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24일~착한여행사에서 성지순례에 갔다.수원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평택역에서 모두 모였다. 가이드의 인솔로 버스를 탑승하고 당진읍성으로 향했다.바다갯벌이 펼쳐지더니 이윽고 면천읍성 부근으로 하늘높이 우뚝솟은 매우 울창한 골정지의 가로수길이 펼쳐졌다.골정지의 길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당진의 중심지 읍성을 시작으로 성지순례길을 시작하였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91호인 면천읍성은 1439년 세종21년 왜구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평지읍성으로 조선후기까지 면천의 군사 및 행정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성벽은 자연석을 잘 다듬어 쌓았는데 외부는 석축이고 내부는 돌을 채운 후 흙으로 덮어 쌓았다.이 면천읍성은 조선시대 성을 쌓은 규정이 가장 잘 반영된 우수한 유적으로 해안지역 읍성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였다. 성벽이 소박한 시골읍성의 정겨움으로 묻어나고 성벽안길의 초원의 언덕위로 남문이 비추며 싱그러웠다. 둥그런 옹성과 함께 남문이 위풍당당한 역사의 그림자로 나붓거렸다.남문을 지나 장대한 은행나무가 홀로 하늘로 우뚝솟으며 역사의 숨결로 빛났다. 서문으로 가는 길로 돌 하나하나가 과학적인 숨결로 고풍스러웠다.남문을 지나 성벽사이로 초목이 생명의 싹을 틔우고 하늘높이 우뚝솟은 초목이 성벽을 드리우며 정겨웠다. 당진의병의 전투지를 이룬 면천읍성으로 당진의 역사숨결을 이룬 길이였다. 성벽길을 지나 면천읍성안으로 가니 대청마루같은 드넓은 공간을 이룬 일자형 면천객사가 잔디밭과 장대하게 우뚝솟은 초목들을 이루며 생명력으로 충만했다.영랑 효심의 전설이 전해오는 1100년 수령의 천연기념물 은행나무가 객사를 드리우며 매혹적이였다. 객사에서 돌게단으로 내려가니 영랑효공원이였다.팔각정자의 군자정은 돌을쌓아 작은 섬을 만들고 난간과 나무다리를 이루며 삼국시대 정감을 자아냈다.연꽃이 수련하는 연못으로 정교한 돌다리를 이루며 고풍스러웠다. 당진시를 대표하는 향토유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정자와 연못이였다.군자정에서 내려오니 당진읍성에서 유명한 팥국수식당으로 줄을 서고 있어 점심을 잠시 미루었다. 바로 그때 아주머니가 들깨강정을 들고와 시식하라 하여 시식하였다.모든 견과류가 들어간 건강식으로 매우 정성껏 만든 고급진 수제맛이였다.면천읍성안에는 식당,미술관, 3.10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관을 비롯해 과일나무,초목들이 무성한 마을을 이루며 활기찼다. 마을 골목길로 흰벽체의 2층 양옥집과 함께 흰 나무담장을 이룬 "그 미술관"이 당진을 대표하는 문화전당을 이루고 면천공립보통학교의 3.10 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관으로 당진의 자랑스러운 역사의 햇불로 타오르고 있었다.골정지는 봄에는 벚꽃길의 울창한 가로수로 생명력이 약동치고 여름에는 연꽃으로 가득한 매우 아름다운 곳이였다. 매우 울창한 벚꽃 가로수길로 생명력이 약동쳤다.골정지는 고려시대 벽골지라 하였고 조선 중엽부터 골정지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골정지에 있는 초가지붕정자인 건곤일초정은 1800년 정조24년 면천군수 연암 박지원이 축조한것으로 당진시 향토유적이였다.골정지 한가운데에 돌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고 그곳에 육각형의 초정을 세운 것이였다.건고일초정으로 건너는 다리는 당시 나무판으로 된 부교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돌다리로 되어 있었다.이곳은 향교와 가까워 유생들이 자주 머물러 시를 읊고 학문을 익히기도 한 은자의 정취가 있었던 곳이였다. 박지원 군수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4년간 이곳 면천군수로 재직하면서 면양잡록,한민명전의 과농소초를 집필하였다.돌다리와 난간을 이룬 건고일초정은 흙을 이룬 마당과 함께 기단위 초가 팔각정자로 매우 운치가 있었다. 매우 커다란 연꽃잎들로 가득 메운 골정지는 생명샘으로 충만했다. 골정지에서 향교가 비추며 옛 선비들의 삶의 그림자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매우 울창한 벚꽃가로수길과 생명력이 약동치며 선비의 정취가 서려있는 골정지로 매혹적인 곳이였다.즉 면천읍성은 충효와 선비정신인 면천향교길 따라 선비들의 풍류인 골정지,호국정신이 깃든 의병 전투지,선인들의 숨결 군자정과 영랑의 효심이 드리운 천년 은행수등 역사의 변천상을 담고 있는 읍성이였다.면천읍성안에는 팥칼국수가 유명했다. 밀가루 음식이 잘 맞지 않아 읍성 밖으로 나가 주위 가까운 부근 뜨락식당에 들어갔다. 