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남양주시 다산1,2길(2024년10월22일)

백재은 2024. 11. 18. 11:24

 

다산1길

 

다산2길
양수역

 

10월22일~둘도모 천사걷기 모임으로  경의 중앙역 팔당역 지하철에서 내려 점심을 먹으러 향했다.산 입구로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한식메뉴가 있는 간판을 보고 옹심이 메밀칼국수집에 들어갔다.콩나물무침,무우짠지,고사리복음,시금치무침,고기,계란이 들어간  비빕밥으로 매우 감칠맛 있었다.고소한 다진고기와  무우짠지가 비비밥의 중심이 되면서 직접 담근 고추장의 천연의 맛으로  맛을 좌우하고 있었다.비빕밥의 한그릇에  일품 한정식의 풍미가 담겨져 있었다.옹심이들깨 국물로 매우 고소했다. 천연재료로 정성껏 달인 비법국물로  저절로 힐링이 솟구치는 환상적인 맛이였다.무우짠지는 무우와 깔깔한 고추가루맛이 조화로운 맛이였다. 열무김치는 열무의 싱싱한 맛과 짜지않는 시원한 김치국물로 지금까지 먹었던 열무김치중 제일 맛있었다.지하철에서 강변을 바라보며  양평댐 상수원 한강으로  강과 산봉우리가 보이고  하늘색 자전거장식되었다. 강변길 따라 식당이 밀집된 도로로 오르니 경춘선 페역된 철길이 그대로 남아 잇었다. 바로 그곳에서 잠시 휴식한 후 걸었다.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한강의 양평댐을 바라 보며 곳곳에 전망대가 있었다.봉안터널로엣 스러운 정취를 자아냈다.남한강과 함께 아담한 정원의 건물이 보이고 연꽃단지가 펼쳐졌다.봉주르와 함께  이근호 손편지공원으로  여인들의 최고 데이트 장소로 유명한 곳이였다.갖가지 여인 조형물로 장식되어 있었다.봉주르에서 필립대장님과 합류하여 잠시 휴식하였다. 푸우짱 대장님이 치츠과자를 주어 감사했다.필립대장님이 사진을 찍어주어 웃음꽃이 저절로 나왔다. 대장님의 궁실거리는 소리조차 유우머로 다가왔다.분수대가 뿜어 오르는 봉주르 주변 정원을 지나  능내역에 도착했다.먼저 나와 기다리던 엄마, 손이 흔든 친구, 멀리서 지켜보는 아버지로 능내역을 기억하는 글들이 장식되며 그리움과 다정한 안부가 쌓인 곳이였다. 흰벽체와 함께 목재출입문으로 빨강 우체국이  장식하며 옛 것을 고스란히 간직한 페여된 추억의 향기로 가득차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다산2길로 향했다. 마을길로 흰벽체의 맞배지붕장식과 함께 철문으로 전원적이였다.다산로526번길 도로길로 상추등 텃밭으로 싱그러웠다.덩쿨이 우거진 숲길로 다산2길이 시작되었다. 숲길로 산봉우리들과 남한강의  섬들이 비추며  연꽃단지가 펼쳐졌다. 팔당호의 경치가 보이는 숲길로 산속에 온 기분 같았다. 갈대가 춤추는 가을 수채화를 그리는 숲길로 토끼섬이 비추었다. 맞배지붕의 목재양식인 다산영농종합병원이 세월로 녹아내리고 갈대숲사이로 물안개 핀 산봉우리와 남한강의 경치가 비추었다. 소나무가 빽빽히 줄지며 녹음이 매우 짙은 울창한 숲길로 매우 아름다웠다. 도심근교에 이렇게 울창한 숲이 있나 할 정도로 청정했다.다산생태공원으로  초목이 장대하게 드리우고 드넓은 생태공원의 연못길 사이로 습지 테크길을 이루어 청정했다. 유려한 산봉우리들이 펼쳐지는 남한강의 경치가 펼쳐지며 사색적 정취를 자아냈다. 강변길 따라 주차창 쪽으로 가니 카페가 줄지어 있었다. 진노랑벽체의 기와집을 이룬 "ㄱ억자형"카페로 작은 정원과 테라스 장식으로 운치가 있었다.적벽돌벽체와 기와양식을 이룬 카페가 정원과 잔디마당을 이루며 정겨웠다. 정약용유적지로 다산기념관과 실학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언덕으로  대가농원 기와집의 카페가 양반집 한옥으로 비추었다. 

