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고령시(대가야생활촌,대가야박물관,지산동고분군,개실마을),달성군 도동서원,숨쉴곳 허브체험,옥연지 송해공원,디아크문화관 (2025년9월6~7

백재은 2025. 9. 11. 09:38

대가야생활촌
대가야카페

9월6일~테마켐프여행사에서 1박2일 고령,달성군으로 여행을 갔다.휴게소로 가는  차창가로 산봉우리가  펼쳐지며 싱그러웠다. 가야시대 생활,문화를 재현한 대가야 생활촌에 갔다. 대가야생활촌 광장 앞  대가야 중심지 고령에  대종과 종각이 대가야의 찬란한 문화를 드높이고 있었다. 삼국과 통일신라 건축의 품격으로 대가야 위상을 드리웠다.하천이 흐르는 다리와 함께 초가집의 대가야 생활촌 문이 옛 가야시대 마을에 온 기분처럼 매우 고풍스러웠다.초가집지붕과 함께  황토벽체의 공방촌으로 흰 수국과 초목이 드리우며 고즈녁했다. 인줄마을(고상가옥촌)에는 약방 할아버지,포목점,어부의 집으로 구성 되었다.움집과 2층가옥으로 이루어진 가야의 가옥형태를 볼 수 있었다. 화덕과 난방시설이 있는 움집은 지붕위에 짚이나 갈대를 덮었다.원룸처럼 1칸짜리 구조였다. 고령에는 다양한 종류의 청동기시대의 바위그림이 남아있다. 대가야가 건국되기전 선사시대  동심원 모양,가면 모양,윳판 모양,별자리 모양 등의 바위그림이 존재한다. 풍년을 기원하거나 자손의 번성 등 소원을 빌었던 장소로 보인다. 평야와 낙동강 주위의 비옥한 땅에서 논농사를 구릉지에서는 밭농사를 지었다. 주식은 오곡으로 산나물과 과일을 따 먹었다.가축으로 소와 닭을 길렀다.대가야 의복은  남자들은 바지와 저고리에 겉옷을 입고 모자를 썼다. 여자들은 치마와 저고리 겉옷을 입고 모자대신 머리장식으로 머리를 꾸몄다. 대가야 왕관은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의 신라의 금관과는 다른 풀잎 모양으로 가야 금관의 특징을 지닌다. 금관 테두리에 새겨진 정교한 물결 무늬는 처음에는 곡선이었다가 후기에는 직선에 가까운  모양으로 바뀌었다. 후기에 달개장식과 곱은 옥이 달리는 등 장식적인 요소가 강해졌다. 대가야의 전성기에는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금,금동 은으로 만든 귀걸이가 크게 유행하였다. 대가야를 비롯한 삼국시대에는 자체적인 소비나 대외 교역품,공물을 마련하기 위해 특정 해산물을 생산하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어부들이 있었다. 대가야 중심지인 고령에서는 주로 하천이나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았고 바다생선은 물길을 이용해 수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가야 건국신화의 가야산신 정견모주상이 있는 건국신화공원으로  정견모주상을  하늘이 내린 신처럼 칭송하고 있었다. 가야산 깊은 골 성스런 성품과 아름다운 용모,착한 마음을 가진 산신 정견모주는 인간이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 주는 것이었다. 정견모주는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하늘에 소원을 빌었다. 기대산 바위 밑에 제단을 차리고 하늘의 신 이비가의 짝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후 아들 2명을 낳으니 첫째가 뇌질주일인 대가야의 시초 이진아사왕이고 둘째는 뇌질청예인 금관가야의 시초 수로왕이 되었다. 건국신화공원의 바위절벽으로 흘러내리는 폭포수를 따라 하천이 흐르며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하천과 초목에 드리운 마을이 매우 환상적으로 비추었다. 불묏골(철기제작소)는 철기공방,단야장의 방,1000도씨 불꽃을 만드는 백탄으로 구성되었다. 365일 식지않는  열기로 대가야의 철기공방이였다. 대가야는 철광산을 개발하여 농기구를 만들어 농업을 발전시키고 무기와 갑옷을 만들어 군대의 힘을  키웠다. 대가야의 뛰어난 제철기술은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다양한 철기들을 바다건너 중국과 일본에 수출했다.단야장의 방에서는 철광석 채취-손풀무질-쇠부리 작업- 단조-주조의 과정을 거쳤다.철을 만드는 첫 걸음은 1000도씨가 훨씬 넘는  온도에서 철광석을 녹이는 일에서 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좋은 숯을 굽는 기술이 있어야 좋은 철을 만들 수 있었다. 숯에는 흑탄과 백탄이 있는데 제철작업에는 화력이 좋은 백탄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에 질 좋은 철광석 산지가 많이 존재하여 대가야는 이러한 풍부한 철광석을 배경으로 고대 사회에서 손꼽히는 제철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철의 왕국 대가야는 철생산 기술을 통해 양질의 철을 대량 생산하면서 경제적,군사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덩이쇠와 같은 대외교류품으로 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삼국에 버금가는 단계까지 크게 발전하였다.