조형적 긴장감과 우아함을 부여했다. 그는 사실적인 재현보다는 조형적 해석을 중시했다. 색채사용에 있어 푸른색과 검은색을 과감히 추가하거나 강조함으로써 회화적 아름다움과 조화를 극대화했다. 색채의 배열과 조화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그가 느낀 감정과 기억을 시각화하는 방식이었다.그는 한번 그린 작품이라도 완벽하다고 느껴질 때까지 수차례 덧칠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했으며 이를 통해 최대한 완성도를 추구했다.죽도어시장 가는길로 영일만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졌다.서울떡집에서 건포도,밤,견과류가 들어간 떡을 먹었다. 주인장이 삶은 감자를 보너스로 주어 배부르게 점심을 채울수가 있어 너무 감사했다.점심을 먹고 시장을 돌아보니 매우 신선하고 풍부한 수산물과 함께 각종 식재료,잡화물,식당등 볼거리가 어마 어마한  시장으로 매우 활기찼다. 영일만을 지나 북구의 호미곶가는 길로  제철현대공장이 비추었다.공장을 견학하고 싶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포항제철본사 정원으로 피톤치드 향기로 가득했다. 공장지대 거리가  매우 울창한 가로수 물결을 이루어 청정해 보였다.해군항공사령부 정문으로 늠름한 위세의 비행기가 진열되었다. 바다가 비추는 마을과 산고개 호미면을 지나 노랑 밤꽃물결을 이룬 마을로 갯벌같은 바다가  펼쳐졌다.즉 호미곶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매우 낭만적이였다. 지금까지 본 바다 중 제일 광활한 바다로 비추었다.드넓은 야생화가 펼쳐지는 호미반도로 바다와 연결되며 생명력으로 충만했다.자주빛 둥그런 벽체와 베이지빛 사각형의 조합을 이룬 새천년기념관이 둥그런 철제장식을 두르며 제철의 고장 포항을 상징하고 있었다."생명의 순환"의 조형물이 새천년기념관을 드리우며 바다와 하늘을 품은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 생태계로 희망과 삶의 활력을 노래하고 있었다.새천년기념관 전시실에서 "빛의 도시 포항속으로" 주제로 전시되었다. 포항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해맞이 도시이자 형산강이 만들어낸 삶의 터전의 도시였다. 영일현과 홍해군은 해운수송이 가능했으며 전라도와 함경도를 잇는 상거래 중계자이자 중개지였던  포항지역에 장시권을 이루었다. 동해안과 형산강의 하류지역에 위치한 포항은 일본이나 미국 ,러시아 및 기타 국가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는 지형적 요건이 있었고 주위에서 조선공업이 발달하여 철광석,석탄 수입에 필요한 선박이 쉽게 보급되었으며 형산강을 이용한 수력이 풍부했다. 수이전,삼국유사와 필원잡기에 수록된 한국의 태양신에 관한 신화가 서려있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고장 포항이 역사의 발자취와 함께 전시되었다.2층은 바다화석박물관으로 국내 최대규모 같았다. 3층은 수석박물관으로  한국수석회 회원들이 포항시에 기증한 작품들이였다. 매우 신비한 자태의  화석과 수석들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매우 경이로웠다.옥상전망대로 주변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마을경치와 함께 등대가 밝히는 바다가 펼쳐졌다.호미곶광장으로 육지로 올라온 돌문어 조각이 버티고 있었다. 호미곶의 대표적인 특산물인 "돌문어"를 형상화 하였다. 파란색은 동해의 푸른바다를 의미하고 있었다. 둥그런 형태의 호미곶여행자센터 지붕이  잔디를 이루며 전망대를  형성하고 있어 매우 이색적이였다. 해맞이축제로 제작된 "전국 최대의 가마솥"으로 해맞이 도시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연오랑세오녀"신화가 서려있는 조형물이 호미곶을 향해 위시하고 있었다.이 설화는 오랜 세월동안 포항문화의 큰 물줄기를 이루었다.  연오랑세오녀부부는 신라 초기 지역의 소국 근기국의 인물로 제8대 아달라왕(4년)157년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살았다.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초를 따고 있던 중  한바위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비상한 사람이라고 여겨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찾다가 남편이 벗어놓은 신을  보고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그전처럼 세오를 싣고 갔다. 