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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통신사 특별전으로 "사귐,여운이 물결처럼" 주제로 전시되었다.외교 사절단,통신사는 조선 국왕이 일본 막부의 공식 요청에 따라 파견한 외교 사절단이다.조선 전 기간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되었으며 일본 역사로 보면 무로마치 시대 초기부터 에도시대까지 이어졌다.이러한 외교시스템을 통해 양국은 오랜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며 문화적,개인적으로도 깊은 교류를 나눴다. 나아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안정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근대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되기 전까지 평화적 외교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던 통신사 역사적 의미를 전시하고 있었다.조선의 외교정책의 기본 원칙은 사대와 교린을 채택하였다. 중국과는 통치자를 책봉받고 조공을 바치는 사대관계를 유지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일본 등 다른 이웃 나라들과는 대등한 교린관계를 맺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가 수립되면서 두 나라는 새로운 정권아래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으며 명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편입되었다.이후 1404년 조선과 일본은 각각 국왕 명의로 된 국서를 교화하며 국가 대 국가의 대등한 교린관계를 수립했다. 이를 통해 600여 년간 단절되었던 한일관계가 다시 이어졌다.조선 전기,조선과 일본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외교현안은 왜구문제였다. 왜구의 침략은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조선 정부최대 관심사였다.일본에 사절을 보내 왜구문제와 교린체제를 완성하였다.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교린 관게를 붕괴시켰다. 전국 시대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그 야욕을 조선과 명으로 돌려 명을 정복하기 위한 길을 내달라는 명분을 들어 조선을 침략했다. 7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조선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전쟁은 단순히 양국간의 충돌이 아니라 조선.중국.일본이 한반도에서 벌인 대규모 국제 전쟁이였다. 그 결과 180여 년간 유지되었던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완전히 붕괴 되었다.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의 전국 시대는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가 새롭게 에도 막부를 열었다. 그는 막부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원했다. 조선 또한 북쪽 후금과 일본 위협 속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국교재개를 논의했다. 먼저 사명대사를 일본에 보내 일본의 재침략 가능성과 함꼐 화해 의지를 확인했다. 조선은 일본의 강화 요청에 신중히 대응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먼저 국서를 보낼것과 임진왜란때 왕릉을 도굴한 범인을 처벌할 것이라는 두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일본이 이를 빠르게 수용하자 1607년 조선은 사절단을 파견하여 국교를 재개했다.임진왜란 상처가 깊어 믿음으로 통한다는 통신사라는 명칭 대신 회답겸쇄환사라는 이름으로 사절단을 보냈다. 회답겸쇄환사는 일본국서에 대한 답변과 포로 송환을 목적으로 하는 사절단이였다. 전후 조선은 침략에 대한 사죄를 분명히 요구하면서 국교를 회복하는 실용적인 외교를 펼쳤고 양국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사명대사 유정은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으로 활약하고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을 벌이며 일본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전쟁후 1604년 일본에 탐적사로 파견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교섭해 13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환하였다. 이는 조선과 일본의 평화 분위기를 조성한 중요한 외교적 성과로 세계적으로도 모법적인 전후처리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외교관게속에서 국서위조사건도 일어났지만 조선과 일본은 각자의 명분과 실리를 챙기며 외교의 타협을 이루었다.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후 총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했다. 주된 목적은 포로송환,막부 쇼군직계승축하,우호관계유지 등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은 일본을 점차 신뢰의 대상으로 받아들였고 사절단 명칭도 통신사로 확립되었다.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공식 외교사절로 방문해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최종 목적지인 에도에서 국서를 전달하는 의례를 마친 후 귀국했다. 여정 중 통신사가 머문 지역에서는 일본 문사들과 교류하며 시문 서화를 주고받고 학문을 논하는 문화 교류의 장이 열리기도 했다. 단순한 외교 경로가 아니라 평화와 문화가 흐르는 길이였다. 조선과 일본은 언어가 달라 한문으로 글을 주고받았다. 붓으로 글을 써서 대화를 나누는 필담창화로 소통할 수 있었다. 