불묏골마을 언덕으로 가야봉수대가 있었다. 봉수대는 옛 통신시설의 하나로 가야의 봉수는 일본서기에 가야계 반파(대가야)가 513년부터 515년까지 3년 동안 백제와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 봉수를 운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부정형 할석을 사용하여 벽석을 쌓고 그 안쪽을 돌이나 흙으로 채운 뒤 원형의 거화시설이 마련되었다.봉수대 언덕으로 저! 멀리 산봉우리가 비추며 철의 왕국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골안마을(나루터)는 대가야의 교역물품과 공예에 대해 알아 볼 수 있는  마을이였다.교역소,토기공예장의 창고,쉼터롤 구성되었다. 토기공예장의 창고와 토기,공예유물이 전시 되었다.가야는 해상운송에 양호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당시 한반도의 대외 교역창구  역할을 하였다.그중 대가야는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과 활발한 무역을 했다. 대가야 주요 수출품은 각종 토기,고리자루 칼과 쇠창 등의 무기,말투구와 말재갈,말띠꾸미개등의 말갖춤, 귀걸이와 허리띠장식등의 장신구,덩이이쇠 등이 있다. 덩이쇠는 일본과 중국으로 수출하는 주요 수출품이었다. 반면 수입품은 왜의 오키나와산 야광조개국자와 청동거울도 있었으나 주로 나락(쌀)일 가능성이 높다.오수전은 우리나라 철기시대 주로 발견되는 동전으로 한나라 때 만든것이며 중국과의 교역을 알려준다. 중국의 비단이 대가야를 통해 일본 등으로 수출되었다.대가야의 토기는 당시 일상생활용기로 군다리접시,각종 항아리와 그릇받침,뚜겅접시,손잡이 잔 등으로 종류가 다양하다. 무덤에도 음식과 그 재료를  담아 껴묻거리로 많이 넣었다. 고령에서는 5세기 초반부터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모양의 토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대가야식  토기는 고령을 중심으로 점차 합천,거창,함양,남원,하동 그리고 백도대간과 섬진강을 넘어 호남 동부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대가야 토기 가마는 좋은 흙이나 뗄감을 구하기 쉽고 운반하기 좋은 하천 근처에 많았다.또한 껴묻거리용 토기를 만들기 위해 큰 고분군 주변에 조성되기도 했다. 대가야 사람들은 토기를 만들 때 가마 안에 토기들이 서로 달라 붙지 않도록 토기들을 포개어 구웠다. 토기들 사이에 풀이나 나무 잔가지를 넣었다.대가야 토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나고 변화하였다. 굽다리접시,긴목항아리,그릇받침 등으로 대표하는 대가야양식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안정감을 준다. 표면에 물결이나 솔잎 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뱀모양 장식으로 민간신앙을 모습을 볼 수 있다.초가집을 이룬 쉼터로 나루터마을과 상가라도 못이 펼쳐지며 매우 아름다웠다. 옛 가야시대 나루터  쉼터에 온 기분 같았다.상가라도 못이 펼쳐지는 쉼터로 초목이 드리우며 매우 싱그러웠다. 가야풍 초가쉼터와 동심의 흰색 의자쉼터가 조화를 이루어 운치가 있었다.한기촌(숙박시설) 초가마을과 기와마을로 산봉우리가 드리우고  황토담장으로 수국꽃밭을 이루며 매우 싱그러웠다.고령 어린이과학체험관의 벽체에 따라 대가야 산성인 주산성으로 드넓은 잔디와 함께 과학체험관의 벽체가 드러내며 매우 운치가 있었다. 주산이 드리운 주산성의 문루로 북이 장식되며 대가야국 위상의 깃발이 나붓거렸다.바로 이곳은 가야시대 성터로  해발 310m에 불과한 주산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산봉우리가 드리운 문루에서 저! 멀리 산봉우리가 비추고 마을 언덕과 상가라도 못의 경치가 펼쳐져 매우 아름다웠다. 주산성을 따라 대가야고분전시관으로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위치했다.대나무에 드리운 고분으로 주산성과 함께 대가야국 옛 정취로 녹아 들었다.고령 지산동고분군은 사적 제79호로 700영기의 봉토분과 수만 기의 작은 무덤으로 구성된 가야의 최대 고분이다. 그중 지산동 44호분은 화려한 유물과 최대 순장분인 대형고분으로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대가야 무덤은 뒤에는 산성이 있고 앞에는 마을과 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사마루와 산줄기에 주로 위치한다.둥글고 큰 봉분은 왕 무덤이고 그 주위에 부장품을 넣는 돌방과 순장자들을 위한 작은 무덤들로 구성되어 있다.순장이란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해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 함께 매장하는 장례풍습으로 고대 사회에서 널리 성행했다. 대가야의 지배계층에서 순장이 일반화 되었다. 6세기 중반 무렵에 대가야 무덤은 구덩식  돌덧널에서 신라 양식의 굴식 돌방무덤 구조로 바뀌었다. 