그 나라사람들이 귀하게 보고 왕께 말하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어  귀비로 삼았다.  길쌈과 제철기술 등 선진문화를 전파하고  그 곳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지니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있었던 것이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괴변이 일어났다고 하여 사자를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다. 연오는 내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된다하면서 비단을 주었다. 그 말대로 제사를 지내니 해와 달이 그전처럼 깔아졌다는 설화이다. 그 비단을 임금의  창고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라고 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했다.호미곶은  한국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라는 과학적인 입증이 되어 일월숭배와 제천의식의 국가행사처였음을 알려준다.  평화적 통일의 염원하는 "새천년의 빛"의 조형물따라 호미곶 등대박물관이  있었다.야외전시장에는 실제로 사용했던 항로표지 장비들이 진열되었다."호미곶등대"는 경상북도념물로  대한제국 광무(5년)1901년에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하여 1908년 준공하였다. 팔각형으로 서구식 건축 양식이였다.기초에서부터 등의 중간부분까지 곡선을 그리면서 점차 좁아지는 형태이며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은것이 특징이다. 등대 내부는 6층으로 각 층의 천장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모양의 문양이 조각되었다.날렵하게 위로 솟아오른 외곽선,정교한 박공지붕, 이중벽 구조설계로 구조적 안정성을 지닌 신고전주의 미학으로 세계등대유산 걸작품이였다.등부표,전기혼,무종,부도등대 등롱..등이 장식들이 매우 고귀한 문화유산처럼 빛났다.여러가지 조각작품들이 진열 되었다. 포항을 대표하는 "돌문어"와 "해녀상"이 생명력이 넘쳤다. 천구의,한반도,등대를 함께 상징하는 "호미곶호랑이상"은 김오성작품으로 전세계와 우주로 영원히 뻗어가는 대한민국의 원대한 희망과 미래를 예술적으로 표현하였다.등대지붕 양식같은 등대역사관이 등대의 햇불처럼 빛났다. 국립등대박물관 등대역사관에는 등대건축,등대 형태별특징과 재료별특징,등대의 역사,세게각국의 등대,항해도구인 해도 지구의 천구의 사분의 나침반,배와 바다 육지와의 대화하는 항로표지가 자세히 전시되었다. 등대양식이 건축예술작품으로 빛났다.기원전 440년경 포세이돈신전이 등대시작으로 지중해 연안을 항해하는 선박의 항해지표로 이용되었다. 기원전500~400년경 그리스 피라에우스항 입구에 그리스인들이 선박 항해지표로 최초의 등화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등대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B.C2500년 고대문명은 강과 해변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수로는 사람과 상품의 운송,교환통로였다. 초기 고대사회 경제발전과 문화확산에 큰 영향을 주었다.B.C 11세기경 시리아 지역에 자리 잡았던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 신진세력으로 부상했다. 초기 페니키아인들은 항해술이 부족해 주로 연안에서 항해 하였으나 지중해 무역의 발달과 식민지 개척으로  점차 먼 바다로 나가게 되었고 항해술도 발달하게 되었다. 이후 B.C 480년경 살라미스 전투에서 페니키아 상대로 승리한 그리스가 지중해를 장악하고 식민지를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주도해 나갔다.로마제국이 지중해 해상을 장악하면서 인도의 향신료를 비롯한 다양한  나라의 상품들이 로마 거리에서 거래되었다. 로마인들은 별자리와 시각,계절에 따른 조류의 변화와 바람을 이용한 항해술을 알게 되었고 선박을 위한 운하,조선소 방파제를 갖춘 고대항구와 지중해 여러곳에 등대를 건설했다.바이킹은 오랜 기간 먼 바다로의 일상적인 침략과 탐험을 하였다. 항해 시 별자라와 간단한 방향탐지기를 이용하였으며 콜럼버스에 앞서 A.D 1000년경 아이슬랜드,남그린랜들르 지나 북아메리카 북동지역을 항해하는 등 뛰어난 항해술과 선박 건조술을 지니고 있었다.대항해시대인 중세는 선박 건조술과 항해술,항해도구발달로 항해를 가능하게 하였다.