시문을 주고받는 데서 시작한 필담창화는 점차 학문,문학,사상, 관습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로 확장되었다. 평화외교시스템 통신사는 믿음을 통하는 사절로 이 명칭은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에만 사용되었다. 외교에서 신뢰를 가장 중요시한 것으로 1636년부터 파견된 사절단은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총 31회의 사절단이 파견되었다.1682년을 기점으로 활발해진 필담창화는 1763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17세기 후반 동아시아 경제가 안정되고 통신사 외교관계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통신사 사절단 문화교류는 활발해졌다. 조선은 통신사를 통해 국위를 선양하고 일본을 교화하고자 했으며 일본은 중국과 교류가 끊긴 상황에서 조선을 통해 문물과 학문을 배우려 했다. 두 나라는 한자라는 공통의 문자로 소통하며 학문과 예술을 교류했다. 처음에는 경계와 멸시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나아갔다.조선 전기 통신사가 동아시아 외교질서 구축의 기반을 다졌다면 후기의 통신사는 동아시아 정세의 안정을 기반으로 한 문화교류를 통해 한.중.일 세 나라의 문화를 연결하는 창구가 되었다. 비록 200년 동안 한 번꼴로만 이루어진 사행이었지만 그 영향을 받은 문화는 상류층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까지 스며들어 오랫동안 이어졌다. 1763년 제11차 통신사행인 계미사행은 조선과 일본 문인들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외교가 재개된 후 150년 동안 이어진 만남을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다. 통신사들은 귀국 후 사행일기,일본국지,창수시집 등을 집필하며 일본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을 정리했다.특히 통신사들과 교류가 깊었던 학자 이덕무 등은 조선내에서 일본학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연구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조선 실학자들의 일본 인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당시 일본은 쇄국으로 인해 외국과의 교류가 제한적이었기에 통신사는 일본인들이 이국문화를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각 지역에서 이루어진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만남은 단순한 외교적 우호 관계를 넘어 문화교류와 개인 간의 사귐으로 까지 이어졌다.통신사는 일본에서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민중들의 일상과 문화에 깊이 스며들었다. 조선문화에 대한 애호풍조는 통신사가 왕래하지 않던 시기에도 지속되었으며 통신사가 직접 방문하지 않은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다. 통신사 행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를 감상하기 위한 가이드북이 제작되어 널리 읽히고 향유되었다. 사람들은 축제에서 통신사 복장을 입고 그들을 흉내내는 가장 행렬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 유행이 지나치게 확산되자 막부가 금지령을 내릴 정도였다. 통신사는 패션 아이콘으로서 공예품의 디자인에도 활용되었으며 신사에 봉헌하는 애마와 같은 민속문화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조선시대 일본과의 회화 교류는 통신사 수행 화원들이 주도했다. 김명국부터 이의양까지 많은 화가가 사절 수행 중 그림을 남겼고 이를 통해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자국 문화를 알리는 문화 교류의 역할도 했다. 일본의 지형과 새로운 문물을 그려오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요청에 부응해 그림을 그려주었다. 특히 호랑이,매,선종화 등을 그려 일본인들의 취향을 반영하면서도 조선의 미술을 널리 알렸다. 이 과정에서 화가와 문인 등 개인 간의 사귐이 이어지며 서로의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 통신사를 통해 확산된 회화교류는 사행이 중단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직접적인 교류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쓰시마-왜관의 중개를 통해 일본에서 조선의 그림을 주문제작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고 조선의 그림은 계속해서 일본으로 전해졌다. 외교는 단절되어도 문화는 끓임없이 흘러갔다. 19세기 들어 통신사 파견에 대한 반대 여론이 확산되면서 200여 년간 이어진 전통적인 교린관계는 점차 무너져 갔다 1811년 신미 통신사를 끝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신사 외교는 막을 내렸다. 애도가 아닌 쓰시마까지만 와서 외교를 진행하는 역지통신을 끝으로 더 이상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이는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로 인한 국제 질서 급변,막부의 재정 악화와 조선에 대한 인식 변화가 맞물린 결과였다. 평화적 교린 관계는 시간이 지나며 조선의 통신사 파견에 대한 회의론,일본 내 조선에 대한 멸시 위기가 강해지면서 쇠퇴했다. 마지막 신미사행은 축소되고 간소화되었지만 시문과 서화교류는 여전히 활발했다.공식 사행이 없던 시기에도 서로의 문화를 향한 관심은 이어졌다.새롭게 들어선 메이지 정부가 근대 이전의 외교방식을 거부함에 따라 200년간 이어진 대등한 교린관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서울역사박물관 덩쿨기둥을 이룬 잔디마당으로 박물관의 건물과 건물사이를 통유리창의 야외복도를 이루며 정겨웠다. 운현궁 일가 장명등과 망주석,매우 단아한 자태의 고려시대 오층석탑으로 문화산책길 같았다.경희궁으로 가는 길로 고혹적인 자태의 초목이 드리우며 운치가 있었다.