신라에 병합(562년)된 뒤 대가야 무덤 구조와 토기 양식은 급속히 신라식으로 바뀌었다. 562년 신라의 이사부와 사다함이 이끄는 기마병 5천명의 공격을 막지 못해 대가야가 멸망했다.주산성을 지나 메나릿골(놀이터)의 주산통문이 초가지붕과 함께 2층 누각을 이루어 가야의 정취를 자아냈다.상가라도 못 부근 언덕으로  대가야  금관장식과 함께 주산이 비추며 대가야마을의  주산성의 그림자로 비추었다. 강자지풀이 미소짓는 언덕으로 주산통문이 비추며 대가야의 정감을 자아냈다.마을과 주산성의 중앙으로  상가라도 못이 매우 아름답게 펼쳐졌다.연꽃이 수련하는 연못으로 물 분수가 뿜어내리며 생명샘이 약동쳤다. 지금까지 수목원에서 본 생태연못 중 가장 싱그러웠다.상가라도 못으로 한기정의 정자가 있었다. 한기정은 가야에서 우두머리,수장을 의미한다. 가야는 대가야를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을 비롯해 금강유역과 섬진강 유역 및 광양만,순천만 일대의 호남 동부지역을 지배하였다.6세기경 가야에서 탄생된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가야금을 만든 대가야의 흥이 서려있는 정자였다. 한기정으로 기와마을이 드리우며 정겨웠다.굴같은 화장실 양식으로 주산성을 이룬 가야국의  정취를 그리고 있었다.대가야생활촌에서 점심을 먹으러 고령농가 맛집인  참살이집에 갔다. 참살이정식을 먹었다.들깨샐러드,한우아름사태 수육과 채소무침, 한우육회와 새싹채소,오곡메밀전,생김,고등어구이,된장찌게,취나물밥,도라지양갱,식혜로 이루어진 정식이였다.취나물밥이 나오기까지 음식들을 차례대로 서빙해 주었다.들깨의 신선하고 고소한 풍미가 가득한 샐러드로 지금까지 먹었던 들깨 샐러드 중 제일 맛있었다.육회와 곁들인 양파,부추,팽이버섯이 들어간 채소무침은 다른 집에서 먹어보지 못한 고급진 풍미를 담고 있었다. 각각의 채소맛이 살아있는 환상적인 맛이였다.육회와 곁들인 새싹채소는 새싹채소의 향기로 힐링되었다.메밀오곡전은 입안에서 매우 부드럽게 녹는듯한 식감과 함께 메밀과 오곡의 고소한 풍미로 가득했다.입안에서 녹는듯한 생김, 바싹하고 담백한 고등어구이,구수하고 진한 된장국이 취나물밥과 맛이 어우러져 힐링되었다.물엿이 들어간 식혜는 다른 집에서 맛보지 못하는  환상적인 맛이였다.힐링을 목표로 매우 질좋은 식재료와 천연조미료 사용으로 담백한 맛을 추구하는  일류맛집이였다.적은 재료의 소스로 야채의 본연의 맛을 잘살려 호텔의 풍미를 지닌  고령을 대표하는 맛집이였다.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 지산동고분군에 갔다. 토기와 돌탑장식으로 장식된 대가야 박물관이 고령 대가야의 문화 햇불로 타오르고 있었다.  대가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찬란한 가야문명의 기록이 전시되었다.
대가야박물관
고령지역에는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후 300년 무렵까지 변한에 속한 작은 나라 반로국이 있었다.쇠로 만든 농기구와 철제 무기로 군대 힘을 키워 세력을 넓혀갔다.반로국은 기원후 300년 이후 영역을 넓혀 가야 사회로 전환하면서 가락국으로 발전하였다. 더 많은 철제무기를 만들고 기술이 발전하여 훨신 단단한 토기를 생산하였다.400년대 이후 대가야국이 되었다. 562년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대가야군으로 757년부터는 고령군으로 바뀌었다. 선사시대 한국형 바위그림을 대표하는 암각화가 존재한다. 대가야 사람들은 왕릉을 만들때 바위그림이 그려진 돌을 떼어와 무덤의 뚜겅돌로 사용했다.대가야.금관가야 시조의 어머니로 가야산신 정견모주를 숭앙되었다.  대가야 왕실세계의 최고 높은 위치에 자리하였으며 해인사에 정견모주를 모시는 사당인 정견천왕사가 있었다.대가야국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은 뇌질주인 또는 내진주지라 한다. 금관가야 시조인 수로왕(뇌질청예)의 형으로 서기 42년 대가야국을 건국하였다. 대가야는 이진아시왕부터 도설지왕까지 16대 520년의 역사를 누렸다. 대가야는 자신들 중심의 건국신화를 만들어 왕실의 신성성을 강조하였다.전성기의 대가야는 고령을 도읍으로 하여 경남 서부와 호남 동부지역을 아우른 국가로 발전하였다.382년 가락국의 기본한기가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400년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신라를 도와 주었다.  이를 기반으로 광개토대왕이 남침하여 금관가야는 성이 항복하였다.464년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 가야왕이 신라를 구원하였다. 하지왕 479년 중국 남제에 사신을 파견해 보국장군본국왕이라는 작호를 받아 국제 사회에 등장하였다.514년 고구려와 말갈군이 신라를 공격하자 대가야와 백제가 신라를 도왔다. 481년 백제,신라와 동맹해 고구려 말갈이 신라의 미질부성을  침공하자 원병을 보내기도 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주변 정세에 힘입어 남원,임실,장수를 차지함으로써 광범위한 권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5세기 부터 150년 간 가야의 맹주국이었다. 