지구는 둥글다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서쪽 항로를 찾아 팔로스 항구를 떠나면서 본격적인 대항해 시대를 시작하였다. 16세기는 장거리 항해가 보편화되었다. 마젤란 함대가 바다를 통한 세계일주가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유럽인들은 낯선곳에 상륙해 해외 식민지 늘리고 교역을 확장하여 희귀한 물품을 유럽으로 들여왔다. 해상활동 번영과 군함 상선이 더욱 발달하였다. 유럽 여러나라들은 중국 먼나라와 상품 교역 하기위해 동인도화사를 설립해 운영하였다.우리나라 등대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삼국시대는 국제 해상무역을 비롯한 해상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이다. 이로 인해 햇불을 이용한 봉수의 활용이나 선박의 이용제도가 중요하게 인식되었다.통일신라시대는 장보고가 청해진(완도)를 중심으로 당나라와 일본에 해외  무역기지를 구축하고 남해와 서해를 무대로 상품 유통과 해운업에 종사하며 국제 해상무역을 이끌었다. 당시 연안항해는 육지의 지형지물로 위치와 항로를 파악하는 지문항해,원양항해는 태양,달,별 등으로 위치와 항로를 파악하는 천문항해가 이용되었으며 중국이나 아랍과의 국제무역에 사용된 교관선운항에는 지남철이 사용되었다. 고려시대는 전 시기 동안 해상활동이 왕성하였다. 건국 초기부터 군사력 강화를 위해 해군력 증강에  힘을 썼을 뿐만 아니라 해로를 통한 대식국(아라비아),거란,여진,일본, 동남아시아, 등과의 국제교역이 매우 활발하였다. 특히 송과의 적극적 통상정책으로 인해 무역의 주요 항로였던 서해에 외교무역선 왕래가 빈번하였다.조선시대는 일본으로의 조선통신사 파견을 제외한 국제 해상활동이 위축되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세곡을 수송하는 조운은 국가의 중대사로 인식되어 경상,전라,충청지역과 한양을 왕래하는 조운선운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조운선 항해는 주로 지문항해로 조곡의 안전한 수송을 위해 풍랑이 없는 일정 기간을 정하기도 하였다.해난사고 방지를 위한 표목설치  등 항로표지의 필용성이 제기되었다.국립등대박물관  전시관 앞에는 햇불을 들고 있는 인어여신과 전기혼,최인수의 작의 희망의 빛이 진열 되었다. 희망의 빛은 사랑과 희망의 매체로서 등대이미지를 표현하였다.바다를 지키며 선반의 안전을 인도하는 등대의 불빛을 의미하고 있었다. 국립등대박물관  전시관  상설전시인 "등대시간"은 찬란한 빛을 밝힌 바다의 신호등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해양 문화 공간 마셜제도에는 크고 작은 섬 1151개가 있어 매우 복잡했다. 스틱차트 원리 덕분에 원주민들은 안전하고 정확하게 바다를 항해할수 있었다. 인류에게 바다는 도전의 장이자 교류의 장이였다. 그 발자취를 따라 망망대로를 건너온 배를 맞이하기 위해 등대가 세워졌다. 고대부터 배를 만들었고 바다를 건너 물자를 나르고 전쟁을 치렀다. 중세 유럽에서는 북해와 지중해 항로를 중심으로 와인,동방 산품,양모 등 상품을 운송했고 해적활동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15세기 말엽에 이르러 본격적인 항해술이 발달했다.원양 항해용 대형 범선,나침반,천문 관측기구,해도 등의 항해도구를 이용해 대서양항로와 인도항로가 열렸다. 20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전파를 이용한 항해술이 개발되었고 20세기 후반 위성을 활용한 항법이 도입되어 항해술은 최첨단에 이르렀다. 등대는 해상교류의 상징물이다. 항로가 개척되고 기술 발달로 바다로 연결되었다. 중세 유럽 르네쌍스가 꽃피고 신항로가 개척했으며 근대 유럽의 팽창시대에 이르러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지에 건설된 등대는 식민역사의 아픔으로 남았다. 이렇게 등대의 매개로 교류와 대립 속 다채로운 문화가 섞어 세계화가 진행되고 현재에 이르러 등대는 항로표지이자 해양문화 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등대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알렉산드리아의 보물인 파로스등대는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1세의 명령으로 건설이 시작되어 그의 아들 인 프톨레마이오스 2세 통치기간인 기원전 3세기 알랙산드리아  입구 파로스섬에 건축되었다. 