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영주시 소수서원,청포도가는 길 (2024년10월15일)

백재은 2024. 11. 15. 11:04

소수서원
퇴계종택
맘모스제과점

10월15일~우리함께 걸어요 밴드모임에서 영주시로 여행을 갔다.차창가로 노랑과 녹색이 어우러진 논밭으로아름답게 비추었다.영주시에 이르니 사과밭 천지를 이루며  생명력 약동쳤다.아침식사를 선비촌순흥청국장집에서 청국장을 먹엇다. 놋그릇에  담은 음식들로 고급 한정식차림처럼 돋보였다.사과의 달큰함이 살아있는 사과김치로 청령감이 넘쳤다. 파의 달큰함이 우러나온 파김치로 환상적인 맛이였다.고추찜무침은 입안에서 부드럽게 감기며 깊은 양념이 베어 감칠맛 있었다. 멸치볶음은 감칠맛으로 고추장맛이 관건인 것 같았다. 시원함과 싱싱한 맛이 조화를 이룬 얼갈이물김치로 입맛을 돋구었다. 좁쌀밥과 함께 감칠맛있는 오이무침,묵무침,도라지 향이 강한  도라지무침으로 정겨운 맛을 담고 있었다. 본연의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려 조리한 반찬들이였다.두부,파,양파가 들어간 청국장은 콩을 갈아서 끓인 청국장으로 힐링죽 같았다. 비법 청국장의 짜지않고 냄새나지 않은 구수한 맛으로 두부와 매우 부드럽게 씹히며  힐링이 솟구쳤다.아침을 아주 맛있게 먹고 소수 서원에 갔다.소수서원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후 서원을 산책했다.은행나무가 매우 장대하게  경렴정를  드리우며 운치가 있었다. 문성공묘를 드리우는 은행나무로  매우 경건하게 비추었다. 지락재와 학구재가  "ㄱ억자형"으로 매우  학구적이고 윤리적인 이념이 담은 듯 비추었다. 죽계천으로 방송 드라마를 찍는 배우들과 감독들로 분주했다.소나무가 고결한 자태로 드리우는 죽계천 백운교를 지나  취한대로 가는 하천길로 기와 돌담장의 지락재, 지도문,경렴정이 비추며 매우 운치가 있었다. 취한대로 산과 하천의 소박한 자연을 즐겼던 옛 풍류소리로 가득했다.학자수의 영귀봉으로 지도문과 경렴정이 비추며 매우 싱그러웠다. 즉 서원,죽계천,초목들이  조화로운 매우 사색적인 곳이였다.서원같은 문을 이룬 소수박물관으로 소수서원에 관한 모든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소수박물관

상설전시관

(1)주요학자~공자(BC551~BC479)는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교육자,철학자 ,치사상가,유교의 개조로서 대표적인 사상은 인이며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를 따르는 극기복례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에 전체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안향(1243~1306)은 고려 말 불교의 현실부정적인 사실이 페단의 원인이라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배워 온 후 고려에 전파하여 크게 유행시켰다. 그 결과 성리학은 조선 개국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안향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의해 동방의 주자라고 추앙받게 되었다. 

주세붕(1495~1554)은 조선중기 학자 1543년 풍기군수 시절 순흥 땅에 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세우니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최초로 인삼재배에도 성공하여 산삼 공물에 시달리던 풍기지역 백성들의 오랜 고충 덜어 주었다. 

이황(1501~1570)은 조선 성리학 발전의 기초를 형성한 대학자, 영남학파의 종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인간의 순수성을 소중히 여겨 선의지와 이성을 지켜가야  한다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였다. 풍기군수 시절 1550년 명종으로부터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편액과 함께 면세 면역  특권으 받게 하여 최초 사액성원이 되게 하였다. 

(2)죽계지 서문~서원이 선비학문이 역량을 얻고 나라에 인재를 얻고 국학이나 향교보다 나을것이다 확신한다.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교육이다. 교육은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 보다 급한 것이다고 죽계지 서문에 적혀 있었다.

(3)향교와 서원~향교는 국가에서 유교를 교육하기 위해 지방에 설립한 관학 교육기관이다. 국가 통제하로 지방관료들의 정치적 영향을 받고 유생들에게 획일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교육기관 필요성이 대두되어 그 결과 우리나라 최초 서원인 소수서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서원은 사립 교육기관으로 지방 사족들의 후원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자율성을 보장받으면서도 유생들에게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조선추기 특히 광해군과 정조연간에 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다.  