522년 대가야의 이뇌왕이 신라의 왕족 비조부의 누이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었다. 529년 대가야왕과 신라왕녀 사이 아이를 가졌으나 이혼소송이 일어났다.532년 가실왕이 가야금을 창제하였다.가실왕은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악기를 가야금의 형태로 통일시키고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담은 12곡을 짓게 하여 분열된 가야를 음악으로 통합하고자 하였다. 금관가야의 왕 김구해가 신라에 항복하였다. 김해의 금관가야는 400년경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에 패전한 뒤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고 이후 고령의 대가야,함안의 안리국이 중심이 되어 가야연맹을 주도하였다. 6세기 접어들어 가야연맹은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치열한 외교정책을 펼쳤으나 결국 금관가야532년 신라 법흥왕(19년)에 멸망하였다. 551년 우륵은 대가야국 사람으로 가실왕의 총애를 받았다. 가야금을 만들고 수많은 연주곡을 지었다. 550년을 전후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신라로 떠났다. 551년 신라  진흥왕이 청주에 행차하였을 때 대가야 출신의 악사 우륵과 함께 그의 제자 이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554년 대가야는 백제와 함께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배하였다.562년 9월 제16대 도설지왕때 신라  진흥왕에 의해  멸망되었다.대가야는 금관가야와 달리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쟁에 의해 멸망당했다. 가야가 멸망한  후 김유신 등 금관가야 출신들은 무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에 도움을 주었고 강수우륵 등 대가야 출신들은 문이나 예술로 신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구덩식돌넛무덤에서 신라양식인 앞트기식 또는 굴식돌방무덤으로 변하고 껴묻기도 신라 양식으로 변화하였다.고려시대 불교문화가 융성되었고 조선시대  학문과 절의를 숭상하는 선비의 고장이 되었다.의병대장의 대승으로  신라와 맞서 싸웠던 대가야의 저항정신은 의병정신으로 승화되었다.대가야는 국가의 안정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나라들과 다원적인 대외관계를 맺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대체로 신라보다 백제와 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가야가 중국과 일본으로 오가는 가장 쉬운 길은 낙동강이었지만 신라에 의해 막히면서 새로운 대외 교역을 찾아 섬진강으로 진출하였다.대가야는 농경문화와 해양문화를 종합하였다. 독특한 순장문화,최첨단 하이테크인 철기문화,음악과 예술의 상징인 가야금을 탄생시킨 나라였다.대가야 지배층은 벽돌과 기와를 사용하여 왕궁과 관청을 지고 생활하였다.옷의 새깔과 형태,옷감의 재질 등으로 신분을 구별 하였다. 신분이 낮은 백성들은 삼베와 같은 거친 옷을 입었다. 대가야 사람들은 산신과 하늘신 등을 숭배하였다.현실의 삶이 사후에도 이어진다는 게세사상을 가졌다.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이고 무덤 제사를 지냈다. 유학의 예약사상으로 나라를 운영하였다. 
고분전시관
고령박물관 언덕위로 고분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적 제79호인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의 왕도였던  대가야읍을 둘러싸고 있는 주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위치한다. 고분군의 북쪽에는 대가야시대의 산성인 주산성, 동쪽에는 대가야 궁성지가 있다. 대가야가 고대국가로 성장 발전하는 400년경부터 신라에 멸망하는 562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주묘제는 구덩식 돌방무덤이며 왕을 비롯한  지배층과 다양한 신분층의 무덤들이다. 가야 지역 최대 규모의 고분군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연결된다는 내세사상과 순장을 비롯한 장례문화,탁월한 경관과 우수한 토목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서기 400년 전후하여 최고 지배자인 73호분은 대가야 왕릉 출현기에 만들어진 최초의 왕릉이었다. 44호 고분은 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최대 규모의 순장무덤으로 대가야 대표적인 무덤이다. 