학문과 교역의 중심지인 수도 알렉산드리아의 거대한 등대는 14세기 초 대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어 등대 기능과 역할이 상실되었다.1500년동안 상인과 여행자,항해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8세기말~11세기 바다에서 온 침략자인 바이킹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로 유럽 북부,지중해 동부,발트해,동유럽 내륙까지 약탈했고 노르망디공국과 키예프공국을 건국하였다. 바이킹 습격은 당시 유럽 여러 국가에 큰 피해를 주었기에 해양 방어시설이나 항로를 안내하기 위한 표지시설의 건설이 절실했다.11세기~13세기는  바다공화국시대였다. 중세 초 지중해 연안 도시국가들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무역 선단을 구성해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해군은 지중해 한축으로 자리잡았고 십자군 전쟁 기간에는 운송과 보급을 독차지하며 얻은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으로 지중해 무역을 장악했다. 베네치아,제노바,아말피,피사 등의 도시가 대표적이다. 13세기~17세기 한자동맹 시대로 한자는 유럽 도시 상인들의 조합으로 독일 북부 연해도사(뤼베크,함부르크,브레멘)와 발트해의 연안도시(폴란드 그디니아,라트비아 리가)들을 중심으로  여러도시가 연합한 무역 공동체가 되었다. 영국과 북해 연안까지 그 영향력을 넓혀 교역로를 독점했다.16세기 이후 세계가 분활되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대륙 탐험과 정복에 나선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영토분쟁이 극심해지자 교황의 중재로 서쪽은 스페인,동쪽은 포르투갈이 유럽이외의 모든 영토에 대해 권리를 나누는 토르데시야스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이 스페인이 차지가 되었지만 포르투갈은 아마존강의 하구를 확보해 아마존을 개척하며 남아메리카의 절반을 차지할 수 있었고 그 영토는 현재의 브라질이 되었다.프랑스 보르도 지방은 온난한 기후로 고대부터 포도를 재배해 와인을 만들었다.12세기부터 보르드 와인은 지롱드강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전해졌다. 프랑스는 지롱드강 어귀 코르두앙섬에 와인무역을 위한 등대를 건설했고 1611년 완공했다. 장식성이 뛰어나 바다의 베르사유로 등대 중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16세기 말~19세기 영국,프랑스,네덜란드, 스페인,포르투갈은 아시아로 가는 항로가 필요했다. 16세기 말부터 북동항로와 북서항로에 수많은 탐험가가 도전했지만 19세기까지 뚜렷한 진전을  보지 못했다. 1878년 스웨덴의 노르덴시월드가 북동항로를 1903년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북서항로를 최초로 일주헸다. 18세기 이후 제국주의 열강은 18세기~20세기 세계 각지에 철도와 역,항구와 등대를 건설하며 침략의 손길을 뻗었다. 이 시기 등대는 근대의 시작이자 아픈 식민역사의 상징이다.1800년대에 이르러 렌즈가 개량되었다. 과학자 오귀스트 장 프레넬은 아주 크고 두꺼운 렌즈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프레넬렌즈를 개발했다. 프랑스의 코르두앙등대에 처음 설치된 뒤로 현재까지 모든 등대에서 사용하고 있다. 1800년대 후반  등대의 광원으로 아세틸렌가스가 주목을 받았지만 많은 가스가 소모되고 작은 충격에도 푹발의 위험이 있었다. 스위스 닐스 구스타프 달렌은 아세틸렌가스를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는 아가라는 물질과 함께 자동 섬광 장치를 개발했다. 야간에만 빛을 낼 수 있는 태양밸브를 개발하였다. 무인등대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1912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우리나라 등대역사는 근대이전 삼국사기에 햇불이나 표목으로 현재 항로표지 역할을 하는 시설물이 설치하고 관련제도 마련했다는 기록이 있다.금관가야 시대( ?~532년) 김수로왕이 배를 안전하게 인도하기 위해 망산도에 햇불을 설치하였다. 신라 (기원전 57년~) 지증왕이 선박용에 대한 법을 제정하였다. 통일신라때 문무왕이 배에 관한일을 관장하는 선부서를 선부로 승격하였다.장보고는 당나라에서 귀국해 흥덕왕 3년(828년) 청해진(왼도)을 중심으로 해적을 토벌해 신라 무역선을 보호하고 항로를 개척했다. 통일신라는 바닷길을 통해 일본,당나라(중국)및 서역 문화를 받아들이며 활발한 무역활동을 펼쳤다. 