정약용 유적지

입구로  박철웅의 꺼지지 않는 불 조각이 장식되었다.정약용이 저술한 500여권에 서책으로 그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의 타오르는 실학사상 정신을 조형물로 형상화하였다.유적지와 실학박물관으로 가는 길로 거중기를 재현해 놓았다.1792년 정조(16년)왕명에 따라 1627년 독일인 선교사 슈레크가 저술한 기기도설에 실린 그림을 보고 고안한 운반도구로 밧줄과 도르래를 이용하여 물건을 들어 올리는데 사용하였다. 시대에 앞선 과학사상을 담고 있었다.정약용(1762~1836)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이곳 마재(마현) 을은 선생이 태어나고 묻히신 곳이였다.관직생활(1783~1800)과 전남 강진 유배(1801~1818)을 제외하고 주로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이익선생 뒤를 이어 실학사상을집대성하여 조선후기 개화사상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 500여권을 집필하고 수원화성 설계,거중기 과학기구 제작, 마과회통 등의 의학서적을 남겼다.선생의 학문적 관심은 오직 수기만인으로  즉 어떻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담아 백성의 삶을 행복하게 할수 있을까에 있었다. 

곳곳에 "아버지 무덤에 오르다","임금을 하직하려 하자니"  제목으로 그가 쓴 글귀가 비석으로 장식되었다. 그의 대표작에 대한 글귀가 장식되었다. 백성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하늘을 찔렀는지  알수 있었다. 한 백성이라도 은택을 입은자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담긴것으로 백성을 다스릴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마음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것 이라는 "목민심서", 오직 사람의 생명은 하늘에 매여 있어 정당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흠흠신서",수령은 백성을 위해서 있다는 "여유당집"으로  백성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하늘을 찔렀는지  알수 있었다. 관제 군현지체 전제 부역등 지금의 쓰임에 얽매이지 않고 경을 세우고 기를  펼쳐서 우리 오랜 나라를 새롭게 하려는 생각으로 저술한 "경세유포"는 조선이 털끔만큼 작은 일이라도 병페아닌것이 없으니  지금에 와서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야 말것이다고 주장하였다.두 아들에게 부친 서신에 실학에 뜻을 두거라는 글귀가 장식되었다.경기도 기념물 제7호인 정약용의 묘를 중심으로 정약용의 유적지를 이루며 문화관,기념관,둔도사,묘,자찬묘지명,여유당(정약용생가),서화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둔도사와  묘지명을 수비하는 장대한 보호수,생가를 드리우는 장대한 초목으로 그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 시간이 모자라 자세히 보지 못한 아쉬운 발걸음을 해야 했다.다산실학박물관도 관람하지 못한 채 1층 전시실만 보고 나왔다.박물관 안내소에 꽂힌 팜프렛으로 실학에 관한  내용들을 알수 있었다. 

다산실학박물관

실학은 문명의식,자아의 탐구, 실사구시의 정신을 가르킨다.실학이 가리키는 대상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조선전기에는 유학을 가리켜 실학이라 불러 불교와 달리 유학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학문으로 보았다. 대한제국기부터 민족독립과 근대화 매진하던 시기에  조선후기 있었던 개혁적 실천적 학품을 범주화하여 실학이라 불렀다.