벽에 부엉이 그림이 걸려 있었다.매우 화사한 색채의 부엉이로 신화처럼 그려낸것 같았다.돌솥비비밥을 먹었다. 호박복음,콩나물,당근볶음 고사리나물,계란이 들어간 비비밥으로 기름의 고소한 맛과 함께 고추장맛이 조화를 이루어 맛있었다.감자의 향기와 기름의 고소함이 조화로운 감자볶음, 취나물 향기가 진하게 베어나온 취나물무침, 정겨운 맛의 오이무침과 김치,마늘쫑의 향기가 베어 난 마늘쫑무침으로 매우 감칠맛 있었다. 짜지않고 맵지 않은 알맞는 간으로 재료의 본연의 맛을 잘 살린 맛이였다. 핸드폰 충전을 부탁했더니 주인이 직원의 핸드폰을 충전하고 있다고 충전기 없다 하였다.밥을 먹다가 또 다시 한번 부탁했더니 충전을 해 주시었다. 몇분이 지난 뒤 충전을 그만한다고 하여 7프로 정도밖에 충전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취나물무침을 더 달라고 했더니 직원에게 조그만 주라고 말하고 있어 좀 이상했다. 베푸는 마음이 없는 계산적인 주인장의 마음을 엿볼수 있었다.밥을 아주 맛있게 먹고 면천읍성의 장정에서 휴식하였다. 대청마루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힐링이 솟구쳤다.면천읍성에서 솔뫼성지로 갔다. 솔뫼성지는 1785년 내포의 사도 이존창으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김대건 신부의 집안이 4대에 걸쳐 신앙을 증거한 장소였고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 곳이였다. 직사각형 기둥들의 중앙 꼭대기로 십자가가 장식됭 정문이 소나무에 드리워 고결한 순교지처럼 빛났다.프란치스코 교황이 솔뫼성지를 방문했을때 어린 소녀와 만남을 가진 "만남"의 금조각과 함께 고인돌같은 돌 사이로 기억과 희망이 비추며 운치가 있었다. 기억과 희망은 장미꽃들을 형상화하여 건축하였다. 장미꽃의 건축물을 통해 이 시대 사람들이 순교의 꽃으로 피어나길 희망하고 있었다. 피어라 순교자의 꽃들아!...외침이였다.기억과 희망의 내부는 스테인글라스가 경건의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기억과 희망주위로 십자가의 길과 성모 칠고 동산의 조각들이 진열되었다.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십자가를 신비롭게 조각하였고 성모 칠고 동산은 동남아풍 조각으로 성모 마리아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았던 7가지 슬픔과 고통을 말하고 있었다. 십자가길 따라 담장으로 곱향나무 가로수를 이루어 매우 고혹적이였다. 담장으로 드넓은 초록의 논밭과 하천이 흐르는 주변의 경치가 에워싸고 있었다. 바위와 함께 아담한 정원을 이룬 순례자집으로 매우 산뜻했다.메세타콰이어가 장대하게 가로수를 이루는 길 따라 성모경당이 있었다. 소나무를 봉헌하며 바치는 기도인 망덕비와 애덕비의 소나무숲을 이룬 성모경경당이 돌성벽과 함께 둥그런 양식으로 운치가 있었다. 성벽같은 벽체로 조각들과 철문이 장식되며 성지요새 같았다. 하늘을 향해 번쩍이듯 십자가 장식의 문과 십자가 조각이 장식된 출입구로 경건의 기도처 같았다. 내부는 기둥을 떠받치며 올려있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중앙으로 성모 마리아,순교한 신부들,촛대등의 제단으로 장식되었다. 솔뫼기념관 역사관은 솔뫼성지 성당으로 사용되다가 복합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된 곳이였다. 천주교 대전 교구 역사관 개관 전시와 초대사진 작가 이문희의 "천주신앙의 못자리 묏자리" 주제로 사진 전시회가 있었다.내포는 지리적으로 일찍이 선진문물의 수용지로 인식되어 내포를 중심으로 충청도는 18세기 이후 한국 천주교사에서 전교와 박해의 중심지였다.역사관은 김대건신부의 가문과 순교자,김대건 가문 순교자연보,육필로 만나는 김대건신부,대전교구연보가 전시되었다.역사관 내부는 제단,유리화,십자고상 등의 의미가 움직이는 공간이였다. 성물과 천주교서적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십자가상을 중심으로 스테인글라스가 번쩍이는 매우 작은 기도처로 경건했다. 전시관은 작가 이문희 사진전으로 많은 성지와 순교자들의 숨결을 사진속에 담았다.성지들이 하늘로 향하는 거룩의 등불 같았다.중앙 솔뫼아레나는 성인들의 조각들이 줄지은 원형극장으로 로마시대 박해를 연상케 하였다.십자가상 앞에서 바치는 기도 조각이 절규의 외침 같았다.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한복을 입은 성모마리아상이 김대건신부 생가를 비추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그가 태어난 생가는 솔뫼성지로 세계적인 성지로 주목 받고 있는 곳이였다.김대건 신부는 1821년 이곳에서 태어나 1846년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김대건신부생가는 충청남도 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상투를 쓰고 한복을 입고 있는 김대건신부 초상사진앞에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앉아 묵상하는 금조각이 성인을 향한 묵념 같았다. 