고려(918년~1392년)는 수도 개성과 가까운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구로 번성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벽란도는 가까운 송(중국),일본뿐 아니라 대식국(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방문하는 국제교역의 중심지였다. 당시 대식국의 상인들이 고려를 코리아라 불렀고 그 이름이 서양에 널리 알려졌다.  봉화를 이용하여 사신단의 배를 안내하였다.  조선시대(1392년~) 명나라의 영향과 왜구의 침입으로 해금정책을 고수하며 원앙 항해를 금지했다.  세종5년(1423년)에 동제총제 이각이 해난사고 방지하기 위해 각 포구와 연해에 표목  설치와 선박 정박을 권하는 상소를 하였다. 단종3년 암초가 있는 곳에 표를 세웠다. 그후 각 고을에 항로표지용 표목설치를 법제화하였다.1876년 조선은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한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항 원산항 인천항을 개항했다. 각 국의 상선과 군함이 들어오면서 항로표지 설치를 요구해 설치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등대 설빌이 본격화되어 1902년 인천 팔미도,소월미도등대 등 공사를 시작하였다.열강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호미곶등대와 가덕도등대에 새겨진 오얏꽃문양과 물기둥대에 새겨진 태극문양은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팔미도 등대는 근대와 만난 등화를 사용하였고 당사도등대는 항일운동 햇불로 타올랐다. 한국전쟁 이후 원조받는 날에서 2006년 원조하는 나라로 되었다. 세계각국의 등대양식이 그림으로 전시되었는데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빛났다.2층 바다전망 테라스로 호미곶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게 펼쳐졌다.호미곶으로 바다에 떠있는 다섯손가락이 매우 신비롭게 다가왔다.새천년 출발을 의미하는  새천년 빛의 조형물로 연오랑세오녀의 일월숭배 신화가 깃들인 것 처럼 매우 환상적이였다. 조형물 중심으로 광활한 바다가 매우 낭만적이였다.해안 테크길로 호미곶 돌문어 조형물로 포항의 명물을 자랑하고 있었다.호미곶부근에는 해안가의 지형이 계단의 형태를 띄는  해안단구가 있었다.호미곶에서 구룡포에 이르는 해안에는 약 90만년 전에 만들어진 해안단구가 였다. 과거 파식대였던 해안단구는 지면이 점차 융기하면서 해발고도의 두 층으로 형성되었다. 파도에 의한 침식과 지면의 융기로 인해 생성된다. 현재 이곳은 농경지로 이용하고 있었다.호미곶 부근이 생명력으로 충만한 자연 생태계로 비추었다.연오랑세오녀 공원으로 가는 길로 광활한 바다가 펼쳐지고 구룡포의 전산가옥의 거리로 운치가 있었다.연오랑세오녀공원의 입구부터 기암과석이 펼쳐졌다. 연오랑세오녀공원을 이루는 바다 절벽위로 호미반도해안둘레길을 이루고 있었다. 기암괴석의 해안절벽과 함께 바다가 광활하게 비추며 낭만적이였다. 청동기시대 무덤양식인  고인돌 (지석묘)이 형산강변을 중심으로 고대 문화 중심지였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단아한 일월대가 사방 곳곳을 조망할 수 있는 고귀한자들의 공간이였다.제일 높은 언덕길로 귀비고 전시장이 비추며 운치가 있었다. 귀비고와 일월대 사이청초한 잔디언덕과  연못으로 싱그러웠다. 철예술뜰이 바다로 드리우며 신라시대 바다를 바라보는 기분 같았다. 신라마을과  초가지붕의 정자가 바다를 드리우며 신라의 감성으로 충만했다.언덕위로 신비로운 쌍거북바위와 세오녀가 짠 비단을 보관하고 있는 귀비고가 드리우며  연오랑세오녀의 신화감성으로  매우 신비로웠다. 귀비고는 일월의 빛을 잃은 신라가 세오녀가 짠 비단을 받고 다시 빛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설화를 배경으로 귀비고는 세오녀가 짠 비단을 보관하는 창고를 의미한다.전시관 1층과 2층 복도에 장식된 천 조형물이 신라의 매우 고귀한 비단을 상징하듯 드리워 고혹적이였다. "달을 그리다" 주제로 전시되었다. "패브릭 드로잉"은 해와 달을 추상적으로 표현한것 같았다. 최우람의 "태양의 노래"는 연오랑세오녀의 일월신화와 불을 다루는 포항,인간이 아는 가장 큰 불인 태양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였다. 생명의 근원인 태양의 신화를 재해석하여 무한한 창조와 비상의 상징으로 표출하였다. 33쌍의 날개를 유기적으로 연동시켜 변화하는 파도와 일렁이는 태양의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포항의 새로운 도약을 표현하였다.