(1)제1전시실 실학의 형성 ~16세기 중엽 이후 서양  문물이 동양으로 전해지면서 한,중,일 삼국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여러가지 개혁을 진행하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대동법이다.대동법은 지방 특산물을 토지 단위에 따라 쌀로 통일하여 징수한 세금제도이다. 대동법 시행으로 가난한 농민들의 부담은 줄었으나 상공업과 화페경제가 발전하게 된다.조선후기 변화와 개혁은 기존 학풍에서 벗어나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학문적으로 제시하였다. 학문의 대상이 정치,경제,사회,문화등 현실문제로 옮겨갔고 여기서 실학이 탄생하게 되었다.17세기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한국 최초 문화백과사전으로  50여개국의 지리정보를 수록 조선이의 지리인식 확장에 기여하고  백과전 서류 편찬에 영향을 주었다. 잠곡 김육(1580~1658)은 대동법을 주도하고 동전 필요성을 제기하였다.이후 조선시대 대표적인 동전인 상평통보가 제조되었다.상평은 항상 평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상시평준의 준말이다.1706년 숙종(32년)요계관방지도는 우리나라 관북,관서지방과 중국 동북부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군사용 관방지도로  중국의 주요 진,관, 보  등 요새 지역을 적색 깃발을 그려 표시하였다. 병자호란이후 북방지역 방어에 대한 의식이 강화된 분위기를 반영하였다.17세기 유형원(1622~1673)의 반계수록은 1가구당 1경을 경작하는 자작농 체제 기본으로 하는 토지제도를 주장하였다. 노비세습제의 폐지와 상업의 진흥 등 국가 개혁안이 제시되어 있다

(2)제2전시실 실학의 전개~18세기로 접어들면서 실학은 국가체제 개혁을 위한 제도개혁을 중심으로 한 경세치용파 상업  진흥및 기술개발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파 학문방업에서 실증을 중요시하는 실사구시파로 발전하였다. 실학은 조선사회 개혁을 지향하기 때문에 현실생활에 밀접한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다.여기에 종래  중국 중심의 학풍에서 벗어나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한 국학이 등장한다. 조선의 실학은 동시대 문제해결의 실질적인 길을 찾고 있었다. 

18세기 성호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은  40년동안 연구한 성과를 30책 총 3007편 주제로 정리한 백과전서식 저술이다.연암 박지원(1737~1805) 이 1780년 청나라에 다녀온 뒤 남긴 기행일기인 열하일기는 청나라 문물제도와 사회경제등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그 곳의 문인 명사들과 교유한 소감을 자세히 기록하였다.19세기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목민심서는 지방관의 행정지침서이다.백성의 입장에서 관청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경계할 것을 담은 내용이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금석과안록  신라 진흥왕순수비 중 황초령비와북한산비를 판독하고 고증한 저술이다.박규수(1807~1877)가 1872년 중국 사행을 준비하면서 쓴 편지이다. 그는 청나라에서 일어난 양무운동을 목격하고 개국과 개화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3)제3전시실  실학과 과학~16세기 이후 동아시아에 서양의 학문과 문물이 전래되면서 조선의 천문학과 지리학은 크게 발전하였다. 1653년 서양 천문학의 영향을 받은 시헌력이 중국 청에서 도입되었다. 이로써 계절의 변화를 음양외행의 순환에 따른것이 아니라 태양과 지구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한편 1602년 제작된 도니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가 그 이듬해 조선에 전해지면서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세계의 여러 나라를 독자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1402년  조선에서 제작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왕명을 받아 제작한 지도로 동아시아에서 현종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다. 원본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1669년 조선 헌종(10년)송이영이 제작한 혼천시계는 태양의 위치와 계절,날짜를  알려주는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던 기구인 혼천의와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적인 시계를 결합한 천문시계이다. 곤여만국전도 1708년 조선왕실에서 제작한 회화식 세계지도이다. 1602년 마테오리치와 이지조가 중국에서 제작한 지도를 다시 모사한 것이다.실학박물관에서는 2011년 이를 원형대로 복원하였다.1787년 정조(11년) 유금(1741~1788)이 제작한 혼개통헌은 유금 아라비아식 천문시계이다.이슬람 양식의 천문기기로 아스트로라브라고도 불린다.18세기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유일하다.