김대건 생가 뒤 언덕으로 잔디를 이룬 소나무숲길이 펼쳐졌다. 소나무 숲으로 김대건 동상을 따라 십자가의 길과 14처 순례길을 이루며 조각들이 진열 되었다. 절규,애원,탄식하는 소리가 온 하늘을 요동치는 것 같았다. 매우 장대한 은행나무가 소나무숲 사이로 우뚝솟아 있어 운치가 있었다.솔뫼성지에서 신리성지로 향했다. 차창가로 합덕성당과 드넓은 논밭이 펼쳐졌다. 논밭 중앙으로 성모 마리아상과 함께 흰벽체의 아주 조그마한 성당이 비추며 성지 순례길을 밝혀 주었다.신리성지를 중심으로 내포 천주교순례길1코스와 2코스로 가는 이정표가 붙어 있었다. 십자가의 길 따라 잔디언덕으로 초록잎새들이 생명력으로 약동치며 드리워져 운치가 있었다.잔디 언덕으로 4개의 작은 경당을 이루고 저 ! 멀리 십자가 탑 같은 순교미술관이 비추며 성스러운 비밀요새 같았다. 회색벽체의 일자형 사무실과 함께 십자가가 하늘 높이 향한 탑같은 순교미술관이 잔디언덕을 이루어 사방으로 봐도 성지요새처럼 거룩하게 빛났다. 십자가를 바라 볼수 있는 잔디언덕 테크로 더욱 더 신비롭게 다가왔다. 사무실의 야외 복도를 통해 연결된 순교미술관 입구가 운치가 있었다. 사무실의 벽면 사이로 내포의 윤택한 평야가 비추었다.순교미술관은 내포의 천주교와 신리성지에 대해 전시되었다.내포는 신리성지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평야지대를 일컫는다. 바다가 육지안으로 휘어들어간 지역을 뜻하는 말로 조선시대에 이 일대는 서해 바닷물이 들어오는 하천과 주변의 습지, 논으로 이루어진 곳이였다. 한국 천주교 역사속에서 내포는 보다 좁은 의미를 사용했다. 초창기 프랑스 선교사들은 삽교천과 무한천에 접한 평야지역을 내포평야라 불렀다. 천주교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내포지역은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으로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땅이 개간된 지역이였다. 수로와 바닷가,육로가 발달되어 있어 외부와 교류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췄다. 내포 천주교회의 역사는 1784년 예산군 신암면 출신 이존창이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내포지역에 천주교가 왕성하게 전파된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유학을 기반으로 나라를 성립한 조선은 조선후기에 주류를 이루는 종교가 사라진 상태였다.하지만 이 시기에 뚜렷한 신앙체계를 가진 천주교가 소개되면서 민중들의 종교적 심성이 승화되어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포구와 간척지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 살아온 내포사람들은 신분적,제도적으로 여러 가지 차별을 받았다. 천주교의 평등과 나눔의 정신에 매료되었고 종교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다. 내포지역 인근에는 중국을 통해 들어온 천주교를 전하고 해석해 줄 실학자들이 살고 있었다. 천주교는 성호 이익(1681~1763)을 따르는 성호학파에 의해 먼저 수용되었다. 1784년 이존창이 세례를 받기 전부터 이미 천주교는 내포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이존창의 세례와 복음 선포를 계기로 불꽃처럼 번저나가기 시작했다. 충남 당진시 합덕읍에 속한 신리는 삽교천 상류에 위치한 마을이였다. 지금은 평야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밀물 때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였다.신리의 인접마을인 거더리에는 나루가 있어 배로 외부와 왕래하기가 수월했다. 신리와 거더리는 합쳐서 신리로 불렀다. 1860년대 신리 일대는 온통 습지로 인해 우물이 없어 주변에 흐르는 소금기 섞인 물을 마셨다. 고덕지역은 신리 앞을 지나는 삽교천의 상류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인데 초기 교회 신자들이 거주하던 마을이 분포되어 있다. 1784년 이존창이 세례를 받은 후 신리에 천주교가 전해지게 되었다. 이 시기 신리에 정착해 살고 있던 밀양 손씨 집안을 중심으로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66년 무렵에는 마을 전체가 신자로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성장하였다. 1865년부터 신리에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거주하고 프랑스 선교사가 배를 타고 입국하는 통로가 되었다. 