정다운의 "달에게"  페브릭 가변설치는 세오녀의 비단을 떠오르게 하며 신화-공간-관람객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해의 그림자에 숨어 있는 달을 고요한 밤 출렁이는 파도소리와 함께 달빛에 취한듯 했다.사공숙의 "해월도"는 일월신화를 품고있는 귀비고는 달과 바다가 만나는 장소이다.  달은 바다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바다는 밀물과 썰물로 달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의 해월도는 작가가 꿈꾸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담은 내면의 풍경이였다.전시장에 전시된 해월도가 매우 고혹적으로 빛났다.전시실에 일월신화를 간직한 귀비고 비단함이 매우 고혹적이였다. 신라8대왕 아달라왕(154~184)시대 고증하여 제작한 귀비고 비단함이였다. 삼국시대 건축과 공예분양에 주요 사용되었던 삼족오 문양(태양을 상징)과 인동무늬(장수와 길상의 의미)가 새겨져 있으며 명주로 짠 비단에는 인동꽃이 그려져 있었다.연오랑 세오녀 설화와 관계된  고사기,일본사기,영일읍지가 전시되었다.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역사적 배경은 삼한시대로 당시 삼한은 마한,진한,변한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 진한12국은 오늘날 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12개의 소국으로 진한12국 가운데서도 형산강 하류 일대와 영일만 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근기국이 바로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근기국은 기원전 2세기 말부터 기원전 1세기 초엽까지 영일-포항일대에 형성되었다가 서기 2세기경아달라왕 시기 신라에 복속되었다.근기국의 주민은 동해안 북방 (강릉,속초,정선등)의 유이민세력,즉 예족이 주로 해안을 통하여 이주하여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이들 예족이 속한 고대 북방계통의 동이족은 태양숭배 신앙과 조류 숭배 신앙이 합치된 우주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이 반영된 것이 삼족오였다. 근기국의 삼족오 태양숭배집단은 조상신을  중시하는 신라 세력들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었고 전통적인 천재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신라의 복속에 불응하고 도기야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해류의 흐름을 따라 일본 지역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짐작한다. 고대 영일 지역을 다스렸던 읍락국가 집단이 신라의 고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일본 변방으로 진출하여 선진문화 기술을 전파하였다는 고대 한일 관계사의  많은 부분을 은유하고 있었다. 연오랑세오녀 설화를 근거로 고대,삼국시대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청동기시대에 촌락 공동체가 형성되며 본격적인 농경  정착생활이 이루어졌고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해서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확대되어 농업 생산력과 전투력이 높아져 한반도 곳곳에 국가가 성립되었고 나라에 제천의식이 발달하였다. 한민족의 선직적인 농경문화,도작문화는 일본으로 전파되어 고대 일본의 농경문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신라는 직조 기술이 매우 발달했었는데 신라 유리왕(?~서기57년)때는 가배 행사로 베짜는 시합을 열었다. 이러한 직조문화는 일본으로 전파되었다.제철문화로 형산강변의 충적평야인 영일만은 고대인들의 철기문화가 담겨져 있다. 초기철기시대에는 높은 수준의 청동기 유물을 지녔다. 신라에서 일본으로 금속기 문화가 전파되었다.즉 도작문화,제천문화,직조문화,제철문화가  일본에게 전파되었다.더 나아가  신화와 유적속에 남은 한일 문화 교류 흔적들이 전시되었다. 고대시대부터 일본과의 교류를 알 수 있었다.한국과 일본뜰로 매우 아담햇다.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벽화장식과 함께  연오랑 세오녀 설화 조형물로 한일문화 교류의 금자탑 같았다.