 
고분전시관을 지나 언덕길로 가니  빽빽한 숲에 둘러싸인 초목과 함께 주산의 능선에 따라 뻗은 고분이 비추어 초입부터 설래이게 했다.오른쪽과 왼쪽길 두길사이 중  오르막으로 이루어진 왼쪽길로 갔다.오른지 얼마 안되어 멀리 능선까지 뻗은 고분군과 함께 굽이치는 오르막 언덕길로  주위 산봉우리와 마을의 경치가 펼쳐져 환상적으로 압도되었다. 고분길을 중심으로 저! 멀리 고령군의 경치들과 함께 주산의 능선에 들어선 고분들이 펼쳐지며 매우 환상적이였다.오르면 오를수록 경치들이 더욱 웅장하게 비추었다.서로 맞 물리며 비추는 고분군으로 매우 운치가 있었다.맨 위로 올라갈수록 왕과 계급이 높은 관직들의 릉으로 릉 규모가 더욱 컸다.거대한 지산동 44호 고분은 대가야 대표적인 무덤이였다. 지산동 44호고분을 중심으로 주산의 능선들로 뻗어나간 고분들이 저! 멀리까지 매우 광대하게 비추며 대가야 영광의 햇불로 우주를 약동쳤다.개실마을 가는길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논밭에 베롱나무 가로수 가 펼쳐졌다.개실마을은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김종직(1431~1492)선생  후손이 터를 잡고 350년째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선산(일선) 김씨 집성촌이다. 경북민속문화재 제62호인 점필재종택에는 현재 선생의 18대손이 살고 있다. 2019년부터 여러가지 체험마을로 자리잡았다.김종직종택과 김종직 사당이 비추는 소공원의 개실각 체험장에서  엿만들기 체험을 하였다.엿은 두뇌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원인 포도당이  많이 함유하고 있었다.조청을 가지고 두사람이 같이 엿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 실습하였다. 완성된 엿을 쌀가루에 뿌려 비닐봉지에 담고 얼음팩과 함께 종이빽에 담아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하여 주었다.엿 체험을 한 후 엿만들기를 주도하신 분이 김종직 18대손이라며 김종직 종택으로 안내해 주었다. 김종직 18대손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개실마을은 원래 아름드리벚꽃나무 가로수였는데 가로수를 모두 베어 버리고 도로가 들어왔다. 수도가 늦게 들어와 우물로 살아왔다고 증언해 주었다. 김종직의 후손으로 유교의 전통을 지키며  불편한 종택생활을 해온것 같았다. 미남인 얼굴에서 비춰지는 눈빛은 선비의 자손으로써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조선시대 대학자 자손을 직접 보게 되니 신기했다.무사 최고 호가 충무공이고  무신 최고 호가 문충공인데 김종직은 문신 최고 호인 문충공이다.유물과 유품들은 대가야박물관에 기증하였다.조선시대 최고 무신의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2호인 김종직 종택은 선산 김씨 문충공파의 종택으로 안채 1800년경에 사랑채는 1812년에 건립된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마을 뒷산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를 이룬 터에 님동향으로 자리를 잡고있다.사랑채,중사랑채,안채,고방채,사당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출입문 옆 문은 여자들만 출입하는 문이였다.왕만 사용하는 사랑채의 원형기둥을 이루고 있었다.사랑채에 앉으니 접무봉이 한눈에 들어왔다.사랑채 앞마당  옆으로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서린각이 감나무에 드리운 출입문과 담장으로 에워싸고 있었다.사랑채를 지나  고방채,안채,중사랑채를 이루고 서린각 담장 위  언덕으로 사당이 화개산과 대니무숲에 둘러싸여 있어 매우 이색적이였다.안채구역이 트인 상태로 언덕으로 이어져 사당이 서린각을 내려다 보는 구조로 고택의 구조가 다른 고택과는 달라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서린각  담장에는 김종직에 대한 생애와 지금도 기려지는 선생의 정신에 대해 전시되었다.문충공 김종직(1431년~1492)은 호가 점필재로 김숙자 선생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세때부터 부친에게 배워 정몽주,길재 김숙자로 이어져 내려 온 성리학 도통을 계승하는 기틀을 닦았다. 어린시절  가뭄에 고통받는 농민의 고통을 시로 읊펐다.농민의 고통을 담은 여럿 시를 지었다. 20세후반까지 시를 모아 놓은 시집회당고가 있다.16세~25세 시기 시재에 대한 자부와 낙방의 아픔을 맞이했다. 26세~28세 시기 부친의 죽음으로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다.27세때  단종의 비극적 소식을 듣고 조의제문을 지었다.29세 과거급제와 관직에 첫발을 내딛었다.30세부터 40세까지 관직생활을 하며 문장으로 명성을 얻었다.41~45세까지  함양군수시절 교육과 선정으로 이름을 날렸다.44세때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잃은 슬픔을 맞이했다.46세~49세까지  선산부사 시절 풍속 교화와 제자 교육에 힘썼다.49세 모친이 사망하였다.49세~52세까지 모친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제자 교육에 바쳤다.52세때 부인 조씨가  사망하였다.53세~59세까지  가족사의 시련 뒤 혁혁한 사대부로서 삶을 살았다.55세때 부인 조씨를 잃고 혼자 지내던 선생은 성종(16년) 1485년 18세 부인과 재혼하였고  56세때 아들 숭년을 얻었다.59세~62세까지 밀양으로 낙향하여 도덕과 덕행과 정사에 뛰어났던 생애를 살았다.