(4)관학의 쇠퇴~관학은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을 말한다. 건국후 유교 통치이념으로 성리학이 보급되어 인재양성을위해 성균관,사부학당,항교등 관학을 설치했다. 그러나 관학은 관리 등용을 위한 과거시험 준비하는 곳으로 이용되면서 교육기능이 점차 쇠퇴 여기에 과거제도 문란과 관리기강 해이 등 피해 발생하면서 더 이상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할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연산군때 더욱 심화되어  국학의 황폐화와 사풍의 붕괴를 초래했다. 

(5)소수서원의 역사~소수서원은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공인된 사학으로  1542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안향의 연고지인 숙수사라는 사찰의 엣터에 사당을 세우면서 비롯되었다.  그 이듬해 사당옆에 강학당과 재실을 마련하고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으면서 서원의 골격이 갖춰지게 되었다. 주세붕은 송나라 유학자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떠 백운동서원이라 이름짓고 안향의 위패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후 이황(1501~1570)이  풍기군수 시절 1550년 명종으로부터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편액과 함께 면세,면역특권을 받게 하여 최초 사액서원이 되게 하였다. 

(6)유교의 본향 영주~고려시대에는 관리로 선발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중앙에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을 두고 지방에는 향학을 설치하였다.  영주에는 영주향교가 세워지고 이후 주세붕이  안향의 사당 세워지고 이황에 의헤 소수서원으로 사액되면서 서원이 발흥되었다. 영주 전역에 수많은 서원들이 세워지면서 영주는 유교 본향이 불리게 되었다.

(7)불교에서 유교로~영주지역은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 국경이 만나는 지역이 되면서 문화의 교차로가 되었다. 그 결과 통일신라시대 불교문화 중심지가 되었는데 의상에 의해 창건된 부석사는 화엄사상 발원지가 되어 소백산 자락에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는데 영향을 끼쳤다.그러나 고려시대 불교 페단이 심해져 이에 충렬왕 때 순흥 출신 문신인 회헌 안향은 원나라 에서 성리학을 가져와 보급했다.안향을 시작으로 안축,안보,정도전 등  유학자를 배출하여 조선시대 유교문화가 발전할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8)선비의 삶~선비의 교육 조선시대 교육기관은 크게 향교,성균관과  같은 관학과 서원,사당등과 같은 사학으로 구분되었다. 16세기 소수서원이 등장한 이후 서원이 지방교육의 중심기관이 되었다. 교육목표는 성리학에서 지향하는 학문과 인격을 닦는 수기를 통해 남을 다스리는 치인의 단계로 나아가는 선비를 배출하는데 있다.선비의 벼슬길  문관은 소과와 대과를 거쳐야 한다. 소과는 자격시험으로 유교경전 이해하는 생원시와  문장력 평가하는 진사시로 나뉜다.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대과라는 문과 시험에 응시 할수 있다. 선비의 하루 독서,부모봉양,자녀교육,간찰작성등  시간으로 구성되었다. 선비의 일생은 엄격한 의례에 맞춰 정형화 하였다.관례,혼례,상레와 제례,의례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선비들의 풍류 16세기 사림이 본격적으로 중앙정부와 향촌사회를 주도하면서 선비의 문화가 수준 높은 경지에 이룬 시기였다. 문 사철을 두루 공부하고 시,서,화도 교양으로 익혀 학예일치를 이루고자 했다.  풍류익혀 시적 재능을 발휘하여 풍류는 예술이 되었다.  선비의 고장 영주는 안향이 원나라에 들어온 성리학이 이황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다. 영주지역에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영남학맥의 중심을 이루며 많은 활동을 했다.선비들의 편지로 정치적인 주요엄무와 사적인 일들까지 편지를 왕래하였다.선비들의 일기는김항회 기증 유물중 표해록,해유록,통신사도해기,임진유록등이 있었다.선비의 죽음 상례와 제례는  윤리적 임무로 인식되었다.

그밖에 소수서원의 운영,서원의 경제기반,입원록,서원의 강학,기록 속 소수서원,서원 배향인물, 향사 제향절차,소수서원의 제향, 도동곡,서원의운영, 소수서원의 책,안향의 발자취,  괴헌 김영(1765~1840) 고택 기증유물이 전시,김항회 기증유물전시로 구성되었다.보관되고 있는 소수서원 유물을 전시실 통유리창으로  볼수있게 전시되어 매우 인상적이였다.

복도 유리창으로 수풀림에 둘러싸인 기획전시실이 비추고 창을 위로 걷어올린  목재의자 쉼터와 함께 소나무에 드리운 연못이 비추며 매우 청정했다.

특별전시실

기증자들의 책들이 보관된 곳으로 도서관 같았다.