우비로 인해 포항국제불빛축제가 취소가 되어  가이드의 안내로 경주로 향했다.뜻하지 않는 경주여행으로 기쁨으로 충만했다.가이드가 포항도시에 대한 특징과 여행지에 대한 설명을 아주 간단하게 잘 설명해 주어 도움이 많이 됬다.경주에 이르니 시내 곳곳에 고분들로  신라의 수도 그림자로 얼룩졌다. 경주 대릉원 주차창에 도착하여 첨성대부터 산책했다. 비가 내리는 경주거리로  찬란한 신라의 황량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현대문명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다.드넓은 잔디로 홀로서 있는 초목과 함께 고분들이 역사침묵으로 얼룩졌다.고분을 따라 첨성대를 중심으로 사계절의 각기 다른 꽃밭향연을 이룬 잔디가 역사의 터로 문화유적지 같았다.바로 이곳은  교촌마을,계림,반월성,동궁과 월지,대릉원과 이웃하는 곳으로 신라 경주의 중심마을 같았다.초목들 사이로 첨성대가 비추며 운치가 있었다. 저녁에는 무지개 색깔들의 야광으로 찬란한 문화의 불빛을 밝혔다. 국보 제31호인 첨성대는 신라시대 선덕여왕(재위 632~647)때 세워진 천문기상 관측대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관측대이다. 건립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다. 당시의 높은 과학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천문학은 별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수 있는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수 있다. 첨성대는 다듬은 돌을 받침대 위에 27단으로 원통형으로 쌓아 올렸는데 아래쪽이 부르다가 위로 갈수록 점차 수직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간 돌을 맞물려 우물 정자모양을 얹었다. 안쪽은 12단까지 자갈과 흙으로 채우고 그 위로는 비어 있으며 13단과 15단 사이에 정남향으로  창이 있다.  정자형 우물이 하늘을 향해 솟은 모습이어서 의례 상징물 혹은 기념비적 건축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첨성대가  우주로 약동치듯 신비로운 자태로 불가사리한 탑 같았다.옛 조상의 지혜가 경이로웠다. 첨성대를 마주보며  문호사가 있었다.조선중기 성리학자 관란 이승증(1515~1599) 선생의 서원 유적지에  충효정신을 받들기 위해 제향하는 곳이였다. 첨성대를 주변으로 조선시대 중심 마을을 이루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첨성대를 중심으로 곳곳마다 신비롭게 비추었다.경주 대릉원은  사적 제512호로 황남리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 덧널무덤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다. 천마총에서 금관을 비롯해 많은 유물이 나왔다.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다. 정문부터 매우 수려한 자태의  울창한 숲길로 매혹적이였다.기와 돌담과 삼문에 둘러싸인 미추왕릉이 장대한 초목에 드리우며  청정했다.뻐꾸기가 울어대는 대릉원의 거대한 둥근 봉토분인 미추왕릉이 덧없는 그림자로 가득했다. 미추왕은 신라 제31대 왕으로 여러 차례 백제공격을 막아냈고 백성들에게 농업을 장려하였다.고분길 따라 거대한 봉분들이 서로 맞물리며 한폭의 경치를 담아내 환상적이였다.대릉원의 담장길 따라 횡리단길로 이루어졌다. 즐비한 레스토랑 골목길 사이로 숭혜전이 버티고 있었다. 숭혜전은 신라 최초의 김씨 임금인 13대 미추왕과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30대 문무대왕, 그리고 신라 마지막 임금인 56대 경순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였다. 원래 경순왕 유덕을 기리기 위해 처음 월성에 사당을 지어 영정을 모시다가 정조 18년(1974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황남전이라 고쳤다.그후 고종 24년 (1887)에 미추왕와 문무대왕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크게  사당을 짓게하여 숭혜전이라는 편액을 내렸다.횡리단길은 황님동 포석로 일대거리로  한옥이 밀집된 전통길이였다.수원 행궁길과 같은 한옥양식과 레스토랑,카페들로 정겨운 감성을 담고 있는 길이였다. 