연산군때 무오사화(1498년)로  관직이 삭탈되고  부관참시되었지만  중종반정으로 신원이 복권되었다. 저서로는 청구풍아,동문수,점필재집,회당고,이준록,당후일기가 있다. 밀양 유림들이 김종직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명종 22년(1567년) 덕성서원 세웠다. 임진왜란때 소실된것을 인조(12년)1634년에 복원하여 현재 위치로 이건했다.이름을  예림서원으로 바꿨다.종택에서 남서쪽으로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림들이  건립한 도연재가 있었다.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인 도연재는 김종직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림들이 고종 원년1886년에 건립하여 유생들을 가르치고 제사를 모시던 재실이다.김종직 종택에서 남서쪽으로 거리를 두고   정면5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집이였다. 선생의 정신은  지금도 기리며 살아 있었다. 코카콜라를 수집하여 장식한 대가야카페로 향했다.카페가는 길  차창가로  노랗게 수채화를 그리는 논밭이 매우 아름답게 비추었다.논밭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시골길로 카페가 버티고 있었다. 새빨강 승용차와  코카콜라의 간판이 조화를 이루며  낭만적이였다.코카콜라와 관련된 장식의 1층과  사진기와 골동품을 장식한 2층의 카페 내부로 주인장의 수집 열성에 매우 감탄했다.빈틈없이 사방을 두르고 있는 장식품들로 레트로 감성을 자극했다.두레 곤드레 돌솥밥 한정식 집에서 저녁을  곤드레돌솥밥을 먹었다. 오리고기구이,게장,갈치구이,두부구이,메추리알조림,새싹채소 샐러드,계란말이로 주인장의 정성으로 가득했다. 더덕이 들어간 오곡밥으로 힐링되었다.참나물향기로 가득한 참나물무침,무우볶음,콩나물무침으로 더덕장과 함께 비벼 먹을수 있는 비빕밥차림과 다시마,양배추,브로컬리 쌈과  양념장,양념고추장으로 쌈과 함께 먹을 수 있는 밥상차림으로 힐링되었다. 구수하고 시워한 맛이 느껴지는 된장찌게로 직접 담은 비법 된장을 담고 있었다.더덕을 으깨어 양념장을 만든 더덕장볶음은 매우 인상적인 맛이였다. 먹으면 먹을수록 잘게 씹히는 더덕으로 힐링되었다.하지만 조금 달아 아쉬웠다. 인삼맛이 느껴지는 명이나물절임은 환상적인 맛이였다.짜고 시지않은 궁채절임과 고사리볶음은 다른집에서 맛보지 못하는 맛을 담고 잇었다. 간장과 식초사용이 관건인것 같았다. 소고기미역국과 양파간장절임은 감칠맛 있는 간장이 맛의 관건 같았다.갓김치와 양파두부절임은 할머니 손맛이 느껴지는 정겨운 향수맛을 담고 있었다.저녁을 아주 맛있게 먹고 마스터피스호텔에서 묵었다. 논밭이 펼쳐지는 시골길의 호텔로 빌라 같았다.혼자 묶게되어 땀에 쩢은 속옷을 빨고  머리를 감는데 너무 편했다.단순한 호텔방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화가 느껴졌다.

참살이집
대가야박물관
고분전시관가는 길
고분전시관
지산동고분군
김종직생가
도연재
개실마을
대가야카페
두레 곤드레돌솣밥 한정식

9월7일)

도동서원
숨쉴곳 허브체험
디아크문화관

 
 
9월7일~호텔방에서 아침부터  귀뚜라미 우는 소리로 정겨웠다. 아침부터 비가 주르륵 내렸다.호텔 앞에서 모여 버스를 타고 현풍밥잘하는 집으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청국장정식을 먹었다. 달자지근한 청국장찌게로 안동에서 먹었던 청국장찌게가 생각났다. 비법양념소스의 돼지두루치기는 불맛을 잘 살려 감칠맛 있었다.모든 손님들이 좋아할 맛 같았다.황태양념찜,계란찜,콩나물무침,숙주나물무침,김가루무침으로 집밥과 같은 맛이였다. 김치는 달큰하고 시원한 맛으로 인상적인 맛이였다.오래간만에 맛있는 김치는 먹는 기분 같았다.열무겉절이는 싱싱한 열무맛과 함께 새콤한 맛이 담겨진 맛으로 입맛을 돋구었다.달성군 가는 길로 논밭과 가로수의 조화로 아름다웠다.고령보다 높은 산봉우리를 드러냈다.도동서원으로 가는 길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드넓은 논밭이 펼쳐져 서원의 자연경관이 설래임으로 다가왔다.도동서원 버스 정류장부터 산봉우리에 드리운 주변과 함께 낙동강이 흐르는 자연지형으로 청량감이 넘쳤다.산아래 초목사이로 서원의 거의재가 비추는  서원둘레길  초입으로 생명력이 약동쳤다. 도동서원은 조선시대 유학자 김굉필(1454~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흙과 기와로 쌓아 만든 담장을 둘러서 검소하고 단아하면서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룬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서원이였다.화사한 베롱나무와  커다란 초목에 드리운 언덕위 비각이 매우 고풍스러웠다.450년된 은행나무 보호수가 매우 고혹적인 자태로 서원을 드리우며 매우 운치가 있었다.김굉필(1454~1504)은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다. 