신리의 첫 순교자는 1839년 가해박해 때 순교한 손경서 안드레아 이다. 병인박해는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1866년 시작되어 그가 실각한 1873년까지 계속된 박해이다.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이 확장해오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자신의 정치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하였다.1866년 병인박해 때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하기 위해 덕산에 침입하여 몇몇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남연군 묘를 찾았다. 하지만 도굴작업은 미수롤 그치고 오페르트는 도망가면서 신리를 포함한 내포지역 교우촌 전체가 붕괴되는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후 1892년 프랑스 선교사 퀴를리에 신부가 성당을 세웠다. 1927년 신리의 신자들은 다블뤼 주교가 지냈던 집을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였다. 복원된 생가 주교관의 기둥과 뼈대는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대들보,서까래,주춧돌,문지방디딤돌,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 대부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지하로 내려가는 통유리창으로 대형그림들이 걸려 있었다.이종상 화백이 교회에 봉헌한 신리 다섯 성인의 영정화와 13점의 순교 기록화였다. 미술관으로 기류가 경건의 빛으로 가득했다. 우리나라 유일한 순교미술관이였다.순교미술관에서 옥상 전망대로 가는 복도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대작 같았다. 매우 거친 벽체사이로 등이 비추며 신비한 기도처 같았다.벽사이로 등이 비추며 고대 동굴 기도처를 연상하였다. 꼭대기로 올라가기 전 조그마한 창가로 신리성지가 비추며 경건의 기도처 같았다. 전망대에 이르니 삼각형의 회색벽체 위로 십자가가 하늘로 향하며 순교자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신리성지를 비롯한 주변 내포의 평야지대가 펼쳐졌다. 덩쿨벽체를 이룬 성당과 마주보는 치타 누오바 카페가 예술조형물들로 진열되며 운치가 있었다. 1970년대 도지사 사택같은 양식인 사제관으로 정겨웠다.성당입구 철문에 조각된 성화로 경건으로 인도하였다. 성당 내부는 목재천정과 목재 벽장식으로 단순했다.야외성당으로 십자가가 하늘로 솟구치는 미술관이 비추고 종탑이 드리우며 성지의 햇불로 타올랐다.우주를 좌정하시는 하나님 성전을 향해 요동치는 조각들로 십자가를 향한 순교의 빛 같았다.야외성당과 마주보며 성 다블뤼 주교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교관을 중심으로 신리의 신앙교우촌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신리성지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곳이였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김대건 신부와 함께 강경에 첫 걸음을 내디딘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에서 활동하였다.신리는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 마을이었으며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처였다. 이처럼 한국의 천주교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곳은 조선의 카타콤바(로마시대 비밀교회)로 불리고 있었다.신리성지에서 합덕성당에 갔다.신리성지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합덕성당은 충청도 최초의 본당이였다. 성당 자리는 1894 갑오년 전라도 고부보다 앞서 발생한 합덕농민항쟁 시발점이였다. 합덕지역은 한국천주교회의 창설 직후 천주교 신앙이 가장 적극적으로 전파된 내포교회의 중심지였다.교회 건물은 1929년 건축된 고딕양식이였다. 성모동산과 성가정동산사이 계단을 통해 합덕성당이 매우 운치가 있었다. 십자가와 비둘기아래 여러개 종들로 이루어진 종탑이 예술작품 같았다.장대한 초목과 성직자묘지에 드리운 합덕교회가 고딕양식으로 매우 고풍스러웠다.성당을 중심으로 사방 어느곳에나 매우 운치있게 비추었다. 성당 내부는 아치형 천장과 벽돌기둥,아치형 창문,쌍드리에로 용인시 은이성당과 같은 양식을 취하고 있었다.합덕성당 뒤로 싱그러운 공원이 비추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합덕방죽을 주변으로 초가체험 등을 할수 있는 합덕농촌테마공원이였다. 