그중  흰벽체로 타일벽화 장식을 한 ㄱ억자형 "대릉원 본가", 아담한 자갈마당과 함께 흰벽체 기와집을 이룬 "경주어보",연못 마당과 함께 야외 천막을 이루며 초목에 드리운 흰벽체 기와집인 "카페솔", 팔작지붕에 드리운 직사각형 "황남쫀드기"양식이 매우 정겨웠다.입구부터 아치형 담장으로 자갈마당과 정원을 이룬 2층 한옥인 "대릉갈비"와 매우 아담한 정원과 함께 일본풍 창살을 담은 "줄리스 작은식당"이 일본풍 정감으로 운치가 있었다.마을길 기와 담장으로 거대한 초목에 드리운  봉분이 웅장하게 비추며 고즈녁했다. 이중 팔작지붕을 이룬 2층 한옥인 "SLAP",아담한 자갈마당과 함께 2층 한옥인 "고소간지",통유리창을 이룬 2층 팔작지붕 한옥인 "소소함박"이 풍류소리로 가득했다.좁은 마을길로 흰담장과 함께 흰색의 처마와 벽체를 이룬 ㄱ억자형 "하우 헤브 유 빈"이 이국적이였다.푸른색 샷시의 출입문과 함께 마당을 이룬 "포석로소갈비찜"이 흰벽체와 함께  목재출입문,창문을 이루어 매우 산뜻했다. 매우 아담한 자갈마당을 이룬 ㄱ억자형 "smalljeurney on a table" 이 흰벽체양식을 이루며 운치가 있었다. 대릉원 주변으로 신라의 야경의 불빛이 펼쳐졌다. 형형색깔로 바뀌는 첨성대와 금빛으로 물든 봉분으로 찬란한 신라의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경주 "십원빵"앞에서 십원빵을 사 먹었다. 단 팥소스와 함께 계란이 듬뿍들어간 빵으로 재료를 아끼지 않은 주인장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십원빵가게 캐노피에서  쏟아지는  장마비를 막으며 버스에 오를 시간을 기다렸다.경주에서 매우 활기찬 여행객들로 최고의 명당 자리였다.이곳에 상가를 둔 사장님은 천운을 받고 태어나신 분 같았다.동궁과 월지(구 안압지)는 사적 제81호로 통일신라시대 궁궐 유적지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 최대의 인공연못으로 문무왕 시기에 조성되었다. 과거 군신들이 연회를 갖던 곳이였다. 동궁과 월지 유적의 연못 서편과 남편에서 총 31동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독립된 건물터와 긴 복도 형식의 건물터,긴 건물의 부속건물터,소규모 건물 터 등으로 구성되었다. 남편 건물터에서 직선으로 된 담장들이 설치되었다. 1호 복원 건물은 월지의 서편 호수 기슭에 있는 건물터로 추정되는 곳에 팔작지붕의 누각으로 복원되었다.월지의 중앙섬으로 매우 수려한 자태의 초목들이 물에 반영되고 돌제방과 함께 3호,5호 건물이 비추며 매우 환상적이였다. 네모 반듯하게 제방이 3곳의 건물터를 향해 굽이치며 정자를 이루고 초목에 드리운 드넓은 월지로 매우 이색적이였다. 3호 복원 건물은 월지의 서편 호수 기슭에 있는 건물터로 추정되는 곳에 팔작지붕의 누각으로 복원되었다. 복원 건물안에 모형으로 동궁과 월지를 50분의 1로 축소하여 복원해 놓았다. 매우 아름다운 월지와 함께 유려한 자태의 건물들로 위풍당당해 보였다. 조선시대  연못과는 다른 카리스마스 자태로 압도 되었다.삼국시대 이러한 자연합일의 건축발상이 매우 놀라웠다. 3호 건물에서 돌제방위 5호 건물이 비추며 찬란한 신라의 빛의 그림자로  매혹적이였다.5호 건물은 월지의 서편 호수 기슭에 있는 건물터로 추정되는 곳에 사모지붕의 누각으로 복원되었다. 5호 건물에서 질서 정연한 돌제방위 1호와 3호 건물이 비추며 매우 매혹적이였다. 5호 건물에서 월지주위를 한바퀴 산책했다. 청초한 월지로 금빛 찬란한 성벽같은 돌제방과 우아한 날개짓을 하는 건물들이 비추며 매우 환상적이였다. 생명샘이 흘러 넘치는 초록의 잔디로 동궁의 빛이 우주로 약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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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공원
스페이스워크

포항시립미술관

최옥영~물성 감각하는 철)

이정~왕거미가 당신을 주지하고 있어)

장두건~투계)

포항환호공원
영일만
죽도어시장 서울떡집

새천년기념관)

호미곶광장)

호미곶)

야와전시장)

국립등대박물관전시관)

국립등대박물관 등대역사관~등대시간)

호미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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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세오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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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과 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