(4)1층 전시실 아이들을 위한 "자산어보"속으로  전시~ 실사구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는 것처럼 직접 확이하고 연구해서 개인적인 생각이나 편견없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만을 정확한 판단과 답을 찾는 태도이다. 실사구시 정신으로 실제생활 쓰임이 있는 책들이 편찬된 조선후기 실학시대 학문,예술,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모은 백과사전은 당시 사회 지식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생활중 자산어보를 완성했다.바다생물백과사전으로  완성된  당시 현미경,카메라,잠수함도 없던 210년 전 바다생물을 관찰하여 놀라운 정확한 과학적지식을 담고 있다.  바다생물백과사전을 넘어서 섬생활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된 실용적인 지식의  보물창고이다. 바다생물의 생김새와 특징,잡는 방법,이동경로.병을 고치거나 활용하는 방법,조리법과 맛등을 보기 편리하게 분류하고 이해하기 쉽게 정리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만난 제자인 이청에게 자산어보부족한 부분을 여러 책에서 찾아 보충하도록  하여 이청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는 더욱 완성도 높은 책이 되었다.직접 쓴 자산어보는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다른사람이 베껴  쓴 책은 여러 곳에 보관되어 있다. 

정약전은 1858년  마재마을에서 태어났다.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서양에서 들어 온 과학기구 같은 새로운 학문에 흥미를 느껴 새로운 학문인 천주교에 대해 배웠다. 32세 과거에 합격학여 정조임금 총애로 병조좌랑 임무를 맡았다. 정조가 돌아가신 후 천주교 박해를 받았는데 정약전 형제와 친척중에는 천주교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1801년 정약전은  흑산도에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정약전은 유배생활중  사촌서실이라는 서당을 세워 아이들 가르치며 연구를 계속하다가 1816년 유배지에서 죽었다. 섬에서 청년 어부 장창대 도움을 받아 흑산도 주변 생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자연의 비밀을 탐구하여 1814년 자산어보가 나왔다.

즉 팔당역에서 운길산역까지 정약용길로 마재옛길을 이루는데 그중  정약용유적지까지 갔다.한강나루길이  한강삼패지구에서 운길산역까지인데 다산길1코스 길이였다.정약용유적지앞 버스 정류장에서 58번버스 타고 운길산역가는 부근에서 내렸다. 필립대장님,푸우짱대장님,잘란잘란,지니님과 함께 양수리황태구이집에서 저녁을 먹었다.부추전,황태구이,더덕구이,오징어볶음을 먹었다.양파와 해물이 듬뿍 들어간 부추전은지금까지 먹었던 전중 제일 부드러운 식감을 지녀 너무 맛있었다.아끼지 않는 재료와 함께 매우 부드러운 반죽으로 정성을 다한 주인장의 솜씨를 담고 있었다.비법 양념소스로 더덕과 황태향기가 살아있는 더덕구이와 황태구이로 매우 감칠맛 있었다. 오징어볶음은 지금까지 먹어본 오징어 중  매우 부드러운 살과 싱싱한 오징어를 자랑하엿다.입안에서 매우 부드럽게 감기며 고급진 해물음식 같았다.오징어볶음을 먹은 후 남은 양념에 멸치와 반찬들을 넣어 비볐다.멸치로 인해 볶음밥이 더욱 더 고소했다.콩나물과 오뎅이 들어간  오뎅국,마늘쫑무침,도라지향이 강한 도라지무침,콩나물무침,멸치볶음,부추들어간 김치,황태무침으로 반찬마다 매우 감칠맛나는 맛으로 입맛을 돋구었다.계속 젓가락이 가는 반찬들로 여러번 반찬들을 가져와 먹었다.부추전부터 오징어볶음밥까지 맛이 매우 조화로운 환상적인 메뉴로 착한가격을 갖고 있었다. 다음에 다시 오고 싶은 식당이였다.주인장의 넉넉한 인심과 정성으로 깊은 손맛을 자랑하는 일류맛집이였다.  술을 먹으면서 지니님이 남편과 자식이야기로 소설을 써도 되는서글픈 인생사를 털어 놓았다. 자기가 홀로 경제를 감당하며 상가를 사게 되었고 무능한 남편과 불효자식 이야기로  넋두리를 하였다.남편성격으로 이혼하고 자유하고 싶다고 고백하였다.이야기를 들으면서 서로 더욱 친숙한 분위기가 되었다. 밥값을 지니님이 5만원을 내 대장님을 빼고 만원씩 걷었다.처음 보는 회원들에게 인정을 베풀어 주셔서 너무 감동했다.식당에서 양수역 지하철으로 가는 다리로 남한강의 연꽃단지가 비추었다.시골정취의 야경이였다.

다산샐태공원부근 카페
정약용유적지
다산실학박물관