경희궁은 광해군때 창건되어 고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의 중요한 궁궐이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 불리고 경희궁을 서궐이라고 한다.영조가 주로 보내고 정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경희궁으로 인왕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경희궁의 숭정문을 지나니 숭정전을 중심으로 죄우로 연결된 건축양식이 웅장한 기세로 압도되었다. 매우 높게 건축된 숭정전이 국왕의 품격을 위시하고 있었다.국왕이 신하들과 회의하거나 경연을 열고 공무를 수행하던 곳인 자정전이 위엄으로 비추었다. 태령전 뒤에 있는 서암으로 신비로웠다.기이한 모양의 바위로 암천으로 불리며 이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인왕산 자락에 있는 서암으로 자연과 합일할 수 있는 조선시대 최고의 궁궐터 같았다.숭정문앞 잔디마당으로 저! 멀리 인왕산이 드리우며 매우 아름다웠다.경희궁 홍화문을 지나니 돈의문 박물관마을이 펼쳐졌다.서대문의 옛이름인 돈의문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됬다. 돈의문의 옛터는 성균관의대 강북삼성병원 신관 앞 사거리에 위치해 있었다.난로위에 도시락이 올려진 추억의 학교교실에서 잠시 휴식하였다.날개달고님의 수박과 백동백님의 김스틱으로 너무 감사했다. 골목길로 갤러리,한옥길,돈의문역사관,여관,극장,사진관,학교, 삼대가옥등...이 펼쳐져 1960.70년대 레트로 감성으로 충만했다. 그 중 1970년대 2층 양옥인 삼대가옥은 1956년에 지어져 3대가 최근까지 살았던 집으로 도시 한옥에 양옥,일본식 가옥의 구조까지 합쳐져 근대 우리나라 건축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건축물이였다.돈의문박물관 마을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 강남면옥에서 점심을 먹었다. 비빕냉면을 먹었는데 깔깔한 맛과 담백한 맛이 어우러진 맛이였다.국물은 소고기육수의 구수함으로 담백했다.신맛의 무우짠지로 집밥과 같은 맛이였다.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 덕수궁 돌담길로 갔다.근대유산 1번지 정동으로 599년된 회화나무 보호수가 드리우며 영조가 내려 준 어필을 봉안하기 위해 최규서(1650~1735)가 자기 집안에 지은 건물인 어서각터가 있었다.1883년 미국공사관을 시작으로 외국공관들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정동은 외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한제국의 탄생이 이루어진 덕수궁,을사협약과 헤이그밀사회의가 열렸던 돈덕전,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화대학병원터,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근대건축 양식인 구 신아일보사,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정동극장등...으로 매우 운치가 있었다. 정동극장앞에는 명창 이동백상으로 이동백(1867~1950)은 판소리를 높은 민족 예술로 승화시킨 명창이였다.러시아영사관의 전망탑이 고종의 길 옆으로 우뚝솟으며 매우 환상적으로 빛났다. 6.25때 전망탑이외 모두 소실되어 모두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랬다.고종의 길로 가니 문이 굳게 닫혀있어 성공회성당으로 가는 골목길로 갔다.조선일보미술관과 아트 조선 스페이스가 버티고 있는 길따라 성공회성당이 이국적인 감성으로 비추었다. 아트 조선 스페이스의 창가로 하인두의 추상파 작품이 걸려 있었다. 마음의 정화가 느껴지는 작품이였다.적벽돌 벽체와 함께 한옥의 기와문이 절충된 성공회성가수녀원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성가수녀원은 1892년 영국인 수녀들이 병원,교육,선교를 진행하였다. 1990년 건축가 김원의 설계로 원래 한옥 건물이 서양식 건축과 어우러지게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성공회성당은 1922년 착공하여 1926년 미완성에 준공하였다. 1993년 한국을 다녀간 영국 건축가가 원래 설계자 아더딕슨의 설계도를 찾아 원본대로 재건축하여 1996년에 완공되었다.정동의 성당은 비잔틱(로마네스크양식)으로 외벽의 기초부와 뒷면 일부에는 화강석을 쓰고 나머지는 붉은 벽돌을 사용했다.처마와 창문과 지붕에 남아있는 한옥양식이 서양건축과 어울러져 묵직하고 중후한 외형감을 주어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였다. 제대화가 황금색 모자이크화다. 모자이크화는 비잔틴시대의 화려한 교회장식이였다.국립정동세실극장 옥상 전망대에 올라가 정동교회를 감상하였다.이국적인 정감으로 압도 되었다.이와같이 북악산 기슭의 경복궁,인왕산 기슭의 경희궁,시청부근의 덕수궁으로 조선시대 어마 어마한 땅을 차지했던 궁궐영역을 알 수 있었다.조선의 개항과 함께 덕수궁을 중심으로 해외 공사관이 건립되고 대한제국이 탄생했던 역사를 되새길 수 있었다.정동은 덕수궁을 중심으로 교회,성당,학교,의료사업으로 조선인들을 선교했던 선교사들의 피끓는 순교정신이 묻어난 길이였다.해방이후 덕수궁주변으로 출판사등... 근대건축 유산이 남아있는 길이였다. 옛 흰벽체 양식인 국회의사당이 서울시청과 마주보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었다. 해가 저물어지고 있을 쯤 덕수궁 야경을 보기 위해 갔다. 2분의 지각으로 아쉽게도 덕수궁을 들어가지 못했다.덕수궁 부근 민선에서 맥주타임을 가졌다. 안주로 비빕국수와 가오리구이를 먹었다.매우 고소한 가오리구이와 매우 감칠맛 나는 비빕국수 양념이였다.광화문부터 성공회성당까지 홍두깨대장님이 포토존에서 매우 환상적으로 사진을 찍어 주셨다.매우 아름다운 배경을 포착하여 안정된 구도로 인물을 잘 살려 주셨다. 사진 찍는법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얻어낸 결과물 같았다. 역사적인 설명을 하면서 리딩을 해 주셨다.길의 동선을 편하게 이동할수 있도록 먼저 사전답사를 통해 안내해 주신것 같았다.사전답사,역사적인 공부,포토까지 완벽하게 준비해오신 대장님으로 매우 감동했다.






특별전:사귐,여운의 물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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