합덕제생태관광체험센터 표지따라 내려 가니 수리박물관이 자리잡고 있었다.미색벽체의 수리박물관으로 세계관개시설물 유산처럼 빛났다.상설전시관에는 합덕제에 대한 역사적인 모든 내용들이 정리되었다. 당진 합덕제는 신라말기 후백제 견훤이 이 곳에 둔전을 개간하고 합덕제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둑을 쌓은 시기가 고려시대 이전것으로 밝혀지고 있다.합덕제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황해도 연안 남대지,김제 벽골제와 함께 조선 3대 저수지 중의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합덕제 주변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이었는데 조상들은 갯벌을 막아 간척하여 농지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간척지에 담수를 공급,농지를 활용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 합덕제였다. 이러한 합덕제 역할로 이 지역은 한국에서 대표적인 곡창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건립부터 조상의 지혜가 담겨있는데 성을 쌓는 방법으로 마을주민들이 함께 진흙과 나뭇가지,낙엽을 켜켜히 쌓아 견고하게 만들었고 또한 7개의 수문을 조성하였다.각 수문이 인근 마을에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고 이들 수문과 저수지를 각 마을에서 함께 관리하였다. 충청남도기념물 제70호인 합덕제는 1000여년의 역사와 함께 주변 지역의 농업생산량을 크게 향상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하여 2017년 세계관게시설물 유산에 등재되었다.전시실에는 신석기시대 당진에서 발굴된 패총이 전시되었다.말로만 듣던 패총을 처음보니 매우 신비로웠다.합덕제는 현재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으며 제방만 원형대로 남아있어 일부 구간을 연지로 조성하여 합덕제 수변공원을 이루고 있었다. 버드나무가 길게 늘어진 산책길 따라 연지로 정겨웠다.홍련,수련,멸종위기 야생동물, 천연기념물들이 서식하는 연지로 매우 커다란 연꽃잎들로 생명력이 약동쳤다.이와같이 당진시는 천주교 성지를 이룬 곳으로 버그내순례길은 이루고 있었다. 버그내순례길은 솔뫼성지-합덕제-합덕성당-신리성지를 잇는 길로 충청도 내포지역 한국 천주교의 최고 신앙공동체를 이룬 순교자들의 산실이였다.합덕성당에서 버스로 기차를 타기위해 합덕역에 갔다. 매우 산뜻한 합덕역으로 한산했다. 합덕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평택역까지 갔다. 평택역에서 내려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역전 김밥 분식집에서 점심을 역전김밥을 먹었다. 우엉,당근,계란,깻잎이 들어간 김밥은 좋은 식재료로 정성껏 담은 집밥과 같은 맛이였다. 깻잎으로 김밥의 맛을 더욱 상큼하게 해 주었다.국물은 기름기 없이 맑은 국물로 감칠맛이 있었다.깔끔한 내부와 건강한 맛으로 신뢰할수 있는 역전 식당이였다.평택역에서 새마을호를 탔다.수원역으로 향하는 기차창가로 30분이상 동안 환상적인 경치들이 펼쳐졌다. 논이 매우 정교하게 펼쳐지며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장대하게 펼쳐지는 논 가운데 집들이 군데 군데 분포되며 낭만적이였다.대교를 지나 연꽃단지를 둘러싼 숲으로 청량감으로 가득찼다.기계를 사용한 과학적인 모내기 논밭들이 환상적으로 비추었다.

















































































































































































































































상설전시관)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2025년7월3일) (0) | 2025.07.15 |
|---|---|
| 서울역사박물관 조선통신사 유물전시회,경희궁,돈의문마을,구 러시아영사관,성공회성당(2025년6월26일) (0) | 2025.07.15 |
| 포항 환호공원,호미곶,연오랑 세오녀공원,경주 대릉원,첨성대,동굴과 월지(2025년6월21) (0) | 2025.06.25 |
| 가평베고니아 새정원(2025년6월17일) (0) | 2025.06.23 |
| 성주 성밖숲,성산동고분군 ,청천서원 청담1942다류체험,가야산역사신화테마관,가야산야생화식물원,합천영상테마파크,정양늪생태공원,해인사,홍류동계곡 농산정(2025년6월14~6월15일) (0) | 2025.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