이 은행나무는 1607년 (선조40년)에 안동부사로 재직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외종손이며 이황선생의 고제인 한강 정구선생이 도동서원 중건기념으로 식수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었다.돌담장 중앙 화사한 수월루가 카리스마스 자태로 버티고 있었다. 고혹적인 은행나무와 함께 수월루의 전경이 매우 환상적으로 압도 되었다. 언덕의 지형의 따라 수월루 앞 비석이 고결한 선비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 우뚝솟은 초목이 돌담장위 유물전시관을 드리우며 기품있게 빛났다.즉 도동서원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은행나무  보호수,비석,유물전시관의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수월루의 전경이 고혹적으로 빛났다.문간체를 지나 곡간채로 정겨웠다. 바로 그 돌계단 위로  "ㄷ자형" 전사청을 이루고 사주문으로 중정당이 연결 되었다. 중정당 뒷마당으로 정원을 이룬 돌계단위 사당으로 매우 운치가 있었다.강당 주위 흙과 기와로 쌓은 맞담으로 매우 아름다웠다.중정당은 일자형으로 학문을 닦고  배우던 강학 공간이였다. 중정당 마루에서 사당이 비추며   고즈녁했다. 3개의 목재창문을 이룬 중정당 마루양식이 매우 고결하게 빛났다.조선시대 매우 기품있는 건축양식 같았다. 중정당 앞 거인재와 거의재 마당 환주문으로  수월루가 연결되며 매우 고풍스러웠다.수월루에서 낙동강 주변 경치들이 펼쳐지는 곳으로 자연과 합일하는 공간이였다. 도동서원을 감상하고 비각이 있는 서원 둘레길로 가니 돌담장 사이로 수월루,강당영역,사당이 고개를 내밀며 매우 운치가 있었다. 언덕을 오르면 오를수록 청량감으로 가득찼다. 빽빽한 초목으로 둘러싸인 뒷산의 도동서원으로 매우 아름다웠다. 즉 매우 울창한 뒷산이 드리운 도동서원은  산 언덕 지형에 따라 건축을 이루고 수월루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드넓은 낙동강이 펼쳐지는 자연과 조화를 이룬 매우 환상적인 곳이였다.도동서원에서 에코허브화분만들기 체험장인 숨쉴꽃으로 향했다. 차창가로 한평중학교 담장으로 나무벽화타일을 이루어 이색적이였다. 드넓은 낙동강이 광활하게 펼쳐지고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매우 드넓은 벼밭이 펼쳐져 매우 상쾌했다.숨쉴꽃 부근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갔다. 걸어 가는 동안 장미꽃,들꽃이 미소짓는  벼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매우 아름다웠다. 벼밭의 아름다움을 난생 처음 느꼈다. 비닐하우스로 이루어진 숨쉴꽃은 유치원 아이들의 체험장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어 동심의 인테리어와 함께 허브판매대로 아늑했다. 농부 김은성의 스파이민트 페퍼민트,레몬밤과 히비스커스,레몬버베나 3종류의 허브차를 시식하였다.그중 스파이민트 페퍼민트가 시원하고 매우 상큼한 맛으로 제일 향기로웠다.허브화분을 만들기 전  허브가 심어진  비닐하우스로 안내해 주었다.비닐하우스 부근으로 약초가 땅에 자라나며 신비로웠다. 레몬밤,바질,마조람,타임,오레가노,캐모마일, 세이지,베르가못,로즈메리,라벤더,헬리오트롭,레몬 버베나,오렌지밤,유칼립투스,티트리,구문초,스테비아,애플민트,스피아민트,페파민트,뉴콜라,바질,장미허브의 온갖 종류의 허브향기를 맡으며 따 먹었다. 사과향기의 애플민트,껌냄새가 나는 스피아민트,매우 단맛의 스테비아등...갖가지 다른 향과 맛으로 힐링이 솟구쳤다.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매우 신비롭게 느껴졌다.선생님의 지시대로 로즈메리를 화분에 옮겨심는 허브화분 체험을 하면서 허브향기에 심취되었다.숨쉴꽃 언덕 위로 높은 제방의 하천이 인상적이였다.수생식물들로 가득찬  하천으로  매우 싱그러웠다.숨쉴꽃에서 점심을 먹으러  향했다.차창가로 낙동강이 드넓게 펼쳐져 아름다웠다.  신도시  아파트거리로  울창한 은행나무 가로수 물결을 이루어 매우 인상적이였다.곤지곤지에서 곤드레 돌솥밥정식을 먹었다.대나무에  매우 정갈하게 차려진 반찬들로 귀빈대우를 받는 기분 같았다. 곤드레와 잡곡이 들어간 곤드레돌솥밥으로 힐링이 솟구쳤다.  열무김치,콩자반,무우무침,콩나물무침,멸치땅콩볶음,다시마줄기볶음,젓갈,잡채,비빕국수,다시마,양배추,쌈케일 쌈채소,호박볶음,도라지볶음,고사리나물볶음,마른나물볶음,참나물무침,간장양념장,젓갈양념장으로 집밥과 같은 맛이였다.나물향기가 가득한 마른나물볶음과 다시마 양배추 쌈케일의 쌈채소로 힐링되었다.점심을 맛있게 먹고 옆에 앉으신 분이 시지않고 맛있다면서 자몽을 주어 너무 감사했다.옥연지로 가는 차창가로 울창한 산,베롱나무가로수길,낙동강이 펼쳐져 매우 싱그러웠다.옥연지부근에 이르니 드넓은 호수가 펼쳐지며 전국에서 가장 큰 저수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옥연지는 1964년 준공해 농업용 저수지로 활용되다가 힐링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옥연지 초입부터 꽃밭,물레방아,오색풍차,학,돛단배,달등 각종 조형물로 장식되었다.옥연지 수면위를 가로지르는 백세교와 정자인 백세정으로 싱그러웠다.1층 쉼터와 함께 좌우로 목재계단을 이룬 백세정이 신한옥 같았다. 