 

소수서원에서 소백산 생태탐방원에 갔다.저수지 제방위로 산봉우리들이 펼쳐졌다. 소백산 생태탐방원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청포도길로 향했다.청포도가는길 차창가로 사과나무밭과 무르익은 황금빛 논밭,들녁에 굵고 장대한 나무, 우뚝솟은 울창한 가로수로 사색의 정취를 자아냈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시골마을길로 이육사문학관이 있었다. 본체를 중심으로 "ㄷ자형" 장식으로 독립의 희망을 담은 날개 같았다.이육사문학관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문학관에 들어갔다.문학관 출입문 맞은편으로 이육사 생가가 자리하며 이황의 14대손 명문가  마을을  드러내고 있었다.전시실을 들어가려고 하는데 리더님이 버스를 정차할수가 없어 청포도길을 걷지 않는 사람들은 버스로 돌아간다고 해 민족시인 이육사(1904~1944)전시실을 관람하지 못한 채  아쉬운 발걸음을 하였다.강미전,서호옥,유인선님과 같이 버스에 올랐다.퇴계종택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유인선님이 하루한끼영양바,김규혼 한과 신궁전통 한과,샤인머스켓,사과를 주어 꿀맛 같았다.퇴계종택앞에서 버스가 정차하여 그 주위를 산책했다.경상북도 기념물인  퇴계종택은 이황가문의 종택으로 이황 장손인 이안도(1541~1584)가 처음 지었다. 원래건물은  190년7 불에 타 소실되어 13대손 이충호가 1926년부터 3년에 걸쳐 새로 만들었다.정침,정자,사당으로 나누어진다.솟을대문을 지나 일제시대 한옥양식같은 쌍미닫이문으로 이황 자손이 문을 열고 반갑게 마중하였다.삼문인 사당으로 연결되며 유교이념으로 대대로 가문을 지키고 있었다.퇴계종택옆은 퇴계명상길과  퇴계기념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퇴계 명상길은 이황이 산넘어 도산서원을 오가며 우주와 자연을 벗삼아 사람의 도리를 추구하였던 길이였다. 퇴계기념공원은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즐비하게 숲을 이루어 가을단풍이 아름다운 공원 같았다.퇴계종택 뒤 언덕으로 도산서원과  유교문화를 현대화한 건축같은 선비문화 수련원가는길로 이루어졌다.즉 낙동강변 시사단과 도산서원에서 언덕 내려와 선비문화수련원,퇴계명상길,퇴계기념공원,퇴계종택을 이루는 길이였다.퇴계종택 대문 앞 하천으로 장대한 은행나무가 드리우며 저! 멀리 기와집이 비추었다. 호기심에  안내도를 보니 퇴계종택 맞은편으로 열화재,게상서당,한서암,계재,산천정사,고게정,퇴게선생묘소,하게마을,독립운동기적비를 이루고  퇴계선생묘소에서 언덕길로 이육사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즉 이황선생의 도산서원부터 14대손 이육사 생가까지 유교,선비의 숨결,독립운동  숨결이 빛나는 매우 뜻깊은 역사의 길이였다.퇴계종택에서 역사의 발자취 길을 볼수 있어 카타르시스가 넘쳤다.모두 퇴계종택에서 모여 단체사진을 찍고 휴식하였다. 퇴계종택에서 연수와 안나와 같이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겼다.회원이 샤인머스켓과 방울토마토,이애영과 유채현이 군김치만두와 방울토마토를 주어 감사했다.퇴계종택에서  군산 이성당,대전 성심당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빵집인 안동 맘모스로 향했다.맘모스제과점 가는 길 차창가로 유려한 산봉우리가 펼쳐지는 강이 아름답게 비추었다. 와룡천부근 안동구시장 시장길로 맘모스제과점이 있었다.베이지빛 벽체와 함께 쌍여닫이 목재 출입문으로  명동거리 같았다. 국세청에서 향토장수식업으로  선정된곳으로  빵들이 팔리고 얼마 남지 않았다. 크림치즈빵 유명한 곳으로 기념으로 크림치즈빵을 샀다. 모두들 줄을 서서 빵들을 주문하기 매우 분주했다.회원님들이 빵집 골목으로 맘모스제과점에서 산 빵들을 먹고 있었다.  리더님의 고로케, 유채현님의 크림치즈빵, 정지안님의 말차빵을 시식하며 힐링되었다.말차빵은 진한 말차향으로 가득한 맛으로 매우 이색적이였다. 크림치즈빵은 매우 부드럽게 씹히는 반죽과 매우 신선한 치츠향이 가득한 크림으로 환상적인 맛이였다. 맘모스제과점에서 서울로 향했다.서울로가는 차창가로 물안개 피어오른 산봉우리들로 아름다웠다.

소수박물관
이육사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