옥연지를 따라 3.5km 둘레길과 함께  산의 능선길로 이루어졌다. 장대하게 뻗은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매우 드넓은 저수지로 생명력이 약동쳤다.옥연지의 핫한 장소인 금굴로 가기위해 옥연지 수변 테크길로 갔다.장대한 초목이 수변으로 드리우고 나무가지들이 옥연지를 수를 놓아 매우 싱그러웠다.수변테크길을 가다가 금굴의 표지만 따라  능선길로 올라갔다.산줄기에서 뻗어 내려온 폭포수가 흘러 내려  깊은 산속에 온 기분 같았다. 저수지 주변의 산 등산길 경치로 감동했다.금굴내부로 조명과 함께 이국적인 장식으로 신기한 기도처 같았다.금굴 주변이 산속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  처럼 저절로  힐링되었다.금굴에서 내려와 수변 테크길 쉼터로 정겨운 송해조각,말조형물,오늘이 가장 젊다라는 조형이 장식되었다.옥연지를 지나 이찬원카페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찾아갔다.횡단보도로  회색벽체와 적벽돌벽체가 대비를 이룬 대형카페가 보여 찾아가니 핸즈커피였다. 다시 방향을 돌려 반대편으로 가니 상가 3층에 이찬원카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찬원의 트롯이 울려 퍼지는 평범한 실내로  사람들이 매우 북적거렸다.시간이 모자라 송해기념관은 다음기회를 약속하며  디아크문화관으로 향했다.차창가로  은행나무 가로수와  금호강이 펼쳐졌다. 금호강 주변으로 매우 싱그러운 습지 생태원을 이루고 있었다.잔디 언덕으로 우주 모형체 같은 유려한 곡선의 디아크문화관과 함께 사슴과 말을 타고 있는 천사 조형물이 비추며 신비로웠다.디아크문화관은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한국 수자원공사가 운영하는  강문화 건축물이였다. 이집트 세계적인 건축가 하니 라시드가 설계한 것으로 도자기 같은 타원형 외관이 인상적 이비를 통해 댄스처럼 물 밖으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2014년 한국건축문화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은 건축작품이였다.디아크의 이름에는 강문화와 물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공간내부는  돌아가는 통로와 높은 천장이 있는 중앙홀은 마치 물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며 파랗고 하얀 둥근벽이 함께 어우러져 시원한  느낌을 준다. 물의 힘과 아름다움 그리고 물의 정신을 공간에 구현한것이 건축가의 의도였다. 물의 순환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체험할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였다.희망나눔인 그리팅맨은 문화 인종적 편견을 초월한 평화와 화해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중앙 홀 벽에 유영호 작가의 그리팅맨  5000명의 파란색 조각들이 침착하고 화해의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그리팅맨은 작지만 여럿이 모여 허리를 굽히는 자세로  환영을 받는 기분이였다. 지하의 중앙홀부터 진하늘색 계단이 굽이치는 변화의 강은 감각적 영상과 북소리가 어우러진 미디어 아트였다. 팝아트적인 그래픽과 심장의 박동과도 같은 힘찬 북소리를 통해 물의 효용 가치를 극명하게  대비하여 전달하고 있었다. 강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경제적,풍요로움을 물에 관련된 아이콘과 오브제 를 활용하여 감각적으로 표현하였다. 물과 강이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변화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 있었다. 굽이치는 계단을 따라1,2층의 흰 벽면원형공간은 전시공간이였다. 3층에서 1층으로 쏟아져 내린  미디어아트인 기운 생동의 샘은 만물의 근원인 물,생명을 담고 흐르는 물,물의 흐름에 따라 소생하는 자연, 물에서 자연으로 자연에서 물로 순환되는 생명의 서클을 담고 있었다. 13미터 길이의 미디어 월은 물과 자연의 순환을 재현해주며 압도적이였다. 3층 전망대는 디아크문화관 주변 금호강과 함께  고령 다산면과 연결되는 낙동강의 고령 강정보와 주변의 경치들이 펼쳐졌다.즉 자연과 물이 순환하는 강줄기로 환경을 살리는 일은 우리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고 건강한 자원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가치 있는 사명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미디어아트와 조형물들이였다.디아크문화관 산책로를 따라 금호강의 드넓게 펼쳐지며 싱그러웠다. 잔디 언덕의 다이크문화관 언덕으로 올라가니 우주로 약동치는 신비한 모형체처럼 빛났다. 자연과 물이 순환하며 우주로 약동쳤다.디아크 건축과 함께  김형표의 추억의 문, 각종 조각품들이 자연의  상생과 조화를 상징하듯 신비롭게 빛났다. 


 

 

도동서원
숨쉴곳허브체험

 

곤지곤지
옥연지
옥여지부근 커피숍
디아크문화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